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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루마니아·불가리아 과학기행 특색있는 제도와 내용

서구의 과학에 비해 대체로 낮은 수준이지만 동구의 과학은 나름의 특색이 있었다.

근래 동유럽의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에 편중되던 관심이 점점 다양해지고 있는 경향인데 아무튼 바람직한 현상이다. 그러나 동구권은 아직 우리에게 먼 나라들이다. 특히 과학기술 면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마침 나는 1977 1978 1982년에 걸쳐 루마니아 불가리아 소련을 방문한 적이 있다. 이 방문은 미국의 학술원(National Academy of Science)과 이들 3나라 학술원의 교환교수 계획에 의해 이뤄졌다. 러시아어로 번역된 나의 저서 2권(유동의 박리, 유동의 박리제어)을 이 세나라의 대학과 학술원에서 강의하게 되었던 것이다.

체류기간이 불과 10개월이었고 만난 사람이나 활동분야도 제한돼 있었으나 생소한 동구의 과학기술을 이해하는데 얼마간 도움이 되기를 기대하며 나의 경험을 소개한다.

소련

소련은 다 아는 바와 같이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다. 남북한을 합한 한반도의 총면적보다 2백60배나 크며, 미국의 2.5배, 아시아 총면적의 2/5나 된다. 인구는 2억7천만명 가량인데 주로 슬라브족으로 구성돼 있다.

10년의 의무교육

교육은 어린이가 7세가 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때부터 초등학교 4년, 중학교 4년, 고등학교 2년 등 10년제 교육이 의무화 되어 있는 것이다 (러시아어를 제2외국어로 공부하는 소수민족은 1년 더 공부해야 한다.). 따라서 문맹자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중학교를 마친 후 막바로 직업학교나 전문고등학교에 진학하는 학생도 많다. 특히 과학과 기술분야에는 우수한 학생들이 줄지어 모여든다.
고등교육기관의 수도 상당히 많다. 전문학교가 7백여교, 종합대학이 약 65개교, 독립공과대학이 2백47개교나 된다. 대학생 수는 약 3백50만명이다.

내가 강의했던 모스크바국립대학은 1백여년 전에 개교한 유서깊은 곳이었다. 이 대학의 총학생수는 4만명 가량인데 특이하게도 여학생수가 2만5천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학생수에 걸맞게 19학부, 2백60학과, 4천여명의 교직원, 3천5백여명의 교수진으로 짜여진 매머드급 대학이었다. 대학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대개 수업은 매년 2학기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대학의 총 수업연한은 우리와 같이 4~6년이고 매 학기마다 5과목 이내의 필기 및 구두시험을 치른다.

대체로 소련의 학생들은 미국의 학생들보다 실험훈련을 많이 하였고, 연구에 일찍 참가한다. 소련의 공대생은 공장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 이곳에서 공작실습등을 직접 체득하는 것이다.

공작장이나 농장등에서 실제 훈련을 받은 다음 그들은 그 경험을 토대로 해서 맡겨진 프로젝트를 완성시킨다.

학생들은 전문과목 이외에도 어학 정치학 경제학 철학 등을 배운다. 국가시험에 통과되고 대학수준의 프로젝트를 마쳐야만 졸업장을 받게 되는데, 졸업 후 에는 거의가 직장으로 들어간다.

소련박사 대(對) 미국박사

대학원 과정을 마치면 2종류의 학위가 주어진다. 과학 후보자(Candidate of Science)와 과학박사(Doctor of Science)학위를 받는 것이다. 이를 미국의 ph.D와 과학박사(Doctor of Science)와 비교해 보자

소련의 과학후보자 학위는 미국의 ph.D나 과학박사 또는 과학석사(Master of Science)에 해당한다. 이 학위는 지원자 제도(Aspirantura)제도에 의해 수여되기 한다. 즉 대학원 강의를 받지 않았을지라도 논문을 제출하거나 기존 학술논문을 공부하는 것만으로 학위를 받을 수 있다.

