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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만 남부에 계곡모양으로 형성된 첨단 전자산업의 발원지 실리콘밸리. 그곳에는 오늘도 기술 하나로 일확천금을 꿈꾸는 엔지니어들이 몰려 들고 있다.
 

실리콘 밸리^멀리 샌프란시스코가 보이고, 그 아래로 스탠퍼드대학이 있는 팔로알토로로 부터 마운틴부 서니베일 쿠러티노 산타클라라를 거쳐 남쪽 관문 산호세에 이르는 폭 16km 길이 48km의 구역, 애플컴퓨터를 비롯해 휴렛팩커드 인텔 록히드 텐덤 AMD 등 4천여개 기업이 운집해 있고 미국 전자공업협회(AEA)본부가 위치해 명실상부한 전자산업의 메카다.


실리콘밸리(Silicon Valley)가 현대에 내디딘 거보도 실은 조그마한 파리(fly)의 발자국소리에서부터 시작됐다. 전자공학의 역사상 한 중요한 실험이 1906년 팔로알토(Palo Alto) 에머슨로 913번지에서 있었다. 후덥지근한 여름, 드포레스트와 동료 연구원들이 지켜 본 것은 백지 위를 걸어다니는 한 마리 파리였다. 파리가 걷는 소리는 드 포레스트와 그의 동료가 개발한 진공관의 증폭회로를 통해 2백20배나 증폭됐다.

파리의 걸음소리는 마치 나치군대의 분열행진에 비견할 만큼 거대한 소리로 들렸다. 지금도 당시 실험실로 사용됐던 팔로알토에 있는 초라한 집 앞에는 이런 비문이 새겨져 있다. '연방전신회사(AT&T)의 드 포레스트가 이곳에서 진공관 증폭회로를 발견했다'라고. 이 사건은 실리콘밸리라고 이름지워질 지역에서 성공한 최초의 성과였다.

로마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듯이 실리콘벨리 역시 한 나절에 완성된 것은 아니다. 실리콘밸리의 탄생에는 세계 최고의 대학인 스탠퍼드대학이라는 산파가 있었다. 또한 수많은 젊은 과학기술자를 훈련시켜 도처에 첨단산업을 전파시킨 쇼클레이라는 전자공학의 전도사가 있었다. 물론 실리콘밸리는 사람이 살기에 충분히 좋은 기후도 갖고 있다.

실리콘밸리는 어디에 있나. 그곳은 온통 땅바닥이 실리콘으로 끈적거리는 곳인가. 그곳은 아름다운 샌프란시스코만을 둘러싸고 있는 남부지역이다. 스탠퍼드대학에서 출발하여, 팔로알토 마운틴뷰 서니베일을 거쳐 산타클라라에 이르면 우리는 실리콘밸리의 중심에 와있게 된다. 우리가 익히 아는 인텔(Intel)사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그 근처에는 '역마차바퀴'라는 유명한 술집이 있는데, 주로 반도체기술자들이 모여 떠들며 술을 마신다고 한다. 첨단산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라도 가끔씩은 옛날의 마차바퀴가 그리워지나 보다. 산타클라라에서 더 내려가면 산호세(San Jose)라는 멕시코 냄새가 물씬 풍기는 지명의 도시가 있다. 1982년의 한 조사에 의하면 전체적으로는 3천5백개 가량의 기업이 실리콘밸리내에 있으며 그중 70%이상이 10명 이하의 조그마한 소프트웨어 하우스라고 한다. 모두들 제2, 제3의 애플신화를 꿈꾸면서 밤샘작업을 하고 있다.

