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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TⅠ 창의성과 민주적 운영 중시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변모하는 소련과학계

군사과학과 항공우주, 기초과학에서 소련은 세계최고의 기술을 갖고 있다. 그러나 컴퓨터와 생명공학, 생산기술분야에서는 미·일에 10년이상 뒤처져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속도가 과거에 비해 현저하게 빨라진 현대에 있어서 한 국가의 과학기술수준은 그 나라의 총체적 국력을 평가하는 중요한 지렛대 역할을 한다. 우리가 미국과 소련을 초강대국(superpower)라 부르는 것도 이들이 과학기술 분야의 연구인력, 연구기관의 수 및 기초·응용과학 분야의 성과에 있어서도 다른 선진국들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최근 샌프란시스코에서 개최된 한소정상회담은 한국에 폭발적인 '소련붐'을 일으켰다. 이제 일반 국민들도 소련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대한 높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소련을 정확히 인식하려는 노력이 확산되고 있다. 향후 한소간의 정치적 경제적 관계는 더욱 급속하게 긴밀해질 것이 확실시되며, 이에 따라 그동안 멀게만 느껴져온 소련은 이제 우리의 가장 중요한 협력자로 부상하고 있다. 최근 이러한 한소관계의 발전과 맥을 같이하여 소련의 과학기술분야에 대한 국내 과학기술계의 관심도 고조되고 있다. 그러나 소련의 과학기술분야에 대한 지식이나 자료가 거의 전무한 우리의 현실이고 보면, 이러한 관심을 충족시키기가 그리 쉽지 않은 실정이다. 세계 최대의 연구인력과 높은 수준을 보유한 소련 과학기술의 현주소와 고르바초프 등장 이후 전개된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개혁정책)가 소련의 과학기술 분야에서 어떠한 변화를 가져오고 있는가 알아보기로 하자.

전세계 과학자의 25%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후 소련당국은 과학기술의 진흥을 국가의 최대 역점사업중의 하나로 간주해 왔다. 혁명과 내전으로 피폐된 경제를 재건하여 '위대한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 과학기술의 발달은 필수불가결한 요소였다. 레닌이래 소련의 역대 지도자들은 과학기술발전을 위한 최선의 조건을 제공하기 위해 대대적인 과학기술 진흥정책을 추진해 왔다. 특히 냉전시대 이후 미국과의 자존심을 건 국력대결을 펼치면서 소련의 과학기술 진흥정책은 1957년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러시아어로 '위성'이란 뜻)의 발사로 결실을 보았다. 그 이후 소련은 '과학기술 대국'이란 칭호를 얻게되고 과학기술 분야에서도 세계 제일이라는 자부심과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1989년말 현재 소련에는 5천개 이상의 전문연구기관과 1백52만명을 상회하는 연구전문인력이 있다. 이중 절반 이상이 과학기술연구소이며 연구전문인력의 수는 전세계 관련분야 인력의 4분의 1을 넘는 방대한 규모다. 인구 1만명당 연구원의 수도 54명으로 미국의 33명, 일본의 34명보다 훨씬 많다. 투자면에 있어서도 소련은 88년 국민소득(National Income)의 6%인 3백78억 루블을 연구개발비로 투입하였다. 이는 금액면에서는 비록 미국이나 일본에 뒤지지만 GNP에서 과학기술연구비가 차지하는 비율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높다.

민간연구소나 기업이 큰 역할을 담당하는 미국 일본 서유럽과는 달리 소련의 과학기술정책은 국가 주도로 이루어지고 있다. 소련 과학기술에 있어서 쌍두마차는 국가과학기술위원회(State Committee of Science and Technology)와 과학아카데미(Academy Nayka). 국가과학기술위원회는 소련 각료회의의 상설기구로 국가 전체의 과학기술 정책을 입안하고 총체적으로 모든 과학기술 분야의 관련 기관들을 통제한다. 과학기술위원회는 정부 산하 각 부처에 소속된 연구소들이 수행할 기본 프로젝트에 대한 지침을 하달하며, 과학기술 정책의 종합조정 역할을 담당한다. 과학아카데미는 연방 전체의 연구활동을 조정하면서 기초 및 응용연구를 수행하는데, 산하에 4백여개의 연구소가 있다.