요즘에는 보(Soiska1stvo)과정을 통해서도 과학후보자 학위가 주어진다. 즉 연구소의 연구원이 소정의 시험을 치르고 논문을 제출하면 이를 근거로 학위가 수여되는 것이다.

과학후보자(Candidate of Science)를 받은 후 7~10년을 더 연구하면 미국의 ph.D보다 높은 과학박사(Doctor of Science)가 된다. 이 학위를 받으려면 뚜렷한 연구실적이 있어야 하고 아울러 교수 능력과 그 성과도 고려된다. 미국에서는 수여하지만 소련의 대학은 자율성이 떨어진다. 각료회의 산하에 있는 고등시험 관리위원회만이 유일하게 학위수여 권한을 갖는 것이다.

대학교수들의 대우는 상당히 좋아 보였다. 1982년 모스크바대학의 한 공대교수 월급이 5백루블(1백루불이 1백60달러 정도다) 가량 되었다. 그때 모스크바 시민의 월평균 수입이 1백80루블이었던 것과 비교하면 소련 과학자들의 수입이 상대적으로 높은 편임을 알 수 있다. 교수들은 대개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었다.

소련의 총 서적수는 미국의 1/7~1/10 정도였다. 게다가 특이하게도 재판(再版)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초판이 다팔리면 헌 책을 구입할 수 밖에 없다. 특히 모스크바시에 위치한 레닌도서관은 유명하다. 세계에서 가장 큰 도서관중 하나로 꼽히는 레닌도서관은 장서가 2천5백만권이다 된다고 한다.

이번에는 소련의 과학기술 연구에 대해 알아보자.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각종 과학기술 분야에 종사하는 인원이 엄청나게 많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략 전세계 연구원의 1/4이나 되며 미국의 과학기술 종사자보다 2배나 많은 숫자다. 각종 과학연구소도 5천여군데나 있다. 여기에 투자되는 연구개발비는 소련 총 GNP의 3%를 차지한다.

특히 두드러진 특징은 소련내 과학자 가운데 여류과학자가 절반이나 된다는 점이다. 과학자와 기술자의 봉급이 다른 분야 종사자의 봉급보다 훨씬 높다는 점도 소련 과학의 특징이다.

연구는 주로 연구소가 담당한다. 이는 대학에서의 연구가 큰 비중을 차지하는 미국과는 다른 점이다. 소련의 대학은 전체 연구의 5% 가량만 떠맡는다. 대개 기초연구는 학술원 연구소가 주관하고, 응용과 군관계연구는 수많은 정부기관에서 하고 있는 것이다. 소련의 연구능력은 매우 높은 수준이라고 말할 수 있다. 1904~1978년까지 노벨상을 받은 소련 과학자는 의학 화학 물리학 등에서 모두 11명에 이른다.

소련 과학기술계의 조직은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공산당의 정책에 따른 정부와 직접 연결된다. 따라서 정치국(Politburo) 수석이 과학기술계의 최고 책임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은 과학기술계를 실제적으로 과학자와 기술자가 이끌어 간다는 사실이다. 반면 미국은 주로 법과대학 출신들이 과학기술계를 관리하고 있다.

소련은 세계 최대의 과학체계를 갖추고 있으나 그 능률은 그리 높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과학자들은 정부와 공산당 그리고 KGB의 통제와 지시를 받는다. 각 과학기관마다 KGB의 지부가 설치돼 있을 정도다. 이같은 간섭때문에 서로간의 유기적인 협력제계가 부족한 편이라고 한다.

기초연구와 응용연구가 따로 이뤄지는 것도 소련과학의 특징이다. 기초연구는 주로 학술원에서, 응용연구는 GKNT와 GOSPLAN에서 담당하고 있다.
 

