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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론을 바꾼 역사 뒤편의 영웅들


‘일반상대성이론의 우주론적 고찰’. 1917년 아인슈타인이 발표한 논문이다. 우주의 탄생과 변화를 일반상대성이론으로 밝힐 수 있다는 점을 처음 발견한 순간이다. 아인슈타인 자신은 비록 풀이를 찾아내지 못했지만, 프리드만, 드지터, 톨만, 로버트슨, 월커 등 과학자들이 1920~1930년대에 걸쳐 풀이를 상세히 밝혀냈다. 상대론적 우주론이 본격적으로 모습을 갖추기 위해선 중력장 방정식의 수학적 풀이를 넘어 관측이 뒷받침돼야 했다. 여기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사람이 에드윈 허블이다. 우주론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법칙 중 하나인 ‘허블의 법칙’을 발견한 사람으로, 허블망원경을 비롯해 허블상수, 허블시간 등 곳곳에 이름이 붙어있다. 하지만 우주론의 거대한 성과를 이뤄내기 위해선 많은 덜 유명한 사람들의 노력이 모여야 했다.
 

뜨거운 팽창우주론 처음 밝힌 르메트르

허블은 미국 윌슨산에 있는 천체 망원경으로 은하의 운동을 관찰하다가 1929년 은하의 빨강치우침(적색편이)을 발견했다. 빨강치우침은 멀리 있는 은하일수록 관측결과가 더 빨간 빛으로 치우치는 현상을 말한다. 지구에서 멀리 떨어진 천체일수록 더 빨리 멀어진다(드지터 효과)는 걸 의미하는데, 우주가 팽창한다는 증거다. 허블은 자신이 찾아낸 외부은하 46개의 속도측정값을 논문으로 발표하며 팽창우주론의 개척자가 됐다.

헌데 사실 허블보다 2년 앞서 팽창우주론을 이론으로 증명한 사람이 있다. 벨기에 사제였던 조르주 르메트르다. 그는 일반상대성이론을 풀어 팽창하는 우주를 나타내는 풀이를 제시했다. 당시 발표한 논문을 보면 이론에서 드지터 효과를 유도했고, 심지어 나중에 ‘허블상수’로 이름 붙은 비례상수도 비교적 정확히 계산해 놨다.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추측도 적혀 있다. 허블이 이뤘다고 알려진 업적 중 상당수를 이미 2년 전에 발견한 셈이다.

아인슈타인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1927년 벨기에 솔베이에서 열린 학술회의에 참석했다가 르메트르의 강연을 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아인슈타인은 “계산은 옳지만 물리학은 형편없다”는 혹독한 평가를 내렸다. 르메트르가 1927년 ‘브뤼셀 과학 학술원 연보’에 발표한 프랑스어 논문은 학계의 주목을 끌지 못했다. 그는 이후 조용히 사제로 살아갔다.

조르주 르메트르는 우주론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지만, 그 업적을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반면 허블은 당시 천문학계의 스타였고(Inside 참조) 언론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인지도 면에서 시골사제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1931년 르메트르 논문의 중요성을 인정한 영국왕립천문학회는 논문을 영어로 번역하면서 허블상수, 우주팽창에 대한 추측을 담은 구절을 송두리째 빼 버렸다. 학회는 왜 논문을 검열했던 걸까. 역사의 미스터리다.


팽창우주를 관측으로 확인한 휴메이슨

허블은 1936년과 1937년 자신의 연구를 책으로 발표하면서도 르메트르를 전혀 인용하지 않고 있다. 당시엔 르메트르가 학계에 널리 알려진 뒤였는데도 말이다. 허블이 공로를 전혀 인정하지 않은 과학자가 또 있다. 그와 함께 관측을 했던 윌슨산 천문대 직원, 밀턴 휴메이슨이다. 휴메이슨은 14살 때 학교를 그만두고 이후 정식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미국 로스앤젤레114스 윌슨산 정상에 천문대가 새로 생길 때 건축자재를 나르는 노새를 부리기 위해 고용됐다. 나중에 천문대의 청소부가 됐는데, 어깨 너머로 배운 천문관측 기술이 놀라웠다. 이를 알아챈 윌슨산 천문대장 조지 헤일은 여러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휴메이슨을 ‘야간조교’라는 과학담당 전문직원으로 승진시켰다. “윌슨산 천문대의 망원경은 휴메이슨의 손길이 없으면 작동하지 않는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휴메이슨은 탁월한 관측천문학자였다. 휴메이슨은 은하 620여 개의 사선방향 속도를 정확히 관찰해 측정했다. 휴메이슨의 도움이 없었다면, ‘허블의 법칙’은 나오기 힘들었다. 하지만 고상한 척 영국 억양을 흉내 내며 천문대에서도 승마복과 승마신발을 신고 다니던 허블은 자신의 가장 중요한 동료를 언제나 무시하며 천대했다.


