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모함, 잠수함, 이지스함 등 외국의 첨단의 군함들을 보면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 우리는 저런 군함을 만들 수 없는가’하고 한탄한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우리가 전통적으로 가장 우수한 군함을 만들어온 해양국가라는 사실은 까마득히 잊고 있다. 우리는 육지에서 완패한 임진왜란을 바다에서 역전시킨 해양강국이었다. 그리고 이는 고려시대 이래로 이어져온 조상들의 탁월한 선박 건조 능력이 바탕이 됐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한선(韓船)의 선구자 완도선
1984년 전남 완도군 약산면 어두리 어두지섬 앞바다에서 한척의 침몰선이 발굴됐다. 함께 인양된 3만여 점의 도자기를 분석한 결과, 이 배는 고려시대 11세기 중반의 선박으로 해남군 산이면 일대의 가마에서 생산되는 도자기를 가득 싣고 항해하던 중 침몰한 것으로 밝혀졌다. 선체와 함께 인양된 유물은 도자기를 비롯해서 총 3만여 점으로 고려청자가 대부분이며 잡유 26점, 토제유물 2점, 철제유물과 목제유물이 각각 18점과 9점이다. 이들 유물은 전라 경상 제주도의 지방관청, 민가, 그리고 사찰 등에서 실생활에 사용된 것으로, 배로 이 유물들을 운송하다 이곳에서 침몰된 것으로 추정된다. 15m 해저에서 발굴된 완도선은 선수와 선미부가 유실된 채 배의 중앙부분만이 남아 있으나, 우리 한선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구조적 특징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아시아권에서 발견된 구조선(構造船) 중에서 가장 오래 된 것으로 추정되는 완도선은 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통일신라시대의 배와 더불어 한선의 발생과 발달과정을 알려주는 중요한 유물로 평가된다. 완도선의 구조는 몇가지로 요약된다. ①용골이 없고 바닥이 평평한 단면구조이다. ② 가룡목으로 좌·우현을 고정시켰다. ③흠불이로 외판을 접합한 구조로 돼있다. ④ 충해 방지를 위해 연화법(그을리기)을 사용했다. ⑤돛대가 하나인 단주범선이다. ⑥사용된 선재는 한국산 육송 등이며, 나무못이 사용됐다. ⑦복원선의 길이는 약 9m, 선폭은 약 3m, 무게는 약 10t이다.
완도선이 갖고 있는 한선의 특성은 바로 우리 한선(韓船)의 전통적 특성이다. 한말까지 우리 한선은 바닥이 평평한 평저선 형태를 유지했다. 그것은 갯벌이 많은 우리 연안의 특성을 이용한 것으로 배를 갯벌에 올려놓고 물건을 싣고 내리기 편리하며, 전투시 배를 은폐시켰다가 유리한 시점에 배를 출항시키기 위한 방편이었다. 한선은 용골이 없는 대신 가룡목을 사용해 종강도와 횡강도를 강하게 했으며, 배의 격실(칸막이 방)을 만드는데 이용했다.
그리고 한선은 쇠못 대신 참나무나 박달나무로 된 나무못을 사용했다. 쇠못은 염분이 있으면 쉽게 부식된다. 철이 부식할 때 나무도 함께 부식된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우리 선조들은 나무못을 사용했다. 따라서 배가 물에 들어가면 밖에 있는 선재가 불어 나무못은 오히려 강도가 높아진다. 고려 원종 15년(1274) 고려와 몽고 연합군이 일본 원정을 단행했을 때, 일본 군선과 몽고의 군선은 풍랑에 파손됐으나 고려선만은 완전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것은 일본과 몽고의 군선이 쇠못을 사용해 풍랑에 쇠못 구멍이 점차 넓어져 자연 파손됐으나, 고려 군선은 나무못을 사용하고 가룡목이 풍랑에도 선체를 지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신도시를 만든 조운선(漕運船)
조선이 건국되면서 수도를 개성에서 지금의 서울인 한성으로 옮긴 이유 중의 하나가 조운로가 막혀버린 때문이었다. 개성을 굽이쳐 흐르던 예성강의 토사가 쌓여 선박의 운항과 접안이 어렵게 됐다. 이로 인해 지방의 세곡과 물산들이 때맞춰 도착하지 못해 개성은 생필품 부족과 물가의 폭등으로 민심이 흉흉해졌다. 이 위기를 극복해 민심을 안정시키는 방안이 바로 조운이 편리한 한성으로 수도를 정하는 것이었다. 물의 양이 많고 맑은 한강은 조선을 부흥시킬 조운로로 이용되기에 제격이었다. 지금처럼 육로가 개발되지 못한 시절에 각지방의 특산물과 생산품을 쉽게 유통시킬 수 있는 방법은 수로였다. 작게는 나룻배로부터 크게는 병선이나 조운선이 동원돼 많은 물동량을 적은 노동력과 저렴한 비용으로 먼 지방까지 운반할 수 있었다.
