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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은 문제 해결의 마법사

기억 정돈과정에서 통찰력 생겨나

 

잠은 문제 해결의 마법사


과학의 역사를 살펴보면 꿈을 꾸다가 문제를 해결했다는 경우가 종종 있다. 최근 이처럼 잠을 자는 동안 새로운 착상이나 발견을 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연구결과들이 나오고 있다. 잠은 문제해결에 어떤 기여를 할까. 잠을 자는 동안 우리 두뇌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꿈꾸는 뇌 속으로 들어가 그 단서를 찾아보자.

한숨 자고 생각하라
 

(그림1)잠과 통찰력의 관계를 분석한 퍼즐^세가지 숫자(1, 4, 9)를 배열해 8자리 수를 만든다. 퍼즐의 규칙은 숫자 두개가 같으면 그 수를, 다르면 숫자 3개 중 이 둘을 제외한 나머지 수를 기입하는 것이다.


어려운 문제를 붙잡고 끙끙대고 있을 때 미국이나 영국에서는 ‘sleep on it’이란 말을 한다. 우리말로 치면 ‘한숨 자고 나서 생각해봐라’ 정도의 뜻이다. 3시간 자면 합격하고 4시간 자면 떨어진다는 ‘3당 4락’의 잣대 속에 사는 수험생들에게 이 말은 호사스럽기 그지없어 보인다. 그렇지만 과학자들은 분명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는데 잠이 기여를 한다고 주장한다.

문제해결을 위해서는 일단 다양한 정보를 기억하는 일이 우선이다. 우리의 두뇌는 이 정보를 정돈하고 그 가운데 의미있는 것들을 장기기억으로 저장한다. 문제해결은 이 장기기억 가운데 필요한 정보를 되살리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독일 뤼벡대 신경내분비학과의 얀 본 교수와 우를리히 바그너 박사 연구팀은 간단한 수학 퍼즐을 통해 잠을 자는 것이 문제해결에 어떤 도움을 주는지를 알아냈다. 실험 결과 문제풀이를 몇번 한 다음 8시간을 잔 그룹이 깨어있었던 그룹에 비해 다음 문제풀이에서 두배 정도 우수한 능력을 보였다고 ‘네이처’ 1월 22일자에서 밝혔다.

연구팀은 우선 세가지 숫자(1, 4, 9)를 배열해 8자리 수를 만들었다. 여기에 두가지 규칙을 적용시켜 새로운 7자리 배열을 만들게 했다. 규칙은 인접한 두 숫자가 같으면 다음 배열에선 그 숫자를 쓰고, 다르면 세가지 숫자 중 나머지 숫자를 쓰는 식이다. 즉 1과 1은 1이 되고, 1과 4는 9가 되는 식이다. 퍼즐은 7자리 숫자로 이뤄진 새로운 배열에서 마지막 숫자를 알아내는 것이다.

실험에 참가한 모든 학생들은 우선 이와 같은 퍼즐을 3번 정도 풀었다. 그 다음에는 밤에 문제풀이를 시작하되 8시간 동안 자게 한 그룹과 그대로 밤을 샌 그룹, 그리고 문제풀이를 아침에 시작해서 낮 동안 대기한 세그룹으로 나뉘었다.

이렇게 그룹으로 나뉜 학생들은 다시 8시간 뒤 새로운 퍼즐을 풀었다. 모든 학생들은 애초 문제를 풀 때처럼 처음에 주어진 규칙에 따라 숫자를 대조해나가면서 마지막 7번째 숫자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이번 실험의 핵심은 숨겨진 또하나의 법칙에 있었다. 수학 퍼즐에 일일이 계산을 하지 않고도 답을 알아낼 수 있는 숨겨진 지름길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험 결과 잠을 잔 그룹에서는 60%가 지름길을 알아냈지만 나머지 그룹에서 알아낸 사람은 22%에 불과했다. 즉 잠을 자고난 학생들은 꿈에서 새로운 과학적 발견을 한 과학자들처럼 일종의 통찰력을 얻게 된 것이다. 한숨자고 문제를 푸는 것이 실제로 위력을 발휘한 셈.

잠을 자는 것이 문제해결을 도와준다는 사실은 다른 연구에서도 확인됐다. 미국 시카고대 심리학과의 다니엘 마고리아쉬 교수 연구팀은 알아듣기 힘든 외국어를 공부한 뒤 잠을 자고난 그룹이 깨어있었던 그룹보다 새로운 단어를 훨씬 쉽게 이해한다는 실험결과를 지난해 네이처 10월 9일자에 발표한 바 있다.

