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에 30군데의 정부출연연구소가 생긴 셈이지요"
이번에는 1백25연구센터가 17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모두 여섯관문을 통과해야 최종적으로 선발 되는데…
최근에 발표된 SRC(Scientific Research Center, 과학연구센터)와 ERC(Engineering Research Center, 공학연구센터)가 과학계에 큰 화제를 불러 모으고 있다. SRC나 ERC로 선정된 연구단체는 처음 만져보는 거액의 연구비에 들떠 있고 탈락한 단체는 절치부심 후일을 기약하거나 불만에 싸여 있다. 이 까다롭고 말많은 선정작업을 주도한 한국과학재단 강홍렬(姜洪烈, 63)이사장을 만난 날은 마침 페르시아만에 전쟁이 터진 다소 어수선한 날이었다.
이웃집 할아버지같은 인상인 강이사장은 서울대 화공과를 졸업하고 미국 위스콘신대학에서 화학박사학위를 받은 정통 과학자. 더 정확히 말하면 한국화학연구소 연구담당부소장, 한국 표준연구소 소장을 역임했던 테크노크라트다.
미국에서 처음 시작돼
- 과학재단하면 연구비를 대주는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어떤 분들이 지원을 받습니까.
"박사학위를 가진 사람의 약 80%가 대학에 몸담고 있는 게 우리의 실정입니다. 그런데 대학교수들에게 연구비나 시설지원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서 연구를 하고 싶어도 손을 놓을 수 밖에 없는 경우가 많아요. 이런 분들을 위해 과학재단에서는 꽤 오래전부터 지금까지 연간 1천5백~2천 연구과제에 대해 개인단위로 일반 기초연구비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한사람당 5백만~8백만원의 연구비가 지원되는데 이 돈에는 아무런 조건이 없습니다. 다행히 국내외학술지에 논문이 실리게 되면 고맙고, 아무 성과가 없어도 그만입니다."
이렇게 지원을 해보니 기초연구 축적에는 상당한 도움이 되었으나 국가가 육성시키고자 하는 분야를 집중적으로 지원하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그래서 과학재단은 6년전부터 목적기초연구분야에 따로 자금을 마련해 지원하고 있다.
"대개 교수 다섯분이 한 팀을 이루게 되는데 팀이 구성되면 연간 5천만원 규모의 연구비를 3년동안 지원받게 되지요. 그런데 일단 지원을 받으면 적어도 전문학술지에 논문이 게재돼야 하고 가능하면 특허를 받아 국내 산업에 도움을 줘야 한다는 부담이 따르지요."
하지만 이 정도 인원 지원규모로는 엄청나게 빨라진 세계의 연구력 발전속도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적어도 정부출연연구소 규모는 돼야 연구다운 연구를 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현재 20군데인 출연연구소의 숫자를 무작정 늘릴 능력은 없고, 기초기술과 최종제품의 다리 역할을 해주는 요소기술을 쉽게 확보할 수 있는 묘책은 없을까.
"대학교수 50~60명, 연구를 도울 수 있는 전문인력 1백50~2백명을 모으면 정부의 한 출연연구소의 기능을 할 수 있지 않겠어요. 바로 이것이 SRC ERC의 출현배경입니다. 따라서 현재 30곳이 SRC ERC로 지정돼 있으니 일시에 정부출연연구소 30군데가 새로 생긴 셈이지요."
- 이 새로운 연구지원체제는 우리의 독창적인 것입니까.
"미국에서 먼저 시작된 것입니다. 자기네 나라의 기술잠재력이 일본보다 확실히 앞서 있는데 왜 자꾸 일본에게 선수를 빼앗기게 되는가를 분석한 미국의 과학행정가들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지요. SRC와 ERC의 원형이랄 수 있는 미국 STC와 ERC는 미국의 과학재단격인 NSF에서 주관하고 있습니다. 전임 과학재단이사장이었던 정근모박사(전 과기처 장관)가 이 제도를 국내에 도입했는데 틀림없이 좋은 결과가 나올 겁니다."
89년도에 13곳, 90년도에 17곳이 우수연구센터(SRC ERC)로 선정됐는데 그 경쟁은 불꽃을 튀겼다. 따라서 작년에 신청한 1백25 후보는 6개월동안 6단계의 엄격한 선발과정을 거쳤다.
"1단계는 대학총장의 OK를 받아내는 것이었어요. 총장이 '노'하는 곳은 일단 제외시킬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2단계로 서류심사를 통해 각 센터별로 점수를 매기는 절대평가작업이 이뤄졌어요. 3단계는 각 센터가 과기처의 중점개발 12분야 중 어디에 속하는가를 기준으로 해 분류작업을 벌이고 이어서 분야별로 상대평가를 실시했습니다. 제2, 3단계 평가에는 신청서를 낸 1백25센터에서 각각 다섯명씩 나와 평가작업을 도와주셨습니다. 이렇게 3단계까지를 마치니 65센터가 남게 되었죠.
