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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발등의 불」 전산서체 개발

한글 글자꼴을 일본에서 수입한대서야

현재 인쇄출판계에 쓰이는 서체들은 대부분 60년대 국내에서 개발돼 일본에 팔려간 것들인데, 이것이 일제 사식기에 내장돼 국내로 역수입되고 있다.

과거 많은 학자들은 컴퓨터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모든 업무가 자동화되고, 결국에는 종이없는 사무실(paperless office)이 도래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러나 이러한 예언과는 달리 오늘날의 컴퓨터는 이전보다 훨씬 많은 양의 종이를 토해내고 있다. 사무실의 프린터는 문서나 도표를, 작가의 워드프로세서는 소설을 찍어낸다. 출판사에서는 탁상출판(DTP)시스템을 이용하여 책과 잡지를 편집한다. 신문사에서는 컴퓨터조판시스템(CTS)을 통해 기자가 작성한 원고가 바로 지면에 배치된다. 이러한 시점에서 인쇄물을 만들어 내는 출력기의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강조되고 있다. 출력기는 수십만원대의 도트 프린터나 수백만원대의 레이저 프린터로부터 수억원을 호가하는 전산사식기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지만,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그것이 찍어내는 글자의 품질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출력기에 쓰이는 글자, 즉 전산 서체(digital typeface)와 그에 관련된 기술은 90년대의 컴퓨터기술에서 가장 핵심적인 기술 중 하나로 떠오르고 있다.

폰트전쟁
 

(그림 1) 비트맵 서체와 윤곽선 서체의 비교
 

전산서체는 흔히 폰트(font)라는 용어로 표현되는데, 영어 문화권의 컴퓨터 업계에서는 포스트스크립트(Postscript) 언어를 개발한 어도비(Adobe)를 중심으로 애플 마이크로소프트 IBM 비트 스트림(Bitstream) 등 쟁쟁한 기업들이 이 분야의 주도권을 놓고 소위 '폰트 전쟁'(font war)이라고 할 만큼 치열한 기술경쟁을 벌이고 있다. 어느 회사의 기술이 더 나은가, 어떤 제품이 더 아름다운 글자를 출력하는가, 어느 회사가 더 다양한 서체를 확보하고 있는가가 시장점유율에 큰 영향을 미치고, 회사간의 제휴에도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

전산 서체는 크게 컴퓨터 모니터화면이나 도트 프린터와 같은 저해상도용, 레이저 프린터와 같은 중해상도용, 그리고 전산사식기와 같은 고해상도용으로 분류할 수 있다. 과거에는 대부분의 출력기들이 글자의 모양을 점의 배열 형태로 바꾸어서 표현하는 비트맵(bitmap) 서체를 사용했으나, 근래에는 글자의 윤곽선을 저장하는 윤곽선(outline) 서체가 점차 일반화되고 있다. 윤곽선 서체는 비트맵 서체에 비해 확대 축소 회전 등의 변형이 자유롭고 고품질의 글자를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고급의 레이저 프린터나 전산 사식기에는 필수적인 것이 되고 있다.

전산 서체를 만드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종이에 그린 서체 원도를 스캐너로 읽은 다음 다듬어서 글자를 만드는 방법이고, 또 하나는 처음부터 컴퓨터로 글자를 설계하는 방법이다. 현재 기존의 명조체나 고딕체와 같이 원도가 있는 서체는 원도에서 글자를 뽑아내는 방법을 쓰지만, 새로운 서체를 만들 때는 컴퓨터로 직접 설계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윤곽선 서체에서는 원도를 스캐닝하여 얻은 비트맵 글자로부터 글자의 윤곽선을 뽑아내고, 이를 디자이너가 수정하고 서체를 만든다. 이때 수작업을 줄이기 위해서는 글자를 읽어들이거나 윤곽선을 뽑아내는 과정을 되도록 자율화할 필요가 있다. 수정이 끝난 다음에는 출력될 글자의 품질을 조정하는 최종 마무리 작업을 하는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힌팅(hinting) 기술이다.

힌팅은 작은 글자에서도 품질을 좋게 하기 위해 글자의 윤곽선을 조정해 주는 특별한 기술인데, 힌팅의 유무에 따라 글자의 품질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기존의 시스템에서 영문을 위한 힌팅은 많이 개발되어 있으나, 한글 한자는 영문과 구조가 근본적으로 다르므로 한글을 위한 독자적인 힌팅 기술이 개발되어야 한다.

국내에서도 출력기 시장의 확대에 따라 한글 전산 서체에 대한 관심이 점차 높아지고 있으며, 각 업체에서도 출력기 및 서체의 개발을 서두르고 있다. 현재 국내에서는 정주기기 서울시스템 한국컴퓨그래피 삼화양행 동우기기 신명시스템즈 휴먼컴퓨터 등의 회사들이 서체와 출력기 관련 제품을 공급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한글 전산서체나 그 관련 기술의 개발은 초보적인 단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또한 업체들이 독자적인 기술 개발보다는 외국의 기술을 곧바로 도입하는 경우가 많으며, 심지어는 서체의 원도조차 일본에서 들여온 것을 그대로 복사하는 실정이어서 문화종속까지 우려된다.

국내 인쇄 출판계에서 사용되고 있는 서체들은 대부분 60년대에 우리나라에서 개발돼 일본으로 팔려간 것이고, 그것이 오늘날 샤켄이니 모라자와니 하는 일제 사진 식자기에 내장돼 우리나라로 역수입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인 한글과 구텐베르크보다 2백년이나 앞섰다는 인쇄 기술의 역사를 가진 우리나라가 정작 한글 서체를 일본에서 수입해서 쓰고 있다는 사실은 부끄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한글서체 개발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다. 영문의 경우는 알파벳 대소문자와 숫자, 몇가지 부호를 합해 1백자 내외만 만들면 되는데 비해 한글은 최소한 1천자를 만들어야 하며 거기에 수천자에 이르는 한자와 특수기호를 같이 만들어야 하므로 이에 소요되는 시간과 경비는 실로 막대하다(2천5백자 가량의 한글 서체 하나를 갖추는데 최소 1억원이 든다는 것이 통설임).

