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하필 축산을?"하는 질문에 "동물과 사람을 동시에 위하는 위대한 축산학자가 될 것"이라고.
목장길을 거니노라면 진한 풀내음과 함께 상긋히 펼쳐진 초원의 아름다움을 문득 떠올릴 수 있다. 경쾌하게 울리는 쇠방울소리, 거기에 어울려 산새 들새의 조화로운 하모니가 아니더라도 목장길을 걸으면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이런 매력이 여자인 나에게 축산대학을 택하게 한 까닭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자리잡기 시작했을 때부터 누군가가 "여자가 무슨 축산을 해…"하는 물음에 가벼이 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실상 스스로 반문해보면 "남자도 힘든 일을 어떻게 해나가나…"하는 짜증스런 고민을 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학문에 무슨 남녀차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더욱이 주위에서 그런 소리를 들으랴 치면 "남자보다 더 위대한 여성들도 많은데…"하는 식으로 일축해버리고 말았다.
●-「누리」의 죽음을 통해
축산학은 인간에게 유용한 가축들을 사양·관리하고 번식·육종하는 모든 기술 및 학문을 말한다. 축산학에 밑받침이 되는 학문으로는 기초과학인 생물 화학 등을 필두로 유기화학 생화학 생리학 해부학 조직학 유전학 미생물학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리고 농업경영 가축관리론 등을 포함시키는 동물생산학이 바로 내가 하고 있는 축산학이다.
세분하면 더욱 다채롭다. 가축사양학 유정육종학 가축번식생리학 축산경영학 사료학 등을 모조리 섭렵, 만능이 되어야 축산을 한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축산학을 한다 하면 동물자원을 생산하는 모든 기초 및 응용과학을 포괄적으로 할 수 있다는 부담감과 자부심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흙에 대한 애착과 가축에 대한 애정이다. 이것들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전제가 축산학도 모두에게 제시되기 때문이다.
어릴 적부터 동물을 좋아했고 동물의 생태에 관심을 갖고 그에 관한 책들을 수집한 결과, 남들보다 동물에 대하여 해박한 지식을 갖게 되었다.
국민학교 6학년 때의 일이다. 나는 '누리'라는 치와와를 기르면서 동물에 대한 애정이 깊어졌다. 그런데 사랑스런 '누리'가 원인 모를 병으로 죽었을 때는 깊은 상심에 빠져 며칠간 식음을 전폐하다시피한 기억도 있다. 이를 계기로 동물에 관한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기회를 더욱 넓히려는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 대학입시를 앞두고는 생물에 대해서 누구보다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그런 이유인지 몰라도 생물학과에 들어가 동물생태학을 연구하고픈 욕심이 생기기도 했었다.
뿐만 아니라 수의학에 대한 관심도 커서 수의학과를 지원할까 망설이기도 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에 가정선생님이 선배 2명이 어느 대학교 수의학과에 가서 즐거운 학교생활을 한다며 자랑삼아 이야기해 준 다음부터였다. "수의학과는 내가 좋아하는 동물들을 치료하는 의술을 배우는 과라던데". 이런 생각을 하며 가끔 수의학과를 생각해 본 것이다. 수의학과에 가면 동물들과도 자주 대할 수 있고 '누리'같이 귀여운 강아지를 속수무책으로 죽게 내버려두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의 고3생활은 여느 수험생과는 조금 달랐다. 싫어하는 공부도, 할 수 없이 하는 공부도 아니었기에 물론 시험 때는 공부를 했지만 때로는 동물이나 축산업에 대한 책도 읽으면서 미래의 푸른 목장 여주인을 꿈꾸며 지내왔다.
어쩌면 주위의 반대가 심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수의학에서 축산학으로 방향전환을 하게 된 결정적인 동기는 건국대학교 축산학과에 대한 짤막한 안내서를 읽고 나서부터였다. 이왕 동물학을 할 바에는 응용과학 쪽으로 해봐야 되겠다는 결심을 굳혀버린 것이다. 그 뒤로는 국·영·수는 물론이고 생물 특히 축산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막상 축산학도가 되고 보니 이론보다 실습이 중요한 학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하였다. 학과 선배들은 열이면 열 모두 입을 모아 축산학은 행동하면서 배우는 학문이라고 말하곤 하였다.
