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이익.”
드디어 국제우주정거장(ISS)과 소유스 우주선을 연결한 해치가 열렸다. 좁은 소유스 우주선에서 하루에 열여섯 바퀴씩 지구를 돌면서 보낸 이틀보다, 도킹 성공을 확인하고 ISS의 압력을 확인하기 위해 기다리던 3시간이 훨씬 길게 느껴졌다.
ISS 안으로 ‘날아’ 들어가자 동료 우주인들이 반가운 얼굴로 맞아 줬다. 이들은 나를 꼭 안으며 ISS 입성을 환영했다. ISS에서 나를 기리고 있던 건 선배 우주인들뿐만이 아니었다. 별로 반갑지 않은 ‘우주멀미’가 시작된 것이다.
ISS에 오는 이틀 동안은 어지러움만 조금 느꼈을 뿐 구토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ISS에 도착하자 우주멀미 증상이 급격히 찾아왔다.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면서 환영식을 할 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어느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어지럽고 구토가 밀려왔다.
6개월 째 우주정거장에서 생활해온 베테랑 우주인 미국의 페기 위트슨과 러시아의 유리 말렌첸코가 금세 나의 증상을 알아차리고 첫 일정인 안전 수칙과 우주정거장 모듈을 설명하는 일정을 뒤로 미루고 휴식을 권했다.
하지만 휴식도 잠시. 첫날 임무를 뒤로 미룰 만큼 일정에 여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 힘들지만 주섬주섬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나의 첫 과학 실험 임무가 시작됐다.
말렌첸코가 어디에선가 검은 가방을 들고 왔다. 우주와 지상에서 식물의 생장특성을 비교하는 실험 키트였다. 그는 어떤 우주인이든 처음 우주정거장에 도착해서 며칠은 멀미로 힘들어 한다며 윙크로 날 안심시켰다.
콩은 우주에서 천천히 자란다?
검은 가방 안에는 콩과 무 씨앗이 들어있었는데, ISS에 오는 이틀 동안 그새 싹이 텄다. 배지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씨앗은 공중에 떠다니고 있었다. 습기가 있는 곳에 놓아두기만 하면 싹이 트는 콩이지만, 긴 우주여정을 함께한 콩이어서 그런지 싹튼 모습이 왠지 기특하고 신기했다.
중력과 빛의 영향을 보기 위해 4개의 상자 가운데 2개는 위쪽에 구멍을 뚫어 빛이 들어가게 하고, 나머지 2개는 빛을 막아뒀다. ISS에 실험 장치를 두기로 한 위치가 환한 곳이 아니라서 빛이 생장에 미치는 영향이 잘 나타나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이 됐다. 하지만 ISS의 벽은 빈 부분을 찾기 힘들만큼 여러 가지 물건이 가득 붙어 있어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매일 한 번씩 싹이 튼 모양을 사진으로 찍고 기록했는데, 그때마다 동료 우주인들은 내게 콩나물의 안부를 물었고, 마지막 날엔 콩을 꺼내서 신선한 샐러드를 해먹자고 너스레를 떨기도 했다.
사실 임무훈련을 받을 때는 콩이 싹트는 모습을 기록하는 일이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방팔방으로 뻗는 뿌리와 박스 안에서 제멋대로 날아다니는 콩들을 보고 기록하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는 않았다.
내가 실험을 하는 동안 지상에서는 우리나라와 러시아 한인학교에서 지원한 초등학생 212개 팀 600여 명과 일반인 지원자 529명이 같은 실험 키트로 동시에 실험을 진행했다. 나중에 내가 우주에서 키운 씨앗과 지상에서 키운 씨앗을 비교해봤는데, 우주에서 키운 씨앗이 지상보다 더 느리게 자란다는 결과가 나왔다.
간단한 교육실험이었지만, 앞으로 장기 우주여행을 할 때 필요한 우주식물 생산시스템과 우주에서 키워 먹을 수 있는 우주작물을 개발하는데 꼭 필요한 기초실험이었다. 무엇보다 지상에서 실험을 같이 수행한 학생들에게 우주에 대한 꿈이 담긴 씨앗이 되길 기대한다.
우주에서 쉬 늙는 초파리
한참 콩에 푹 빠져있는데 말렌첸코가 이번엔 주황색 주머니를 내밀었다. ‘초파리를 이용한 중력반응과 노화 유전자 탐색 실험’ 키트였다. 그제서야 초파리의 안부가 떠올랐다.
가장 먼저 초파리가 이틀 동안 죽지 않고 살아있는지 확인했다. 주머니를 여는 그 짧은 시간에 여러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혹시 초파리가 다 죽었으면 어쩌지…. 그래도 몇 마리는 살아서 날아다니고 있으면 좋겠는데….’
여름철 골칫거리였던 초파리가 이렇게 소중하게 느껴진 적은 이제껏 없었다. 실제로 러시아에서도 유전자 연구를 위해 초파리 실험을 시도한 적이 있었는데, 실험키트에 들어있던 초파리의 밥이 로켓 발사할 때 초파리를 덮쳐 실험을 망친 적이 있다.
다행히 주머니를 열고 꺼낸 투명한 상자 안에는 수많은 초파리가 부산하게 날고 있었다. 동료 우주인들도 초파리들이 살아서 날아다니는 것을 보면서 신기해하며 성공적인 실험의 시작을 축하했다.
