팔만대장경이 모셔진 장경각 안에는 지금도 거미줄 하난 생기는 일이 없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기록물의 하나로 꼽히는 이집트의 파피루스나 고대 이스라엘의 양피지에 적힌 글들은 모두 절대자의 존재와 그 전능한 힘을 찬양하는 내용 일색이다. 그것이 태양신이 됐건 야훼이건 간에 신의 말씀을 글로 나타내 온세상에 알림으로써 그의 자비로운 전능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고대인들의 소망이 인류 최초의 문서들을 남긴 것이다. 그러나 인쇄문화의 발달은 결코 신의 섭리를 널리 알리는 데만 그 기능을 발휘하지는 않았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지식을 보급하고 후대에 지적 유산을 안정적인 형태로 물려줌으로써 문화의 축적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따라서 인쇄술의 정도는 한 시대 문화수준을 판단하는 유용한 척도로 인정되고 있다.
불국사 석가탑에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된 지난 66년 이후 우리 선조들의 인쇄술은 세계적으로 그 높은 수준을 인정받고 있다. 우리의 경우에도 인쇄술의 발달은 결코 종교적인 맥락에서 따로 떼어 생각할 수 없다. 세계 최고(最古)로 인정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그렇고 오늘날 판본 자체로는 역시 세계 최고로 꼽히는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이 모두 불교적인 신심에 기초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해인사의 팔만대장경은 목판본이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목판인쇄가 금속활자보다 수준이 떨어지는 것으로 여겨지나 조선조 말까지도 금속활자인쇄와 목판인쇄는 병행됐다. 활자가 견고하지 못해 몇번 인출(引出)을 거치고 나면 변형이 오는 경우가 적지 않아서 영구보존을 위해서는 목판을 함께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해인사에 보관돼 있는 경은 알려진 대로 고려 고종때(1236-1251년) 만들어진 재조(再造)판이다. 최초의 대장경은 그보다 앞선 현종때 만들어졌으나 몽고군의 방화로 불타 없어지고 말았다. 고려인들이 무려 두 번에 걸쳐 대장경을 만들어 내면서까지 불경제작에 몰두했던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잦은 외침을 부처의 힘으로 막아보고자 한 데 있었다. 실제로 승전(勝戰)에 불력이 작용했는 지는 알 수 없어도 국가가 관장하는 대역사를 벌임으로써 국민의식을 한데 모은다든가 국가 재원을 재분배하는 효과는 거둘 수 있었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팔만대장경이라는 명칭은 판수가 모두 8만1천3백40개라는 데서 연유했다는 풀이도 있고, 인간의 8만4천 번뇌에 대치하는 법문을 수록하고 있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각각의 판은 가로 67㎝, 세로 23㎝에 무게는 약 3.5㎏이 보통이나 크기가 일정하지는 않다. 한 판에는 모두 23행이 들어있으며, 13자와 15자짜리가 더러나 타나는 경우도 있지만 각 행은 대개 14자로 구성된다. 괘선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는 책을 찍어내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두루말이로 찍어내려는 용도로 추정된다.
부식 방지 위해 바닷물 속에 담가
대장경이라는 명칭은 사실 아무 데나 붙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이 직접 설법한 경(經)과 불제자로서 지켜야 할 생활규범을 밝힌 율(律), 이 경과 율을 해설한 논(論)이 갖추어졌을 때에야 비로소 대장경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것이다. 팔만대장경 제작 과정의 과학성이나 보존의 합리성은 일단 접어두더라도 대장경의 내용적인 완벽성은 일찍이 인정받아 온 바 있다. 일례로 1930년대에 만들어진 일본의 신수대장경도 이 팔만대장경을 모본으로 삼고 있다. 재조대장경은 초조대장경과 불교문화가 융성했던 당시의 북송 거란의 대장경을 한데 모아 제작한 것이므로 한역대장경의 종합판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관계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해인사가 흔히 법보사찰로 불리는 이유도 바로 불교에서 세가지 보배로 치는 불법승(佛法僧)중 부처님의 말씀을 담은 법, 즉 대장경을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나무위에 새긴 팔만대장경이 어떻게 7백 년이라는 세월에도 큰 훼손없이 보존될 수 있었을까. 이를 해명하기 위해서는 목판제작 자체의 과정과 보관방법의 특이성을 함께 살펴봐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대장경의 제작과정에 대해서는 일체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절에서 구전돼 내려오는 얘기나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목조물의 제작방법에 견주어 생각할 수밖에 없다.