미국·소련 학술원의 특징 비교


비밀투표로 선출

소련의 학술원은 연구계획을 수립할 뿐 아니라 자체적으로도 연구를 수행하기도 한다. 아울러 다른 기관의 연구도 지도한다. 한편 15개 연방공화국에 설치된 학술원 지원들은 지역내부의 공업문제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각종 연구결과를 응용하는데 주력한다.

1725년에 설립된 소련의 학술원(본부는 모스크바)은 국내최고의 권위를 자랑한다. 학술원 원원(院員)으로 선출되는 것은 소련학자들의 최대 소망이자 최고 영예인 것이다. 2년마다 각부에서 투표로 2/3 이상의 신원원을 뽑는데 이 투표는 철저한 비밀투표로 실시된다.

학술원은 2백45명의 정원원(正院員)과 4백47명의 부원원(副院員), 68명의 외국인 원원으로 구성돼 있다. 외국 원원 가운데에는 하버드대학 MIT대학 교수 등 미국인 11명이 끼어 있다. 반대로 미국의 학술원에는 18명의 소련인이 가입돼 있다. 과학기술계에서는 미·소간의 협력이 이미 가시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내가 강의했던 소련 역학(力學)문제연구소는 모스크바 서남쪽에 자리잡은 학술원산하 연구소였다. 그곳엔 5백명 가량의 남녀 연구원들이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분원(分院)인 시베리아학술원도 가 보았다. 그 곳은 1957년에 창설되었는데 3만5천여명의 소련 과학두뇌들이 20여 연구소에서 밤을 밝히고 있었다. 이 학술원이 위치한 곳은 아카뎀고로도크(Akademgorodok)라는 시(市)였는데 인구 10만명의 전형적인 과학도시였다. 이곳을 방문하면서 퍽 자유스러운 연구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또 국제적인 교류도 활발, 외국의 유명 과학자 2만5천여명이 이미 다녀갔을 정도였다.

아카뎀고로도크에 있는 열물리연구소에서는 8백명의 과학자와 관리원들이 주로 기초연구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연구소를 찾은 사람들이 실험실을 자유롭게 관찰할 수 있게 배려하였다. 연구내용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놀랍게도 나의 저서가 소련의 과학자들에게도 읽히고 있었다. 실제로 러시아어로 번역된 '유체의 박리'(Seperaiton of Flow) 3권을 보고 박사시험을 치렀다는 연구원도 만난 적이 있다.

아카뎀코로도크대학엔 1천여명의 교수가 재직중이었다. 이들은 3천5백여명의 학생들에게 강의하고, 연구를 지도했다. 학생들은 3학년 때까지 기초과학을 배우고 그 이후에는 학술원의 연구에 참여했다. 4학년 때는 매주 나흘을 연구소에서 보냈다.
 

소련의 과학 기술 조직


대학의 비중이 작아

소련 응용과학기술의 중심조직으로는 GKNT와 GOSPLAN을 꼽을 수 있다. GKNT에서는 연구과제를 선정하고 국가 기술사업을 수행한다. 또 과학정책의 중복을 파하게 하고, 연구결과를 경제에 응용하는 방법을 모색한다.

약 40개에 이르는 과학심의회가 GKNT와 학계사이를 연결해주고 있었다. 과학심의회는 저명한 과학자와 연구전문가들과 구성돼 있는데 그 영향력은 매우 컸다.

GOSPLAN은 전국적 경제계획을 수립하고 연구 결과를 직접 응용, 생산을 증가시키는 것을 목적을 하는 기관이다. 이 기관은 자체적인 연구소는 없지만 학술원과 관련된 연구소는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VINITT이다. 이곳은 전세계에서 출판된 매년 1백만권 가량의 과학기술문헌을 모집 분배한다. 그 규모는 세계최대를 자랑할 정도다.

각료의원회에 속해 있는 민간시스팀(Civilian Mjinistry System)은 미국의 공업연구개발처에 해당한다. '대학교육과 특수고등교육부'는 종합대학과 단과대학의 교육과정과 연구개발을 통제한다. 그러나 소련 전체를 놓고 볼때 연구에 있어서 대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극히 제한돼 있다. 대부분의 연구개발이 대학에서 이뤄지는 미국과는 극히 대조적인 것이다.