군사기술은 초강국, 민수용은 2등국가

오늘날 소련은 계량적으로 볼 때 다른 국가와 비교할 수 없는 대규모의 연구기반을 갖고 있다. 소련은 세계과학자 총수의 4분의 1과 엔지니어의 절반을 보유하고 있고 해마다 소련은 국민소득의 6%를 연구개발에 투자하고 있다. 소련은 탁월한 과학교육제도를 확립했으며 소련학생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거의 모든 학생이 4년 이상의 물리 화학 생물과정 그리고 10년 이상의 수학과정을 마친다. 소련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 더 많은 과학기술분야의 대학졸업자를 배출하고 있다. 예컨대 1983년에는 45만명의 이 분야 전공학생이 소련의 공교육기관을 졸업했는데, 소련인구의 85% 가량이 되는 미국의 이 분야 졸업생 수는 20만명을 넘지 못했다.

소련은 최초의 인공위성을 발사했고 최초로 인간을 우주궤도로 진입시켰으며 다른 천체에 우주선을 보냈다. 소련은 최초의 원자력발전소를 건설했고 핵융합 레이저 및 원자분쇄기분야 연구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소련은 지난 1세기 동안 파블로프와 멘델레예프를 비롯하여 많은 세계정상급 과학자들을 배출했다. 그러나 한나라의 과학기술수준은 과학기술자 교육기관 연구투자 항공기 핵무기 미사일 그리고 우주시스템의 양적인 규모만 가지고 측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소련의 경우는 기초과학분야의 튼튼한 토대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자원을 군사와 우주계획에만 집중투자함으로써 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을지는 모르나, 특정분야에 대한 자원의 집중투자 결과 비군사적인 기술에서는 2등 국가로 뒤처지게 되었다.

미국의 외국응용 과학평가센터(FASAC)가 1985년 발표한 소련의 과학기술 조사연구에 따르면 소련은 미국에 비해 거의 모든 과학기술분야 연구에서 뒤지고 있으나 핵무기 계획과 직접 관련되는 수학과 충격압축연구에서만은 상당한 수준에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소련은 20세기 말과 21세기를 주도할 첨단기술인 컴퓨터와 생물공학에서 초보적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소련이 그동안 서방과의 기술격차를 줄일 수 있었던 것은 서방의 신기술을 어떤 수단을 통해서든지 가져와서 복사하는 이른바 '분석공학'(reverse engineering)에 상당한 솜씨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련 최초의 원폭은 서방에서 도용한 기술의 도움으로 제작되었고, 설계상 차이는 있으나 최근 선을 보인 소련의 우주왕복선은 NASA(미국항공우주국)의 우주왕복선과 너무나 닮았다.
 

(표1) 소련의 과학기술 연구비 추이


왜 낙후됐는가?

소련 과학기술이 낙후된 근본적인 원인은 소련정부의 정책적인 실패 뿐아니라 문화적 역사적 정치적인 제도에 깊은 뿌리를 둔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소련 과학기술의 구조적인 단점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첫째 소련의 과학기술은 지리적 또는 인력면에서 극단적으로 편중되어 있다. 소련의 과학자들은 두개의 큰 집단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 중의 하나는 대학과 기술연구소 그리고 순수과학을 연구한 과학아카데미와 그 산하연구소에 배속된 사람들의 집단이다. 다른 하나는 일부 응용과학과 대부분의 엔지니어링 연구를 하는 정부의 각부 산하연구소에서 일하거나 또는 앞의 두집단 중 어느 한 곳에서 온 사람들이다. 미국 외국 응용과학평가센터 보고에 따르면 대학과 기술연구소의 수준은 대부분 매우 낮고, 수천개의 정부부처산하의 산업·생산연구소 중에서도 서방의 연구소와 수준이 비슷한 연구소는 얼마되지 않는다.

