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디지털패션쇼

컴퓨터로 디자인하고 패션쇼 연다

패션의 4대 도시 파리, 밀라노, 뉴욕, 런던에서는 매년 봄이 되면 그 해 가을/겨울의 트렌드를 알리는 패션쇼가 열린다. 현란한 조명 아래 연기가 피어오르면 늘씬한 몸매의 모델들이 걸어 나와 음악에 맞춰 한껏 포즈를 취한다.

그러나 이런 패션쇼는 패션디자이너, 직물디자이너, 패턴사, 봉제사, 모델 등 많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만들어진다. 게다가 패션쇼장에서는 무대디자이너, 조명디자이너, 음향디자이너, 음향기사, 조명기사, 촬영기사의 활약도 필요하다. 화려한 패션쇼 뒤에는 숨은 이들의 엄청난 땀과 노력이 배어 있는 것이다. 패션쇼를 간단히 여는 방법은 없을까.

‘슈렉’이 2% 모자란 이유

최근 컴퓨터그래픽을 사용해서 한 대의 컴퓨터로 패션쇼를 재현하는 기술이 개발되고 있다. 이를 CAFD(Computer Aided Fashion Design)라고 한다. CAFD는 컴퓨터에서 옷을 디자인해서 만들 뿐만 아니라 이 옷을 가상 모델에게 입혀 패션쇼를 3차원 그래픽으로 미리 보는 기술이다. 가상모델이 옷자락을 나풀거리며 컴퓨터에서 ‘디지털 패션쇼’를 여는 셈이다.

CAFD에서 옷을 만드는 과정은 가상의 천을 자르고, 봉제하고, 그 옷을 사이버 인체에 입혀보는 것으로 구성된다. 컴퓨터에서 이뤄진다는 점을 제외하면 실제 옷을 만드는 과정과 비슷하다.

이렇게 만들어진 옷은 CAFM(Computer Aided Fashion Manufacturing)을 이용해 실제 옷으로 만들 수 있다. CAFD와 CAFM을 합쳐 CAF(Computer Aided Fashion)라고 부른다.

‘디지털 패션’의 핵심 기술은 사람이 입고 있는 옷의 질감을 진짜처럼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옷의 주름을 3차원으로 재현해야 한다. 사실 주름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이것을 재현하는 것이 무슨 첨단 기술이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슈렉’과 같은 애니메이션 영화를 눈여겨본 사람이라면 캐릭터들의 옷이 눈에 거슬릴 정도로 단순하게 표현됐다는 것을 눈치 챘을 것이다. 막대한 자금과 인력을 동원한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그 정도의 옷을 보여주는 수준에 그쳤다는 것은 거꾸로 이 기술이 얼마나 어려운지 짐작케 한다.

옷을 3차원으로 재현하기 위해서는 옷의 움직임을 미분방정식으로 만들고 풀어야 한다. 옷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옷감의 특성을 정확히 모델링하는 미분방정식을 세우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천의 움직임과 그로 인해 생기는 주름의 변화를 관찰하면 옷의 재질에 따라 구김의 정도도 다르고 빛이 반사되는 정도도 다르다. 또 사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따라 주름이 생겼다가 펴지기를 반복한다. 이런 특성들을 정확하게 표현할 미분방정식을 세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미분방정식을 세우는 것 못지않게 푸는 것도 어렵다. 방정식을 푸는 과정에서 오차가 생길 수 있고, 여러 방법을 동원해 해를 구하다 보면 원래 방정식이 표현하는 옷의 특성과 다르게 옷이 움직일 수도 있다.

옷과 옷, 옷과 신체가 부딪힐 때 생기는 충돌 문제를 처리하는 기술도 녹록치 않다. 컴퓨터그래픽에서는 옷이나 신체가 충돌하면 서로 뚫고 들어가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실제로 옷을 3차원으로 구현하는 전체 계산 과정의 70% 정도가 이런 현상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데 쓰인다. 실제로 우리가 옷을 입을 때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부분인데 ‘디지털 패션’에서는 그렇게 많은 계산이 필요하다는 것은 재밌는 사실이다.