동구의 과학기술상황은 소련과 대동소이하다. 그러므로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의 과학기술에 대해서는 소련과 다른 점만을 기술해 보기로 한다.

루마니아

알파벳으로 Romanaia 또는 Rumania로 표기되지만 이 나라 사람들은 대개 Romania라고 쓴다. 공문서에서도 마찬가지다. 이는 로마(Roma)인 또는 그 문명의 후계자임을 자칭하는 것이다.

루마니아는 라틴계통의 나라이므로 문화적으로 프랑스나 이탈리아와 가깝다. 지리적으로 카르바티아(Carbathia)와 알프스(Alps)산맥 속에 위치한 나라이다. 따지고 보면 주변 강대국의 끊임없는 침략에도 불구하고 고유의 언어풍속과 문화를 유지하게 된 것도 이 산맥들 덕분이리라. 인구는 약 2천만명이고 국토는 한반도 전체보다 좀 크다.

실습이 성적을 좌우한다.

루마니아의 과학 역시 다른 동구권 국가들의 사정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서구의 과학보다 확실히 뒤떨어져 있는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서구를 따라가려고 많은 노력을 한다. 그들은 서구에 비해 공작기술 생산능력 배양같은 실제훈련에 더 중점을 두고 있다. 따라서 실습시간이 길어지는 것도 당연하다.

루마니아의 공과대학은 문교부의 간섭을 많이 받는다. 전학과의 교육내용은 물론이고 이론 및 실습교육의 시간배당등을 지시받는 것이다. 공대생들은 졸업할 때까지 5년을 공부하는데 학기는 10월 1일~1월 14일까지의 동기(冬基)학기, 2월 15일~6월~30일까지의 춘계(春季)학기로 나뉘어져 있다. 처음 2년간은 공대 기초과목을 배우고, 다음 3년간은 전문분야를 이수하게 된다. 5년간 강의를 매주 30여시간 이상 듣고 매학기마다 4~5차례 시험을 치른다. 졸업을 하려면 20~35과목을 이수하고 4천5백~5천5백시간을 강의받아야 하는 것이다.

학생들이 강의나 실습시간에 빠지면 시험을 치르지 못한다. 특히 실습이 큰 비중을 차지, 기계공학과의 경우 총 수업시간의 45%를 점한다.

학기말시험은 필기나 구두(口頭) 그리고 실연(實演)으로 치른다. 또 졸업프로젝트나 논문은 교수의 지도하에서 작성된다. 이 과정을 마치면 최종적으로 전문가들이 배석한 가운데 졸업프로젝트와 논문에 대한 구두시험을 치른다.

공장이나 연구소 등에 근무하면서 대학을 다니는 학생도 2만명 가량 된다. 이들은 야간대학에 다니거나 통신강좌를 받는다. 물론 이들도 대학입학자격시험을 치러야 하는데 적어도 3년간 공장에서 근무해야 자격이 주어진다.

루마니아에는 15개의 공과대학이 있다. 나는 이들중 1854년에 창립, 역사가 1세기가 넘은 부카레스트(Bucharest)국립공대를 둘러보았다. 이 대학에서 나는 교수와 연구원을 상대로 6개월간 특별강의를 하였는데 청강자가 50여명에 달했고, 질문도 비교적 많았다.

부카레스트공대에는 2만여명의 학생이 다니고 있었는데 그중 여학생이 8천명 정도였다. 외국에서 온 유학생도 5백여명 있었다. 특히 1950년 전후로 수백명의 북한학생이 유학하였는데, 그들은 공부도 열심히 하고 성적도 우수하다고 한다.