터먼과 휴렛팩커드

실리콘밸리라는 매력적인 이름이 붙여진 것은 좀 늦은 1971년이었다. 반도체산업 전문정보지인 '마이크로 일렉트로닉스'의 편집자인 돈 C. 호플러가 바로 '실리콘밸리'라는 단어를 만들어 냈다. 사실 지형적으로 따지면 골짜기(valley)라고 부르기에 다소 문제가 있다. 호플러가 실리콘밸리라고 부르기 이전에는 '서해안 전자산업공단'이라든가 아니면 막연히 팔로알토 산타클라라 등으로만 불렀다. 하여튼 호플러의 신조어 덕택에 실리콘밸리는 더욱 유명해졌다. 전자기술을 배우기 위한 목적뿐만 아니라 관광지역으로도 알려지게 됐다. 아주 쓸만한 실리콘밸리의 지도를 처음으로 만든 것은 의아스럽게도 일본사람이었다. 1981년에 나온 일본판 실리콘밸리의 안내지도는 뒷골목까지 꼼꼼히 표기됐다.

스탠퍼드는 어떻게 실리콘밸리를 만들었을까. 1920년까지만 해도 스탠퍼드대학은 별 볼일 없는 서부의 조그만 사립대학이었다. 스탠퍼드가 창립된 것은 1891년이었다. 정확한 이름은 레런드 스탠퍼드 주니어대학이다. 사실 그 이름은 설립자인 스탠퍼드 상원의원부처의 아들이름이다. 불행히도 그는 그 대학 입학전 사고로 죽어버렸다.

1885년 스탠퍼드 상원의원은 가문의 전 재산인 2천만달러와 팔로알토 지역의 8천8백에이커 목장을 캠퍼스 부지로 기증했다. 이것이 발전의 토대였다.

스탠퍼드대학을 세계 최고의 대학으로 키우고 실리콘밸리의 어머니로 만든 사람은 프레드릭 터먼이라는 그 대학교수였다. 터먼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46년 스탠퍼드대학 공학부장이 되었다. 터먼은 어릴 때부터 일찍이 무선공학에 관심이 많았으며 이후 MIT의 전기공학 박사과정에 입학하게 된다. MIT에서 무사히 학위를 끝낸 터먼은 MIT의 강사가 되었다. 그러나 잠시 쉬러온 고향 팔로알토에서 결핵을 얻어 고생하다 결국 MIT를 사퇴하게 된다.

결핵에서 가까스로 회복한 터먼은 MIT보다 기후가 좋은 스탠퍼드대학의 교수가 되기를 원했다. 터먼의 인생관에 영향을 준 사람은 그의 지도교수였던 MIT의 부시교수였다. 부시는 항상 터먼에게 대학의 궁극적 목적은 연구개발센터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터먼이 실리콘밸리에 뿌린 최초의 씨앗은 휴렛팩커드(HP)사다. HP사는 창립자인 휴렛과 팩커드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졌다. 터먼은 자신의 대학으로 이 재능있는 두 청년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당시 가장 주목받는 분야중 하나인 '네거티브 피드백이론'을 주제로 휴렛의 석사논문을 완성시켰다.

휴렛과 팩커드는 그들의 차고작업실에서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이용해 발진기를 제작했다. 처음부터 운도 따랐다. 커다란 수주가 덩굴째 들어왔다. 월트 디즈니사로 부터 8대의 음향 발진기를 주문받았다. 그 발진기는 만화영화인 '판타지아'에 사용될 목적이었다. 이후 HP사는 발전을 거듭해 1942년에는 벌써 연간 매상고 1백만 달러에 이르는 회사가 됐다.

스탠퍼드의 비밀병기

1940년대에 스탠퍼드 대학은 경영위기에 봉착했다. 보다 유명한 교수를 초빙하기 위한 학교운영 자금이 바닥난 것이다. 그렇다고 기증된 토지인 8천8백에이커를 팔아서 그 돈을 조달할 수는 없었다. 애당초 기증자의 기증조건으로는 매각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터먼이 한가지 아이디어를 내놓았다. 땅을 빌려주고 그 대신 임대료를 받아 첨단 기술공업단지를 건설하자는 것이었다. 드디어 스탠퍼드 리서치 파크(Stanford Research Park)가 완성됐다. 연구실에서 만든 기술을 근처 기업에 팔고 기술이전을 하면서 땅장사와 기술장사를 동시에 하자는 것이었다. 싼 땅값과 기술이전이라는 매력적인 조건 때문에 기업들이 속속 몰려들기 시작했다.