특히 조운선은 국가에서 운용하던 관용선(官用船)으로 관청에서 수납한 세곡과 중앙정부에서 소용되는 일용품이 거의 조운선으로 운송됐다. 조운선은 조선 전기 병조선(兵槽船)이라 불렸다. 그 이유는 상장(上粧, 구조물)을 설치하면 병선이 되고, 상장을 철거하면 조운선이 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것은 평시에는 조운선으로 활용하다 전시에는 상장을 설치해 병선으로 운용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평상시 일반업무를 담당하다 유사시 재빠른 전시체제로 돌입하기 위한 지혜의 소산이었다.
조운선은 쌀 8백석, 6백석, 3백석을 적재하는 세 종류가 있는데, 이를 운행하는 인원은 겨우 22명, 20명, 18명 정도였으니 당시 항해술과 화물 선적술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 결과 조운선이 정박하는 나루와 포구에는 관련 관리와 인부, 그리고 상인들이 모이게 되고 이들의 식사와 침식을 위해 또 다른 주민들이 모이게 됐다. 처음에는 조그만 마을로 시작된 나루와 포구는 얼마 되지 않아 번창하는 도시로 변하게 됐다. 조선시대 조운선이 정박해 새로운 도시가 된 곳 중 대표적인 예는 서울의 용산과 마포, 노량진, 동작나루, 양화진 등이며, 충청도의 충주, 전라도의 법성, 덕성, 영산포, 강원도의 원주, 춘천, 황해도의 금곡, 조음, 그리고 평안도의 안주, 삭주, 의주 등이 있다.
바다의 수문장 판옥선(板屋船)
임진왜란 때 조선의 해양방위를 담당한 주력 전선은 판옥선이었다. 판옥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7년 전인 명종 10년(1555)에 만들어졌다. 조선 초기 조선의 군선은 맹선제였다. 전투인원 80명, 60명, 30명이 승선할 수 있는 대맹선, 중맹선, 소맹선이었는데, 이것은 모두 왜선에 비해 선체가 컸으나 속력이 느린 단점을 갖고 있다. 당시 우리나라 연안을 노략질하던 왜구선은 조선의 군선에 비해 선체가 작고 날렵해 우리 군선은 왜구선을 추격할 수 없었다. 조선 수군은 왜구선을 추격하기 위해 소형 경쾌선으로 전환할 것을 호소했다. 이 호소에 의해 소형 경쾌선이 사용되면서 왜구선을 추격할 수는 있었지만 전투는 패배했다. 그것은 선체가 작아 적을 제압할 병사와 무기를 적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크고 작은 왜변에 조선 군선이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자, 중종 18년 군선 제작 회의에서 대형 군선을 만들자는 제안이 나왔고, 백병전을 위주로 하는 왜선을 제압하기 위해선 대형 군선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이 계속 제기됐다. 중종 39년 판중추부사 송흠은 당시 표류해서 도착한 중국선과 왜선을 보면 사면을 모두 판자를 사용해 옥(屋, 집)을 만들어 승조원의 안전을 도모하고 있다고 전제하고 우리도 옥선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송흠의 제안은 수차에 걸쳐 논의됐으며 그 제안의 타당성이 인정돼 명종 21년 3월 비변사의 동의를 거쳐 중국, 일본과는 전혀 색다른 군선이 만들어졌다. 일본과 중국 군선과 비교해 판옥선의 장점은 다음과 같다. 첫째 견고하기 때문에 풍랑 중에도 항해가 가능하며 일시에 6문의 포를 발사할 수 있다. 둘째 선체가 장대해 백병전을 위주로 하는 왜군의 돌입을 저지할 수 있었다. 셋째 포를 설치하는 포좌를 옥위(상갑판)에 설치해 위에서 아래를 보며 화력을 구사해 사정거리를 멀리하면서 명중률을 높일 수 있었다. 