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당자리 대덕에 연구단지를 건설하기로 하고 연구단지를 건설하기로 하고 부지를 닦고 있는데 박대통령으로부터 "그곳으로 수도를 이전하겠으니 공사를 중단하시오"하는 연락이 왔다.
70년대 과학기술계를 회고해 볼 때 대덕 연구학원도시 건설은 큰 의미를 갖고 있다. 이 계획을 구상하기 시작 한 71년에 이미 우리 경제는 연평균 10%라는 놀라운 고도성장의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그간 미흡하나마 한국과학기술연구소(KIST)를 중심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기술연구를 바탕으로 국내 산업의 다변화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때에 정부에서는 몇가지 전략사업을 선정하고 그 육성책을 마련하기 위한 용역을 KIST에 위탁하였다.
나는 이 결과가 우리나라 장래에 큰 영향을 줄 것이라고 생각해 연구담당 부소장인 심문택 박사(전 국방과학연구소 소장, 화학)가 직접 주관하도록 하고 미국 바텔기념연구소에서 파견나온 최영화 박사(전 터프트대학 교수, 기계공학)를 연구책임자로 선정하였다. 여기에 고 천병두 박사(전 KIST 소장, 금속공학), 김재관 박사(전 표준연구소 소장, 기계공학), 이경서 박사(전 국방과학연구소 부소장, 기계공학), 김훈철 박사(현 한국기계연구소 소장, 조선공학), 고 장경택 박사(당시 KIST 금속가공연구실장, 기계공학), 남준우 박사(현 국민대 교수, 기계공학) 등 쟁쟁한 전문가들을 배치했다. 또한 윤여경 공업경제 연구부장(현 한국개발투자 부사장, 경영학)까지 가세시켜 강력한 연구팀을 만들었다.
KIST에서 분가한 연구소들
KIST에서는 연구원이 사는 아파트 구역에 외국인 전문가들을 위하여 따로 연립주택을 마련하고 있었는데 그 중 한채를 비워 여기에 연구팀 전원을 수용하고 숙식을 같이하면서 연구조사사업에 전념하도록 하였다. 이 연립주택은 아파트 바로 옆에 있었는데 이 때문에 "자기 집을 눈앞에 두고 밖에서 숙식을 하다니 이게 무슨 짓이냐"는 부인들의 항의가 빗발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연구팀은 수개월을 같이 지내면서 '한국 기계공업의 근대화 방안'이란 제목의 보고서를 만들어 냈다.
이 보고서는 우리나라 주요 전략산업의 하나인 기계공업을 육성하기 위한 기본방향을 제시하였는데, 구체적인 시행방안으로 종합 중기공장 특수강공장 주물선공장 및 대형조선소의 건설을 건의하였다. 특히 대형선박(20만t급 이상)의 건조는 외국기술의 적절한 도입만 이루어진다면 성공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당시 1만t급 정도의 선박건조 경험밖에 없는 국내 현실에서는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이에 회의적이었다. 다행히 현대가 KIST의 연구조사 결과를 믿고 대형조선소를 건립하는 모험을 무릅써 오늘날의 조선산업이 가능하게 됐다.
종합중기공장은 우리의 제의와는 약간 달라졌지만 창원의 한국중공업으로 귀결되었고, 특수강은 국영기업으로 시작했으나 후에 민영화되어 현재의 삼미특수강으로 성장하였다. 주물선은 그 자체만 가지고는 수지를 맞추기 어렵지만 기계공업 발전의 기초가 되는 것이어서 부득이 포철이 이를 맡아서 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제규모의 확대와 공업의 고도화에 따라 새로운 기술 수요가 급격하게 팽창하게 되었다. 즉 기계공업을 위시하여 전자 화학 재료 에너지산업에서 요구되는 엄청난 기술수요를 충족하는 데에는 KIST 하나만 가지고는 이에 대응할 수 없었다. 분야별 전문화 세분화가 절실히 요구되었다. 이에 따라 분야별 전문연구기관으로 긴급히 요청되는 선박 해양 기계 석유화학 전자통신연구소 등이 KIST에서 분리, 독립될 수밖에 없었다.
먼저 조선공업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1973년 10월에 KIST 부설로 선박연구소와 해양연구소가 설립되었고, 1976년에는 한국선박연구소(현 한국해사기술연구소)가 독립기관으로 발족하였다. 이러한 새로운 전문연구기관 설립에는 여러가지 어려움이 많이 뒤따랐다. 선박연구소의 기본시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심수대형수조(深水大型水槽)인데 당시 선박연구소의 계획과 건설을 담당하고 있던 김훈철 박사는 대단히 큰 규모의 수조건설를 제안했다.