터먼이 말한 '스탠퍼드의 비밀병기'가 서서히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제1호 진출기업은 배리언어소시에이트사였다. 이어 HP사가 리서치 파크내로 들어왔다. 터먼은 HP사로 하여금 리서치 파크에 들어오기를 망설이는 회사를 상대로 맹렬한 설득작업을 펴게 했다.

1970년까지 리서치 파크에는 70여개사가 입주했고 스탠퍼드대학은 토지임대에 따른 안정적인 수입을 얻을 수 있게 됐다. 토지임대의 선약금은 약 2천만달러였으며, 해마다 들어오는 수입은 6백만달러 정도였다. 현재까지 약 7백에이커의 땅이 임대돼 90여개 최첨단기업이 자리를 잡고 있다. 터먼은 땅을 마련하고 휴렛과 팩커드는 사람을 유인했다.

최근 MIT는 캠퍼스부지 부족 문제로 심각한 고통을 겪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스탠퍼드는 아직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도리어 확대일로에 있다.

쇼클레이사단의 세포분열

실리콘밸리의 탄생에 기술적으로 기여한 또 한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월리엄 쇼클레이라는 당대 최고의 물리학자였다. 쇼클레이는 일찍이 벨연구소의 터줏대감이었다. 인간의 역사는 석기시대에서 청동기시대를 거쳐 철기시대 그리고 다시금 석기시대로 돌아간다.

1947년 쇼클레이는 벨전화연구소에서 금세기를 다시금 석기시대로 진입하게 만든 인류 최대 발명품인 트랜지스터를 탄생시켰다. 물론 그 시대에 만들어진 트랜지스터는 같은 무게의 금보다도 비쌌지만. 최초로 상업용 트랜지스터가 나오게 된 것은 1952년이다. 이후 트랜지스터 응용기술은 급격히 진보했다.

1955년 쇼클레이 자신은 쇼클레이 반도체회사를 실리콘밸리안에 세우게 된다. 실리콘밸리에 최초의 상업용 반도체회사가 설립된 것이다. 이 소식을 접한 젊은 기술자들이 쇼클레이의 명성 아래 기꺼이 제자로 자청해 모인다. 거대한 쇼클레이 마피아가 태동하게 된 것이다.

1956년 봄, 쇼클레이가 노벨물리학상을 타는 사건을 계기로 쇼클레이 반도체회사는 절정에 다다르게 되지만 그것은 한순간에 불과했다. 쇼클레이 아래에서 한 수씩 배운 8명의 제자들은 상업적 성공을 원하여 하나 둘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수제자격인 봅 노이스는 페어차일드 반도체회사를 설립했다. 고든 무어도 노이스를 따라 나가버렸다. 진 호니는 아넬코사를 만들어 나갔다. 8명의 배신자를 향해 쇼클레이는 두고두고 분을 삭여야만 했다. 그러나 많은 제자들이 쇼클레이를 떠난 것은 자신들의 개인적 욕망뿐만 아니라 쇼클레이의 불같은 성격에도 원인이 있다. "쇼클레이와 같이 일하는 것은 바로 지옥 자체다"라고 터먼은 평했다. 여하튼 쇼클레이는 짧은 기간 동안에 8명의 사도들에게 기본적인 첨단기술과 사업을 가르쳤다. 이들의 배신으로 쇼클레이 반도체회사는 다른 자본가에게로 넘겨지고 결국 사라졌다. 이창호가 조훈현에게서 떠나듯이, 8명의 사도는 제각기 조금씩 다른 방법으로 새로운 반도체를 생산해내기 시작했다.

특히 진 호니에 의한 프레이너형 생산공정은 트랜지스터 생산확대에 전기를 마련했다. 이 기술은 이후 LSI(대규모 집적회로)의 기본의 되는 MOS전계 효과형 트랜지스터개발로 이어지게 된다. 노벨상을 수상했지만 지나친 금전욕과 가혹한 훈련방식으로 인해 쇼클레이는 파산했다.

