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원짜리 지폐를 보라. 거기에 그려진 물시계가 16세기의 자격루 유물이다. 관노에서 종6품이 된 세종시절 과학자인 장영실의 자격루를 개량한 것이다.
1434년(세종16년) 7월1일(음력). 조선왕조는 새로운 국가 표준시계를 공식으로 쓰기 시작했다. 보루각(報漏閣)의 자격루(自擊漏)라 불리운 자동물시계가 그것이다.
‘세종실록’ 권65, 세종16년 7월1일자의 기록에는 이 역사적인 사실을 김돈(金墩)의 보루각기를 인용,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대략을 머리 부분 만이라도 옮겨 보자.
오늘부터 새로운 물시계를 시동하였다. 임금이 이전에 쓰던 물시계가 정밀하지 못하여 물시계를 고쳐 만들 것을 명하였다.
물을 공급하는 항아리는 4개이며 크고 작은 차이가 있고, 물을 받는 항아리는 2개이며 물을 바꿀 때에 번갈아 쓴다. 길이는 11척 2촌이며 지름은 1척 8촌이다.
띄우는 잣대가 둘인데 길이는 10척 2촌이며, 잣대의 표면은 12시(時)로 눈금을 매겼으며, 매시는 8각(刻)이며 초(初)와 정(正)의 여분을 합하여 1백각이 되며, 각을 12등분하였다(중략).
간의(簡儀)와 맞춰보면 털끝만치도 틀리는 곳이 없었다. 또한 시간을 알리는 사람이 틀리게 됨을 면치 못할 것을 염려하여 임금이 호군(護軍) 장영실(蔣英実)에게 명하여 시간을 맡을 나무인형을 만들어 시간에 따라 스스로 알리게 하여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게 하였다.
그 구조는 먼저 전각 3칸을 짓고 동쪽 칸에 2층 자리를 만들고 윗층에 3신(神)을 세웟는데 하나는 시를 맡아 종을 울리고, 하나는 경(更)을 맡아 북을 치고, 다른 하나는 점(点)을 맡아 징(鉦)을 친다 (중략).
김돈의 보루각기는 이어, 항아리들의 배열과 크기, 거기 설치한 장치의 구조와 크기, 그리고 자동장치의 구조와 원리 및 작동하는 모습의 개도 등에 이르기까지를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 자격루의 구조와 원리에 대한 기술적 배경과 특징에 대한 훌륭한 연구가 최근 제어공학자인 남문현교수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반가운 일이다. 그의 연구는 필자의 과학 기술사적 연구만으로 미진했던 많은 부분을 새롭게 조명하였다. 또 장영실의 독창성을 선명하게 부각시킨 점에서 높이 평가 된다. 지금 계획 추진중인 자격루의 복원 사업이 결실을 맺으면 우리는 움직이는 자격루의 옛모습을 재현시킬 수 있을 것이다.
●─ 15세기의 첨단기술
자격루는 글자 그대로 스스로 치는 물시계이다. 자동시보장치가 붙어 있어서 때가 되면 그 시간을 알리는 인형이 나타나고, 종과 징과 북을 치는 자동물시계인 것이다.
이 장치는 매우 복잡하고 정밀해서 그 당시로서는 결코 쉽게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말하자면 15세기의 첨단기술이었다. 당시 그런 기술을 가진 나라는 몇 없었다.
그 당시 물시계로 시간을 재는 일을 맡은 기관에서는 전담하는 관리요원을 두고 있었다. 관리요원은 밤낮으로 쉬지 않고 지켜보다가 시간을 알렸다. 시계를 뜻하는 영어인 워치(watch)가 지킨다는 뜻과 같다는 사실은 그것을 말해 준다.
실제로 무더운 여름밤이나 몹시 추운 겨울밤에 자칫 졸다가 시간을 놓쳐 큰 소동이 나는 일은 동양이나 서양이나 드물지 않았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물시계를 맡은 군사가 밤에 졸다가 시간을 알리는 때를 놓쳐 처벌되거나 파면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를 통해 조선시대에도 그런 일이 실제로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가장 앞선 시계인 자동시보장치가 붙은 물시계의 제작은 옛 시계제작 기술자들의 꿈이었다. 또한 왕조의 권위를 지키려던 위정자들의 소망이기도 했다. 이 신묘한 기술적 산물은 왕권과 국력을 백성들에게 과시할 수 있는 좋은 소재임에 틀림 없었을 것이다.