길이가 2백m가 넘고 건설비용도 2백만달러나 되어 우리 실정으로는 분에 넘친다는 생각이 들어 주저주저하고 있었는데, 김박사의 끈질긴 설득으로 이를 수락할 수밖에 없었고 그 비용은 UNDP(유엔개발계획)자금으로 충당하기로 하였다. 이 수조는 건설하는데 3년이나 걸려 1978년에 완공되었는데 완공 후에도 엄청난 양의 물을 채워 넣느라 갖은 고생을 하였다. 당시만 해도 엄청난 크기라고 생각했던 이 수조가 이제는 작은 것이 되었고 일본에서는 이것의 2배나 되는 수조를 가지고 있다고 하니 앞을 내다본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뉴턴의 사과나무」심다
우리가 설정한 전략산업의 생산능률을 증진시키기 위해서는 공업표준화와 제품의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한 품질관리 체계의 확립이 필수적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국가표준기구로 한국표준연구소(현 한국표준과학연구원)가 설립되었다. 다른 전문연구기관들의 중추가 된다는 의미에서 연구학원 도시의 서부지역 중심부에 자리잡도록 하였다. 1972년 6월 미국 국립표준국(NBS)의 조사단을 초청하여 국가표준제도의 현대화와 연구기관 설치를 검토하게 하고 그 결과를 가지고 이낙선 상공부차관을 찾아가 표준연구소 건립을 강력하게 권유하였다. 당시만 해도 아직 표준에 대한 인식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서 이 차관은 나의 제안에 응하려 하지 않았다. 여러 방도로 그를 설득하여 결국 상공부에 의한 타당성 조사가 이루어지고 1975년 12월에 재단법인 한국표준연구소가 발족되었다. 연구소의 초대소장에는 김재관 박사(현 인천대학 대학원장)가 취임하게 되었다.
김박사는 표준화 작업에 온갖 정성을 기울여 드디어 국가표준제도 확립을 헌법 조문으로 명문화하기도 하였다. 즉 헌법 127조 2항에 나와있는 '국가는 국가표준제도를 확립 한다'는 구절이 그것이다. 이는 다른나라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다. 또 하나 특기할 일은 한국표준연구소에는 길이 무게 부피 세가지의 일차표준원기(一次標準原器)가 보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KIST로부터 이관된 것인데 동양에 하나밖에 없다. KIST 창립을 기념하기 위하여 존슨 미국대통령이 이 일차표준원기를 KIST에 기증하였던 것이다.
김박사와 관련하여 기억에 남는 것은 NBS가 영국에서 이식해온 '뉴턴의 사과나무'를 다시 이식받아 대덕 표준연구소 뜰에 심은 일이다. 뉴턴은 잘 알다시피 물리학 발전의 대들보 역할을 한 기초과학의 상징적 존재다. 그가 그의 고향집 정원에 있는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만유인력 법칙'을 만든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표준체계확립을 위해 기초연구를 많이 해야 할 표준연구소에 이 뉴턴의 사과나무가 왕성하게 자라고 있다는 사실은 생각만 해도 기분좋은 일이다.
과학기술에 관한 것은 모두 과기처에서 관장해야 한다는 고식적인 관념에서 벗어나 필요한 데에서 이를 수행할 수 있도록 과기처가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즉 연구소를 설립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어떻게 이를 활용하느냐에 있다. 그래서 설립의 준비작업은 과기처가 했지만 이용하는 곳에서 연구소를 주관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에서 표준연구소에 이어 화학연구소 전자기술연구소 기계연구소 등은 상공부가, 통신기술연구소는 체신부가 관장 하도록 하였다.
홍릉연구단지 경험을 토대로
이 과정에서 나는 이들 연구기관을 각지에 분산시킬 것이 아니라 한 장소에 집중하여 협동체를 만들 것을 구상하게 되었다. 이들 연구기관이 협동체를 만들 경우 기기나 시설을 공동으로 이용하는 것은 물론이요 연구원들간의 교류도 인력활용 면에서 큰 장점 이 있을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연구과제나 연구활동 범위가 넓어지고 깊어짐에 따라 여러 분야간 협동이 요구되는 동시에 기초에서 응용, 개발로 이어지는 일관 연구체제가 절실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연구학원도시 구상에는 그간 서울 홍릉에서 이루어진 경험이 어느 정도 토대로 작용하였다.