소련에서 가장 우수한 과학자들은 거의가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 또는 그 주변에 자리한 6~7개의 대학과 과학아카데미 연구센터에서 일하고 있다. 이런 지리적인 불균형 때문에 과학자들은 자기의 분야에서 주요한 업적을 올리기 위해서는 모스크바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연적인 결과로 소련의 과학은 연구소 소장에게 권력이 집중되어 있어 간혹 과학적인 재능과 당에서 영향력을 가진 연구소장이 있다면 그의 연구소와 연구분야는 번창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이다.

둘째 소련 관리제도의 폐단이다. 관료들은 무엇보다 자기보호를 위해 진취적인 일은 피한다. 소련에서 과학은 국가의 기능이며 그 주도적인 정책운영은 공산당이 담당한다. 관료계통의 최고수준에는 보건 국방 교육 및 농업과 관련된 장관으로 구성되는 각료회의가 있고 국가계획위원회 국가과학기술위원회 그리고 과학 아카데미와 그 산하연구소 및 교육기관이 있다. 과학자들이 착수하는 프로젝트는 대개 상부층에서 선택되어 계층을 타고 과학자에게 내려온다. 1960년대 서방에서는 분자생물학이 가장 주목을 받은 연구분야였지만 소련에서는 많은 생물학자들이 이런 사실을 인식했음에도 불구하고 관료들의 인식이 늦어져 과학자들은 이 연구에 필요한 연구자원이 배당될 때까지 오랜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셋째 서방과의 과학기술경쟁에서 소련의 가장 큰 저해요인은 아이디어가 자유롭게 유통되는 통로가 막혀있다는 점이다. 소련 과학자들은 거의가 서방과는 격리되어 있다. 큰 연구센터 밖에서 일하고 있는 과학자들도 센터 내부의 과학자들과 격리되어 있으며, 이론가들은 그 이론을 실험하는 실험가들로부터도 격리되어 있는 실정이다. 다른 도시에 있는 연구소를 방문하거나 심지어 전화통화를 하는 것도 어려운 경우가 있고 즉각적인 과학정보의 교환은 거의 불가능하다. 서방의 과학기술에 관한 뉴스는 거의 1년 뒤에나 얻을 수 있고 과학연구의 결과가 출판되자면 2년이나 걸린다. 소련사회에서 비밀에 대한 강박관념은 대단하며 과학적인 일에는 각별하다. 각 연구소의 정보유통 제어기구는 과학문서의 내용을 검열할 권한을 갖고 있고, 복사기와 컴퓨터의 관리책임을 지닌다.

넷째 중앙집권화된 소련의 과학제도에서 기초연구에서 실제응용까지 아이디어의 발전과정은 역설적으로 오히려 분산되어 있다. 과학아카데미의 연구소와 각 정부부처의 연구소는 체제상 너무나 서로 격리되어 있어, 흔히 봉건시대의 왕국과 비유된다. 과학아카데미의 과학자가 매우 뛰어난 아이디어를 갖고 있다고 해도 이것이 관료조직을 통해 과학기술위원회로 올라간 뒤 다시 관료조직을 통해 산업연구소로 내려갈 때까지 실용기술로 전환될 수 없다. 이런 과정에는 뜻하지 않은 많은 잠재적인 장애가 도사리고 있어 아무리 시간을 다투는 신기술의 개발이라도 업무추진이 지체될 수 밖에 없다.

다섯째 제도의 경직성과 경쟁이 배제된 현실에서 과학자들의 안이한 태도가 과학자의 재능개발을 막는다. 소련은 과학자들을 우대하고 있다.

이들의 생활은 보편적인 소련인에 비해 매우 높은 수준이다. 예컨대 과학기술분야 연구소나 대학 정교수의 봉급은 산업계 같은 부분의 직종보다 훨씬 높다. 소련 과학자들에게는 서방 과학자들과 비교가 안될 정도의 권위와 특권이 주어지고 있다. 이보다도 더 중요한 사실은 소련의 과학은 적어도 오늘날에는 사상적인 제약에서 비교적 자유롭다는 것이다. 이런 권위와 특권, 자유가 가져오는 필연적인 결과는 뛰어난 수재 뿐 아니라 과학의 물질적인 혜택과 지위만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과학계에 끌어들이고 있다. 이들은 일단 과학자가 되면 제도적으로 쉽게 승진한다. 열심히 일하게 만드는 유일한 인센티브는 박사학위를 따는 것이다. 박사학위를 취득하면 승진하고 자동적으로 봉급이 50% 인상된다. 일단 박사학위를 취득하면 아무일도 하지 않아도 여생을 편안하게 보낼 수 있다.

