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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구석기 역사를 복원한다

함북 동관진 유물 최초 공개

조선의 역사가 일본보다 앞설 수 없다는 식민사관에 따라 동관진 구석기 문화는 오랫동안 부정됐다.

우리에게 있어 구석기시대는 참으로 오랫동안 '잃어버린 시대'였고 '잃어버린 문화'였다.

1935년 함북 종성군 동관진(潼關鎭)에서 확인되기 시작한 우리의 구석기문화(유물)는 일제침략기인 발굴당시의 식민사관에 의해 말살내지는 부정됐다. 더우기 1945년 광복이 되어 우리 손으로 우리의 역사가 연구되기 시작했지만, 역사의 첫장이면서 이 땅에서 이룩된 맨 처음의 문화인 구석기문화는 일제 강점기에 깊게 뿌리내려진 학문의 예속성으로 인해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하고 말았다.

이처럼 우리의 역사에 있어 첫장인 구석기 문화의 연구는 그 시작부터 순조롭게 이루어지지 못하고 부정의 논리에 말려든 것이다.

만주 철도선 부설이 발굴계기

종성 동관진 유적의 조사는 1932년 7월 일본제국이 대동아공영권을 건설한다는 계획에 따라 만주지역에 도문서부선(圖們西部線) 철도를 확장공사하던 중 함경북도 종성군 남산면 상삼봉(上三峰)의 산중턱을 파헤치자 여기에서 코뿔이 뼈와 이빨이 나온 것이 그 계기가 됐다. 이때 경성제국대학 예과교수로 있으면서 조선의 고생물학-특히 젖먹이 동물에 관해-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모리(森爲三)는 한반도의 북동쪽 끝에서 나온 이 옛짐승의 뼈에 관한 소식을 듣고 그 이듬해인 1933년 6월 종성으로 답사를 갔다.

상삼봉유적에 도착한 모리교수는 주변지역을 조사하며 여러 짐승뼈화석을 찾게된다. 이곳에서 동관진역의 북동쪽에 있는 연대봉(煙臺峰)에서 뼈 화석이 출토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모리교수는 이 일대를 조사한 결과 옛털코끼리 털코뿔이 등의 뼈와 함께 사람이 손질한 흔적이 뚜렷한 유물들을 찾아 보고한다(1935년). 이것은 우리나라 구석기인류의 유물에 대한 첫 보고로, 학사(學史)에서도 뚜렷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조사보고가 있은 다음 연대봉 유적은 당시 만몽(満蒙)학술조사단의 단장이면서 와세다대학 교수인 도쿠나가(德永重康)와 나오라(直良信夫) 등이 참여한 가운데 1935년 7월부터 2차 걸쳐 본격적으로 발굴조사 됐다.

이때 발굴조사는 철도부설 공사때문에 산허리가 잘려 나간 북쪽(北面斷崖)에 1.5×26m, 서쪽(西面斷崖)에 1.5×24m 되는 범위에서 이뤄졌으며 그 결과 6개의 층위중 3개의 층에서 유물과 뼈화석들이 확인됐다(단면도 참조).

다시 조사보고서는 맨 위층인 표토층(경작층)에서 신석기시대의 유물인 간석기 토기 등이 교란된 상태로 출토되었고 그 밑의 제1황토층(두께 2.0~3.5m의 밑부분)에서 하이에나 털코끼리 털코뿔이 사슴들소 첫소 양 말등 비교적 큰 짐승의 뼈화석 뼈연모와 함께 흑요석을 감(材料)으로 하여 만든 석기가 발굴됐다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이렇게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동관진유적에서는 모두 6목 10과 12속 18종 3아종의 옛짐승화석이 나왔는데 동관진하이에나 큰뿔사슴 첫소 털코뿔이 옛털코끼리 등은 지금 이 지구위에 살고 있지 않는 사멸종으로 동관진유적의 연대를 가름하는데 좋은 기준이 되고 있다.

한 예로 최무장박사(부여문화재 연구소장)는 사멸종의 비율과 짐승의 종적 구성을 근거로 하여 동관진의 연대를 후기 홍적세 초기(뷔름빙기 초기)로 주장하고 있다.
 

흰 부분의 것이 동광진 창끝찌르개와 유사한 슴베찌르개. 단양 수양개 출토품.
 

우리나라 구석기 유물에 대한 첫 보고

이러한 보고에 힘입어 나오요시는 속편의 성격으로 '조선 동관진발굴 구석기시대의 유물'이라는 논문을 발표했다(1940년). 그는 이 글의 제목에서부터 조선에서 발굴로 밝혀진 구석기대의 유물이라는 것을 주장하는 한편 조선 최초의 구석기시대 유물에 대한 보고문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 보고서를 쓴 나오라는 동관진유적의 보고문을 쓰기 이전인 1931년에 벌써 '일본원인'(日本原人) 이라고 불려지는 사람의 허리등뼈를 찾아 보고했다. 또한 그는 도쿠나가 교수와 함께 이 당시까지만 해도 구석기연구의 표준유적이라고 할수 있었던 만주 고향둔(顧鄕屯) 유적을 찾아 발굴 보고를 한 뒤에 이 동관진유적을 대하게 된다. 그래서 이 동관진 문화는 고향둔 유적보다 약간 늦은 시대라는 것도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보고서에서는 흑요석 격지(몸돌에서 돌망치로 깨져 나온 부분) 2점 (길이 27.5, 26.0mm) 만을 소개하고 있을 뿐이다(그림참조). 물론 이 유물들은 제1황토층 밑에서 이미 멸종된 짐승뼈들과 함께 출토되었으며, 자른 면이 세모꼴을 이룬 것으로 보아 돌날이 아닌 양면격지인 것으로 해석된다. 한편 뿔과 뼈로 만든 뼈연모 가운데에는 큰뿔사슴의 왼쪽 뿔연모가 특히 주목된다.

