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수사의 '감초'라 일컬어지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일선수사관의 활동을 가능케하는 수사의 핵심부다.
살인 강도 강간 유괴 사기…. 하루가 멀다하고 우리를 놀라게 하는 강력사건이 터지고 범인은 체포된다. 고전적인 '육감수사'로는 미궁에 빠질지도 모르는 이들 사건의 해결 뒤에는 현대수사의 첨병 국립과학수사연구소가 있다.
범죄와 관련된 각종 증거물을 감정하기 위해 정부가 내무부 산하에 세운 국내 유일의 수사감정기관인 국립과학수사연구소(소장 윤중진). 업무의 성격상 경찰과 뗄 수 없는 관계이긴하지만 시끌벅적한 경찰서와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강서구 신월동 경인고속도로변에 위치한 이 연구소는 인근 김포공항으로 오가는 비행기의 간헐적인 진동소음을 예외로 한다면 국내 어느 연구소에도 뒤지지않는 차분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1909년 법무국 행형과에 지문계가 처음 설치된 것이 효시다. 그후 계속 규모가 커져 지금은 법의학과와 이화학과, 그리고 이들의 감정업무를 지원하는 서무과의 7개과 26실을 갖추고 있다. 현재 지문이나 족흔(足痕)에 관한 업무는 치안본부 감식과가 맡고 그외 범죄와 관련된 모든 감정은 이곳에서 담당한다.
법의학과는 의학적인 지식을 동원해 부검 업무를 담당하는 1과와 법의학 관련학문을 이용해 범죄현장에서 수거된 각종 증거물을 분석 감정하는 2과로 나뉜다. 범죄 심리학이나 거짓말 탐지도 이 부서의 몫.
네개과로 나뉜 이화학과에서는 범죄와 관련된 다양한 의약품 화학약품 마약 총기화약의 분석과 함께 성문(聲紋)감정 필적감정 등을 맡고 있다.
과학수사연구소가 처리한 감정건수는 작년 한해만 해도 4만여건. 사회변화의 속도만큼이나 범죄의 내용과 유형이 복잡해져 과거와 같은 주먹구구식 수사로는 공소유지에 필요한 증거확보가 어려운 상태다.
연구소의 한 관계자는 날로 커지는 과학수사연구소의 중요성을 이렇게 말한다. "요즘의 범죄는 우발범죄보다는 계획범죄가 많아 증거가 될만한 흔적을 남기지 않습니다. 갈수록 범죄기법이 치밀해진다는 얘기죠. 이런 범죄에 대처하기 위해선 감정의 전문화가 필수적입니다."
시체는 말한다
과학수사연구소의 활동중 검시는 가장 기본이 되는 업무. 검시를 통해 사인(死因)은 물론 사망시간, 범행에 사용된 흉기의 종류 등 사체에 대한 이른바 '범죄의 개입성'을 밝혀낼 수 있다. 독약을 먹여 살해한 후 뺑소니 사고로 위장해도 검시는 죽은 자의 진실을 밝히는 열쇠가 돼 정확한 사인을 밝혀준다.