국내 전산 서체 개발회사들은 현재 20가지 가량 되는 본문용 서체(명조 고딕 그래픽 디나루 궁서 등)를 전산화하는데 급급하여 새로운 서체를 개발할 틈이 없으며, 일부 디자이너들이 타이틀용 서체를 중심으로 새 한글 서체의 개발을 시도하고 있기는 하나 본격적인 한글 본문용 서체의 개발은 아직까지 요원하다. 다행히 근래에 들어서 몇몇 선도적인 업체에서 서체 관련 기술을 자력으로 개발하고, 서체도 점차 개발이 이루어지고 있는 점은 고무적이다.
 

(그림 2) 윤곽선 서체 제작과정^a) 윈도스캐닝작업b) 윤곽선 수정작업
 

디자인과 컴퓨터기술의 접목

전산 서체 개발의 어려움에는 많은 원인들이 있는데, 이는 기술적인 측면 디자인적인 측면, 그리고 행정적인 측면으로 나눌 수 있다.

기술적인 측면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만들어야 할 글자의 절대수가 많기 때문에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든다는 점이다. 글자를 초성 중성 종성으로 분류하여 각 자소를 만들고 이를 조합하여 글자를 만드는 조합형(모아쓰기) 서체방식을 택하면 자소의 개수가 4백~7백자면 되므로 노력이 많이 절약되기는 하나 글자의 품질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모아쓰기는 글자의 일관성 유지나 신서체 개발에 매우 유리하므로 앞으로 이 분야에 대해 더 많은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또 하나의 벽은 독자적인 서체 기술이다. 현재 국내에서 한글 서체를 개발하고 있는 대부분의 업체가 미국이나 일본에서 도입한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러한 시스템으로는 한글의 독특한 구조를 살리지 못한다. 예를 들어 위에서 설명한 조합형 서체는 외국에서 도입한 시스템으로 만들기가 매우 힘들고, 앞에서 언급한 헌팅도 한글이나 한자의 구조가 영문과는 다르기 때문에 한글이나 한자를 위한 힌팅 기술을 우리 손으로 개발해야 한다.

디자인 측면에서 가장 큰 문제는 전산 서체가 디자인과 컴퓨터 기술이 접목된 복합적인 분야라는 것이다. 컴퓨터만 만지던 엔지니어가 서체까지 만드는 경우는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펜과 잉크로 원도를 그리던 사람이 컴퓨터에 대한 지식 없이 전산 서체를 만드는 경우에도 제대로 된 결과가 나오기 힘들다.

두번째는 현재 쓰이는 한글 서체의 문제점이다. 현재 출판에서 쓰이는 한글서체는 하나의 계열 안에서도 글자 모양에 일관성이 없다. 이것은 이전에 글자의 원도를 그릴 때 한 사람이 연속하여 그린 것이 아니라 여러 사람이 오랜 기간에 걸쳐 그때 그때 만들었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컴퓨터의 도움으로 제작 기간을 단축하여 이런 부분들을 보완해야 할 것이다.

행정적인 측면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업체들의 서체에 대한 인식 전환이다. 업체들이 서체를 그저 '글자를 알아볼 수만 있으면 되는' 정도로 치부하고 있는 한에서는 한글 서체의 발전은 불가능하다. 서체도 하나의 상품이며 그것을 만드는 데 많은 노력이 든다는 사실, 미래의 컴퓨터 산업에서 서체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투자를 해야만 제대로 된 한글 서체가 나올 수 있다.
 

(그림 3) 힌팅의 효과^윗줄이 힌팅없이 그린 것이고 아랫줄은 힌팅을 추가해 그린 것이다. 윗줄에서는 획의 굵기가 들쭉날쭉하고 가는 획은 아예 사라지기도 한다.
 

저작권 보호 시급하다

현재 국내에서는 서체의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거의 없어 남이 힘들게 개발한 서체를 무단으로 도용하거나 모방하는 일이 적지 않다. 이런 실정에서 서체를 개발한 사람이나 회사는 손해를 입을 뿐 아니라 개발 의욕이 저하돼 결국 서체 개발을 포기하게 될 것이다. 서체 개발에 대한 경제적 대가의 보장 및 저작권의 법적인 보호가 이루어져야 서체 개발이 활발히 이루어질 수 있다.

현재 널리 쓰이고 있는 20여가지의 사식용 서체들은 원저작자가 누구며 어디에 소유권이 있는지, 그 원도는 어떻게 구매할 수 있는지가 분명하지 않다. 또한 각 서체 전문 회사에서 보유하고 있는 서체도 창작품이라기보다는 기존의 사식용 서체를 여기 저기서 끌어모아 만든 것이 많다. 이러한 실정에서는 오히려 가장 기본이 되는 명조체와 고딕체의 원도를 공동으로 제작하여 싼 값에 널리 공급해 중복 투자를 막고, 앞으로 개발되는 신서체에 대해서는 저작권을 철저히 보호하는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 절실히 요구된다.

이와 함께 서체 상품의 원활한 유통을 위해 서체 보급센터와 같은 유통기구의 설립도 시급하다. 개발자들이 개발한 서체를 등록하고 수요자에게 공급하는 역할을 맡는 서체 보급센터는 제값에 사고파는 풍토를 조성하는 데 일조할 것이며, 이를 통해 서체 개발도 활발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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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임순범 개발담당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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