1970년 쇼클레이는 '모든 인종은 유전적으로 차이가 있으며 다같이 진화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신념을 발표했다. 나치시대의 표어같은 자신의 신념을 실천이라도 하듯이 그는 캘리포니아주 에스컨디드에 있는 정자은행에 자신의 정자를 기증했고 이 사실을 공개적으로 표명했다. 사방에서 비난의 소리가 터져 나왔고 이같은 극우적인 성향으로 인해서 그의 찬연한 과학적 업적은 가려져 버렸다.
 

쇼클레이사단^1956년 노벨상을 수상한 쇼클레이를 축하하는 그의 부하들. 테이블 정면에 앉은 사람이 쇼클레이교수이고 그 오른쪽에 잔을 들고 서있는 사람이 수제자격인 봅 노이스. 쇼클레이 반도체회사는 이 무렵 전성기를 구가한다. 그의 부하들은 이후 모두 쇼클레이르 배신하고 실리콘밸리에 여러 반도체회사를 설립해 흩어져갔다.


마이크로 황금시대 개막

쇼클레이의 수제자인 노이스는 1926년 아이오와주의 작은 마을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던 그가 필코사에서 쇼클레이 반도체연구소로 옮겨온 것은 1955년. 약관 28세의 물리학자인 노이스는 그곳에서 약 1년간 머물렀다. 이후 페어차일드로 분가해나간 노이스는 집적회로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보다 조금 앞서 텍사스 인스트루먼트사(TI)의 잭 킬비 역시 같은 아이디어로 집적회로에 대한 특허신청을 내놓았다. 이것을 몰랐던 노이스는 똑같은 특허신청을 냈고, 두 회사는 특허권 분쟁으로 몇년간 법정을 들락거려야 했다. 발명은 거의 동시라고 할 수 있었지만 IC회로에 대한 모든 영예는 킬비에게 돌아갔다.

노이스는 페어차일드를 나와서 두번째 회사인 인텔사를 설립했다. 인텔사의 설립자금은 전설적인 모험자본가 아서 록에 의해서 마련됐다. 아서 록은 노이스의 부탁을 받은 뒤 몇군데 전화를 걸어 30분만에 무려 2백50만달러를 모았다.

트랜지스터 집적회로에 이어 마이크로프로세서가 E. 호프 주니어박사에 의해서 개발됐다. 호프박사는 스탠퍼드대학에서 트랜지스터이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68년 어느날 노이스는 스탠퍼드 대학으로 가서 역량있는 연구원을 찾았다. 대학당국에서 호프를 추천했고, 호프는 인텔에 입사하게 됐다.

인텔에 입사한 호프는 일본에서 설계한 계산기의 내부구조가 지나치게 복잡한 것을 보고 개선방안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모든 중앙처리장치 기능을 단일소자에 집중시키자는 혁신적인 생각이 호프의 머리에 떠올랐다. 1960년대 말 노이스는 한 강연회에서 "멀지않아 한 소자위에 컴퓨터가 실리는 시대가 온다'고 예언했다.

드디어 1971년 호프가 페어차일드사에서 옮겨온 피데리코 파진과 함께 설계를 완성해 인텔4004라는 세계 최초의 마이크로프로세서가 등장했다. 4004는 인텔의 기관지인 '일렉트로닉 뉴스'에 의해서 대대적으로 선전됐다. 칩 하나에 프로그램과 CPU가 동시에 들어간다는 선전문안은 대단히 매혹적인 것이었다. 마치 포켓에 자동차를 넣을 수 있다는 선전을 보는 기분을 다들 느꼈을 것이다.

실제 1971년 라스베가스에서 열린 컴덱스쇼에서 사람들은 그 결과를 눈으로 보면서도 잘 믿으려 들지 않았다. 다들 "이것이 컴퓨터이긴 한데…"하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 이유는 4004가 워낙 혁신적인 발명품이기도 했지만 첨단산업계에 만연된 뻥튀기 선전에 구매자들이 많이 속아 왔기 때문이다.

