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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져 가는 옛조상의 땅 중국동북지방의 고구려 유적

우리 민족사의 요람이었던 대륙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옛조상의 유적을 잃었던 강토를 찾아가는 걸음으로 더듬어본다.

중국의 동북지방은 우리 민족의 고향이다. 이 넓은 대륙은 고조선을 비롯해 부여, 고구려, 발해가 일어나고 스러져갔던 민족사의 요람이었다.
그만큼 우리 민족사의 뿌리와 깊게 연계되어 있다.

그런 땅이 지금은 남의 땅이 되어 있다. 가는 곳마다 이름도 낯설지 않은데 주인이 바뀌었고 그 역사는 굴절되어 있다.

중국의 여러가지 기록은 고구려 발해 등을 중국역사상의 한 지방정권으로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나 발해 유적지와 유물을 보관한 박물관의 기록은 고구려족 또는 조선족을 중국의 한 소수민족으로 표현하고 있다. 길림성의 이곳저곳에 있는 고구려와 발해의 옛유적은 허술하기 이를 데 없고 문화재로 지정해놓고 있는 곳도 겨우 중국역사의 한 부분으로 표시하고 있다.

일제가 패망한지 40여년만에 깊은 감회를 안고 민족사가 태동했던 이 역사의 땅을 둘러보고 온 동포들이 이런 사실을 전하여 준다.

동북지방에 섰던 강국 고구려

고구려는 중국 동북지방(만주)을 토대로 흥성했던 강대한 나라였다. 기원전 37년에 주몽(朱蒙)이 이끈 부여족의 한 갈래가 압록강지류 동가강(佟佳江·渾江)유역 졸본(卒本)에 처음 나라를 세웠다.

일찍 기마민족문화를 받아들여 일어선 고구려의 역사는 그 세력이 안정되기까지 한족(漢族)과의 싸움이 끊임없이 계속된 역사였다.

졸본에서 통구(通溝)로 옮긴 뒤는 낙랑과 임둔의 통로를 끊어 한족을 막았고 태조왕 때부터는 강력한 대외정책을 펴 현도를 쳐서 무순방면으로 몰아냈고 요동과 낙랑을 공격하여 청천강 상류까지 진출했으며 임둔의 옛땅에 있던 옥저와 동예를 합방하여 동해안에까지 그 세력이 미쳤다.

중국대륙에서 위(魏) 오(吳) 촉(蜀)의 세나라가 대립하고 있던 시기인 동천왕 때는 요동의 실권자 공손연(公孫淵)과 친교를 맺어 위나라를 견제했으나 위나라 관구검(毌丘儉)의 공격을 받아 수도 환도성(丸都城))이 함락되기도 했다.

봉상왕 때는 선비족 전연(前燕)의 장수 모용외(慕容廆)의 침입을 두번이나 받는 위기를 겪다가 미천왕 때에 서안평을 확보하고 낙랑과 대방을 정복하여 한반도에서 한사군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 고조선의 옛땅을 되찾았다.

소수림왕 때에 이르러서는 불교를 공인하고 태학을 설립했으며 율령을 반포하는 등 국가체제와 정치의 안정기반을 굳혔다.

광개토왕 때는 남으로 임진강과 한강선까지 진출하여 신라를 도와 왜구를 격퇴하였다. 북으로는 후연을 쳐서 요동을 차지하여 중국 동북지방과 한반도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확보했다. 장수왕은 부왕 광개토왕의 업적을 이어받아 수도를 평양으로 옮기고 고구려 최대 전성기를 이루었다.

그뒤 보장왕27년(서기668년)에 멸망하기까지 교육기관으로는 372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국립대학격인 태학(太學)이 설립되었고 5세기 초에는 지방의 사립대학격인 경당이 설립되어 한학과 무술을 가르쳤다.

고구려인은 검소하고 청결하며 무술을 숭상하여 말타기와 활쏘기가 뛰어났다. 왕궁과 관청 사원에는 기와를 덮고 일반민가는 짚을 덮었으며 온돌을 사용했다. 귀족들의 모자는 소골(蘇骨)이라는 깃과 금으로 장식한 비단으로 만든 관을 썼으며 관리는 등급에 따라 옷색깔이 다르고 무사는 절풍이란 건을 썼다.

여자는 머리에 수건을 쓰고 주름잡은 치마를 입었으며 남자는 큰 소매가 달린 저고리와 통이 넓은 바지를 입었고 상투를 틀었다.

상류층에서는 바둑 항아리에 물건 던져 넣기, 축국(지금의 축구 비슷한 공놀이) 등의 오락을 즐겼고 서민층에서는 무도 음악 돌싸움 씨름 등을 즐겼다. 장례 때는 생활 정도에 따라 부장물을 관과 함께 묻는 풍속이 있었다. 10월에는 시조신을 모시는 동맹(東盟)이란 제전을 열어 부족의 전통을 기리고 결속을 다짐했다.
 

