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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의학적인 오진이라 할지라도 치료방법이 결과적으로 효과적이었거나 무해했다면 고의성이 없는 한 법률적인 오진으로 보지 않는다.

과거 의술이 인술로 일컬어지던 때에는 의료는 환자의 권리가 아니라 시혜(施惠)란 개념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의료보장제도가 실시되면서 의료는 베품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의식주처럼 당연히 누려야 할 기본권이라는 쪽으로 인식이 바뀌게 되었으며 특히 최근 4,5년 전부터 우리사회전반에 걸쳐 불기 시작한 민주화바람은 국민의 의료관(醫療觀)에도 적잖은 변화를 가져왔다.

불과 십수년 전까지만 해도 병원에서 치료중 또는 치료후 환자의 상태가 나빠지거나 사망할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원인을 환자가 운이 나쁘거나 명(命)이 짧은 탓이라는 식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은 비록 의료과오의 원인이 불가항력이었다고 입증된 경우라도 곧장 의료분쟁이나 의료기관 점거 치료방해와 같은 양상으로 이어지는 경향이 높아지고 있어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오진의 의학적 정의

오진의 사전적 정의는 '병을 잘못 진찰함, 또는 틀린 진찰'이라고 나와 있으나 의학계에서는 '오진'(誤診, misdiagnosis)이라는 단어보다는 '부정확한 진단'(inaccurate diagnosis) 또는 '적합하지 않은 진단'이란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같은 의학계의 지적은 같은 질병이라 할지라도 모든 사람의 임상증상이 똑같을 수만은 없고 병세 또한 고정돼 있는 것이 아니라는데 그 근거를 두고 있다. 즉 인간의 질병이 진행성과 변화성을 특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진찰한 시간과 상황에 따라 진단이 다르다고 해서 오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실례로 진단당시에는 감기였으나 환자자신이 감기치료를 소홀히 해서 며칠후 급성폐렴으로 이행된 경우, 처음부터 폐렴진단을 내리지 않았다고 해서 이것을 오진으로 간주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다. 또 시험개복(試驗開腹)과 같이 일종의 진단적 의미를 지니는 수술사례를 오진의 범주에 넣는 것 등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의학계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오진에 대한 시비와 이와 관련된 의료분쟁은 해마다 증가하는 추세다. 따라서 국가와 국민, 의료계 모두가 이에 대한 적극적인 예방책과 사후대책을 시급히 세워야 할 실정이다.

전통적으로 사체손상을 금기로 여기고 있는 우리나라의 경우 오진여부를 가리는 확실한 진단방법인 부검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에 대한 통계자료는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지난 해 10월에 개최된 전국법의학세미나에서 몇몇 학자들이 밝힌 부분적 보고를 통해 일부 임상과별 진단의 정확도를 개괄적으로 가늠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세미나에서 울산의대 이문호교수는 자신이 서울의대에 재직하던 66년부터 86년까지 서울대병원 내과에 입원, 소정의 진단과정을 거친 후 외과적 치료의 필요성이 인정돼 외과계에서 수술받은 환자중 의무기록의 충분한 검토가 가능했던 사례들을 모아 검토했다고 밝혔다. 병록지를 조사해 전과(내과에서 외과로) 당시의 주질환에 대한 임상진단과 수술 후의 병리조직학적 진단을 비교, 내과에서 행한 임상진단의 정확도를 산출한 것이었다.

이 연구보고에 따르면 부정확한 진단의 비율은 60년대 후반의 29.7%에서, 70년대 초반에는 17.2%로, 다시 70년대 후반에는 14.4%로, 이어서 80년대 초반에는 12.5%로 감소했다고 한다.

수평적 비교치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80년대에도 최고 30%선의 오진율을 보이고 있는 선진국에 비하면 진단의 정확도는 오히려 앞선다. 국내 임상의학의 발전상황을 반영하듯이 선진의료국에 비해 조금도 뒤지지 않는 진단의 정확도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역시 특정사례에 치우쳐 있어 정확한 비교치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지난 87년 11월 미국의학협회지에 실린 케신박사의 조사결과도 역설적으로 우리의 현수준을 짐작케 한다.

케신박사가 몇가지 시술예에서 과연 적합한 진단이었는가를 알아본 결과, 관상동맥조영술을 받은 환자의 17.4%, 상부위장관내시경술을 받은 환자의 17.2% 그리고 경동맥내막절제술을 받은 환자의 32.4%가 적합하지 않은 진단을 받은 케이스로 드러났다.