검시는 사망자에 대한 기초자료를 토대로 외표검사만 행하는 '검안(檢眼)'과 직접 사체 내부의 장기를 조사하는 '부검'(剖檢)으로 나뉜다. 사인판명과 함께 피살자가 언제 죽었는지를 밝혀내는 일은 용의자의 알리바이와 밀접한 관계가 있어 매우 중요하다. 시체는 초기에 일어나는 변화로 온몸에 반점(斑點)이 생기고 체온이 내려가며 몸이 굳어지는 현상을 보인다. 이같은 요인을 토대로 전문가들은 피살자의 사망시간을 추정한다. 사인, 사망장소, 사망당시 입고 있던 옷 등의 변수에 따라 차이가 있긴 하지만 대체로 손발과 얼굴에서 찬 기운이 감돌면 사망한지 1,2시간, 옷 표면까지 찬 기운이 느껴지면 4,5시간이 경과한 것으로 본다. 또한 시체에 나타난 상처를 조사해 어떤 흉기로 몇번이나 공격을 받았는지는 물론 가해자의 평소 습관까지 밝힐 수 있다고 한다. '시체는 말한다'라는 법의학계의 경구는 이와 같은 검시의 위력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미국이나 영국 일본 등 수사선진국에 비하면 한세대 뒤졌다고 얘기되던 우리나라의 과학수사수준도 80년대에 들어 각종 과학장비가 도입되면서 눈에 띄게 발전했다. 89년 트리폴리에서 일어난 KAL기 추락사고의 유해 판정은 그 좋은 예. 당시 사망자 유해 대부분은 사고직후 심하게 불에 타 신원파악이 어려운 상태였다. 서울로 운구된 이들의 유해는 과학수사연구소의 모든 첨단장비가 동원돼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지난 88년 12월 경기도 화성군의 한 야산에서 뼈만 남은 시체 한 구가 발견됐다. 이 지역에서 연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부녀자 살인사건으로 가뜩이나 긴장하고있던 경찰은 느닷없이 발견된 백골의 신원조차 파악할 수 없어 전전긍긍했다. 이때 연구소는 슈퍼임포즈(Superimpose)란 첨단과학장비를 이용, 피살자의 신원확인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했다. 슈퍼임포즈는 과학수사연구소가 최근 범죄수사뿐만 아니라 홍수에 떠내려간 무덤들의 유골 신원파악에까지 광범위하게 이용하고 있는 첨단장비로 두개골과 생시의 사진을 비교해 동일인 여부를 밝힐 수 있는 전천후 특수촬영기다.
이 사건에서도 연구소는 두개골의 치아로 피살자의 연령을 추정한 뒤 비슷한 연령의 행방불명인들 사진을 구해 슈퍼임포즈로 대조, 피살자의 신원을 밝혀냈다. 이 일을 담당하고 있는 법치의실 이영석실장은 "과거에는 신원을 확인할 수 없으면 신원불명처리돼 억울한 죽음이 있을 수 있었지만 이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했다.
요지부동의 증거물들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수사에 활용될 유전자지문감식법은 연구소의 또다른 희망으로, 외국에서는 이미 실용화돼 사건해결에 커다란 기여를 하고 있다. 사람의 세포에는 2중나선구조를 가진 DNA(디옥시리보핵산)가 들어있는데, DNA를 구성하는 아데닌 구아닌 시토신 티민의 네가지 염기배열은 사람마다 달라 이를 수사에 적용할 수 있다.
아무리 치밀한 계획범죄라 해도 범행현장에는 사건의 실마리가 있게 마련. 범죄현장에서 채취된 혈흔이나 정액, 머리카락 한올 등은 모두 DNA를 함유하고 있어 용의자의 것과 대조해 DNA패턴이 같다면 요지부동의 증거가 된다는 것이다. 이 기술의 연구를 맡고 있는 최상규 법의학2과장은 "혈액형에 의한 개인식별은 서로 다른 두 사람의 것이 같게 나올 확률이 70분의 1이지만 유전자지문판독은 3천억분의 1에 불과하다"며 "아직까지는 필요한 장비가 완비 안된 상태여서 분석의 경험은 없지만,여건만 갖춰진다면 범죄수사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해 고문근절과 인권수사의 확립에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했다.
지문이나 유전자 등을 범죄수사에 이용할 수 있는 것은 '하늘아래 똑같은 것은 없다'는 평범한 사실에서 출발한다. 목소리도 마찬가지. 사람의 목소리는 개인마다 고유한 특색을 갖고 있어 목소리를 음성분석기에 넣으면 스피치 스펙트럼(speech spectrum)이란 그래프가 나타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성문이다. 유괴사건이나 전화를 통한 공갈협박사건 수사에 자주 등장하는 이 방법은 가성을 내거나 감쪽같이 남의 목소리를 흉내낸다해도 개인의 특징은 바뀌지 않아 미국 일본 등지에서는 이미 20년전에 법정증거물로 채택되었다. "사람마다 입속 용적, 콧구멍, 이모양, 후두의 길이 등이 다르기 때문에 목소리의 특징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게 박종철 성문분석실장의 설명이다.
