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정부는 청소년의 이공계 진학을 독려하기 위한 다양한 시책을 마련하고 있다. 이공계 기피 문제의 진정한 해결책은 무엇일까. 우리 사회 저변에 깔려있는 이공계에 대한 잘못된 인식부터 제도적으로 개선해야 할 문제까지 꼼꼼히 살펴보자.
청소년들의 이공계 기피 현상에 대한 논의가 대학 입시의 교차지원 문제와 맞물려 우리 사회에 커다란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애초에 이 문제는 대학 수학능력시험에서 자연계열 지원자가 감소하고 자연계열을 택한 학생들이라도 이 공학 분야가 아니라 안정적인 수입이 보장되는 의학이나 한의학 분야로 몰리면서 발단이 됐다.
과학기술부는 이 문제를 초기에 사회적인 이슈로 부각시키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아마 여기에는 과학기술 인력 정책에 대한 비판 여론을 감수하면서 과학기술 분야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유도하려는 의도가 부분적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미 지난해 12월부터 청소년들의 이공계 기피 문제에 대처하기 위한 과학교육발전위원회가 구성됐고, 언론에서도 이 문제를 크게 보도했으며, 급기야 대통령이 문제에 대해 관심을 나타내면서 이공계 기피 현상에 대한 대책은 급류를 타기 시작했다.
언론이 이공계 기피 문제를 집중적으로 보도하면서 이것이 이공계 분야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공계 분야에 대한 기피 현상을 심화시키는 역효과까지 나타났다. 과학기술 분야를 전공하면 어렵고 힘만 들며, 40대가 되어선 실업자로 전락하기 십상이라고 묘사되면서 청소년들 사이에서 과학기술 분야는 선택해서는 안되는 기피 직업으로 비춰졌던 것이다. 언론이 이공계 기피 현상에 대해 지나친 과잉 반응을 보이며 이런 분위기를 확산시키지 않았다면 이공계로 진학하려던 학생들까지 문과로 옮기는 기현상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스타 과학자 부재와 벤처의 몰락
우리나라에서 청소년들의 이공계 기피 현상이 문제가 되는 것은 여러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우선 이 현상은 그 동안 우리 사회에서 이공계 분야의 직업을 바라보는 뿌리 깊은 잘못된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공계 분야는 인문사회계에 비해 전체적으로는 안정된 직업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인문사회계에서는 몇몇 두각을 나타내는 스타가 사회의 주목을 쉽게 받은 반면, 이공계 분야는 스타가 부재하다. 이런 점이 이공계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
또한 소득 수준이 높아지고 선진국이 될수록 서비스업의 발전으로 이공계 진학률이 감소한다. 이런 현상은 여러 나라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에서는 이공계 진학률이 감소해도 개발도상국의 인력을 흡수할 수 있기 때문에 급격한 인력 부족이나 질적 저하 문제가 가시화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경제·문화적인 측면에서 외국 인력을 흡수하기 매우 어려운 구조이기 때문에 이 문제를 선진국처럼 해결하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선진국형 직업 분포를 갖게 되면 전통적인 과학기술에 바탕을 둔 산업보다는 지식 기반의 서비스업이 부상되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다. 문제는 우리나라는 아직 완전한 선진국으로 진입하지 않았으며, IMF의 높은 파고와 급변하는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국민소득 1만달러의 벽에 부딪혀 답보 상태에 있다는데 있다. 선진국이 되기 위해 아직 몸은 요원한데, 청소년들의 생각만 앞서 국민소득 3만달러 시대에 가 있다는 것이 문제다.
과학기술 분야가 직업으로서 선망의 대상에서 멀어진 또하나의 요인으로는 무엇보다도 지난 몇년 간 나타났던 벤처의 비정상적인 급성장과 극적인 몰락을 들 수 있다. 이런 벤처업계의 흥망성쇠는 청소년들에게 과학기술자라는 직업에 대한 커다란 실망을 안겨다줬다. 이공계 분야에서 벤처를 통한 성공은 청소년들에게 강한 희망을 줬으며, 한동안 성공한 벤처 기업인은 우리 사회의 우상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지난 몇년 사이 벤처기업들이 어려움을 겪게 되면서 벤처의 신화는 부분적으로 깨졌고, 그 결과 청소년들은 과학기술 분야의 직업에 대해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이 외에도 우리 주변에서 날로 심각해지는 고학력 실업도 과학기술자의 사회적 지위를 실추시키는데 영향을 미쳤으며, 정부가 추진한 의약분업의 실패로 의사들의 수입이 과거에 비해 엄청나게 증대되면서 의료계에 대한 이공계 직업 분야의 상대적 위축감을 심화시켰다.