의학적으로는 진단당시 병상(病狀)을 잘못 판단한 경우를 모두 오진이라고 간주하나 법률적으로는 비록 의학적인 오진이라 하더라도 치료방법이 결과적으로 효과적이었거나 무해(無害)했다면 고의성이 없는 한 오진으로 보지 않는다.

서울지방검찰청 추호경검사는 "법률적으로 오진이 문제가 되는 것은 오진의 결과다. 다시 말해 현 병상에 영향을 미쳐서 그 병상이 악화되거나 적절한 치료기회를 놓치거나 치료의 효과가 없어서 기간이 연장됐거나 병이 다른 사람에게 전염되는 등 나쁜 결과가 초래된 경우"라고 지적하고 "오진에 대해 법적으로 책임을 지우기 위해서는 그 오진이 의사의 과실에 기인한 것이어야만 한다"고 밝히고 있다.

또 국립과학수사연구소 윤중진 강신몽박사도 '법의부검과 오진'을 주제로 한 논문에서 오진으로 인해 환자가 사망, 분쟁이 발생하면 오진에 과오가 개입됐는지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고 밝혔다. 또 오진에 과오가 개입됐는지의 여부는 의사가 주의의무를 다했는가의 판단으로 결정된다고 지적했다. 즉 주의의무를 다 했음에도 불구하고 오진했다면 이는 불가항력이라고 봐야 하며 주의의무를 다하지 못해 생긴 오진이라면 그 정도에 따라 책임을 배분받아야 할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여기서 주의의무란 의료에 수반되는 핵심적 의무로서 법률적 배경은 민법 제681조, 즉 '수임인은 위임의 본지에 따라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로써 위임사무를 처리해야 한다'는 규정이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의 일을 계약을 통해 위임받았을 때에는 선량한 관리자로서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한 외과의사가 고도의 정밀성을 요구하는 수술을 하고 있다. 외과수술을 하다가 내과 등에서 내린 진단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알게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오진시비가 방어의료 불러

"임상증상 소변검사 등으로 봐서 아무래도 임신이 의심돼 환자에게 성접촉시기를 물었는데 남자와 손목 한번 잡은 일이 없다고 펄펄 뛰는 미혼여성의 경우, 또 이 의사의 진단이 다른 의사의 진단과 맞나 맞지않나를 알아보듯이 문진에 제대로 대답하지 않는 경우 등은 의사로 하여금 정확한 진단을 내릴수 없도록 한다."

산부인과 전문의 박양실씨(한국여의사회장)는 그래서 의원급 의료기관에서는 오진시비가 일어날 것 같은 환자가 찾아오면 미리 병세와 관련해 예견되는 문제점을 환자에게 말해주고 가급적 큰 병원으로 보내려 하고 있다고 털어 놓는다. 즉 의료의 패턴이 소신의료보다는 방어의료 쪽으로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서울시의사회 이상웅회장도 "의사의 의료행위는 크든 작든 환자의 신체에 대한 침습(侵襲)을 수반하는 행위"라고 전제한뒤 "의사가 의학적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소신진료를 할 경우 소기의 치료효과를 거둘수 있으나 오진시비의 증가로 대부분의 의사가 조금이라도 꺼림칙하면 큰 병원으로 환자를 보내는 추세"라고 말했다. 아울러 그는 오진시비의 증가가 의료비 앙등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뿐만 아니라 이상웅회장은 현행 의료보험제도가 현실적으로 환자와의 분쟁시비를 최소화할 수 있는 각종 첨단장비를 사용한 고가진료를 가로막고 있다고 주장했다. 첨단장비를 활용하는 의료행위에 턱없이 낮은 수가가 책정돼 있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오진은 환자에게는 심각한 후유증과 심한 경우 인명손실이라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고 의사에게는 의료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하는 크나큰 시련이다.

따라서 기왕에 관련학계에서 제기된 부검의 활성화, 정확한 의무기록, 적정진료를 위한 체제마련 그리고 의사와 환자간의 신뢰회복을 위해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할 때라는 지적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응급환자나 오진시비가 일어날 것 같은 환자가 찾아오면 큰 병원으로 보내는 방어의료 행위가 큰 사회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내용과 관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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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02월 과학동아 정보

  • 홍태숙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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