수면장애 연구자인 인하대 의대 신경과 윤창호 교수는 “일반적으로 잠을 자는 동안 기억들이 정돈되는 과정이 일어난다”며 “낮에 본 사람이나 사건, 대화에 대한 기억들은 일단 대뇌 해마융기에 저장됐다가 잠을 자는 동안 신피질에 옮겨가 장기기억이 된다”고 설명했다. 깨어있을 때는 눈치채지 못했던 숨겨진 법칙이 기억을 장기저장하는 과정에서 인식될 수 있다는 것.

얀 본 교수도 “잠을 자는 동안 퍼즐 풀이에 대한 기억들이 정돈되면서 숨겨진 해법을 찾게 된 것”이라고 잠을 자고난 학생들의 통찰력을 설명했다.

잠자는 모든 시간이 중요
 

쥐가 평소와 다른 경험을 하게 되면 이를 기억하기 위해 잠을 잘때 뇌 해마와 신피질에서 활발한 움직임을 보인다.


그런데 과학자들은 분명 꿈을 통해 새로운 통찰력을 얻었다고 증언했다. 그렇다면 아무리 푹 잤더라도 꿈을 꾸지 않으면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얻지 못하는 것일까.

꿈을 꿀 때는 눈동자가 빨리 움직이는 렘(REM, Rapid Eye Movement)수면상태에 들어가게 되는데, 전체 수면의 20-25%가 이런 상태다. 꿈을 꾸지 않고 깊은 잠을 잘 때는 뇌파가 느린 서파수면상태로 역시 수면시간의 25% 정도를 차지한다.

서파수면과 꿈을 꿀 때의 렘수면이 인지작용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과학자들은 잠을 자는 동안 뇌의 어느 부위가 활성화되는지를 조사했다. 그 결과 서파수면기에는 뇌의 해마가 활성화되며 렘수면기에는 신피질에서 더많은 활동이 포착됐다. 이 결과는 꿈에서 답을 알게 된 과학자들의 일화와 연결돼, 연구 초기에는 장기기억을 형성하는 렘수면이 기억이나 학습에 더 중요하다고 생각됐다.

그러나 윤창호 교수는 “지금은 렘수면이나 서파수면 같은 비렘수면 둘 다 기억과 학습에 의미가 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고 말했다. 이제까지 기억을 공고하게 하는데 작용하는 유전자는 렘수면상태에서만 작용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미국 듀크대의 시다르타 리베이로 박사는 서파수면의 긴 시간 동안엔 총을 장전하고 겨누는 과정처럼 개별 기억이 다시 떠오르고 증폭되며, 짧은 렘수면 때 마침내 방아쇠를 당기듯 기억을 공고히 하는 유전자가 작동되는 상호보완적인 관계라고 설명했다.

리베이로 박사는 쥐의 뇌에 1백개의 미세전극을 꽂아 놓고 4가지 새로운 물건을 보여줬다. 그런 다음 며칠 동안 잠을 잘 때의 뇌 활동을 조사한 결과, 새로운 경험을 한 뒤 48시간까지 뇌의 해마융기와 신피질 모두에서 특이한 뇌파가 감지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퍼블릭 라이브러리 오브 사이언스’(PLOS) 1월 19일자에 발표된 논문에 따르면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뇌의 활동영역이 순차적으로 옮겨가는 것과 달리 새로운 경험을 했을 때는 모든 영역에서 활동이 일어나며, 이는 꿈을 꾸는 렘수면 상태나 뇌파가 가장 느려지는 서파수면 상태 모두에 해당됐다. 즉 새로운 통찰력을 얻기 위해서는 서파수면기의 기억 재생과 증폭과정도 필수적이란 것.

두뇌의 하드디스크와 웹스토리지
 

영화 ‘페이첵’의 기억제거장치. 장기기억을 위해서는 임시로 정보를 저장할 하드디스크가 필요한데 뇌 해마가 그 역할을 한다. 그래서 해마가 제거되면 장기기억이 불가능해진다.


기억이나 학습에 서파수면이나 렘수면 모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은 약물실험으로도 증명됐다.

두뇌에서 신경세포들 사이의 신호전달은 아세틸콜린이라는 물질이 담당한다. 아세틸콜린은 깨어있을 때나 렘수면 상태에서는 많이 분비된다. 그래서 의사들은 기억력 상실이 아세틸콜린 분비량의 저하와 연관돼 있다고 보고, 알츠하이머병을 앓아 기억력이 약화된 환자에게 약물을 투여해 아세틸콜린이 분해되는 것을 억제했다.

