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워 해동성국이라 불렸던 발해왕국의 역사가 중국역사의 한가락으로 왜곡되어가고 있음이 중국의 최근 사서나 유적의 안내판에 나타나고 있다.
발해는 고구려의 옛터전에 일어나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워 해동성국이라 불렸던 우리민족이 세운 나라다. 이 발해역사의 뿌리가 지금 중국역사의 한가락으로 왜곡되어 가고 있다.
발해사는 우리 역사라고 굳게 믿고 있는 우리의 역사인식과는 달리 중국에서는 만주족의 역사로 깊게 인식되 있음이 최근에 밝혀지고 있다.
그것은 중국학자들이 최근에 발표한 발해사 관계논문에 '발해'(渤海)라 하지 않고 한결같이 '당대발해'(唐代渤海)라고 애써 '당대'를 앞에 붙이고 있는 데서도 단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것은 발해사가 당대역사와 마찬가지로 중국사에 귀속되어 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우리 역사는 한때 일제의 식민사관으로 뿌리채 흔들린 적이 있었다. 일본이 가야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을 앞세워 한·일합방을 합리화시키려 했던 것이 그 줄거리다.
정신을 차려 왜곡되어가는 발해의 역사를 하루빨리 바로잡지 않으면 발해사가 중국역사의 한 부분으로 굳어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그만큼 깊어지고 있는 요즈음이다.
이런 상황은 1940년대 후반 이후 우리 사학계에서 발해의 유적이나 유물에 접근할 수 없게 된 사이에 변한 것이다. 30년대에 한 중국인 사학자는 발해국지장편'(渤海国志長編·3부20권)을 내면서 발해를 건국한 대조영이 고구려사람이고 발해문화는 고구려문화를 계승한 것이라고 기술했다.
원래의 뿌리가 감추어지고 그위에 다른 싹이 튼 것은 시공의 단절 때문만이었을가.
민족사의 초기무대가 되었던 중국동북지방(만주지역)을 최근에 둘러보고 온 뜻있는 우리 동포들은 약 반세기 동안에 변한 이런 상황을 뼈 속 깊은 아픔으로 새겨 전해준다.
고구려 유민이 세운 해동성국
발해는 고구려사람 대조영(大祚榮)이 고구려가 망한 뒤 30년이 지났을 때 당나라에 항거하여 일어나 서기 698년 옛고구려의 영토였던 동모산(東牟山·지금의 敦化県敖東城)에 처음 세웠다.
나·당연합군에게 고구려가 패망(서기 668)한 뒤 끝에서 항거하던 고구려인들은 당의 영주(營州·지금의 朝陽)에 강제 이주되었다. 그 뒤 서기 696년에 당의 지배에 불만을 품고 있던 거란인들이 영주에서 반란을 일으켜 혼란에 빠졌다.
이때 대조영이 고구려인들을 이끌고 옛땅으로 돌아왔다. 뒤쫓는 당군과 싸우면서 돌아온 대조영은 698년에 나라를 세워 스스로 진국왕(震国王)이라 했다. 그의 세력은 점점 성장하여 지금의 요동산지 동쪽과 압록강 남쪽의 일부까지 영토가 넓어졌다. 712년에는 나라이름을 발해로 고치고 고구려의 옛 영토를 거의 회복하여 그뒤 14대 2백28년동안 계속되었다. 영토는 동쪽은 동해, 북쪽은 송화강과 흑룡강에서 북방민족과 접하고 서쪽은 장춘 심양 압록강 하구로 그어지는 선에서 거란·당의 경계와 접했으며 남쪽은 함경남도 용흥강 부근까지 걸쳐 있었다.
제2대 무왕(武王·재위 719~737)은 즉위한 해에 인안(仁安)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정하여 그뒤 왕의 대가 이어질 때마다 연호를 제정해 주체의식이 있는 전통을 세웠다. 그의 대외정책은 영토개척에 이해가 엇갈리는 당과 신라를 멀리하면서 항쟁하는 한편 바다 건너의 일본과 가까이 하는 것이었다.