대장경이 보관된 장경각(藏經閣) 입구에는 목판의 재료로 쓰인 자작나무의 모형이 전시 돼 있다. 자작나무외에도 일명 거제도 나무라고 불리는 백화나무가 주요재료로 쓰였다. 남쪽에서 나는 나무가 많이 쓰인 이유는 당시 대장경 조판작업의 분사(分司)가 남해에 설치돼 있었고 작업의 총책임자였던 조정의 실력자 최우의 식읍지가 진양에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일단 선택된 나무는 3년 간 바닷물 속에 담가 진액을 완전히 뺀 뒤 다시 소금물에 삶아 그늘에서 말렸다는 얘기가 구전된다. 소금물을 먹은 나무는 같은 종류의 다른 나무들보다 훨씬 무겁다. 실제로 해인사에서 관리를 맡고 있는 스님들은 손으로 들어보는 정도로도 그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결 삭힘의 과정을 통해 우선 부식예방과 방제 효과를 볼 수 있다. 장주(藏主)를 맡고 있는 관후 스님은 대장경이 보관돼 있는 장경각 내에 거미줄 하나 안 생긴다는 사실을 그 예로 든다. 실제로 해인사에는 팔만대장경외에 절 자체적으로 만든 인쇄용 목판이 많아 팔만대장경과 그 보존 정도를 비교 해 볼 수 있는데 대개 대장경보다는 부식정도가 높게 나타난다.
조각이 끝난 판에는 옻칠이 된다. 또 판끼리 부딪쳐 글자가 떨어져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판의 네 귀에는 쇠장식을 달아 판가(板架)에 꽂혔을 때도 일정 정도 간격을 유지하도록 고안했다. 판 면 자체도 매끈하게 다듬어져 있어 인쇄를 했을 때 티 하나 찍히는 일이 없다.
비록 대장경이 국사로 만들어진 특별한 인쇄물이기는 해도 그 시대 기술의 산물인 것만은 분명하다. 팔만대장경의 판각기술도 고려시대 인쇄술의 수준을 엿볼 수 있게 한다. 판의 조각체가 구양순체로 가로와 세로 획에 차이가 없는 형태라는 특성이 있긴 하지만 팔만개의 판이 마치 한 사람이 새긴 것처럼 통일된 형태라는 점은 당시 기술인력의 수준을 알려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해인사의 무관(無觀)스님은 특히 일자삼배(一字三拜, 글자 한 자를 새길 때마다 세번 절을 한다는 뜻)의 공덕을 강조한다. "당시 조각은 망치를 쓰지 않고 칼만을 이용했다. 따라서 칼끝을 조금만 잘못 놀려도 삐쳐나가 망치기 쉬운데 어쩌다 글자하나가 잘못되면 판 자체를 가는 정성을 기울였다. 최근의 서각이나 전각이 팔만대장경만큼 매끈한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이유는 지극한 신앙심의 유무로 풀이 해야 할 것"이라고 설명한다. 고려와 조선시대에 걸쳐 중국에 가는 사신들의 선물 보따리안에는 으레 팔만대장경으로 찍어낸 경전이 들어 있었다는 사실을 보더라도 고려의 인쇄수준이 도저한 경지에 이르러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지반토가 습기조절
팔만대장경이 장구한 세월을 거치고도 원형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데는 보관소인 장경각의 우수한 시설 덕이 크다. 대장경이 보관돼 있는 장경각은 해인사 안에서도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해인사는 신라 애장왕때(802년) 창건된 이래 모두 일곱번의 화마를 입어 대웅전이 불타는 등의 수난을 겪었으나 유독 장경각 만큼은 화재를 피할 수 있었다. 당초 강화도 선원사에 있던 대장경이 서울의 지천사를 거쳐 해인사로 옮겨지기 시작한 것은 조선 태조 재위시기부터인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때부터 장경각 건물이 만들어지기 시작해 성종때(1488년)에 이르러 현재의 모습을 완전히 갖추게 된다.
왜 해인사가 보관처로 꼽혔을까. 조선을 지배했던 풍수지리설의 풀이에 따르면 가야산을 끼고있는 해인사는 인재와 화재 병재로 부터 안전한 길지(吉地)로 꼽힌다. 현재 해인사가 들어서있는 위치는 해발 7, 8백m 높이. 풍수지리설이 아니더라도 이 정도의 높이는 인간이 살기에 가장 쾌적한 환경인 것으로 꼽힌다.