그런데 아세틸콜린은 서파수면과 같이 깊은 잠을 잘 때는 분비량이 급속히 줄어든다. 서파수면기에는 아세틸콜린을 분해하는 효소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얀 본 교수는 같은 대학의 스테판 가이스 박사와 함께 ‘미국립과학원회보’(PNAS) 2월 17일자에 서파수면기의 낮은 아세틸콜린 양이 장기기억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실험결과를 발표했다.

연구팀은 자원자들을 대상으로 서로 연관되는 단어 40개를 제시한 다음, 화면에 한 단어를 보여주고 짝이 되는 단어를 찾는 기억실험을 실시했다. 일반적으로 지식과 관련된 서술적 기억은 서파수면기에 강화된다고 알려져 있다.

자원자들은 기억과제를 배운 다음 알츠하이머병 환자에게 투여하는 아세틸콜린 분해 억제제를 먹고 잠을 잤다. 서파수면이 끝나는 4시간 뒤 깨어난 자원자들은 이전에 한 기억실험을 다시 했는데, 약을 먹은 사람들은 단어조합 능력이 이전보다 훨씬 떨어졌다. 가이스 박사는 “이 실험은 서파수면기에 아세틸콜린의 분비량을 낮게 유지하는 것이 서술적 기억을 강화하는데 필수적임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기억력 향상을 위해 아세틸콜린 분비량을 늘려주는 것이 잘못된 것일까. 연구팀은 미국 뉴저지주립대의 게오르기 부즈사키 박사가 주장한 2단계 기억 모델로 상반된 실험결과를 설명했다.

이 모델에 따르면 장기기억은 뇌 해마와 신피질 사이의 쌍방향 통신으로 형성된다. 깨어있을 때는 새롭게 획득된 지식이 해마로 전달돼 임시로 보관된다. 이때는 아세틸콜린의 분비량이 높아야 한다. 이에 비해 수면기에는 기억의 전달이 역전돼 해마의 기억이 다시 신피질로 전달돼 장기저장된다.

문제는 아세틸콜린이 해마에서 신피질로 기억이 전달되는 것을 막는데 있다. 그러므로 이때는 서파수면기처럼 아세틸콜린이 적어야 한다.

연구팀은 해마와 신피질의 관계를 컴퓨터 하드디스크와 네트워크로 비유했다. 일단 정보는 하드디스크에 보관되지만 장기저장할 때는 웹스토리지와 같은 네트워크에 분산 보관하는 것이 유리하다. 그래야 하드디스크를 비워 또다른 정보를 받아들일 수 있으며 하드디스크가 파손되도 정보가 사라지지 않게 된다는 것.

이런 설명은 사고로 인해 해마를 떼어낸 사람이 수술 전의 일은 모두 기억하지만 수술 후에는 한시간 전의 일도 기억하지 못하는 임상기록에서 잘 알 수 있다. 즉 신피질에 기억된 장기기억은 떠올릴 수 있지만 해마가 없으므로 새로운 장기기억은 형성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치매약은 밤에 듣지 않아

얀 본 교수팀의 실험 결과는 알츠하이머병 환자에 대한 약물 투여방법이 바뀌어야 함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아세틸콜린 분해 억제제는 낮에는 기억력 회복에 효과를 보인다. 그러나 입이 마르는 등의 부작용이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잠자기 전에 투약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서파수면기에 아세틸콜린의 분비량을 늘려 장기기억의 형성을 오히려 방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치매약은 밤에는 듣지 않는 셈이다.

잠이 문제해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면, 제대로 잠을 못잘 때는 문제해결 능력이 떨어질 것이라는 예측이 가능하다. 이는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윤창호 교수는 “2003년 안산지역의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수면장애를 겪고 있는 학생들의 학업성취도가 그렇지 않은 학생들에 비해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또 미국 일리노이주 학생 2천2백59명을 대상으로 수면시간과 학업성적 사이의 연관관계를 조사한 결과에서도 잠자는 시간이 적은 학생들의 성적이 중학교 3년 내내 지속적으로 하락했으며 자신감도 많이 결여된 것으로 나타났다.

‘성적을 위해서라도 한숨 자고 공부하라’는 말이나 ‘5락 6당’이라는 새로운 잣대가 생겨날지도 모르겠다.

2004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이영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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