처음에 그 뜻을 몰라 당황하였으나 축산대 실습목장인 파주목장 실습을 다녀와서 절실히 느끼기 시작하였다. 목장실습은 간단한 이론강의 후 2박3일 동안 실습을 하는 프로그램으로 짜여져 있었다.
●-분료를 치우면서…
일반 목장에서 하는 일과 똑같이 실습함으로써 현장의 어려움을 알고 낙후된 우리나라의 축산현실을 바로 알게 되었다.
젖소를 직접 착유하고 엔실리지를 담그기 위해 옥수수를 베었다. 그 돈사 계사에서는 분료를 치우는 작업을 하였다. 하루가 흠뻑 땀에 젖도록 실습한 것이다.
무척 힘들고 손에 익숙치 않아 실수연발을 하면서도 남학생에게 지지 않기 위해 피곤한 기색없이 열심히 실습을 하면서 "아, 이것이 축산이구나"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선배들이 말한 행동하는 학문이 바로 이것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기에 목장실습이 즐거웠고 큰 보탬이 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크나 큰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이제 2학년에 올라와 실제적인 전공을 하면서 나도 후배들에게 축산이 무엇인지 축산학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이야기해 줄 수 있는 위치가 되었다. 또 축산학을 한다는데 긍지를 느끼며 더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부담이 늘어났다.
한때는 푸른 목장의 여주인으로 말을 타며 목장을 둘러보는 일이 나의 미래의 꿈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 어른스러운 생각으로 나의 미래에 대해 좀더 구체적으로 계획을 세워보았다.
요즘 한창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인공수정 실험관 아기, 사람들은 축산학이라 하면 소 돼지만을 다룬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생물을 하는 입장에서 보면 사람도 동물이기에 축산학과에서도 사람에 관한 연구를 할 수있는 것이다. 실험관아기에 관한 연구도 따지고 보면 축산학의 인공수정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실험실에 들어가 좀더 많은 지식과 기술을 배우고 여기에 의학공부를 가미한다면 아마도 동물과 사람을 동시에 위하는 축산학도가 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현대 축산은 경제적 가치를 드높이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모든 동물자원을 이러한 목적에 합당하게 육종·번식하고 철저한 사양관리로 인류의 식생활자원에 커다란 일익을 담당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그러기에 요즈음의 축산학의 발전방향은 최신 유전공학을 이용한 가축의 질병치료, 체형의 변화, 가축수의 증대에 그 역점을 두고 있다. 뿐만 아니라 통계학으로 분석한 육종기술을 보다 세련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때에 축산학을 학문으로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철저히 공부하는 것이 나의 당면과제라고 믿고 싶다.
푸른 초원에서 말을 달리는 카우 걸(cow girl)(?)을 꿈꾸며 절대 소홀이 다룰 수 없는 학과 공부를 최우선으로 작성한 계획표대로 오늘도 나아가고 있다. 여자로서 푸른 목장의 주인이 되는 날을 앞당기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축산을 전공으로 할 후배들에게 몇가지 당부하고 싶다.
첫째로 적성과 관심이 있는 분야에 대한 기본적인 자질 소양을 갖추어야 한다는점이다. 또 대학을 사회진출의 중간단계로 잡지말라는 것이다. 대학은 어떤 분야에 대한 첫 걸음일 뿐이므로 자신이 소원하는 것을 보다 세분화하여야 한다.
두번째는 현재 상황에 대해 너무 성급하게 판단내리지 말라는 당부다.
실제로 축산은 먼 장래를 두고 계획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모든 자연산물이 다 그렇듯 단시일 내에 생산하고 산출하고 끈기있게 도전하여야만 될 줄 믿는다.
끝으로 계획성 있는 실천과 학문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할 것이다. 모든 일이 비슷하겠지만 축산하는 사람은 특히 부지런하고 계획성있게 행동하며 자신의 학문에 대한 애정을 지녀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도 끝없이 펼쳐진 푸른 초원을 상상하며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내 소신을 굳혀본다.
"여자가 무슨 축산을 한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