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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 유역에서 화산폭발?

용암분출시킨 화구도 발견돼

임진강과 한탄강을 따라 발달해 있는 두께가 수십m에 달하는 용암대지는 화산활동의 증거다.

한반도에 사람이 처음 들어와 살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 일까. 인류는 지금으로부터 약 5백만년 전 아프리카에서 처음 등장했으며, 이 최초의 인류는 오스트랄로 피테쿠스라고 불린다. 그런데 인간이 지구의 각지에 퍼져 살기 시작한 것은 최초의 인류가 등장하고 수백만년의 시간이 흐른 다음의 일이었다.

인간이 아프리카를 벗어난 것은 약 1백70만년 전,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가 등장한 이후였고 아메리카대륙과 오스트레일리아로 인간이 건너간 것은 불과 수만년 전이었다. 다시 말해 현대인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Homo sapiens sapiens)가 등장한 다음의 일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인류의 진화와 확산의 역사에서 한반도는 어느 때부터 그 무대가 되었을까. 아마도 이 글을 읽는 많은 독자들 중에서도 이러한 의문을 품어 보았던 적이 있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현재 중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는 한반도에 인간이 등장한 것은 구석기시대 전기인 70만년 전부터라고 기술돼 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학계 성원 모두의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으며, 실제로 한반도에 처음 사람이 살기 시작한 때에 대한 자신있는 해답은 아직 얻어지지 않고 있다.

구석기시대에 대한 고고학적 연구는 지질학 지형학 고생물학 고생태학 토양학 해양학 등 수많은 순수과학분야와의 공동연구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공동연구가 요구되는 것은 구석기시대 동안 흔히 빙하기와 간빙기라 불리는 시기가 반복되면서 오늘날에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엄청난 격변을 겪었기 때문이다.

즉 구석기시대가 지질학에서 신생대 제3기 및 제4기 플라이스토세(Pleistocene)라 불리는 동안에 펼쳐졌기 때문에 구석기 고고학 자료의 연대와 당시 인간의 활동양상은 유적과 유적 주변의 자연현상을 각종 자연과학분야의 방법론을 활용, 면밀하게 관찰하고 분석해야만 그 윤곽을 이해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이러한 연구는 우리나라에서 아직 본 격화되지 못하고 있다. 비록 일부 유적의 나이가 70만년 전, 50만년 전 혹은 30만년 전이라고 주장되지만 그러한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는 제시되지 않았다.
 

선캄브리아기의 기반암을 덮고 있는 용암. 베개모양과 닮았다고 해서 침상용암(枕狀, Pillow lava)이라고 불리는 용암덩어리를 임진강 유역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이런 형태의 용암은 뜨거운 용암이 물속에서 급히 식을 때 만들어진다.
 

구석기유적의 보고

그런데 그러한 종합적 연구가 제법 잘 이뤄져 유적의 나이와 당시의 환경과 생활상 등이 어느 정도 밝혀진 곳이 있다. 임진강 유역의 여러 구석기유적이다. 1978년에 처음으로 알려진 이래, 수많은 유적이 발견된 임진강 유역은 가히 구석기유적의 보고인 것이다.

만약 이 글을 읽는 독자중 문산에서 조금 동쪽에 있는 장파리란 곳에서 시작해 임진강과 한탄강을 따라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 보았던 사람이 있다면, 필경 이곳의 지형은 우리나라의 다른 강변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고 느꼈을 것이다.

임진강의 상류인 한탄강과 임진강 하류를 따라서 강물은 밋밋하고 평탄하게 펼쳐진 용암대지에서 수십m 절벽 아래를 굽이쳐 흐르고 있다.

강안에 노출된 검은 색조의 현무암 절벽 위로는 다시 밝고 붉은 색조의 두꺼운 토양층이 쌓여 있고, 사람들은 이 절벽 위의 평탄한 대지에 터전을 이루며 살고 있다.