학과는 기계 전기 금속 에너지 등 4개과 뿐이다. 건축과 토목은 따로 독립된 단과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었다. 공대교육은 5년제와 3년제로 분류되는데 졸업생은 전원 취직이 된다. 등록금은 전혀 없었고 반 이상의 학생들이 국가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았다. 그들은 주로 기숙사나 하숙집에서 생활했는데 많은 특권을 누렸다. 의료비도 없었고 교통비나 극장입장료도 아주 쌌다.

다른 공과대학들의 사정도 비슷했다. 학생들은 매주 30여 시간의 강의를 듣고 상당한 시간을 요하는 숙제를 해야만 했다.

가끔 루마니아 학생들이 필자를 찾아 왔다. 졸업프로젝트와 논문에 관한 자문을 받기 위해서였다. 이를 보고 동구의 학생들이 얼마나 힘든 공부를 하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과학기술자를 우대해

루마니아정부에서는 과학기술자에 대해 상당한 대우를 하고 있었다. 예컨대 한 저명한 항공기제작자를 기념하기 위해 박물관에서 그의 업적을 전시할 정도였다. 또 그때 미국의 대통령이 루마니아를 방문하고 있었는데 이때의 대표환영자도 과학기술자였다.

당시 루마니아 정부는 공업발전을 최우선 정책으로 설정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공과대학과의 학생수는 1959~1965년 사이에 2배로 늘었다. 루마니아의 대학이 소련의 대학과 다른 점은 과학기술연구에 상당한 비중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한 공과대학에 방문했을 때 젊은 교원이 자신의 5년간의 연구를 설명한 적이 있다. 그는 이 논문이 통과되면 과학후보자(Candidate of Science)학위를 받는다고 자랑했는데 그 논문의 수준은 미국의 ph. D 정도였다. 그 젊은 학자는 앞으로 10년을 더 연구한 뒤 자신의 연구 결과를 일류학술지에 발표하겠다고 말했다. 10년 후 그가 연구한 논문이 학술심사위원회에 제출되면 심사원들이 통과여부를 놓고 비밀투표를 할 것이다. 여기서 통과되어야 그는 과학박사(Doctor of Science)학위를 받게 된다.

대학의 학장은 교수들의 추전을 받아 선출되는데 최종적으로 문교부로부터 임명을 받는다. 부카레스트공대 교수들은 주로 외국에서 학위를 받은 사람들이었다. 교수의 퇴직정년은 남자 65세, 여자 60세로 남녀간의 차별이 있었다. 교수들은 퇴임한 후에도 강의와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

1938년만 해도 루마니아에는 불과 16개의 종합대학이 있을 따름이었다. 학생들도 대부분 상류층 자녀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일반인들에게 공개돼 있으며 종합대학의 수도 46개교에 이른다.

불가리아

끝으로 불가리아의 방문기를 적어 본다. 불가리아의 국토면적은 남한과 비슷한 약 10만km²이고, 인구는 9백만 정도이다(여기에는 터어키계 소수민족이 포함돼 있다).

이처럼 조그만한 나라지만 그 지정학적 의미는 만만치 않다.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터키 그리고 흑해에 접하고 있어 유럽 아시아 아프리카 3개륙의 교차점을 이룬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여러 나라의 문화가 서로 충돌해 왔다.

이러한 환경에서 그나마 국가의 독립을 확보하게 했던 지주는 동방정교회의 분파인 불가리아정교회였다. 실제로 불가리아 국민은 대부분 정교회의 신자들이다.
 

불가리아를 지탱해준 동방정교회의 사원


불가리아인들의 자랑거리

국가의 성립은 AD 680년에 이뤄졌다. 중앙아시아에서 남하한 불가리아라는 동양민족이 슬라브족과 통합되면서 나라가 세워진 것이다. 그후 불가리아는 수많은 외침을 당했다. 비잔틴제국에 2백년, 터키의 오토만제국에 5백년간 지배를 받은 것이다.

그러다가 1828~1829년에 걸쳐 벌어진 러시아와 터키 간의 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하면서 독립, 불가리아왕국을 세우게 되었다. 그후 2차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공산화의 길을 걷게 된다.

