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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로 마우스와의 첫 대면은 나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이 작은 로봇을 직접 만들어 보겠다는 충동이…

입춘이 지나고 날씨도 꽤 따뜻해졌지만 교정에 쌓인 눈은 아직 그대로다. 이 눈이 녹으면 나는 대학에서의 마지막 학년을 맞게 되고 다시 눈이 쌓이면 거의 매일 찾아오던 도서관도 떠나게 될 것이다.
 

서울대 제어계측공학과 4학년 최혁호 학생


가볍게 좋은 성적을 받아

나의 중·고등학교 시절은 참으로 단조로운 생활의 연속이었다. 운이 따라서 인지 머리가 좋아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별다른 노력없이 좋은 성적을 거두는, 약간 특이한 학생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 나를 가장 지루하게 만들었던 것은 피곤한 공부가 아니라, 상대할 만한 맞수가 내 가까이에 없었다는 것이었다. 경쟁자가 없이 공부를 한다는 것은 따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신의 궁금증을 놓고 함께 토론할 만한 동료가 없다는 것은 참으로 비참한 것이었다.

또한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때까지도 상당히 여유를 갖고 생활했다. 반면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입시준비에 바빴던 것으로 기억한다. 힘들게 노력하지 않고도 좋은 성적을 거두는 나를 스스로 이상하게 여긴 경우도 많았다.

그때 나는 나와 비슷한 수준의 여러 사람이 모여 함께 토론할 수 있는 '대학'이라는 곳을 초조하게 동경했다. 빨리 대학생이 돼야겠다는 기대 속에서 지루하고 따분한 시간들을 보낸 것이다. 같은 학문적 이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얘기를 나누면 나의 이상도 실현되리라 믿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무엇을 만들기를 좋아했다. 실제로 원하는 것을 그럭저럭 만들어낼 수 있는 손재주도 가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때 누가 장래 희망을 물어오면 세상에 아직 없는 전혀 새로운 물건을 만들어내는 기술자가 될 것이라고 했다.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지만 그 때는 자연과학은 실제적인 가치가 없고 이론에만 그치는 학문으로 여겼다. 기술만이 실제적 가치가 있다고 본 것이다.

대학에 대한 기대 속에서 대학입시를 치르고 원서를 썼다. 내가 선택한 학과는 그 때까지만 해도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았던 제어계측공학과였다. 사실 나 자신도 지원한 학과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었다.

단지 고등학교 시절에 들어본 적이 있는 마이크로 마우스(모형 미로의 중심점을 자신의 힘으로 찾아가는 소형 로봇)와 관계된, 즉 로봇을 만드는 공부를 하는 곳으로 짐작하고 있을 뿐이었다. 마이크로 마우스와 처음 만난 사람이 대부분 그렇듯이, 나 역시 매우 신기하게 생각했으며 직접 만들어 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겨우 합격은 했다. 대학 입학시 나의 성적은 과에서 하위권이었을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아니 그렇기를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1학기 말에 시험거부가 있었다. 이 일은 내게 큰 충격을 주었다. 분명 내가 기대해 왔던 대학의 분위기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사건이었다. 아무튼 시험거부는 내가 대학에 온 목적을 다시금 생각하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시험거부에 반대했다. 공부와 시험은 완전히 개인적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완전히 개인적인 일들이 여러 사람의 합의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대학생활에 대한 나의 기대는 점점 무너져 갔다. 주위 학우들과도 차츰 멀어져가는 느낌이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대학에 왔는가'라는 물음에 대답해야 했다. 그러는 사이에 1년이라는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입학 전에 생각하던 대학에 대한 기대는 2,3학년을 거치면서 더욱 더 약해졌다.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이 모여 서로의 이상을 실현해 나가리라는 나의 기대는 거의 사라져 갔다. 공부에만 열중하는 것을 용납치 않을 정도로 우리 주변에는 복잡한 문제들이 너무 많기 때문일까. 지금까지 열심히 공부했으니 이제는 쉬어가며 공부해도 괜찮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대부분의 과 학우들의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명문대학이라는 이름이 가져다 주는 특권은 우리들을 더욱 수동적이고 나태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과공부에 대한 토론과 공동연구는 거의 불가능해졌고 대학에 걸었던 나의 기대는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아울러 소속감과 자부심도 함께 사라져 버렸다.

매사가 그렇듯이 특히 공부는 자신에게 주어진 한정된 시간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사용하느냐에 크게 좌우된다. 우등생과 열등생의 차이는 머리의 좋고 나쁨이 아니라 자신의 시간 관리에 누가 더 효율적인가에 따라 결정된다고 늘 생각해 왔다. 실제로 시간을 더 효과적으로 사용하기만 하면 더 많은 여유를 가지고 더 많은 내용을 공부할 수 있다.

만능을 요구하고

입학 초기에는 공대에 입학한 것에 대해 별로 자랑스럽게 생각하지 못했다. 공학은 학문이 아니라 직업획득의 수단정도로 인식됐기 때문이었다. 공학교육=직업교육. 지금은 전적으로 잘못된 사고였음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나는 공학도를 단순한 기능공 정도로 여기고 있었다. 공학은 자연과학을 하는 이들보다 좀 열등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생각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차츰 바뀌어 갔다.

내가 소속되어 있는 학과는 공대의 다른 과들과는 꽤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우선 공대답지 않게 엄청난 양의 수학적 지식을 요구한다. 또한 여러 분야의 잡다한 지식들을 많이 요구한다. 우리에게 '만능'이 되기를 강요하고 있다.

원래부터 수학을 미치도록 좋아했고 꽤 소질도 있었던 터라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나에게 알맞은 분야라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기발한 아이디어만 있으면 충분한 학문으로 여겼는데 그렇게 만만하게 본 학문이 하면 할수록 심오한 세계로 나를 이끌었다. 게다가 거의 완전한 수학적 기초를 갖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실험시간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아주 단순한 작업들의 연속이 나를 괴롭혔던 것이다. 그때마다 내가 이 정도의 일을 하려고 대학에 왔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생각도 곧 교정됐다. 물론 단순한 기능공이 되기 위해 대학까지 오지는 않았다. 그러나 앞으로 이런 작업을 직접 하지는 않더라도 할 수는 있어야 하며 실제로 해본 경험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할 줄 알면서 안하는 것과 몰라서 못하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우수한 엔지니어가 되려면 자신의 학문과 관련된 일들을 직접 한번씩은 해보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가끔은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외국의 대학생들이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질 때가 있다. 내가 생각해 왔던 이상적인 공부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일까.

오늘도 외로이 도서관 열람실에서 창밖의 눈덮인 관악산을 멀리 바라본다. 이땅의 대학생으로서의 삶이 현실과 너무 유리된 것은 아닌가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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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03월 과학동아 정보

  • 최혁호 4학년 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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