다음 왕인 제3대 문왕(文王·재위 737~793) 때는 발해건국지이며 정치중심지였던 오동성이 날로 번창하는 국력에 비해 협소하여 747~751년 사이에 두만강 북쪽 현주(顯州)에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를 일으켜 도읍을 옮겼다가 755년에는 다시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로 수도를 옮겼다. 54년이란 긴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왕권을 굳히고 외국과의 관계도 원만하게 유지하였다.
제4대부터 제9대까지는 왕위계승을 둘러싼 싸움으로 혼란이 계속되어 20여년 동안에 왕이 6명이나 바뀌는 걷잡기 어려운 시기였다. 그러다가 제10대 선왕(宣王·재위 818~830)이 방계옹립으로 즉위하고 나서야 겨우 안정을 되찾았다. 중앙정부와 지방행정을 정비하여 국민생활이 날로 번영하여 당에서도 발해를 '해동성국'(海東盛国)이라 불렀다.
그러나 선왕이 죽은 후에는 다시 왕위계승을 둘러싼 왕실의 암투와 계층간의 반목 등으로 혼란이 계속되어 지배층의 권위가 약화되자 발해를 따르던 흑수말갈(黑水靺鞨)같은 부족까지 그 지배에서 벗어나 버렸다.
그리고 드디어는 서쪽 요하(遼河)유역에 새로 선 요나라 태조 야율아보기(耶律何保機)가 926년 발해로 쳐들어와 발해왕국은 망하고 말았다. 망국의 국왕을 비롯한 왕족과 지도층은 모두 사로잡혀 끌려갔다.
발해유민들의 광복운동은 그뒤 1백97년동안 끈질기게 지속되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발해의 문화는 당의 영향을 받은 유교적 요소와 고구려에서 전하여진 불교가 섞인 것이었다.
도성에 구축된 궁전 관청 사찰 민가 등의 배치와 규모는 당의 장안(長安)과 비슷했다. 특히 불상 석등과 같은 출토유불과 발굴된 사찰유적은 그 규모가 크고 당시의 불교예술이 얼마나 성했는가를 짐작케 한다. 또 와당(瓦當)에 새겨진 연꽃무늬는 고구려의 영향을 짙게 나타내고 있다.
발해왕국의 문화는 고구려문화의 전통을 이어받아 거기에 다시 당의 문화를 섭취하여 생활에 알맞게 발전시켜 갔던 것이다.
'발해국은 중국역사상 당나라시대의 지방정권이다' 이것은 발해의 도읍이었던 상경용천부(현재의 黑竜江省東京城 부근)유적지 안내문의 한 구절이다. 발해가 중국역사의 한가락이라고 주장하는 중국의 의도를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한반도 동북쪽 끝 두만강에서 건너다 본 도문(圖們)에서 목단강(牧丹江)으로 가는 열차를 타고 약 4시간쯤 가면 동경성(東京城)에 이른다. 여기서 발해도읍 유적이 있는 발해진(鎭 ·혹은 鄕)까지는 남서쪽으로 약 30km.
이 일대는 조선족 1만5천명이 살고 있다. 향수(响水) 강서(江西) 상경(上京) 강동(江東)에 집중되어 있고 토대(土台) 등 몇몇 촌락에도 더러 흩어져 있다.
북쪽에는 흑룡강성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관광명승지 경박호(鏡泊湖)가 있다. 주변의 산은 곰보같은 구멍 투성이인 화산 바위가 많고 평지는 밭을 일굴 수 있는 두께가 60cm 정도의 표토뿐이며 그 밑에는 용암이 깔려 있다.