페레스트로이카와 과학기술

소련 과학기술정책의 기본방향은 공산당의 강력한 지도 아래 기본방향이 결정되며 5년마다 결정되는 소련경제 및 사회발전의 기본방향에 따라 추진된다. 각료회의에서 확정된 과학기술정책은 최고회의가 승인하게 된다. 각료회의는 과학기술정책의 결정에 앞서 소련 전체의 경제계획을 책정하는 국가계획위원회와 그 테두리안에서 구체적인 과학기술계획을 정하는 국가과학기술위원회의 보좌를 받는다. 실제의 연구개발은 각 부의 부속 연구기관에서 실시하지만 일부 고등교육기관에서도 한다. 한편 과학아카데미는 기초연구를 계획 관리한다.

1986년부터 시작된 제12차 5개년계획에서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정책의 일환인 과학기술진흥의 기본방향으로 과학기술의 전면적인 촉진 △투자배분 정책의 전환과 자원의 가장 중요한 방향으로의 집중 △생산기술의 개선 및 자동화의 촉진 △공업제품의 질향상 △발명 특허 라이선스제도의 개선 △과학-기술-생산의 통합 △기초과학의 발전 △체제재건 등을 설정했다.

또한 소련은 현재 △연료 에너지 △식량생산 △생산관련기술(전자 원자력 자동화 신소재 생물공학 에너지 및 자원절약기술) △우주개발 △기초과학 등 5개영역을 중점적으로 연구개발하고 있다. 이 중에서 우주개발은 소련의 국제적 지위향상에 공헌한다고 인식하고 특히 적극적인 연구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소련의 과학기술은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의 영향으로 최근 중요한 변환기로 접어들었다. 그 주요한 변화추세는 다음과 같다.

소련 과학아카데미총재 마르추크가 이끄는 소련과학계의 활성화 캠페인 결과 과학아카데미 간부회 멤버의 거의 반수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최근 전례없이 교체되었다.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75세 이상인 7명의 아카데미 위원과 9명의 아카데미 정회원은 1990년에 만료되는 임기를 2년 앞두고 자리를 비우는데 동의했다. 이들은 전원이 최고회의 자문역으로 남을 것이며 따라서 최고회의 위원이 누리는 특권중 많은 부분을 그대로 가질 것이다. 그러나 아카데미 업무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은 크게 줄어들었다. 이들의 교체는 일련의 아카데미회원의 투표를 통해 결정되었으며, 은퇴에 동의한 사람 중에는 마르추크보다 앞서 국가과학기술 위원회 의장이던 에너지전문가 키릴린도 있었다.

한편 47명으로 구성된 소련 과학아카데미 간부회 회원으로 선출된 사람중에는 이미 고인이 된 사하로프도 포함됐었다. 모든 후보자를 간부회에서 미리 선출하고 총회는 다만 추인만을 하던 종전의 선거방법과는 달리 이번의 후보자들은 선거때 아카데미회원들이 추천할 수 있었다. 이 총회는 또 1930년부터 1937년 실종될 때까지 아카데미 과학기술연구소의 소장이던 부하린의 복권을 만장일치로 승인했다.

경쟁적인 연구풍토로 전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추진 이후 소련지도층의 과학기술에 대한 새로운 인식으로 기초연구에 대한 지원은 크게 강화되기 시작했으며, 연구비 신청에 대한 심사도 서방식 제도인 전문가심사제도(peer review system)가 도입되었다.