서울 홍릉에는 KIST가 자리를 잡으면서 인근에 한국과학원(KAIS) 한국과학기술정보센터 한국개발연구원(KDI) 국방과학연구소(ADD) 등이 잇따라 건립되었다. 연구교육기관들이 모이자 자연적으로 하나의 연구단지가 형성되었다. 이 단지는 외국기술에만 의존하던 민간기업에 대해 꾸준하게 계몽과 지도를 하고 수탁연구를 통해 산업기술개발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각 연구기관의 장들이 모이는 연구단지협의회가 구성되었고 이 협의회를 통해 연구원의 상호교류, 기술정보의 교환, 시설의 공동이용 등 일상적인 협동체제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한편 대덕연구학원도시 건설은 현실적으로도 긴급하게 요구됐다. 당시 서울시내에 산재한 국공립시험연구기관의 대부분이 우수 연구원을 확보하지 못하고 실험기기의 노후 등으로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업무 내용에 있어서도 연구소마다 유사 기능이 혼재되어 연구기관을 정비할 필요성이 제기됐다. 또 도시소음 등으로 연구환경이 날로 악화되어 땅값 비싼 곳에 구태여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광범위하게 확산됐다.
이러한 상황에서 연구와 교육을 핵심으로 하고 과학자들이 불편없이 연구할 수 있는 도시환경과 생활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대덕연구학원도시 구상은 점차 구체화됐다.
대덕연구학원도시 기본계획을 수립하면서 다른 나라 연구단지의 건설배경 형태 및 운영 등을 조사연구하고 이를 우리나라 여건과 비교검토 하긴 하였지만 외국의 연구단지는 그 형성 배경에서 대덕과 많은 차이가 있었다. 일본의 쓰쿠바는 수도권 인구 및 시설의 분산이 건설의 일차적인 목적이었고 미국의 트라이앵글 연구단지(Reaserch Triangle Park)는 북캐롤라이나주의 지역발전, 그리고 소련의 노보시비르스크는 시베리아 개발이 단지 건설의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다. 이에 반하여 대덕은 그 건설 이념을 국가발전을 위한 과학기술의 효율적인 개발과 이의 전국적 확산에 두고 처음부터 범국가적인 차원에서 건설을 입안한 연구단지 였다. 때문에 그 입지는 우리나라 산업권에 대한 전국적 지원이 용이하도록 국토의 중심부에 위치하도록 해야 했다. 또한 대덕연구학원도시는 장래 국가 발전을 위한 두뇌 역할을 담당해야 했으므로 지적 공동체로서 충분한 여건을 갖추도록 계획되었다.
"대덕으로 수도를 이전하겠소"
이런 배경하에 나는 73년 연구학원도시 계획을 성안하여 대통령께 이의 추진을 건의하였다. KIST 설립 때와 마찬가지로 행정부처 장관들은 무슨 뚱딴지 같은 연구소냐고 고개를 흔들었으나 대통령만은 흔쾌히 그 계획을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워낙 풍수지리에 관심이 많던 분이라 손수 학원도시 설립에 마땅한 장소를 물색하여주기도 하였다.
당시 우리는 연구학원 후보지로 충북의 청원, 경기도 화성, 충남의 대덕을 생각하고 있었다. 청원의 경우 군사기지에 가까운 곳이라 일찍 후보에서 탈락되었고 결국 대통령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대덕으로 입지는 결정 되었다. "최 박사, 이곳 대덕이 명당 중의 명당이요" 하면서 건설부장관과 함께 헬기를 타고 돌아보라고 권유하기도 하였다.