북쪽으로 약 12km 되는 곳에는 현무호(玄武湖)가 있다. 옛날 발해군의 무예를 닦던 연병장이라는데 지금은 80ha정도의 양어장이 되어 있다. 잉어 초어 붕어 메기를 기르고 있으며 수면에서는 젊은이들이 보트놀이를 즐기기도 한다.
발해왕국 도읍유적이 있는 곳은 현재의 흑룡강성 영안현 발해진 향수촌(黑竜江省寧安県渤海鎭响水村).
이 성은 동서 4천6백50m 남북 3천5백30m의 네모꼴 외성을 4m높이 토성으로 두르고 그 중앙 북방에 왕궁(내성)을 쌓았던 것이다. 내성 남문에서 외성 남문으로 일직선으로 이어진 도로(失雀大路)를 중심으로 동쪽을 좌경(左京) 서쪽을 우경(右京)으로 가르고 이것을 다시 여러 조방(條坊)으로 나누었다. 내성 안에는 5개의 궁전터가 남아 있고 그곳에서는 오늘날의 온돌시설도 발견되었다.
이 유적지의 입구에 발해상경용천부유적 안내비석이 있다. 그 비문에는 '서기 698~926년간에 섰던 발해국은 5경15부62주를 설치한 강대한 나라로 이곳이 그 수도였던 자리다. 그 유적은 발해문화의 수준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 이 도시는 서기 737~755년 사이에 건설되었으며 당시 당나라의 장안(長安)에 다음가는 규모였다고 해설하고 있다.
그 성의 4m 나 되던 토성성곽이 지금은 거의 허물어져 평지와 다름없고 군데군데 몇곳에 2m 정도의 흔적이 남아 있다. 그 토성의 흔적 양쪽엔 백양나무와 베드나무가 우거져 있다.
외성에서 4백여m 북쪽으로 들어간 중앙에 내성이 있고 내성 안에는 돌로 된 궁궐의 담장 흔적이 이곳 저곳에 2~3m 높이로 남아 있다.
내성 입국에는 '발해국궁성유지'라는 표지가 있다. 그 내성과 외성 사이의 빈터에는 옥수수 콩 마늘 채소 등이 자라고 있다.
옛날엔 이 내성에 5개의 궁이 남북으로 배열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현무암 기초와 기둥이 몇개 남아 있을 뿐이다. 제일 바깥쪽 제5궁터 입구에는 '발해구궁성제5전(第五殿)유지'라 쓴 비석이 외로이 서있다. 제5궁과 제4궁 사이의 거리는 1백20m, 4궁전 자리라고 쓴 비석은 반쯤 부러져 땅에 떨어져 있다. 그 옆에는 주춧돌 몇개와 곰보같은 화산돌이 흩어져 있다.
4궁에서 3궁까지의 거리는 50m, 이곳에서 동쪽으로 50m 되는 곳에 井자 모양의 돌로된 우물이 있다. 궁중의식수로 쓰던 팔보유리정(八宝琉璃井)이다. 깊이가 4m 정도이고 너비는 70cm정도.
3궁에서 2궁까지는 1백m 정도, 거기서 제1궁까지는 1백50m다. 여기에는 높이 2m 남짓한 기초가 남아 있다. 궁의 동서길이는 50m 남북길이는 20m 동서 양쪽에는 화랑 흔적이 있다. 궁의 동쪽 담 밖에는 연못이 있는 비원이 있었고 북쪽에는 팔각정자가 있었다. 이 일대에는 옛날의 벽돌과 깨어진 가왓장이 많이 흩어져 있다.
외성의 남쪽에는 발해의 불교문화 수준을 짐작케하는 절터가 있다. 이 절은 정조 때에 중건하여 흥륭사라 불렀으며 발해왕국 때의 것으로는 석등이 하나 온전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외성과 내성 궁전 등의 배치도를 간략하게 그려놓은 고성유적안내문 마지막에는 '발해상경용천부유지는 중국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당대의 동북지구역사를 밝히는 데 귀중한 자료가 있는 유적이다'라고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