임진강 유역의 이러한 지형은 단구(terrace)라 불리는 지형의 일종이다. 이곳에 단구지형이 발달한 것은 이 지역이 겪은 매우 흥미있는 지질학적 역사 때문이다.

까마득한 과거에 이곳에서 인간이 살았다는 증거인 구석기들이 용암대지 위에 쌓인 두꺼운 퇴적층 속에서 풍부하게 발견되고 있다. 여기에서는 구석기 중에서도 전문용어로 주먹도끼(handaxe) 가로날도끼(cleaver)라고 불리는 정교하고 독특한 형태의 도구들이 발굴됐다. 이들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도의 동쪽 지역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던 것이었다. 한탄강변의 전곡리 유적을 필두로 임진강 유역에서 이들이 다량 발굴됨에 따라 인류진화사의 내용중 일부를 바꾸어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한마디로 이제 이 지역은 한국 뿐만 아니라 세계 구석기고고학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판구조론과 추가령지구대

임진강 유역의 구석기시대에 대한 고고학적 해석은 먼저 하필이면 왜 여기에서 그렇게 풍부한 자료가 존재하는가에 대한 문제의 해명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곳에서 사람이 살고 있었던 때에는 한반도의 다른 지역에서도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다른 지역에서는 구석기 자료가 매우 낮은 빈도와 밀도로 발견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모든 고고학 유적은 크게 세단계를 거쳐 오늘에 이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첫 단계는 사람들이 사용하던 물건을 버리는 폐기의 단계다. 다음으로는 폐기된 유물이 흙 속에 묻히는 단계이고, 마지막으로는 유물이 퇴적층 속에서 보존되고 변형되는 단계다. 임진강 유역은 이 일대의 독특한 지질학적 조건 덕분에 두번째와 세번째 단계가 진행되기에 매우 훌륭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래서 수많은 유적들이 오늘날까지 살아 남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유적의 형성과 보존에 좋은 여건을 마련한 그러한 지질학적 조건이란 무엇일까. 이에 대한 해답은 이 지역에 구석기시대인들이 살았던 때의 지질학적 고찰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지구상에 등장한 때보다도 훨씬 더 까마득히 거슬러 올라간, 중생대 이후의 그 일대 지사(地史)를 생각할 때에만 얻어진다.

임진강과 그 지류를 이루는 한탄강 유역은 흔히 추가령지구대라고 불리는, 한반도 중부의 특수지형의 일부를 이루는 곳이다. 추가령지구대란 서울과 원산을 북북동-남남서 방향으로 잇는 계곡형태의 지형을 가리키는데, 임진강 유역의 지사와 구석기유적의 형성은 바로 이 추가령지구대의 발달과정과 밀접하게 관계된다. 추가령지구대의 정확한 형성원인과 과정은 아직 계속 논의되고 있으며, 그 수수께끼가 다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임진강 유역의 지사에 얽힌 의문중 몇몇은 밝혀졌다.

이러한 연구성과를 토대로 이 지역에 고고학적 현상이 풍부하게 남아 있게 된 이유를 살펴보자.

임진강 유역은 원래 선캄브리아기에 형성된 변성암지대였으며, 그후에도 적어도 십수 억년 동안 별반 큰 지질운동의 영향을 받지 않았던 안정된 곳이었다. 그러나 중생대 말기에 안정된 상태가 깨지면서 이 일대에서는 활발한 지질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약 9천만년 전 이 일대에서는 크고 작은 규모의 단층운동과 화산활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화산활동의 결과, 오늘날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 서쪽에는 용암대지보다도 높이가 5백~6백m나 높은 암석화된 화산재(응회암)의 산지가 솟아 있으며, 곳곳에서 이 시대의 용암덩어리가 발견되고 있다. 이러한 지각운동의 원인은 여러 각도에서 설명되고 있지만 당시 전지구적 규모로 전개됐던 판구조운동과 관계있다는 입장이 유력하다. 아무튼 이 중생대 말의 지각운동에 대한 해명이야말로 추가령지구대의 형성과정을 시원하게 밝혀주는 열쇠가 될 것이다.