연이어 출하된 인텔 8080은 몇년동안 선풍적인 인기를 끈 마이크로 프로세서가 되었다. "어쨌든 많이 팔렸다." 호프는 8080의 성공을 이렇게 무덤덤하게 설명했다. 8080의 등장은 바야흐로 마이크로 황금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컴퓨터와 다른 기기들의 결합이 시작된 것이다. 그 원인은 1개당 2달러 50센트 밖에 하지 않는 8080의 가격에 기인한다.

반도체 산업에서 인텔이 차지한 위치는 해마다 흔들렸다. 그리고 1983년 호프는 인텔을 버리고 게임 프로그램으로 유명한 아타리(Atari)사로 옮겨갔다. 실리콘밸리에서 기업의 합병과 분열은 단세포들의 운동만큼이나 활발하고, 그것은 이미 예사로운 일이 돼버렸다. 그리고 그 경쟁은 월드시리즈의 프로야구만큼이나 엎치락뒤치락했다.

실리콘밸리의 창세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벨연구소는 쇼클레이 반도체회사를 낳고, 쇼클레이 반도체회사는 페어차일드를 낳고, 페어차일드는 내셔널 세미컨덕터 인텔 AMD를 낳고…. 이렇게 하여 실리콘밸리의 계보가 형성된 것이다. 땅을 제공한 터먼과 열매를 제공한 쇼클레이는 각각 이브와 아담에 해당될 것이다.
 

「산업의 쌀」로 불리는 반도체산업은 실리콘밸리에서 발원돼 꽃을 피웠다. 그러나 최근 일본 기업들의 거센 도전으로 「실리콘밸리의 영화」는 흔들리고 있는데...


미국 자본주의 최대의 작품

실리콘밸리를 성공적으로 이끈 요인으로 스탠퍼드대학과 온난한 기후외에 한가지 중요한 것이 더 있다. 그것은 바로 막대한 군사자금의 유입이다. 1965년 록히드 항공회사의 주력부문이 이곳으로 이사를 왔다. 국방부에서 구매하는 반도체의 약40%가 한때 여기서 구입됐다.

특히 1960년대 아폴로 계획에 의한 NASA로 부터의 막대한 연구자금지원은 전자분야 첨단기업의 성장을 크게 촉진시켰다. 또 미소간의 냉전체제 심화가 군수산업을 크게 확장했다. 예를 들어 미니트맨 미사일 개발은 페어차일드사 부상의 받침대가 되었다. 군산(軍產)복합체와 최고의 대학연구진이 더하여 탄생된 실리콘밸리는 미국자본주의가 빚어낸 최고의 작품이었다. 또한 자유로운 이직(30%)과 탄탄한 경쟁체제는 많은 기업을 도산시키기도 하지만 도리어 자체 시스템을 안정시켜주는 역할을 했다. 즉 하나의 완전한 생태계가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지구상에 낙원은 없듯이 실리콘밸리에도 그 첨단문화 아래에는 엄연한 갈등구조가 놓여 있다. 국제적인 스파이조직, 뿌리 뽑히지 않는 암시장, 미소간의 소비적인 감시체계 등 여러가지 문제가 산적해 있다. 특히 항시 매스컴을 타는 10% 미만 고급기술자의 그늘에는 시간당 4달러 안팎의 임금으로 일하는 제3세계 출신의 노동자들이 있다. 특히 주류를 이루는 스페인계 이민들의 생활은 '첨단의 가난'을 달린다.

실리콘밸리의 사장들이 두려워 하는 것은 일본이다. 그러나 일본보다 더 두려운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노동조합이라고 이야기한다. 쌀 한톨에도 농민의 땀이 서려있듯이 산업의 쌀인 실리콘 칩에도 제3세계의 수많은 근로여성의 땀과 눈물이 서려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하겠다.

1991년 09월 과학동아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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