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의 발달에 비례해서 의료사고는 늘어난다. 아울러 환자의 권리의식과 의학지식이 예전과는 달라서···
최근 국내외를 막론하고 의료사고 또는 의료분쟁의 발생빈도가 급격히 늘고 있다. 그래서 한편에서는 "의사를 믿을 수 없다"는 분위기가 팽배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에서는 "빈번한 분쟁때문에 의사노릇하기 힘들다"는 불평이 거침없이 쏟아져 나온다.
의료분쟁의 발생건수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의학의 발달에 비례해서 늘고 있다. 실제로 미국에서는 지난 40년간 환자가 의사를 상대로 소송한 건수중 80%가 최근 5년동안에 집중적으로 제기됐다. 의학기술과 시술과정이 점점 복합해질수록 예기치 않은 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이 커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아울러 의사들이 최신기계나 첨단 약에 주로 의존함에 따라 의사와 환자간의 인간관계가 소원해진 것도 의료사고의 다발을 부추기는 한 요인이다. 여기에 의사들의 과중한 업무량도 분쟁의 도화선으로 작용할 수 있다. 또 의료보험제도가 확대돼 의료수요가 양적으로 급팽창, 분쟁발생건수를 크게 늘려 놓았다.
환자들의 권리의식도 예전같지가 않다. 일반인들도 이제 만만찮은 의학실력을 갖추고 있어 전문지식이 일방적으로 통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 게다가 환자나 환자가족의 기대수준도 과거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높아져 앞으로 의료분쟁건수가 더 늘어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미묘하기 짝이 없는 인간의 몸에 생긴 병을 기계나 신이 아닌 인간이 다스리는 의료현장에서 간혹 불의의 사고가 일어나는 것은 필연적이다. 환자개인의 체질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의사의 과오없이도 의료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의료사고와 의료과실
따라서 의료사고와 의료과실은 마땅히 구분돼야 한다.
"의료사고란 의료행위가 시작된 후 끝날 때까지의 전과정에서 예상외로 일어난 모든 불상사를 일컫는 말이며, 의료사고 중에서 잘못이 법적으로 인정된 것을 의료과실이라고 한다."
원로 법의학자인 문국진박사의 말이다.
그러므로 모든 의료과실은 의료사고에 속하지만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실력있고 성실한 의사라 할지라도 의료사고에 연루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스트렙토마이신이라는 잘 알려진 항생제를 맞은 뒤 환자가 심한 과민반응을 일으켰다고 가정해 보자. 이 사례는 분명히 의료사고로 간주되지만 의료과실은 아니다. 의사가 주의의무를 충실히 지켜도, 즉 스트렙토마이신을 투여하기 전에 피부반응검사(스트렙토마이신 민감도검사)를 실시해도 환자의 몸이 민감도검사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면 검사는 허사가 되고 만다.
초음파검사를 실시하고도 간종양을 밝혀내지 못했다면 이 경우도 불가항력적인 성격이 짙다. 간에 종양이 생긴 후라도 초음파검사 화면에 멀쩡하게 비치는 시기가 있는데 운 나쁘게도 이때 초음파검사를 실시하면 종양의 존재를 발견할 수 없게 된다.
또 요즘 실시되는 자궁암검진법의 암검출률은 98, 99% 수준에 이르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나머지 1,2%는 의사의 능력 밖에 있음을 뜻한다. 이때도 무과실 의료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
이처럼 의사의 과오가 없다고 인정되면 환자나 환자가족은 현행법상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하게 된다.
세계최고의 의료기술수준을 자랑하는 미국 뉴욕주에서 매년 의료사고로 사망하는 사람이 약 7천명, 피해를 보는 사람이 약 2만7천명이라고 한다. 이 수치는 공신력있는 미국 하버드대 의대에서 내놓은 것(1990년)이어서 발표당시 미국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국내의 의료사고 발생건수는 서구에 비해 훨씬 적은 것이 사실이지만 90년 한해동안 전국적으로 5백3건의 의료분쟁이 일어났다(보사부 통계).
이 5백3건을 진료과목별로 나눠보면 정형외과(98건) 산부인과(73건) 신경외과(66건) 내과(54건) 일반외과(49건) 소아과(22건) 성형외과(14건) 순이었다.
의료사고 발생건수에 있어서 정형외과와 산부인과는 늘 선두자리를 다투고 있다. 정형외과는 그 특성상 응급상황이 자주 벌어지고, 결과가 확연히 드러나는 수술을 해야 하는 경우가 많으므로 의료사고가 빈번하다. 게다가 외과수술현장에서 불가피한 수혈과 마취도 큰 부담이다.
산부인과는 진료대상이 산모와 태아 2인이므로 의료사고의 발생확률이 그만큼 높다. 또한 진료자체가 허다한 가변성을 내포하고 있다. 예를 들어 분만중 태반이 먼저 떨어져 태아가 사망하기도 하고(조기방리), 양수가 혈관속으로 들어가 혈액의 흐름을 일시에 차단해 버리기도 하고(양수색전증), 태아는 나왔으나 태반이 떨어지지 않아 순간적으로 과다출혈을 일으키기도 하고(흡착태반), 탯줄이 태아의 목을 감아 태아를 질식시키기도 하고, 짧은 시간내에 다량출혈을 유발하기도 한다.