용암댐이 생기고

그런데 고고학자에게 중요한 사실은 중생 대 이후 이 지역이 지질구조적으로 매우 취약한 곳이 되었다는 점이다. 즉 이 일대는 중생대 이후 약간의 지질영력의 작용에 의해서도 화산과 단층활동이 일어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이 점이 임진강 유역에서 풍부한 구석기유적을 발견할 수 있게 된 지질학적 배경이 된다.

중생대 말에 수백만년 동안 또는 2천만~3천만년 동안 계속됐던 활발한 지각운동의 종식 이후 신생대 말에 이르는 오랜 세월 동안 이곳에서 특별히 새로운 지질운동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그 대신 활발한 침식운동으로 지형이 다듬어져 왔다. 이러한 침식운동으로 오늘날의 임진강 수계망의 원형이 형성된 것이다. 이렇게 수천만년 동안 이 일대의 지형을 깎고 다듬은 고하천의 활동흔적은 최대 수십m에 달하는 두꺼운 모래와 자갈층의 모습으로, 임진강 유역 곳곳에 남아 있다.

장기간의 휴지기를 거친 뒤 신생대 제3기 말부터 이 일대의 취약한 지각은 다시 지질운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신생대의 지각운동은 용암분출과 같은 화산활동의 형식으로 일어났는데, 연대측정 결과 신생대 말의 첫 화산활동은 대략 2백90만년 전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이 당시의 화산활동은 소규모였고, 그후 2백40만~2백50만년 동안 새로운 화산의 분출은 없었다.

그러나 제4기 플라이스토세의 중기에 들어오면서 다시 대규모 화산활동이 재개됐다. 오늘날 한탄강과 임진강을 따라 발달해 있는 두께가 수십m에 달하는 현무암으로 구성된 용암대지가 바로 이 플라이스토세의 화산활동 결과다.

용암대지의 형성을 가져온 플라이스토세의 용암분출은 지금으로부터 40만~50만년 전에 시작돼 그후 수십만년 동안 간헐적으로 계속됐다. 당시에 용암을 분출했던 화구는 인공위성자료 및 기타 자료의 판독에 따르면 휴전선 이북에 위치한 평강의 북쪽에 있는 압산이라고 추측된다. 압산이 모두 몇 차례나 폭발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용암은 최소한 여섯차례 이상 흘러 내렸다.

이러한 용암대지의 형성과 고고학 유적의 형성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 여기에서 독자들은 신생대 말에 용암이 분출하기 이전에 오늘날의 임진강 수계망의 원형이 이미 형성 돼 있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압산에서 분출된 용암은 결국 하곡을 메우며 흘러내렸는데, 이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몇가지 일이 발생했다.

용암이 계곡을 메우는 과정에 있을 때에는 강물의 흐름이 일시적으로 정지됐을 테지만, 일단 용암대지가 형성되고 난 다음에는 강물이 대지 위를 흐르게 되었다. 그런데 이 용암대지라는 새로운 하상면을 따라 흘렀던 강은 하상(河床)의 평탄함과 낮은 경사도로 인해 용암분출 이전의 하천과는 사뭇 다른 양식으로 운동할 수 밖에 없었다.

즉 하천은 더 이상 하나의 큰 수로를 형성하며 흐를 수 없었고 수많은 소규모 개천이 복잡하게 얽힌 형태로 흐르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유속과 운동량을 크게 감소시켰다. 이와 더불어 새로운 하상면의 투수성(透水性)이 상대적으로 매우 낮아졌다는 점은 그 이전까지 임진강 하계망의 하천운동을 특징짓던 침식운동 대신 퇴적운동의 활성화를 가져왔다. 이로써 용암대지 위에는 두꺼운 퇴적층이 쌓이기 시작했다.