불가리아인들은 슬라브 알파벳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형제 학자였던 시릴과 메소디우스에 의해 9세기경에 만들어졌다. 뒷날 러시아에서도 슬라브 알파벳을 사용, 러시아어를 표기하게 되었다. 이런 배경으로 시릴형제의 슬라브 알파벳 창제는 불가리아 민족의 가장 큰 자랑거리가 되고 있다.

교육현황을 살펴보자. 8년제 의무교육을 마친 학생들은 98%가 직업학교나 고등학교에 진학한다. 또 12개 대학도시에 있는 24개 단과대학에서 10여만명의 대학생이 공부하고 있다.

그중 국립 소피아종합대학은 1888년에 건립된 가장 오래된 대학인데 10만명의 학생중 여학생이 40%를 차지한다. 단과대학으로 공대 의대 농대 건축대 토목대 등이 독립돼 있다.

수도인 소피아시 교외에 위치한 소피아공과대학은 기계 전기 에너지 과학기술 교통 등 6학과가 설치돼 있다. 학생수는 약 1만명인데 주변에는 의대 수의대 건축대 토목대 등이 위치하고 있어 하나의 대학촌을 이루고 있었다.

소피아공대의 유체역학 주임교실에서 관련 교수들 10명을 만난 적이 있다. 그들은 나의 저서(러시아판)을 갖고 들어와 그 책이 교과서로 사용되고 있음을 들려 주었다. 내가 쓴 책이 공산권 학자들에게까지 참고가 되고 있다고 생각하니 학자로서 뿌듯함을 느낄 수 있었다.

공대의 학장은 교수들의 추전을 받아 임명되는데 임기는 2년이었다. 학과장의 임기도 마찬가지였다. 정년퇴직 연령은 남자가 60세, 여자가 55세로 루마니아보다 5년이 짧았다.

학생들의 등록금은 국가가 부담하였다. 기숙사비까지도 정부에서 지급해 주었다. 외국에서 유학온 학생들에게도 마찬가지 혜택을 주었다. 대개 아시아 아프리카 중남미 등지에서 온 약 3천명이 유학하고 있었다.

작년 서울올림픽에서도 나타난 바처럼 불가리아는 공산국가 중에서도 높은 수준의 스포츠국가다.

특히 역도와 체조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박물관과 미술관이 많기로 유면한 불가리아의 또하나의 자랑거리는 온천과 약수다.
9백50여 곳에서 온천과 약수가 쏟아져 나온다. 그중 5백여 곳은 신경통 등에 특효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전국 각지에서 휴양을 겸한 치료원이 있어 많은 외국 관광객들이 모여든다.

문헌을 구하기 어려워

나를 초빙한 불가리아학술원은 소피아 시내 중심가에 있었다. 거기에는 7천여명의 직원들이 있었는데 유체역학연구소에만도 2백50명이 일했다. 그중 몇 명은 소피아종합대학의 유체역학교수로 재직하면서 연구와 강의를 겸했다. 연구문헌은 주로 소련서적들이었으나 소피아종합대학 도서관에는 세계각국의 주요문헌들이 가득 차 있었다.

학자들은 대개 소련의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훈련을 받고 온 사람들이었다. 불가리아도 루마니아처럼 외화가 부족한 나라여서 외국문헌을 구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물론 제한된 범위에서 경험한 일들이지만 그 기간동안 접촉한 동구의 과학자들은 모두 깍듯이 예의를 지켰다. 손님 대접을 하느라고 노력하는 흔적도 역력했다. 특히 여류과학자들은 부드럽고 따뜻한 면이 동양여성에 가까울 정도였다.

나의 방문은 그들에게 분명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나를 중국인이나 일본인으로 착각하기도 했다. 올림픽 이후 많이 달라졌겠지만 아직도 한국은 그들에게 생소한 나라인 것이다.

1989년 07월 과학동아 정보

  • 장극 대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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