과학수사연구소에서는 87년 '디지털 소나그래프 7800'이란 장비를 도입하고 업무를 시작한 이래로 90년 말까지 3백건이 넘는 성문을 분석했는데, 아직까지 에러가 보고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성문분석은 2초간의 목소리를 판별하는데 20분이 소요된다. 힘들게 얻어진 결과가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법정에서 정식 증거물로 채택되지 못하고 있다. 박실장은 이에 대해 "지금까지 용의자들이 녹음된 협박목소리를 본인의 것이라고 자백해 성문은 증거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판례만 생기면 외국처럼 본격적인 증거가 될 것으로 내다봤다.
연구소의 활동은 살인등의 강력사건뿐만 아니라 사기사건의 해결에도 크게 기여하고 있다. 문서분석실은 연구소의 다른 부서에 비해 피냄새(?)가 덜 나는 곳인데, 종이로 흔적이 남은 모든 범죄는 이곳에서 처리하고 있다. 계약서를 변조해 1천만원을 1억원으로 고쳤다든가 1자를 4자로 고친 경우 고정밀비교확대투영기에 계약서를 비추면 1분도 안돼 변조여부가 판명된다. 약물로 문서내용을 감쪽같이 지웠다해도 적외선현미경에 지워진 글자가 나타난다. 심지어 타자기에 의한 협박편지도 감정이 가능하다. 이곳에서는 위조지폐의 감정업무도 맡고 있는데 아직은 '정밀한 가짜'가 나오지 않아 연구원들의 육안으로도 판별해낼 수 있다고 한다.
전문인력 아직 부족
국립과학수사연구소는 첨단장비와 전문인력을 동원해 '범죄와의 전쟁'의 첨병역할을 하고 있지만 아직 만족할 만한 수준에 와있지 못하다고 관계자들은 말한다. 가장 큰 이유는 장비와 인원의 부족. 아쉬운대로 지금의 형편으로 업무를 수행하고 있지만 하루가 다르게 지능화 흉포화된 범죄가 늘어나고 있어 전체 80여명의 연구원이 폭주하는 감정의뢰를 소화해내기는 아무래도 벅차다는 것이다.
부검의 경우 의뢰가 들어오는 변사자는 1년에 약 2천5백구. 하루에 평균 7,8건의 검시가 이루어진다. 따라서 검시관들은 매일 시체와 더불어 산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법의학 1과장 서재관박사는 "부검은 빠를수록 좋고 그러기 위해서는 시체에 더가까이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또 "검시는 단순한 시체해부가 아니라 국민의 억울한 죽음을 없게 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어 변사자에 관한 한 국가가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문인력의 확충이 시급하다는 것.
외국의 경우 일본에는 각 현마다 연구소가 있고 미국에서는 뉴욕에만도 다섯개의 분소가 있어 신속한 감정업무가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앞으로 집중적인 투자를 통해 이 분야를 육성해야 한다고 일선 담당자들은 입을 모은다. 연구원들이 내년에 개소할 예정인 부산분소의 설립에 커다란 기대를 걸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사정때문이다. 과다한 업무량으로 한가지 일에 몰두하지 못하고, 특히 감정업무와 함께 연구를 수행해야 하는 지금의 형편이 나아진다면 무고한 사람이 누명을 쓰는 일은 점차로 없어질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를 위해서는 체계적인 인력수급을 담당할 전문양성기관 설립도 고려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외국에서는 법과학이 독립분야로 정착돼 있으나 국내에서는 서울대를 비롯한 일부 대학에만 의과대학내에 법의학과가 있는 실정. 아울러 대부분의 장비를 외국에서 들여와 쓰고 있는 것에도 눈을 돌려 국내 과학계가 수사장비의 국산화에 힘써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연구원들은 연구소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이 변하기를 원하고 있다. 연구소는 경찰로부터 위탁받은 감정업무만을 담당, 감정결과를 통보할뿐 수사에 개입할 수 없도록 돼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연구소의 일부 감정결과에 대해 불신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과거 인권시비가 일었던 사건이나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 이철규군 변사사건과 같은 시국과 관련된 민감한 사건의 감정을 국가기관인 연구소가 맡아 생긴 부산물이다. 이와 같은 불신감을 씻기위해 연구소 종사자들은 그 어느때 보다도 자신의 업무에 충실하고 있는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