빅뱅이론의 원조 앨퍼와 허먼

르메트르는 최초로 ‘뜨거운 우주 탄생 모형’을 제안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를 출발점으로 삼아 게오르기 가모프는 태초의 우주가 매우 뜨겁고 밀도가 높았다는 ‘빅뱅이론’을 만들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만드는 데 참여했다. 많은 사람들이 가모프가 빅뱅이론을 완성했다고 알고 있지만 1946년 당시 가모프는 실제 물질이 발생하는 원리를 구체적인 이론으로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가모프의 제자 랠프 앨퍼와 로버트 허먼이었다.

랠프 앨퍼는 15살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MIT 입학허가와 장학금까지 받은 수재였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아마도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취소되면서 16살부터 직업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학업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은 앨퍼는 조지워싱턴대 야간학부를 다니면서 물리학을 공부했다. 그는 르메트르의 논문을 읽으며 우주탄생에 대한 궁금증을 키워나갔다. 가모프는 자신에게 부족한 수학적 능력과 집요한 탐구력을 가진 앨퍼를 만나 기뻤다. 앨퍼는 가모프 밑에서 박사학위논문 주제로 우주의 핵생성을 택하고 동료 로버트 허먼과 공동연구에 들어갔다.

1948년 4월 앨퍼의 학위논문 공개심사에는 이례적으로 기자들을 포함해 청중 300여 명이 모여들었다. 그런데 가모프는 납득하기 힘든 일을 저질렀다. 심사를 하기도 전에 미국물리학회 회보에 앨퍼의 동의를 얻지 않고 논문을 투고해 버린 것이다. 게다가 연구에 전혀 참여하지 않은 자신의 친구 한스 베테를 중간 저자로 넣었는데, 이는 순전히 세 사람의 이름(Alpher-Bethe-Gamow)이 그리스어 첫 세 문자, 알파-베타-감마와 유사하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로버트 허먼은 알파(α)-베타(β)-감마(γ)의 말장난에 안 맞는다는 이유로 논문의 저자에서 빠지고 말았다.

앨퍼와 허먼으로서는 무척 화가 나는 일이었지만, 이 주제로 박사학위를 줄 수 있는 유일한 교수가 바로 가모프였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실상 우주 핵생성 문제를 푸는 데 가모프는 거의 도움을 주지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빅뱅이론을 말할 때 가모프를 이야기하지 앨퍼와 허먼의 이름은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프레드 호일과 대적할 수 있을 만큼 저명했던 가모프만이 빅뱅이론의 대변자인 것처럼 여겨지게 된 것은 또 다른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1993년 미국국립학술원이 뒤늦게 앨퍼와 허먼에게 헨리 드레이퍼 상을 수여하면서 “우주의 진화에 대한 물리적 모형을 발전시키기고 우주배경복사의 존재를 예측”한 공로를 치하했지만 말이다.
 



함께 만들어가는 과학의 길

역사는 언제나 최고만을 기억한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역사의 기억이 왜곡돼 있는 경우도 적지 않다. 일반상대성이론의 역사에서도 왜곡이 제법 심각하다. 새삼 덜 알려진 역사를 들춰낸다고 해서 널리 알려진 유명한 사람들의 업적이 깎이는 것은 아니다. 다만 과학 연구가 혼자서 외롭게 역경을 딛고 나아가는 천재들의 영웅담인양 생각하는 것은 과학에 대한 올바른 관점이 아니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수많은 사람들의 땀과 노력으로 한 걸음 한 걸음 어려운 걸음을 디디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과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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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8월 과학동아 정보

  • 김재영
  • 에디터

    변지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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