실험 키트 안에는 중력에 둔감한 초파리 500마리와 보통 초파리 500마리 두 그룹이 나뉘어 있었는데, 갑작스런 움직임에 놀랐는지 활발하게 움직였다. 나는 초파리에 카메라를 들이대며 “얘들아, 내가 비디오를 찍으려고 잠깐 꺼내서 그런 거니 너무 놀라지 말아라”고 말했다.
미국 우주인 개럿 리즈먼은 나의 이런 엉뚱한 행동을 잘 이해하는 친구다. 가가린 우주인 훈련센터에서부터 나와 곧잘 장난을 하던 사이였던 그는 ISS에서도 매일 내가 초파리 비디오를 찍을 때마다 “오늘 초파리들 컨디션 어때? 이젠 초파리가 카메라 앞에서 포즈도 취하겠는걸?” 하면서 안부를 묻기도 하고, 또 나처럼 초파리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우주에서 초파리의 행동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중력에 둔감한 초파리 그룹은 ISS에서 머무는 동안 지상에 있을 때와 움직임이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보통 초파리 그룹은 지상에서보다 훨씬 활발하게 움직였다. 그리고 보통 초파리는 중력 의 반대 방향으로 오르는 본능이 있는데, 우주에서 머물렀던 초파리들은 지상에 간 뒤 이 능력이 현격하게 떨어졌다.
지구로 귀환했을 때 초파리는 1000마리 가운데 600마리가 살아있었다. 실험을 제안한 건국대 조경상 교수는 초파리의 유전자를 분석해 우주에서 노화를 촉진시키는 것으로 예상되는 699개 유전자를 분리했다.
멀미로 고생한 우주에서의 첫날 밤
ISS에서 첫날 마지막 실험은 소형세포배양기를 꺼내 임시 건전지에 연결돼있는 전원을 뽑고, 우주정거장 전원에 연결한 뒤 제자리에 두는 일로 마무리 했다. 이 실험은 우주에서 사람의 연골세포와 조혈모세포, 그리고 벼세포, 김치유산균, 해양미세조류를 소형세포배양기에서 키우는 실험이다.
세포배양기가 정상 작동한다는 표시를 확인하고 매뉴얼에 따라 각각 세포배양기에 배양액을 주입했다. 대부분 실험이 그렇듯이 간단한 조작으로 실험이 가능할 수 있도록 제작돼 있어서, 실험을 수행하는데 큰 무리는 없었다.
ISS에서의 첫날은 지구를 내려다 볼 겨를도 없이 우주멀미로 고생하며 지나갔다. 보통 미국과 러시아 우주인은 수개월 씩 머물기 때문에 ISS에서 온 뒤 이틀 정도는 푹 쉬지만, 10일 동안 18가지 실험을 해야 하는 나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그나마 동료 우주인들이 챙겨주는 두통약과 멀미봉투가 큰 위안이 됐다. ISS의 선장 위트슨은 거의 한 시간에 한번 씩 내 상태를 확인했고, 내 엉덩이에 멀미주사를 놔주기까지 했다. 우주에서의 첫날 밤. 나는 ‘내일은 멀미 증상이 나아져 우주를 만끽할 수 있을까’ 기대하며 잠이 들었다.
ISS에 숨겨놓은 이야기
미국과 러시아의 멀미봉투 대결
우주멀미로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도 위트슨이 건네 준 NASA의 멀미봉투는 공학도인 나에게는 멋진 물건으로 다가왔다.
예전에는 우주관련 물품은 기능만 충분하면 됐지만, 최근에는 이용자의 편의성이나 디자인도 중요해지는 추세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구토봉투 만큼은 미국이 러시아보다 한 수 위였다.
러시아 멀미봉투는 단순한 방수 주머니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물기가 새지 않도록 코팅된 천 주머니에 입구는 줄을 당겨 묶을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고, 마지막에 고무밴드로 묶어서 폐기하도록 돼있다.
그래서 구토할 때 입구를 크게 벌려 입에 대고 이용하더라도 입 주위가 지저분해지고, 주머니를 닫을 때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구토물이 바깥으로 새어 나와 손이 지저분해지는 일을 피할 수 없어 ‘토할 마음’이 안 생긴다.
그런데 NASA 멀미봉투는 도톰한 거즈가 달린 입구를 얼굴에 대고 구토하도록 돼있어 입 주변이 지저분해지지 않고, 주머니를 입 주변에 꽉 밀착시킬 필요가 없다. 구토가 끝나고 그 거즈로 입 주변을 닦을 수 있어서 깔끔하다. 반대쪽 끝에도 지퍼백이 달려있어서 입구 거즈와 구토한 봉투 전체를 반대쪽 지퍼백에 완전히 넣은 뒤 지퍼를 닫도록 돼있어 뒤처리도 쉽다.
편리한 NASA 멀미봉투를 유용하게 사용한 나는, 올해 10월 ISS를 방문할 후배 우주인(미국인 리차드 게리엇)을 위해 멀미봉투 1개를 선물로 남겨뒀다. 그가 ISS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사용할 수 있도록, 편지와 함께 즈베즈다 모듈 식탁 아래에 보물처럼 숨겨 놨다. 보물찾기 힌트를 올해 10월 발사 전에 그에게 알려줄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