장영실은 그것을 실현해 냈다. 동래현관 노비로 있던 그를 면천(免賤) 시키고 중국에 유학까지 보냈던 세종의 은총에 장영실은 훌륭히 보답했다.
자격루는 물을 공급하는 항아리(파수호)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물을 받는 항아리(수수호)에 괴게 하여 그 물의 높이를 재서 시각을 측정하는 부루(浮漏)형식의 물시계이다. 여기에 지정된 시간 간격에 따라 때가되면 자동적으로 시각과 청각적으로 시보를 수행하는 자동시보장치가 연결된 것이다. 이를테면 자격루는 물시계 부분과 자동시보 장치의 2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 자동시보장치의 원리
‘세종실록’에 기록된 자동시보장치의 원리를 설명한 부분을 인용해 보자.
누수가 흘러 수수호에 모이면 띄울 잣대가 점점 올라가면서 시간에 따라서 왼쪽 구리판 구멍의 여닫이 기구를 젖혀 주면 작은 구슬이 떨어져 구리통으로 굴러 들어 간다. 그것이 구멍으로 떨어져 숟갈 기구를 젖혀 주어 기계장치가 열리면서 큰 구슬이 떨어진다. 그 것은 굴러서 자리 아래에 매달아 놓은 짧은 통으로 굴러 들어가 숟갈 기구를 움직여 기계장치의 한 끝이 통안으로부터 올라가 시를 맡은 신의 팔뚝을 건드리면 종이 울린다.
물론 이 번역문으로는 막연한 게 사실이다. 그러나 옛 사람들은 이 글로 전부 이해가된 모양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우리 전통과학 고전의 학문적 해석연구가 필요한 것이다. 외국에서는 그것으로 박사학위 논문이 된다. 그저 한문에 능통하다고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남문현 교수의 자동시보장치에 대한 공학적 설명을 인용해 보자.
물시계에서 수력(부력)에 의해 얻은 힘으로써 1차적으로 시보용 시간신호를 발생시킨다. 또 이것으로써 기계적인 2차 구동신호를 발생시켜 12시 시계와 밤시계의 시보장치를 동작케 하였다.
이를 위해 물시계와 시보장치의 접속부분에 액면의 높이(측정된 시간간격)를 시보용 시간신호로 변환해 주는 시보용 신호발생장치를 두었다. 그런데 이것은 연속적으로 증가하는 수위를 일정한 시간 간격마다 이산적인 시간의 지표로 변환해 주는 일종의 아날로그─디지틀 변환기(analog-digital converter)이다.
시보장치의 내부에는 시간유지기구들을 설치, 현재의 시간을 신속 정확하게 시보하도록 기계장치들을 논리적으로 배열하였다. 이 장치들은 지렛대와 쇠구슬의 위치에너지를 적절히 활용하여 얻은 기계적인 힘에 의해 동작된다. 최종적인 시보는 타격기구와 연결된 인형이 말단기구(종 북 징)를 작동시켜 청각적으로 이뤄진다. 아울러 회전식 수평바퀴에 설치한 인형이 차례에 따라 교대로 도약하여 시의 진행(passage of doublehour)을 전시한다. 시보장치는 역학적 원리를 기본으로 하여 초보적인 제어용 디바이스와 디지틀 기술을 이용한 전형적인 자동시보장치(clock automata)이다.
이런 자동시보장치의 추진방식과 격발방식은 그 때까지의 다른 자동 물시계들과 현저히 다르다. 즉 11세기 중국 송나라 소송(蘇頌)의 거대한 천문시계나 원나라 순제(順帝)때의 궁정물시계, 그리고 아라비아 알-자자리(al-Jazari)의 물시계 등에서 보는 것과는 아주 다른 독창적인 것이다. 또 기술적으로도 매우 앞선 방식이었다.
말하자면 장영실과 김빈은 그 때까지의 자동물시계의 첨단기술을 융합시켜 또 하나의 독창적인 방식의 자동 물시계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 인경과 바라도 자격한다
장영실의 자격루는 지금 남아있지 않다. 설계도나 그 구조를 보여주는 그림도 물론 없다. 오직 ‘세종실록’의 설명문 뿐이다.
이 자격루는 1455년에 고장이 나서 한 때 사용이 중지되었다가 1469년(예종1)에 다시 움직이게 되었다. 1505년(연산군11)에는 창덕궁에 이전되었다.