넷째 활을 쏘는 사부와 노를 젓는 노군을 옥 안에 위치시켜 전투시에도 위험을 줄여 사기를 높일 수 있었다. 충무공 이순신은 판옥선의 우수성에 대해 “왜군이 수전에 패한 것은 그들이 수전에 능하지 못해서 패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군선이 견고하고 장대해 대포를 안치하고 안전하게 전투에 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평가했다.
이 평가는 판옥선을 실전에 참여시키고 그것을 지휘한 충무공의 견해다. 판옥선의 역할과 군선으로서 판옥선의 우수성을 가장 적절히 표현한 것이다. 판옥선은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후에도 상당 기간 조선의 해양방위를 담당하는 주력 전선으로서 바다의 수문장 임무를 담당했다.
신비의 돌격선, 거북선
거북선은 임진왜란 때 조선 수군이 왜군과의 해전에서 승리하게 한 군선의 일종이다. 세인의 입에 자주 오르내리면서도 그 실체가 아직도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은 신비의 배이기도 하다.
거북선은 군선이었기 때문에 주변국의 해양전략과 선형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꾸준히 선형변화를 해왔다. 그러나 거북선 구조에 대한 기록은 정조 때 편찬한 ‘이충무공전서’가 유일한 것이다. 거북선의 연구나 거북선의 복원은 모두 이 책에 의존해 왔다. 불행히도 충무공전서의 거북선 해설은 그 내용이 자세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추상적이며, 그것마저도 임란 당시의 거북선이 아닌 정조 당시의 거북선에 관한 설명이다. 또한 거북선에 관한 과학적 접근보다는 의미 부여에 관심을 집중시키므로써 실제보다 과장된 것이 많다. 거북선이 일류 최초의 철갑선이라거나 잠수함의 효시라는 부분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과장으로 인해 거북선이 갖추었던 점투함으로서의 진정한 우수성이 매몰되고 말았다.
임란 당시의 거북선은 “속력, 화력, 안정성에서 우수한 군선이었다”고 이순신 스스로 평가했듯이 전쟁에서 가장 위험하고 중요한 돌격 임무를 거북선에게 부여했다. 돌격선의 임무를 탁월하게 수행한 거북선의 군공이 인정돼 밤낮으로 거북선을 만들어 실전에 배치하자는 것이 조정의 공론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중 거북선은 많이 건조되지 않았으며,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 오히려 축소됐고, 거북선 개조론이 꾸준히 제기됐다. 거북선의 개조론이 제기된 것은 선체가 커져 돌격선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됐기 때문이다.
거북선에 관한 기존 연구와 이것을 토대로 복원된 거북선은 모두 돌격선으로서의 기능이 소멸된 정조때의 거북선을 말하고 있다. 정조시대의 거북선은 전투시 다음과 같은 단점을 갖고 있다. 첫째 급박한 전투상황에서 노를 저으면 포를 발사하지 못하고, 포를 발사하면 노를 사용할 수 없다. 둘째 적진으로 돌입한 거북선이 전세가 불리할 경우 곧바로 후진해야 하나 후진 기능이 전혀 없다. 셋째 속력이 느려 돌격선의 기능을 전혀 발휘할 수 없다. 이와 같은 사실은 임란 당시 거북선이 적진으로 돌입하면 적은 흩어지고 도망했다는 점과 속력, 화력, 안정성이 여타의 군선보다 우수했다는 이순신의 증언과 배치되는 결과라 할 수 있다.