대덕이 명당자리여서 그랬는지 명문대가의 묘지들이 많이 들어서 있어 공사진행에 애로가 많았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다음에 발생하였다. 공사를 시작하여 한창 부지를 닦고 있을 때 청와대로부터 호출이 있었다. "내가 예전부터 수도권 이전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전 장소로 대덕부근이 적당할 것 같소. 그러니 공사를 중단하고 그 부지를 양보하시오" 하는게 아닌가. 이미 공사가 시작되어 그럴 수는 없다고 고집을 세워 결국은 그대로 공사가 진행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대통령이 직접 공사현장을 들른 일이 있었다. 공사진행과 앞으로의 계획을 담당실장이 브리핑하였는데 이때 도시 건설공사가 어떻게 진행될 것이라는 정도만 보고하면 될 것을 연구학원도시가 완전히 완성될 때까지 드는 경비를 몽땅 보고해버린 것이다. 1980년대 후반까지의 경비를 모두 보고하였으니 그 엄청난 액수에 대통령이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연구학원도시에 대한 기대감을 안고 방문한 대통령으로서는 그 재원 규모에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그 기대는 삽시간에 낭패감으로 변하였다. "그 재원은 연구학원도시가 완전히 완성될 때 까지 드는 경비입니다. 당장은 그렇게 많은 돈이 들어가지는 않습니다"라고 가까스로 설득해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깔끔한 성격의 마가렛 대처
아닌게 아니라 각종 연구소 건립에 쓰일 재원과 인력, 기술을 마련하는 일은 큰 일이었다. 당시 국가 예산의 규모로 보아 이들 연구소에 쏟아부을 자금은 지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더구나 연구소를 운영할 연구원들도 여전히 부족하였다. 해양연구소 건립을 구상 해보아도 연구원으로 일할 사람을 생각하면 막막했다. 이런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나는 과기처 장관으로 부임한 후 국제기술협력국을 강화하여 다양한 국제교류를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종전까지 미국에만 의존해오던 것을 프랑스 영국 독일 등 유럽 여러나라와의 교류로 다변화를 꾀하였다. 이들 나라를 중심으로 세계 각국 연구소의 동향, 기술 수준, 기술내용 등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여 국제협력 5개년 계획을 성안하였다. 그리고는 72년 5월 과학장관회의를 위해 프랑스 영국 서독을 방문하였다. 해양 및 원자력 기술 분야에서 세계적인 권위를 인정받고 있던 프랑스로부터는 이들 분야의 기술협력을 받아냈다. 여기에는 오토리 프랑스 산업기술부장관의 전폭적인 협력이 크게 기여하였다. 이 분은 그후 EC위원장으로 많은 활약을 하였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아직 불모 상태에 있던 해양학 연구인력의 확보를 위해 많은 사람들이 프랑스에서 수학할수 있도록 하였는데 이들이 현재 해양연구소의 중추를 이루고 있다.
영국으로부터는 과학교육에 관한 조언을 많이 들었다. 영국 방문과 관련하여 아직도 잊어버릴 수 없는 일이 하나 있다. 당시 영국의 문교과학장관은 마가렛 대처여사였다. 과학교육에 관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동안 깔끔하고 공정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수상 자리에까지 오르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한국에 돌아와 몇년 후에 그분이 보수당 당수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축전을 보냈다. 그랬더니 얼마후 고맙다는 친필 서신을 보내왔다. 요즘이야 타이프라이터가 발달되어 있으니 웬만하면 편지를 직접쓰지 않는데 이렇게 친필 편지를 보낸 것만 봐도 그 분의 성실한 성품을 알 수 있다. 서독에서는 선박연구소와 정밀기계센터, 주물센터에서 협력을 받을 수 있었다. 당시 서독의 경우 우리가 하는 일에 많은 격려와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트라이앵글 연구단지가 모델
또한 대덕연구학원도시의 구상과 건설에 여러가지 훌륭한 조언을 해준 분들은 미국 학술원 회원인 하버드 대학의 로자 레벨 교수, 코넬대학의 프랭크 롱 교수, 스탠퍼드 대학의 프레드 터만 교수 등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이러한 석학들을 모시고 한국에 왔다갔다하던 미국학술원(NAS)의 국제협력담당직원이었던 존 헐리(John G. Hurley)는 대덕연구학원도시의 구상이라는 주제로 논문을 써서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기도 하였다. 미국 학자들의 도움 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조지 허버트 트라이앵글연구소의 소장이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내가 71년 6월에 미국에서 과학기술처 장관 발령을 받고 귀국직전에 방문한 곳이 트라이앵글 연구단지였다. 이때 만나서 연구단지 구상과 관련된 여러가지 의견을 교환한 사람이 바로 허버트 소장이다. 이 분은 원래 스탠퍼드연구소 부소장이었는데 트라이앵글연구소(Research Triangle Institute)를 창립하면서 초대소장으로 발탁되었고 허허벌판에서 시작하여 오늘날의 번창을 가져오게 한 장본인이다. 그 후 1978년 내가 퇴임할 때까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연구학원도시 건설을 위하여 여러모로 우리를 도와주었다.
대덕연구학원도시의 건설은 분야간 협동연구의 촉진과 효율적인 기술개발의 추진이 라는 연구개발의 기본성격에 있어서는 홍릉연구단지와 차이가 없으나 그 형성배경에 있어서는 홍릉연구단지와 많은 차이가 있다. 홍릉연구단지의 형성이 60년대에 있어서 낙후된 과학기술기반의 구축에 있었다면 대덕연구학원도시는 중화학공업의 건설을 중심으로한 산업기술의 고도화와 2000년대를 향한 과학기술 도약을 예견한 사전적 포석이라 할 수 있다.