소련 과학아카데미총재 마르추크는 1988년 6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소련 공산당회의에서 연설하는 가운데 소련의 기초연구의 진정한 잠재력은 미국의 5분의 1에 불과하며 기초과학자의 수는 미국의 2분의 1, 그리고 연구장비의 부족으로 소련의 기술집약 수준은 미국의 3분의 1에 미달한다고 말하면서, 기초연구비는 소련의 연간 33억 달러에 비해 미국은 1백50억 달러를 사용한다고 지적함으로써 소련은 기초연구 노력에서 미국과 큰 격차가 있음을 처음 구체적으로 시인했다. 이보다 앞서 고르바초프도 과학의 사회적 지위와 과학적 업적의 권위가 최근 수년간 감퇴되었다고 비판하고, 과학연구에 배정된 자금의 6.5%만이 소련 기초연구의 대부분을 수행하는 학술연구소로 간다는 것은 비정상적이라고 언급했다.

한편 소련정부는 1989년도의 기초연구에 대한 정부 지원을 20% 늘린 2백15억 루블로 증액했는데, 이 증액의 대부분은 소련 과학아카데미와 각 공화국 아카데미의 활동에 집중 투자되었다. 이 증액조치의 배경으로는 고르바초프가 여러차례에 걸쳐 소련 국가경제에 대한 기초과학의 잠재적 중요성을 강조했으며, 과학계에서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투자자금을 증액해야 한다고 건의했다는 점이다.

소련 재무상 고스체프가 1989년도 정부세출 계획을 설명하면서 발표한 기초연구 추가자금은 특히 고온초전도, 새로운 건설자재의 개발, 생물공학 및 정보기술과 같은 분야의 유망한 연구를 지원하는 데 사용되었다. 또 국가과학기술위원회가 신규 연구신청에 대한 특별자금을 직접 처리할 수 있고 각 연구소와 연구팀간에 경쟁베이스로 연구비를 제공할 규정도 제정했다.

마르추크에 의하면 소련은 기초연구 프로젝트에 대한 자금을 지원하는 특별기금을 설정하고 개인 과학자와 연구소간의 공개경쟁으로 전문가심사제도를 통해 자금을 배정할 것이라고 한다. 이 새로운 기금은 소련의 과학연구를 경쟁베이스에 올려놓음으로써 종전에는 연구소 소장에게 일괄지원금(block grant)으로 제공하던 전통적인 제도를 피하고 자금을 직접 연구실장에게 배정하기 위한 광범위한 시도의 일부라 할 수 있다. 소련은 이보다 앞서 고온초전도를 위한 연구에서 어떤 그룹에게 자금을 지원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데 경쟁방식을 적용했으며 이 방법은 모든 연구영역에 걸쳐 일반화되어 가고 있다.

미국에 10년 뒤져

현재 소련은 기초과학과 응용과학에 있어서 높은 수준에 도달해 있지만 군사부문과 우주개발 분야를 제외한 첨단기술 분야에서는 서방에 크게 뒤처져 있는 실정이다. 미국 중앙정보국이 최근 의회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미소간 첨단과학 분야의 기술격차는 마이크로프로세서 8~9년, NC(수치제어) 공작기계 8~12년, 미니컴퓨터 8~10년, 슈퍼컴퓨터 10~12년, 소프트웨어 7~11년, FMS(다목적생산시스템) 7~8년 등이다. 첨단과학과 생산기술 분야의 낙후는 최근 계속되고 있는 소련 경제침체의 직접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여 왔다.

과학연구 분야와 기술혁신의 문제에 있어서 소련의 또다른 고민은 새로운 첨단 생산양식을 위한 기술혁신이 이루어지는 경우에도 이를 실제로 생산현장에 활용하기까지에는 시간이 너무 길다는 것이다. 실례로 미국 일본 서독과 같은 서방의 기술 선진국에서는 새로이 개발된 혁신기술의 절반이 1년이내에 직접 생산현장까지 전달되어 응용되고 있으나, 소련의 경우에는 3년 이상이 소요된다. 따라서 새로운 기술혁신이 이루어져 이를 응용한 새로운 기계나 장비가 생산현장에 투입되어도 이들 물품이나 방식은 이미 구식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정책 실시 이후, 소련은 첨단과학과 생산기술의 혁신을 저해해온 과거의 과학기술 투자정책의 오류와 과학 기술자들의 창의성을 유도하기 위한 인센티브 부족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이를 시정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효율적인 과학기술 투자정책과 컴퓨터를 비롯한 첨단과학분야의 대대적인 진흥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과거 국가의 경직된 과학기술 행정을 개선하여 정책의 효율성을 제고하는 동시에 첨단과학기술의 선진국인 서방과의 협력 확대를 적극적으로 모색하고 있다.
 