거북선이 탄생된 것은 다음과 같은 전투환경의 변화에 기인된다. 임란 당시 주력군선은 판옥선이었다. 판옥선은 사부와 노군을 판옥 안에 위치시키고, 포를 쏘는 포수는 옥상에 위치시켜 전투시 포의 명중률을 높이고 기동을 원활히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선체가 커서 속력이 느리고, 개방된 위치에서 포를 쏘던 포수들이 적탄에 맞아 죽는 일이 발생했다. 이순신은 전투시 적진을 혼란케 만든 후 판옥선의 우수한 화력을 이용해 적을 제압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던 중 거북선을 창안케 됐다. 거북선은 판옥선의 장점인 노요원과 포요원을 구분하고 그들 모두의 안전을 도모할 수 있는 덮개를 만들었다. 그리고 속력을 보완키 위해 선체를 작게 만들었다.
안전한 3층 구조
거북선의 갑판이 둘이라는 점과 포가 판옥선과 같이 상갑판에 위치했다는 것은 이충무공 전서에도 다음과 같이 언급돼 있다. 즉 통영 거북선을 설명하는 부분에 “거북선의 난간을 따라 마루를 깔고 마루 주위에 방패를 꽂고, 그 위에 또 난간을 설치했다. ... 현측 난간 좌우에 각각 포혈 10개 복판(덮개) 좌우에 각각 포혈 10개와 복판 좌우에 각각 6개의 포혈이 있다”는 것은 거북선의 갑판이 중갑판과 상갑판으로 분리돼 있음을 의미한다. 영조 때 균세사로 연해지방을 감찰하고 돌아온 박문수는 “이충무공의 기록을 상세히 조사한 결과 거북선의 복판 좌우에 6문의 포문이 있다”고 하고 임란당시 거북선은 주갑판에 노군과 사수(활쏘는 사람)가 위치하고 포수는 상갑판에 위치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 증언은 거북선이 3층 구조로 1층은 수군의 침실과 군량 무기 창고로 이용됐으며, 2층은 노군과 사부가, 3층은 포요원이 위치해 전투시 포와 활 그리고 기동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었던 군선이었다. 거북선의 크기는 박문수가 지적한 것처럼 포혈이 6개였던 것이 정조 때 8개로 증가돼 돌격선으로서의 기능이 상실됐고, 길이도 20여m였던 것이 영조-정조대에 이르러 33m로 커졌던 것이다.
16세기 동양에서 가장 훌륭한 조선술을 보유했던 조선은 17세기 이후 군선 개량에 소극적이었다. 거북선의 선형 변화에서 보여주듯 전투기능보다 시위형으로 변화됐다. 이는 조선의 지도이념인 주자학이 실용성보다 의례를 중시하면서 집권층이 집권을 유지하기 위해 민의에 반하는 붕당정치와 세도정치로 일관함으로써 백성들의 창의성과 기술개발을 우대하기는커녕 오히려 기술자를 쟁이(장인)라는 말을 붙여 천시한 결과였다.
우리와는 반대로 서양과 일본, 그리고 중국은 국민의 창의성과 기술 개발을 장려해 증기선을 만들고 위력적인 대포를 제작하게 됐다. 그들 근대식 군함이 조선 영해를 침범했을 때, 인력과 풍력에 의존했던 우리나라의 범선은 그들의 적수가 되지 못해 급기야 강제개항이라는 국치를 당하게 됐다.
해방 이후 우리는 조선업 분야에 괄목한 발전을 이룩해 세계 2위의 선박 수주국이 됐다. 이제 우리들은 전쟁환경 변화에 적응하고 적을 제압할 수 있는 군함을 보유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창의력과 지혜를 개발하는 일이 무엇보다 선행돼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