이처럼 산부인과는 진료의 특성상 많은 사고인자를 포함하고 있을 뿐더러 그 결과도 치명적인 경우가 많아 의료사고의 '격전지'로 통한다. 실제로 89년 YMCA 시민중계실에 접수된 1백50건의 의료사고중 66건(44%)이 산부인과 사고였는데 그중 사망에 이른 경우도 21명(30%)이나 돼 다른 진료과목에 비해 월등 높은 치명률을 나타냈다.
환자들이 의료분쟁을 신청하는 이유를 살펴보면 진료 및 수술과실이 전체 분쟁발생건수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진단서발급에 따른 마찰, 오진시비, 분만잘못, 불친절, 진료비 과다청구, 피해보상, 마취잘못, 투약잘못, 주사부작용 등이다.
현재 억울하게 의료사고를 당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취할 수 있는 길은 두가지다. 첫째는 보사부와 각 시도에 설치된 의료심사조정위원회의 조정을 거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위원회의 조정실적이 극히 미미한 형편이고(연간 1~6건), 설령 여기서 어떤 결과가 도출된다 할지라도 강제성이 없어 실익을 얻기란 극히 어렵다.
둘째는 민사 또는 형사소송을 제기하는 방법이다. 이 소송에서 의사가 이길 확률은 절대적으로 높다. 실제로 지난 90년에 검찰이 밝힌 자료에 따르면 형사소송이 제기된 의료사고의 약 80%가 무혐의처리됐다. 또 대법원의 의료과오 사건판례 총 60건중 형사사건 19건을 분석한 결과도 비슷한 양상을 나타냈다. 의사에게 유죄판결을 내린 사건이 47.4%에 불과했는데 이는 일반형사사건의 유죄율(95%)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는 수치다.
지난 해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의료사고와 관련된 사체 1백18구를 부검한 뒤 그 결과를 발표했다. 놀랍게도 여기서는 전체부검건수의 45.8%에 해당하는 54구가 의사의 오진에 의해 숨졌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환자에게 의사의 과오입증 책임지워
그렇다면 의료분쟁에서 환자측이 번번이 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환자측은 법원에 가더라도 의사의 잘못을 결국 의사가 가려내야 하는데 인맥 학맥 등이 작용, '팔이 안으로 굽는' 편향된 증언을 하기 때문에 패소할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한다. 아마도 이러한 불신감은 공정한 감정기관이 설립되고 전문적이고 믿을만한 감정인이 등장해야 해소될 것이다.
또 의료지식을 의사들이 거의 독점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오의 입증책임을 환자측이 지는 것도 불합리하다. 미국 등 의료선진국에서는 의사에게 자신의 무혐의를 증명하게 하는 추세로 나아가고 있다.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인의협)의 의료제도분과장 김창협씨는 "의료분쟁은 인과관계의 증명이 어려워 공해사건과 비슷한 성격을 지닌다. 정보가 제한돼 있고 가해 당사자를 적시하기도 쉽지 않아 수년을 끄는 것이 보통"이라고 얘기한다. 실제로 최근 대법원에서 배상판결이 난 한 마취사고(마취하기 전에 사전검사를 소홀히 함으로써 간기능이 악화돼 환자가 사망한 사건)는 10년 가까이 걸려 해결됐다.
이렇게 지루하고 소모적인 의료분쟁을 겪다 보면 환자측이나 의사측 모두 극도로 고달퍼진다. 그래서 일부 의사들은 의료사고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환자를 의식적으로 피한다. 이를테면 방어진료를 하는 것이다. 대개 야간진료 응급환자 중증환자 수술환자 등을 기피하는데, 이 때문에 치료시기를 놓쳐 환자가 치명적인 피해를 입는 경우도 종종 생긴다.
환자의 병과 무관해 보이는 검사를 실시하고 투여하는 약물의 종류도 쓸데없이 늘어나게 된다. 물론 이것도 방어진료의 일환이다. 즉 나중에 "환자가 왜 이런 검사를 하지 않았느냐"고 추궁할 때를 대비하고 "검사 당시에는 아무런 소견을 보이지 않아 그 병인줄 몰랐다"는 자기방어를 하기 위해 과잉검사와 투약을 할 개연성도 없지 않다. 따라서 이러한 방어진료는 환자에게 불필요한 비용을 전가시키는 측면도 있다.
의료사고를 경험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지난 해에 설립된 의료사고가족연합회(의사연, 회장 이진렬, 연락처 (02)579-6539)는 환자의 권리를 지켜주기 위한 자구단체다.
"지난해 12월 한달동안 1백76건이 접수됐다. 그중 의료사고로 판단되는 1백22건을 일차로 추려내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한 이진렬회장은 "일반인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의사연에 한달평균 1백건이 넘는 사고접수가 들어오는 것만 봐도 우리나라 의료사고의 실상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요컨대 환자측은 주로 결과를 중시, 자신의 기대수준에 미치지 못한 책임을 의사에게 지우려 하고, 의사측은 환자들의 몸에 의료사고의 원인이 있으며 자신은 능력껏 했다고 생각한다. 사실 이 차이는 대단히 큰 것이다. 이같은 상호불만을 해소할 절묘한 대안은 없을까. 최근 보사부에서는 의료분쟁조정법 시안을 마련, 양측의 이해일치를 꾀하고 있으나 벌써 이 시안이 '의사를 위한 것'이라는 비판이 일고 있다. 환자의 권리를 최대한 보장하고, 동시에 의사의 진료행위를 위축시키지 않는 접촉점을 찾기란 그만큼 어려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