4단계는 면접이죠. 이때 연구책임자가 나와 어떤 식으로 연구를 진행하겠다는 취지를 발표하지요. 물론 경쟁자도 함께 나와 치열한 질의 문답을 합니다. 서류상의 하자도 면접때 거의 드러나게 되지요. 면접을 통과한 곳은 65곳중 33곳이었는데, 이들을 대상으로 5단계 현장조사를 합니다. 마지막 6단계에서는 지역 및 분야별 안배를 통해 최종 우수연구센터를 선발하지요."
준우수연구센터를 지정하기도
이런 과정을 거쳐 금년 1월에 SRC 8곳, ERC 9곳이 새로 지정됐다. 거의 대등한 자격을 갖췄지만 안배의 원칙에 밀려 선발되지 않은 곳은 일단 준우수센터로 지정, 각 센터당 5천만원씩 지원했다.
"89년 선발시 아깝게 탈락했다가 재도전한 24센터중 11센터가 이번에 우수연구센터로 선정됐어요. 재수(再修) 성공률이 상당히 높은 셈이지요. 이 센터들은 한번 탈락에 낙담하지 않고 계속해서 자체 세미나를 열고 국제학술회의도 주관해서 개최하는 등 재도전을 위해 노력을 많이 했어요."
SRC 또는 ERC로 선정되면 연간 10억원 상당의 연구비를 9년동안 지원받는다. 물론 3년마다 실시하는 재평가라는 산(山)을 두차례 넘었을 때의 얘기다. 그렇다면 이 정도의 지원을 하여 얻고자 하는 것이 무엇일까.
"미세전자공학제품을 생산하는 한 업체가 수천억원을 쏟아 부어서라도 어떤 연구를 반드시 해야 한다고 가정해 보세요. 제일 먼저 그 회사는 이 돈을 소화할 수 있는 연구소를 찾아 헤매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국가에서 인정하는 시범식당에 가거나 KS제품을 살 때는 어느 정도 안심이 되지 않아요. SRC나 ERC는 국가적으로 그 기술연구능력을 인정받은 곳이라고 볼 수 있으므로 정부 기업 개인이 어떤 특정한 연구를 맡기려고 할때 우수연구센터에 신청하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거예요."
처음에는 과학재단이 연구비를 약속대로 대주겠지만 우수연구센터가 본격적인궤도에 들어서면 기업의 연구의뢰가 쇄도, 그때부터는 과학재단의 '젖줄'이 끊기더라도 우수연구단체는 자생력있게 발전해 갈 것으로 강이사장은 전망하고 있다. 그렇게 되면 과학재단은 오스트레일리아의 NATA처럼 우수연구센터 전문인준기관으로 행사하게 된다.
"우수연구센터를 구성하려면 50명 이상의 교수가 모여야 합니다. 이 요건을 갖추는 것은 우리의 이공계 대학교수사회에서 대단히 힘든 일입니다. 독불장군은 결코 신청서 접수조차 해낼 수 없지요. 사실 많은 교수들이 모여 그룹을 만드는것 자체가 연구분위기 조성에 한몫 한 걸로 보여집니다."
지난번과 달리 이번에는 서울대 한국과학기술원 포항공대 등 특정대학의 독과점이 지나쳤다는 주변의 불평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자 그는 "잘 모르는 소리"라고 잘라 말한다.
"교수의 수를 생각해야 합니다. 서울대의 자연대와 공대교수의 수는 3백여명입니다. 여기서 4곳이 지정됐지요. 또 농대 의대 약대교수도 3백여명인데 3곳이 뽑혔습니다. 그리고 KAIST와 포항공대에서는 각각 세곳이 지정됐는데 두 대학 모두 2백50~3백명의 교수진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지방대학중에서 선정된 곳은 해당대학 총장의 집중적인 지원약속이 크게 뒷받침 됐어요. 연세대의 연구센터가 한곳도 지정되지 않은 까닭은 전국적으로 사람을 끌어모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강이사장은 우수연구센터의 활약에 많은 기대를 갖고 있다. 가능하면 프랑스의 원로과학자 모임인 CNRS의 역할을 과학재단이 해내고 싶다는 포부도 펼쳐 보이고 있다. 국가의 예산도 효율적으로 쓰면서 선배의 입장에서 표안나게 연구분위기를 유도하겠다는 것.
우수연구센터로 지정된 곳은 연구비신청서를 낼 때 계수조정에 좀더 신경을 써야 할 것 같다. 연구비를 20% 이상 부풀렸다고 인정되는 센터에게는 적지 않은 불이익이 돌아갈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