대덕연구학원도시는 연구소와 학원이 공존하는 지적 공동체를 형성하여 시설과 인력 활용을 극대화하는 연구단지의 본질적인 이념이 구현되도록 종합적으로 계획되었으며 그 특성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첫째 대덕연구학원도시는 두뇌도시로서 연구와 교육이 도시의 핵심기능을 이루고 여러 전문분야의 과학기술자들이 두뇌집단을 형성하여 협동연구가 가능하도록 도시공간이 구성되었다. 둘째는 이러한 두뇌업무가 주축이 되기 때문에 자연히 녹지와 자연경관을 최대한으로 보존하고 건물과 구조물은 이에 조화되도록 설계함으로써 공원도시로 계획되었다. 셋째 연구와 학문을 하는 도시로서 직장과 주거지역을 서로 인접 배치하여 연구하면서 생활하고 생활하면서 연구하는 이른바 연구의 생활화가 이루어지도록 구상 하였다.
성기수와 시스템공학 연구소
대덕연구학원도시에 가면 한국과학기술원(KAIST) 옆에 우뚝 서있는 독특한 모양을 한 건물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소프트웨어개발의 총본산을 자처하고 있는 KIST 부설 시스템공학연구소다.
이 연구소와 관련해서 기억에 남는 이가 한 사람있다. 바로 성기수 박사다.
KIST가 설립되면서 컴퓨터 이용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은 항상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1960년대 중반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 대형컴퓨터의 설치 운영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러나 나는 곧 전산조직을 활용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KIST가 그 개척자 역할을 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런데 당시만 하더라도 이를 담당할 적임자가 없었다. 그때 마침 머리에 떠오른 것이 성기수 박사였다.
성박사는 하버드 대학에서 항공역학을 전공, 2년이라는 짧은 기간내에 박사학위를 취득하여 귀국하였는데 아직 그 전공분야를 살릴 형편이 못되어 송인상 회장(전 재무부장관)이 운영하고 있던 연구소에서 계량경제에 관한 일을 하고 있었다. 두뇌가 뛰어나고 수학적 소양도 충분하였기 때문에 그런 일을 쉽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컴퓨터 전문가는 수학적인 두뇌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성박사가 적격이라고 보았다. 본인하고 의논하였더니 한번 해보겠다고 해서 KIST의 자매연구기관인 바텔기념 연구소 컴퓨터 담당인 에번스 박사에게 보내 컴퓨터에 관한 연수를 시작하였다. 내가 예측한대로 성박사는 금방 컴퓨터에 익숙하게 되고 얼마안되어 한국에서 제일가는 컴퓨터 전문가가 되었다.
1967년 아주 작은 규모의 KIST 전산실로 출범하여 대량의 자료처리 작업의 전산화에서부터 각종 물자관리, 재무관리 및 특별회계사업의 경영합리화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전산조직화(EDPS) 업무가 수행되었다. 그동안 말썽을 일으킬 소지가 많았던 각급학교의 입시업무, 전화요금 관리, 서울시의 각종 세금징수 관리 업무 등을 아무 탈 없이 거뜬히 해냈다. 그러나 당사자인 성박사보다는 내가 항상 걱정을 해야했다.
성박사는 늘 대형컴퓨터를 선호했는데 그 임대료가 엄청나게 비싸서 이것이 하루만 쉬어도 한달동안 천신만고 끝에 벌어놓은 연구계약 수입이 송두리째 없어져버리곤 했다. 그런데 성박사는 전혀 걱정하는 기색이 없어 결국 애를 태우는 사람은 연구소 경영을 맡고 있던 나밖에 없었다. 나는 KIST를 떠난 후에도 성박사를 만나면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내 머리카락이 백발이 된 것은 70%가 당신 때문이야."
이렇게 출발한 전산실이 이제 5백명 이상의 연구원을 거느리는 거대한 시스템공학연구소로 발전해 88년에는 국내 처음으로 슈퍼컴퓨터크레이-2S를 도입, 기초과학분야에서 첨단응용기술개발에 이르기까지 과학기술연구에 폭넓게 활용되고 있다. 시스템공학연구소는 그동안 시스템 개발, 컴퓨터의 이용, 정보처리 등 소프트웨어 산업의 핵심분야에서 선구자적 역할을 해왔을 뿐만 아니라 장래 이 분야를 이끌어갈 많은 인재들을 배출 하였다. 삼보컴퓨터 회장인 이용태 박사도 초창기 KIST 전산실에서 차장으로 일했다. 얼마전 성박사를 만난 일이 있는데 전산실 발족 25년이 되어 이제는 소장직에서 물러나 연구위원이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