한편 용암의 분출로 비록 용암대지에 연접한 계곡이 직접 용암으로 메워지지는 않았지만, 이들 역시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 즉 하천과 하천이 만나는 지점 부근에서 형성된 용암대지는 강물의 흐름을 가로막는 지형적 장애물이 되었다(이것을 용암댐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물의 흐름이 정지돼 과거의 하천유역은 호수로 바뀌게 된다. 하천의 흐름은 용암댐에 방출구가 형성되거나 혹은 장기간에 걸친 호수 바닥면의 퇴적으로 호상(湖床)면이 용암댐의 고도 이상이 되었을 때 재개된다.

물론 임진강 유역에서도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포천 부근에서 하천을 따라 하류인 백의리에 이르는 넓은 계곡은 한때 거대한 호수를 이루고 있었다. 이 밖에도 크고 작은 호수가 오늘날의 용암대지의 주변부에 형성됐다.
 

용암댐으로 형성된 호수 바닥에 쌓인 퇴적층
 

늦게 시작된 임진강의 구석기시대

임진강 유역에 구석기를 남긴 고인류는 용암분출로 인해 지형을 비롯한 각종 생태적 조건이 엄청나게 바뀐 다음에 이 지역에 들어와 살기 시작했다. 토양층에 대한 각종 분석과 호수퇴적층에 포함된 꽃가루의 분석결과는 고인류가 살았던 시기가 빙하기였음을 말해준다. 또 임진강 주변의 연평균기온이 오늘날의 개마고원에 비견될 정도로 매우 추웠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들이 살았던 당시의 용암대지는 천혜의 자연조건을 갖춘 곳이었다. 그들은 대지 위의 얕은 하천과 주위의 호수에서 각종 동식물자원을 얼마든지 풍부하게 획득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남긴 유물은 왕성한 퇴적운동 덕분에 잘 보존돼 있다.

한편 용암대지를 이루는 현무암은 수직으로 매우 쉽게 쪼개지는 특징을 가진 암석이다. 이러한 암석학적 특징때문에 용암대지의 가장자리, 즉 신생대의 현무암과 신생대 이전에 형성된 보다 단단한 기반암의 접합부는 집중적인 하방침식을 받게 되었다. 그 결과 어느 때부턴가 이러한 접합부를 따라 다시 서서히 수로가 뚫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일단 대지주변부에 수로가 형성된 다음부터, 현무암괴(塊)는 급속히 침식되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 깊은 수직계곡이 하천을 따라 형성됐다. 이러한 하천 발달과정을 거친 결과, 대지 위에 퇴적된 구석기 유물의 상당량은 그 이후의 해수면 변동 및 그로 인한 하상면 고도와 하천운동량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남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인간이 들어와 살기 시작 한 것은 언제 쯤일까. 다시 말해 임진강 유역에서 발굴한 구석기유물의 나이는 얼마나 된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그 유물의 형태가 유럽이나 아프리카의 20만~30만년 전 쯤의 유물과 비슷하므로 이들 역시 그 정도로 오래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유물이 포함된 퇴적층의 연대측정 결과는 고인류가 임진강 유역에 등장한 시기가 대략 4만~5만년 전일 것임을 가리켜 주었다.

이러한 분석결과는 매우 놀라운 것이다. 왜냐하면 이 시기가 되면 일반적으로 주먹도끼나 가로날도끼 등과 같은 고졸한 형식의 도구들은 거의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은 고고학자들에게 새로운 과제를 던져주고 있다. 왜 이렇게 '늦은' 시기까지도 그들은 그토록 오래된 생활방식을 유지 했으며 또 할 수 있었던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한 해명이 현재 고고학계의 주요한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다.
 

임진강 유역에서 발굴된 구석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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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08월 과학동아 정보

  • 이선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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