중장기적인 방안 필요하다
현재 정부에서는 과학교육의 위기를 절감하고 청소년들의 이공계 진학을 고취하기 위한 다양한 시책을 마련 중에 있다. 그 동안 정부는 대통령 과학장학생 선정, 출연연구소의 우수연구원에 대한 영년직 연구원제도 도입과 대학원대학 설립, 국가연구원제도 신설, 과학기술 유공자에 대한 공로연금제 도입, 명예의 전당, 추모공원, 과학문화회관 건립 등 과학기술자들의 사기 진작, 연구원 처우개선, 과학기술자들의 사회적 명예 제고와 노후 보장을 위한 대책을 내놨다. 이 모든 것이 얼마나 현실화될 수 있을지 아직 불분명하지만, 과거에 나왔던 과학기술인에 대한 대책에 비하면 그야말로 파격적인 방안이다.
현재의 이공계 기피 현상에 대한 대책으로 나오는 각종 혜택은 계속 확대돼야 할 것이다. 병역 혜택의 확대는 한국과학기술원이 창립 초기에 우수한 인력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듯 우리나라 과학기술 인력 확충에 커다란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이렇게 각종 혜택을 확대하는 것만으로는 이공계 기피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는 않는다. 각종 혜택을 남발하다보면 이 분야에 커다란 문제가 있는 것으로 비춰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공계 기피 현상에 종합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단편적인 처방만이 아니라 과학기술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획기적으로 바꿔놓을 수 있는 중장기적인 방안도 동시에 모색해야 한다. 따라서 앞으로는 기존의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 급속도로 변화하는 사회의 다양한 요구에 좀더 적극적으로 부응할 수 있는 창의적 능력을 지닌 사람이 더욱 각광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미래의 새로운 학문은 인문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이 통합돼 나타날 가능성이 많다. 예를 들어 오락 산업, 영화 산업 등 문화기술의 대부분은 이런 통합적인 지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런 추세에도 불구하고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고등학교에서 문과와 이과를 구별하는 구태의연함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시대에 뒤떨어진 문과와 이과의 구별이 이공계 기피라는 기현상을 유발한 하나의 원인이 되고 있다. 학생들로 하여금 선택의 폭을 넓혀주기 위해 마련한 교차지원이 대학에 들어가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면서 이과를 기피하는 현상이 심화됐던 것이다.
일상에서 체험하는 과학교육
청소년들의 이공계 기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과학 교과목을 필수로 하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물론 이 방안은 과학기술 교육의 비중을 높이는데 기여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제도적으로 과학기술 교육을 확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청소년들이 스스로의 취향과 적성에 따라 과학기술을 좋아하게 만들어야 한다.
청소년들이 과학기술을 선호하게 만들려면 근본적으로는 과학기술이 현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생활과 밀접한 것이라는 인식 변화가 사회 저변에 나타나야 한다. 과학기술을 모르고는 돈을 벌거나 사회에서 주도적인 위치나 지위를 차지하는 것이 근원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회적 통념이 퍼져야만 청소년들이 과학기술자가 되려고 흔쾌히 이공계로 진학하게 된다. 최근 잇따라 발생한 사이비 벤처인들에 의한 사기행각에 의해 추락된 벤처의 위상을 재고시키고 국민들에게 벤처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다시 한번 각인시킬 필요가 있다.
현재의 이공계 기피 현상을 타개하는데 중요한 여성 과학기술 인력의 확충도 좋은 대책이 된다. 우수한 여성 과학자들이 많이 나타날 때 이공학 분야에서 나타나는 인력 수급 불균형 문제는 크게 해소될 것이다. 국가의 미래 비전은 ‘남녀가 함께 만드는 선진 과학한국’이라는 모토로 펼쳐져야 한다.
이공계 기피 문제는 근본적으로는 과학기술 분야의 인력 수급 문제와 연결시켜 해결해야 한다. 현재 이공학 분야는 몇몇 첨단 분야는 사람이 없어서 야단인 반면, 전통적인 이공학 분야에서는 취업이 안되는 기현상을 나타내고 있다.
그 동안 정부는 국가의 과학기술 경쟁력 강화를 위해 이공학 분야의 대학 정원을 계속 증원해 왔다. 하지만 이 증원 정책이 과연 미래에 대한 정확한 인력 수급에 바탕을 둔 것이었는지 현시점에서 다시 한번 냉정하게 살펴봐야 한다. 수급 문제에 대한 철저한 고찰이 없이 그저 청소년들에게 과학도로서의 꿈을 키워준다는 식의 과학대중화 운동은 결과적으로 커다란 상처만 남길 뿐이다. 이 점은 과학대중화 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던 기성 과학언론 당사자들이 크게 반성해야 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현재 정부에서 마련하고 있는 이공계 기피 현상에 대한 대책과 과학기술인에 대한 사기 진작 방안도 21세기에 들어 본격화되고 있는 커다란 사회적 흐름과 서로 조화를 이룰 때만이 현실 속에서 올바르게 구현될 수 있다. 만약 현재의 이공계 기피현상에 대한 대책이 너무 단기적인 치유만을 강조해 다원화되고 다양한 가치를 추구하는 미래 사회로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라면 장기적인 관점에서 이대책은 오히려 국가 발전에 커다란 해가 될 수도 있다. 이공계 기피 현상 해소와 새로운 지식기반 사회의 구현은 어느 하나도 소홀함 이 없이 동시에 해결해야 할 우리 시대의 과제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