한편 장경각이 서 있는 아래쪽의 지반은 해인사내의 다른 부지와는 전혀 다른 토질을 갖고 있다. 즉 숯과 회 백토 모래 소금 등을 특별히 섞어 지반을 다져놓은 것이다. 이러한 성분들이 가져오는 가장 큰 효과는 습기를 일정정도로 유지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것. 실제로 대장경을 장기보존하는 데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습도라고 할 수 있다. 습도가 너무 높으면 판이 썩어 들어갈 위험이 있고 너무 낮으면 갈라질 우려가 있다. 지난 79년 문화재관리국이 공기조화냉동공학회에 의뢰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장경각의 습도조건은 연중 50~70%RH를 유지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건물 자체의 생김새도 통풍과 환기를 최적으로 하기 위해 특별히 고안된 것이다. 외관상으로 장경각이 갖추고 있는 시설은 세로로 성긴 창살이 지르고 있는 창문이 전부다. 그러나 이 창문도 결코 단순한 구조는 아니다. 앞쪽인 동남쪽의 창은 창살이 굵고 큰 데 비해 뒤쪽인 서북쪽의 창은 작고 좁다.
이 간단한 차이가 공기의 대류는 물론 적정온도를 유지하게 한다. 일례로 장경각 안에서 향을 피워보면 향이 각 전체를 한 바퀴 돈 뒤에야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온도도 가장 추울 때와 더울 때의 차이가 10~15℃를 넘지 않는다.
현대식 신판고 실패
장경각의 우수성은 신판고의 실패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지난 79년 정부는 상당한 재원을 들여 지금의 장경각과는 좀 떨어진 위치에 신판고를 지었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 였다. 최신설비를 갖춘 콘크리트 구조의 새 건물이 현재의 장경각과 같은 정도의 습도와 온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하루 유지비용만도 2, 3백만원이 들었다. 게다가 공기의 대류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습도 조건이 나빠 결국 새 장경각으로는 쓰지 못하고 스님들이 공부하는 선원으로 이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해인사의 장경각이 당시 서고로 지어졌던 건물의 일반적인 건축방법을 적용해 만들어진 것인지는 알기 어렵다. 조선시대의 사고(史庫)들이 모두 임진왜란 6.25전쟁을 거치며 소실됐기 때문에 비교가 불가능한 것이다. 79년 당시의 연구도 매일 일정한 시간에 온도와 습도를 비교 조사한 것일 뿐 이러한 조건을 만들어 내는 메커니즘을 해명해낸 것은 아니다. 만약 이 부분이 해명된다면 우리 건축방법의 과학성을 실증하는 중요한 근거가 될 것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장경각이 아무리 현대과학으로도 해명하기 어려울 만큼 뛰어난 기능을 발휘한다 해도 목조건물인 이상 치명적인 약점을 갖고 있다. 화재가 발생할 경우 속수무책이고, 70년대부터 관람객들의 내부관람을 제한하고 있기는 하지만 도난에 대한 방비도 구조상 허술할 수밖에 없다. 팔만대장경이 국보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보관에 더 허점이 생긴다는 지적도 있다. 이 절의 시명(是名)스님은 "대장경이 해인사 안에 있기는 하지만 관리상 자율성을 가질 수 없다. 가까이서 우리가 보기에는 보관한다고 손도 못 대게 하기보다는 가끔씩 인쇄를 하는 것이 보관에 더 이롭다. 흔히 먹을 묻혀 찍어 내기만 하면 인쇄가 끝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 과정은 1백80여 단계로 분류될 만큼 섬세한 과정을 거친다. 이런 과정을 거쳐 한번씩 먼지를 털어내고 먹기운을 갖는 것이 방제에도 더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신판고 사업의 실패 이후 과연 현대과학의 산물이 팔만대장경보호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가에 대해 회의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을 현대과학의 한계라고 단정하는 것은 섣부른 일이다. 지금껏 신구판고의 환경을 사후적으로 조사한 것 이외에는 판 자체의 목질에 대한 검토나 장경각구조를 현대과학으로 풀어본 시도가 전무 하다시피 하기 때문이다.
"이웃 일본만 같았어도 팔만대장경으로 박사학위 논문 쓰는 과학자가 수십명은 됐을 것이다. 문화재를 끌어 안고 있는 것만으로 보존의 의무를 다하는 것은 아니다. 빠진 부분이나 낡은 부분의 보충도 새로이 해야하고 지금의 장경각을 대신할만한 시설도 예비해 놓아야한다. 이런 일을 하자면 필연적으로 첨단 현대과학의 성과를 이용해야한다"는 한 스님의 지적대로 팔만대장경은 한국의 현대 과학이 풀지 못한 수수께끼이기 보다는 과학의 사각지대에 방치되어온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