툭 튀어나온 배. 걸을 때마다 흔들거리는 허벅지살. 축 처진 팔의 근육.
신체 특정부위에만 집중되는 이런 지방층은 미용상으로나 건강을 위해서나 인간에게 몹시 성가신 존재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 지방층은 단순한 '군살'이 아니며, 인간이 포유동물이기에 치러야 하는 대가(代價)라는 연구결과가 잇따라 발표되고 있다.
인체지방과 비만의 관계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최근 인간과 다른 포유동물들의 지방세포와 그 신진대사과정을 비교 연구함으로써 비만증을 새롭게 해석하고 있다. 과학자들은 이 비교연구를 통해 포유동물은 그 종을 막론하고 앞발의 윗부분(사람의 경우 팔의 윗부분)인 가슴부위, 꼬리뼈와 허벅지 주위, 배 목 등에 지방층이 몰린다는 공통점을 발견했다. 또 이들은 몸의 지방세포가 그 부위에 따라 서로 다른 특성을 갖는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일군의 과학자들은 지방분자를 합성 제조 저장하는 데 사용되는 효소를 비교연구하고 있다. 그 중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흔히 LPL이라 불리는 지(脂)단백질 리파제(lipoprotein lipase). 이 효소는 섭취한 음식물 중에서 지방산을 추출하여 그것을 지방세포에 저장하는 역할을 한다.
연구자들은 인간과 다른 동물의 LPL대사과정을 비교, 어떻게 동면전의 동물들이 고혈압이나 동맥경화에 걸리지 않고도 지방을 과다하게 축적할 수 있는지를 밝혀내 비만치료에 이용하고자 한다.
과학자들은 이런 새로운 이해를 통해 사람들이 적어도 모든 지방이 똑같은 형태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며, 또 똑같은 정도로 몸에 해로운 것도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게 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에너지 저장 창고
동물체내의 지방은 굶주렸을 때 가장 쉽게 활용할 수 있는 에너지저장고 역할을 한다. 지방분자는 생존활동에 필요한 연료를 공급하는데 그 화학구조가 접합, 분산이 쉽도록 되어있기 때문에 연료의 저장형태로는 적격이다.
소화기에서 흡수된 지방은 단 2%만 소비되고 나머지는 모두 지방세포에 축적된다. 더구나 지방분자를 비축하는 지방조직은 거의 무한정으로 확대될 수 있다. 지방조직을 이루는 세포가 원래 크기의 10배이상으로 부풀 수 있기 때문이다. 밴더빌트의과대학의 제임스 힐박사에 따르면 "지방세포는 얇은 막에 들어있는 커다랗고 둥근 지방 방울과 같아 원하는 대로 커질 수도 작아질 수도 있다"고 한다.
음식물로 섭취한 지방이 너무 많아서 지방세포가 이를 다 흡수하지 못하면 새로운 세포가 생겨난다. 그런데 한번 생겨난 세포는 결코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체중이 줄어도 지방세포는 다시 지방을 흡수할때까지 움츠러들 뿐이다.
한편 각 부위별 지방이 서로 다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은 그 생화학적 특성의 차이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몇몇 연구자들은 동물연구를 통해 허벅지 주위의 지방층이 혈액속의 지질(脂質, lipid)을 흡수하는 데는 효과적이지만, 쉽게 에너지원이 되는 포도당은 거의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따라서 허벅지에 살이 많이 찐 사람은 지방질이 많은 음식을 먹었을 때 다른 사람보자 빨리 혈액 속의 지방을 흡수할 수 있다. 반면 신체 근육 사이에서 발견되는 소량의 지방은 주로 혈액에서 포도당을 흡수, 에너지가 필요한 주변의 근육조직에 재빨리 연료를 공급한다.
허벅지의 지방조직이 음식물의 지방은 쉽게 수용하지만 포도당을 받아들이거나 활동의 연료가 될 지질은 잘 내보내지 못한다는 사실은 허벅지 살이 쉽사리 안 빠지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이 조직은 에너지의 장기적인 창고라고 볼 수 있으며 건강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리 나쁜 것은 아니라고 연구자들은 말한다.
뱃살은 수렵시대 잔재
지방을 저장하는 데 가장 민감한 효소이며 호르몬에 의해서도 부분적으로 조절되는 LPL은 지방분포의 성별(性別) 차이를 설명할 수 있게 한다.
예일대학 연구팀은 여성들의 경우 엉덩이 허벅지 가슴부위의 지방세포가 효소를 만들어내는 반면 남성의 경우엔 대체로 배 주위의 지방세포에서 효소가 생산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인간을 포함해 포유류들은 암컷이 수컷보다 LPL을 더 많이 갖고 있어 상대적으로 지방이 많고 포동포동하다. 특히 임신을 하게 되면 여성호르몬의 자극으로 LPL이 더 많이 생산되므로 임신중의 암컷은 평소보다 살찌게 된다.
남성들의 배에 지방이 몰리는 이유도 호르몬에 민감한 LPL의 기능으로 설명할 수 있다. 복부의 피하지방이나 장기(臟器)를 감싸고 있는 지방은 아드레날린이나 부신피질 호르몬같이 즉각적인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스트레스'호르몬에 민감하다.
"복부의 지방은 신속한 에너지원의 저장고인 것 같다. 즉 인류가 수렵 채집생활을 하던 시기에 달리고, 싸우고, 먹이를 찾을 때 짧은 시간 내에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창고로서 생겨난 것이다. 반면 여성은 임신이나 출산 후의 몸조리를 위해 긴 기간동안 사용될 에너지창고가 필요했을 것이다."
캘리포니아 대학의 그린우드박사의 말이다.
효소 양으로 지방대사 조절
그러나 복부 지방등의 급속한 신진대사가 너무 오래 지속되면 몸에 해로울 수 있다. 순환계의 구조상 방출된 지방산(酸)은 몸 전체의 근육으로 퍼지기 전에 바로 간(肝)으로 간다. 이때 너무 많은 지방산이 간으로 유입되면 간은 인슐린의 분비에 영향을 미쳐 혈액중의 포도당 농도가 올라간다. 그 결과 심할 경우에는 고혈압, 당뇨, 심장질환을 유발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인간과 동물을 비교연구하는 과학자들은 다른 포유동물들이 자신의 비만을 자연스럽게 조절하는 메커니즘을 이해함으로써 인간의 비만증을 치료하는 새로운 방법이 나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한 예로 북미산 모르모트는 매년 동면시기가 되면 엄청나게 살이 쪘다가 봄이 되면 다시 살이 빠지는 과정을 되풀이한다. 동면을 준비하는 동안에는 지방의 신진대사에 관계된 LPL이나 다른 효소의 농도가 짙어졌다가 봄에는 정상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사람은 효소농도가 거의 조절되지 않는다. 예컨대 오랫동안 비만했던 사람은 체중이 줄어든 이후에도 LPL과 기타 관련효소들의 농도가 상승된 채로 남아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과학자들은 약물로 이 효소의 농도를 조절해 비만을 퇴치할 수 있는 방법을 구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