(표2) 미·일·소 첨단기술비교


퍼스널컴퓨터에 높은 관심

60년대 초에 컴퓨터가 민간기술영역으로 전환되자 소련의 중앙계획당국은 컴퓨터기술에 냉담해졌다. 컴퓨터가 일반의 손으로 들어가게 되면 정보와 통신에 대한 국가의 통제가 직접적으로 위협받기 때문이었다. 이리하여 소련정부는 1962년 과학아카데미의 컴퓨터를 완전히 없애기로 결정했는데 이것은 돌이킬 수 없는 심각한 오류였다.

현재 소련에는 퍼스널컴퓨터를 양산할 수 없고, 공장기계용의 첨단과학장치나 또는 전산화된 제어장비도 물론 없다. 소련 전국의 퍼스널 컴퓨터수는 1989년 현재 약 30만대 밖에 안된다. 소련에서 가장 빠른 컴퓨터는 미국의 크레이사나 일본의 후지쓰사와 같은 메이커들이 만든 슈퍼컴퓨터보다 훨씬 느리다. 소련의 반도체 생산고는 전세계의 3%밖에 차지하지 못한다. MIT대학의 소련전문가 그래함은 "이 분야에서의 소련의 후진성은 충격적"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오늘날 소련은 이 분야에서 경쟁할 만한 것을 별로 보유하고 있지 않다. 일본과 미국의 반도체회사들은 전자소자의 크기를 미크론(μ, 1${0}^{-6}$m) 이하로 줄일 수 있는데 비해 소련은 최상의 칩이 1.8 미크론의 리토그래피를 사용하고 있다. 서방세계에서는 산업계와 연구소에서 보편화되기 시작한 32비트 퍼스널 컴퓨터를 이들은 아직도 생산하지 못한다. 소련 최고의 메모리 칩은 25만6천비트의 데이터를 기억할 수 있는데 비해 일본과 미국 그리고 우리나라는 메가비트(1백만비트)급의 용량을 가진 칩을 생산하고 있다.

고르바초프 집권 이래 소련은 교육시스템을 비롯한 일반국민의 컴퓨터교육에 새로 역점을 두기 시작했다. 소련은 이 시책의 일환으로 1990년까지 6만개의 중고등학교에 1백만대의 퍼스널컴퓨터를 보급할 목표를 세웠으며 1985년 9월 중고교에 '정보학'에 관한 기초과정을 도입했다. 소련의 컴퓨터교육운동의 주도자는 소련 과학아카데미 부총재이며 고르바초프의 영향력있는 고문인 벨리호프와 소련 과학아카데미 시베리아 지부 컴퓨터센터소장인 예르소프다. 소련 과학아카데미는 정보기술 및 자동화부를 신설하고 벨리호프를 책임자로 임명했다. 이 부서의 임무는 아카데미 산하연구소의 관련업무를 감독하고 조정하는 일이다.

소련은 이 컴퓨터교육 프로그램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1985년 여름 6만명의 중등학교 교사들을 모스크바대학이 운영하는 프로그램으로 훈련시켰다. 새로 도입된 이 과정은 예르노프의 감독으로 제작된 '정보학 및 컴퓨터기술의 기초'라고 불리는 교과서를 바탕으로 한다. 이 교과서에는 두개의 판이 있는데 하나는 컴퓨터를 이용하고 다른 하나는 컴퓨터없이 사용한다. 이 책은 컴퓨터의 이용법을 서술하고 특정 연산방식과 초보적인 프로그래밍을 설명한다. 훈련은 필름으로 보완되지만 대부분의 경우 교사들이나 학생들은 컴퓨터를 만질 기회가 거의 없다.
현재의 구조에서 퍼스널컴퓨터가 소련사회에서 효율적으로 이용되기란 쉽지않다. 소련이 퍼스널컴퓨터를 채용하는 패턴은 서방의 경우와는 전혀 다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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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07월 과학동아 정보

  • 박용석 소·동구반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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