중국역사 속에 묻힌 황폐한 유적

옛 영화의 흔적은 지금 거의 없어지고 몇 곳의 유적은 초라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지난 6월23일부터 7월12일까지 19일 동안 중국동북지방을 둘러보고 온 사진작가 류재정(동아일보사 사진동우회원)씨가 필름에 담아온 고구려유적의 모습은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길림성(吉林省) 통화시(通化市)에서 기차로 3시간쯤 협곡을 달리다가 집안시(集安市)에서 내려 다시 압록강을 따라 동쪽으로 5km쯤 가면 용산 밑에 '장군묘'라는 것이 있다. 이것이 바로 고구려 전성기를 이룬 20대 장수왕의 묘다. 용산과 대우의 두산이 접하는 곳을 등지고 있는 이 묘는 1천1백개의 네모지게 다듬은 화강암을 쌓은 것으로 높이가 12.4m 밑쪽 너비가 32m다. 밑바닥은 큰 돌로 깔고 그 위에 세겹의 7층으로 쌓아 올렸다. 다섯번째 층 중심에 문이 있고 그 속에는 길이 5m 높이 5m의 정방형 공간이 있다. 이 묘실에는 동쪽과 서쪽의 두 관상(棺床·관을 얹어두는 받침돌)이 놓여 있다. 묘꼭대기는 하나의 큰 돌로 덮어놓았다. 그 무게가 50t이 넘는다고 한다.

묘실에 있어야 할 관도 부장품도 없다. 냉기만이 감돌 뿐이다. 일제 때에 도굴꾼이 모두 가져가 버렸다는 것이다. 묘 앞으로 가는 길은 흙과 돌이 거칠게 깔려 있고 비바람에 씻겨 비문이 마멸된 묘 정면의 비석은 비스듬하게 뒤로 기울어져 있다.
 

호태왕비, 고구려전성기를 연광개토왕비를 중국에선 이렇게부른다. 최근에 비석을 보호하는 비각을 세웠다.


이에 비하면 호태왕비(好太王碑)는 비바람을 막을 아담한 정각을 짓고 주변도 단장해 놓았다. 호태왕비란 집안시 동쪽 4km 지점 통구에 있는 광개토왕(廣開土王)의 비를 중국이 붙인 이름이다.

화강암인 비신의 높이는 5.34m이고 면의 너비는 1.5m 정도로 우리나라 비석 중 가장 큰 것이다. 비에는 44행(1행41자)에 모두 1천8백4자의 글이 새겨져 있고 삼국시대의 정세와 일본과의 관계를 담고 있다.

비문 내용은 대략 셋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앞에는 고구려의 건국내력을 기술했고 다음은 광개토왕이 즉위한 뒤의 대외정복사업을 구체적으로 연대순으로 담고 있으며 마지막에는 묘의 관리문제를 적었다.

이 비문 중 일부를 1884년에 일본군 참모본부에서 파견한 한 장교가 파내고 한반도의 남단이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였다는 설을 합리화시키는 글자를 만들어 넣었음이 뒷날 드러났다. 일본은 한때 이것을 빙자, '고대남조선경영론'을 강변하면서 한·일합방의 합리화에 이용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학자 정인보(鄭寅普)는 해석상의 모순을 지적했고 1972년에는 재일사학자 이진희(李進熙)가 비문이 일제에 의해 파괴되고 세번이나 석회를 발랐던 사실을 지적하면서 새로 만든 4자는 믿을 수 없음을 밝혔다. 또 일본의 사학자 '사에키 유세이'(佐伯有淸)는 일본군참모본부가 비밀리에 비문개조에 개입한 전말을 폭로했다.

지난날 우리의 역사를 지키지 못해 일본이 그 기록을 고쳐 아전인수로 이용한 것처럼 지금도 우리 학계는 이 비에 가까이 접근하여 정확한 내용을 해석하지 못하고 있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고구려의 제2도읍 국내성(国內城) 자리에는 길림성중요문화재라고 쓴 콘크리트 간판이 초라하게 서있다. 주변에는 민가가 있다. 옛기록에는 둘레가 2천6백86m나 되었다는 성벽이 1천5백여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모두 허물어지고 지금은 돌과 흙으로 쌓은 성벽흔적이 간간이 1∼4m 정도 높이로 남아 있다. 그 성벽이었던 자리에는 나무들이 무심하게 자라고 있다.

집안에서 북쪽으로 2.5km쯤 간 곳에는 환도산성(丸都山城)이라 쓴 기단 위에 얹은 비석이 있다. 산상왕 때 옮긴 도읍으로 밖은 가파른 절벽이며 안쪽은 완만한 비탈이고 북쪽이 높고 남쪽이 낮은 지형이다. 성 둘레는 6천9백51m나 되었다 한다.

비에 새겨진 내용을 보면 성문이 다섯곳에 있었고 성안에는 따로 놓은 망대가 있었으며 궁전의 남북길이가 92m였고 동서길이는 62m였다 한다. 그러나 궁전은 없어지고 포도밭과 옥수수밭이 되어 있는 그 자리에서는 연꽃무늬와 짐승무늬가 있는 기와쪽이 가끔 발견될 뿐이다.

이 일대에는 고구려 때의 것으로 보이는 옛무덤이 많다. 그 무덤들은 일제시대에 모두 도굴당해버리고 지금도 유일하게 당시를 말해주는 것은 무덤 속의 벽화 뿐이다.

벽화는 고구려의 무사가 말을 타고 활로 사슴 멧돼지 등을 사냥하는 모습 등을 담고 있다.

이제는 이런 대륙의 자료에 적극적으로 접근하여 옛 것을 바로 잡을 때가 된 것 같다.
 

장수왕릉,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루었던 왕의 능답게 규모도 루람하다. 그러나 묘실은 일제때 도굴당하고 주변은 활량하다. 이름도 중국에선 「장군묘」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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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사진

    류재정 기자
  • 이희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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