1534년(중종29) 9월, 조선 왕조는 새 자격루를 만들기로 했다. 그것은 2년 만인 1536년(중종31) 6월에 완성되었다. 이어 창경궁에 보루각을 짓고 8월 20일부터 쓰기 시작했다. 그 자동물시계의 시계장치 부분만이 지금 덕수궁에 남아 있다. 여러분이 만원짜리 지폐에서 볼 수 있는 물시계가 바로 그것이다.
1985년 3월에 국보 2백29호로 지정된 이 보루각 자격루는 지금까지 남아 있는 옛 물시계 종에서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훌륭한 유물이다.
그것이 어떻게 해서 덕수궁에 옮겨졌으며, 왜 5개의 물항아리 밖에 남아 있지 않게 되었는가? 가슴 아픈 이야기이다. 일제의 식민지와 6.25의 처절했던 전란과 과학문화재에 대한 우리의 무지 때문에 겪게된 슬픔이라고 할까. 필자는 그저 그 자격루가 그렇게라도 살아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스러워 할 뿐이다.
더욱 반가운 것은 없어진 것으로만 알았던 잣대와 그것을 뜨게 하는 거북 모양의 청동 그릇을 최근에 찾아냈다는 사실이다. 1920년대에 창경궁에 보존되어 있을 때의 사진을 보면 우리 민족의 애환이 서린 이 유물의 모습이 우리의 가슴을 저리게 한다.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듯한 용을 틀어올린 청동 물받이통의 당당한 모습은 다른 나라 물시계의 유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기품을 간직하고 있다.
창경궁의 자격루는, ‘중종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장영실의 자격루와 구조가 같고 점수(点數)를 자격(자동적으로 시보)하는 기능을 갖는다. 뿐만 아니라 인경과 바라도 자격할 수 있게 개량된 것이다.
그것은 3개의 파수호와 2개의 수수통(授水筒)으로 되어 있다. 청동제 대파수호(reservoir)는 직경 93.5cm, 높이 70cm이고, 얇은 청동 항아리인 소파수호(regulator) 2개는 최대 직경 46cm, 높이 40.5cm 이다. 또 청동제 수수통(measuring vessel) 2개는 외경 37cm, 높이 1백96cm로, 약 2.5cm의 직경을 가진 파이프로 물이 흘러내리게 되어 있었다.
‘중종실록’에는 이 자동물시계를 만드는 일을 전담, 제작에 크게 공헌한 두 사람의 이름이 나온다. 김수성(金手性)과 박세룡(朴世龍)이다. 실제 제작기술자로서 그 일을해낸 사람들일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박세룡은 직책이 자격장(自擊匠) 이었다. 아마도 자격류의 자격장치 제작에 능통한 기술자였을 것이다.
●─ 자동에서 수동으로
이 자격루의 자동시보장치는 ‘세종실록’의 기록에서 엿볼 수 있다. 한마디로 수수통에 떨어지는 물의 부력을 지렛대의 원리와 공이 굴러 떨어지는 운동에 연결, 작동을 되풀이 하도록 한 것이다. 그 작동원리를 요약하면 이렇게 설명된다.
즉 위에 1개, 아래 2개를 2단으로 놓은 파수호가 흘러내리는 물의 수압과 양을 조절한다. 수수통에 물이 흘러 들어와서 물이 괴게되면 그 속에 든 얇은 청동판으로 만든 거북이 떠오르면서 거북이 등에 세운 자막대가 일정한 위치에 설치한 크고 작은 청동구슬을 건드려서 그 밑에 장치한 청동판에 굴러 떨어지게 한다. 떨어진 구슬이 청동판 한쪽을 치면 다른 한쪽이 들리면서 시(時)를 맡은 인형의 팔을 건드려 앞에 걸어 놓은 종을 쳐서 시간을 알린다. 경(更)과 점(点), 인경과 바라도 같은 원리로 작동한다.
이 자동시보장치는 1653년(효종4)에 새 역법에 따라 1일 96각제의 시제로 바뀌면서 쓸모가 없게 되자 제거되었다. 그러나 물시계 부분만은 그대로 사용했다. 다시 옛날 방식대로 사람이 지켜보고 시간을 직접 알리는 수동식으로 되돌아 간 것이다. 이 방식은 조선시대 말까지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