이 연모의 안팎 양쪽에 새긴 여러 선은 곧고 깊은 것, 뱀모양처럼 좁게 한 것 서로 연결시켜 보면 글자모양 비슷한 것 등 세가지가 있는데, 이렇게 새겨진 줄들은 전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것은 동관진의 구석기문화를 이룩한 당시 사람들의 사유(思惟)형태로 이해되며 우리 선사예술의 뿌리를 밝히는데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

모리 도쿠나가 나오라 등이 '동관진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은 구석기시대의 것'이라고 주장하자 당시 조선의 고대사를 연구하던 우메하라(梅原末治) 후지타(藤田亭策) 등 도쿄제국대학 출신의 관학파(官學派)학자들이 반격에 나섰다. 이들은 그때까지 일본에서도 구석기유물이 출토되지 않은 상황인데 조선의 문화가 일본보다 앞설 수 없다는 식민사관에 따라 동관진유물은 연대가 다른 것들이 마구잡이로 섞여 나온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동관진구석기 문화'를 부정했다.
 

나오라가 보고서에 기록한 연대봉 유적 단면도
 

해방 이후에도 인정 못받아

식민사관에 의해 부정된 동관진유적은 광복 이후에도 그대로 잃어버린 유적으로 남았다. 그간 동관진에 대한 고찰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어서 1958년 하버드대학교에서 고고학을 연구하고 돌아온 김정학교수(당시 고려대학교 박물관장)는 동관진유적과 유물이 구석기문화라는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진단학회에서 펴낸 '한국사'(고대편)에서는 앞서 말한 일본인 학자들과 똑같은 논리로 동관진을 부정하여 우리 역사의 상한선은 여전히 신석기시대에 머물러 있게 된다.

그러나 1964~74년에 걸치는 10년간 손보기교수를 비롯한 연세대학교 박물관팀이 공주 석장리유적을 우리 손으로 발굴하여 구석기시대와 문화를 인정받음으로써 식민사관의 허구성을 밝혀내게 됐다.(북한에서도 웅기 굴포리유적을 이 때 발표했다) 이어 글쓴이는 1978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펴낸 '한국사론' 1집의 '구석기시대'라는 글을 통해 동관진유적을 구석기고고학적인 분석과 학사적인 입장에서 정리하여 발표하고 한국전쟁 이후 실종된 동관진 유물 출토품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89년 동관진 출토품이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가 국립박물관으로 옮겨간 것을 확인하고 이번 전시회를 개최하기에 이른 것이다.

북한 유적과 비교연구 돼야

이번에 전시된 유물은 대개 3시기의 유물이라는 점이 우선 관찰된다.

간 화살촉, 간 돌칼, 찰흙, 가락바퀴 등을 비롯한 청동기시대유물과 초기 형식의 반달돌칼, 돌도끼, 파인 밑의 세모꼴 화살촉(흑요석) 등의 신석기시대유물, 흑요석으로 만든 볼록-오목날 긁개, 찌르개, 격지 이암으로 만든 창끝찌르개 등의 구석기 유물들이다.

특히 털코뿔이의 위턱이빨과 털코끼리의 왼쪽 위팔뼈화석이 보고된 상삼봉의 이층은 연대봉의 제1황토층과 같은 시기다. 따라서 나오라 보고서(1940년)에 소개한 2점의 격지 이외에도 더 많은 구석기문화 행위의 재구(再構)가 가능해진다. 실제로 보고서에 기록된 격지들과 제작기법이 아주 비슷하게 되어 떨어진 2점의 격지를 이번 전시유물에서 찾을 수 있다(사진참조).

특히 1점의 창끝찌르개는 지금까지 글쓴이가 충주댐수몰지역조사(1983년~85년)로 발굴한 단양 수양개유적 후기 구석기문화층의 슴베찌르개와 비교되어 크게 주목된다. 이 수양개 후기 구석기문화층이 방사성 탄소연대측정 결과 1만7천년전 (UCR-2078)것으로 밝혀져 당시 구석기문화를 담당했던 집단과 주민들의 이동·전파문제 등도 큰 관심을 끌고 있다. 또한 석기를 만든 흑요석의 원산지가 백두산계통인지 이 연모들을 실제로 썼는지를 밝혀낼 전자주사현미경(SEM) 검사 등의 연구가 계속돼야 할 것이다.

최근 국립과학관 이승모실장의 조사로 동관진유적에서 발굴된 여러 짐승뼈화석들이 도쿄대학에 소장돼 있음이 밝혀져 앞으로의 연구로 동물상에 관한 보다 정확한 비교연구가 가능하게 될 것이다.

또한 그동안 남북한 학자들의 노력으로 평양지방과 충북지방의 석회암동굴에서 많은 옛 짐승뼈화석을 발굴, 복원하였기에 뚜렷한 연구결론이 기대 된다.

모쪼록 이번 공개를 시발점으로 남북한유물의 교환전시, 전공학자들의 상호방문의 길이 열려 우리 문화의 동질성을 찾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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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08월 과학동아 정보

  • 이융조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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