충돌처리가 어려운 이유는 뭘까. 영화에서는 시뮬레이션으로 한 프레임을 만들기 위해서 1/24초 동안 충돌이 없다고 가정한 다음 뉴턴의 운동법칙으로 옷의 움직임을 계산한다. 그런데 이렇게 시뮬레이션 한 뒤에는 옷이 다른 물체와 겹치지 않았는지 확인해야 한다. 뉴턴의 운동법칙이 적용되는 실제 물리세계에서는 한 물체가 다른 물체와 겹치는 현상이 없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않지만 컴퓨터에서는 그렇지 않다.

따라서 만약 시뮬레이션 결과 옷이 다른 물체와 겹친다면 충돌 직전, 즉 1/24초보다 적은 시간이 흐른 시점으로 돌아가서 운동량보존법칙, 반발력, 쿨롬의 법칙 등을 적용해 충돌 후 옷이 어떻게 움직일지 다시 계산해야 한다. ‘디지털 패션’을 구현하는데 충돌처리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며 아직까지 현실적으로 완전한 해결책이 나와 있지 않다.
 

'슈렉 2'에는 등장인물들의 옷이 하나같이 너무 매끈하다. 주름을 3차원으로 재현하는 기술이 어렵다는 증거다.


우주에서 패션쇼 연다?

컴퓨터로 옷을 재현하는 기술은 컴퓨터 애니메이션을 비롯해 패션공학, 섬유공학 분야에서 지난 20년간 세계 많은 학자들이 매달려왔다. 2002년 미국 스탠퍼드대에서도 옷감 애니메이션 프로그램을 내놓은 적이 있다. 이들은 볼링공에 옷감이 휘감기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옷감이 볼링공에 감기면서 마치 고무처럼 조금씩 늘어난다. 사실성이 부족하다는 말이다.

같은 해 필자의 연구팀은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옷감처럼 얇은 구조체가 충돌 등에 의해 어떻게 움직이는지 시뮬레이션할 수 있는 ‘즉좌굴 모델’(immediate buckling model)을 개발했다.

이를 이용하면 옷을 자유자재로 디자인해 사실감을 높일 수 있다. 또 계산의 안정성을 높이고 계산 속도도 2~10배까지 향상시킬 수 있다. 당시 컴퓨터그래픽 분야의 세계적인 행사인 ‘씨그라프’(SIGGRAPH)에서 이를 토대로 비단처럼 얇은 옷을 걸친 모델의 워킹을 3D로 만들어 공개해 찬사를 받았다.

필자의 연구팀은 현재 옷 재현 기술을 패션에 활용할 수 있는 수준으로 개발했다. 지금은 서울대에서 패션디자인 전공자들이 이 기술을 활용하도록 강의하고 있다. 패션 디자이너들이 CAFD를 이용한다면 손으로 몇 달씩 걸렸던 작업을 컴퓨터 계산으로 한 번에 해결하고, 모델을 찾아 옷을 직접 입혀볼 필요 없이 패션 디자인의 모든 과정을 컴퓨터로 처리하는 ‘꿈의 패션쇼’를 열 수 있을 것이다.

이로 인해 패션 디자인과 생산에 커다란 변화가 생길 것이다. 물리와 수학, 그래픽스,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바탕을 둔 3D 재현 기술이 경제적인 파급 효과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지 않은가.

‘디지털 패션’ 기술은 이제 막 시작됐다. 아직까지는 패션 디자이너들이 이 기술을 사용하는데 불편한 점이 많다. 옷을 사실적으로 재현하는 기술과 여기에 필요한 계산 속도를 향상시키는 연구가 더 필요하다. 하지만 패션 디자이너들이 상상하는 대로 얇은 옷, 두꺼운 옷 등 다양한 옷감을 걸친 가상 모델이 실제 모델을 대체할 날도 멀지 않았다. 언젠가 우주 공간을 배경으로 화려한 패션쇼가 열릴 지도 모른다.
 

'누가 진짜 모델이지?' 최근 코엑스(COEX)에서 열린 동덕여대 의상디자인과 졸업작품 패션쇼(01)는 고형석 교수의 '디지털 패션쇼'(02)를  재현했다.
 

이 기사의 내용이 궁금하신가요?

기사 전문을 보시려면500(500원)이 필요합니다.

2006년 06월 과학동아 정보

  • 고형석 교수

🎓️ 진로 추천

  • 컴퓨터공학
  • 의류·의상학
  • 미술·디자인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