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한반도 거의 전역에 구석기인 살아

1만여년전의 사람과 그 문화의 특징

한때 한반도의 구석기문화는 그 존재까지 의심되었지만 이제는 학계의 노력으로 구석기인의 형질·체질과 문화가 속속 밝혀지고 있다.

금년 2월 또 하나의 구석기 유적이 발굴되었다. 섬진강 유역에 자리잡은 보성군 곡천유적이 그것인데 이로써 구석기시대 유적지의 분포가 더욱 확대되었다. 한반도의 거의 전역에서 구석기시대 사람인 곧선사람 슬기사람 슬기슬기사람들이 살았음이 밝혀지고 있는 것이다.

이미 구석기 유적지는 여러 곳이 알려져 있다. 북으로는 두만강의 줄기인 동관진 굴포리 부포리를 들 수 있다. 또 대동강의 줄기를 따라 덕천, 상원 검은모루, 역포구 대현동, 승호구역 만달리 등의 동굴유적이 있다. 이들 굴에서는 슬기사람 슬기슬기사람뼈 화석이 짐승뼈 화석들과 더불어 출토되었다.

한편 북한강과 남한강의 갈래에서도 많은 구석기 유적지가 발굴되었다. 예컨대 양구의 상무룡리 허수리 언저리에는 석기들이 넓게 분포돼 있다. 또 한탄강 줄기의 전곡리에서도 훌륭한 석기들이 출토되었다. 한탄강의 하류에 자리잡은 파주군 주월리 가월리에서도 마찬가지. 잘 만들어진 수많은 석기가 쏟아져 나온 것이다. 그런가 하면 임진강가 교하면 다율리에서도 구석기 유물이 나왔다.

특히 남한강 줄기의 동굴유적에서는 사람과 짐승뼈 화석들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 강둑 유적에서도 훌륭한 석기를 만들어 썼다는 증거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밖에도 제원 점말용굴, 단양 도담금굴, 상시 바위그늘에서는 사람뼈 화석과 짐승뼈 화석이 발견돼 우리 나라 구석기시대 사람들의 형질과 진화를 연구하는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짐승뼈 화석은 곧선사람 슬기사람 슬기슬기사람들과 더불어 살다가 그들에게 잡아먹힌 짐승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 화석들은 그때의 자연환경을 파악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먹고난 짐승뼈를 연장으로 만들어 쓴 사실을 알게 해 준다. 아울러 연장을 만드는 도구, 즉 연모로 석기만이 아니라 뼈도 활용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남한강가의 여러 둑에서도 석기를 만들어 쓰던 유적이 많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석회암 동굴이 아닌 들판이나 둑에 자리잡은 살림터는 오랜 기간 전해내려오기가 쉽지 않다. 빗물이 내리고 흙이 쌓이면 삭아서 사라지기 쉽기 때문이다. 이때 흙이 산성을 띠면 더욱 보존이 어렵다. 유물이 돌이 아니고 뼈인 경우는 더더욱 그러하다. 언덕에 위치한 까닭에 석기만 나오고 뼈화석이 나오지 않는 유적지가 남한강 가에서 여러 곳 찾아졌다. 경기도 광주군 도척면 궁뜰, 제원군 한수면 명오리, 창내, 단양군 애곡면 수양개 등이 그런 곳. 그중에서도 수양개는 많은 돌날석기를 비롯, 좋은 석기가 나오는 유적인데 매우 넓게 분포되어 있다.
 

점말 용굴^이 동굴에서는 짐승뼈 화석이 많이 발견되었는데, 화석들은 옛 짐승의 습성, 당시의 기후 등을 암시하고 있다.


좀 더 깊이 조사해야

금강 줄기에서도 구석기시대 사람들이 살았다. 그 자취로 남쪽에서 가장 먼저 발굴된 구석기유적지인 석장리를 꼽을 수 있는데 공주군 장기면 금강가언덕에 있다. 이 곳은 여러 개의 구석기 문화층을 지니고 있고, 구석기시대 슬기슬기사람의 머리털이 찾아진 유적으로 유명하다. 뿐만아니라 이 땅에서 사람이 살았던 역사의 시간이 1만년 보다 오랜 시기(구석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해준 유적이기도 하다.

금강 상류는 충북지방의 석회암 동굴쪽으로 뻗어 있다. 그 때문인지 그 곳에서는 사람뼈 화석 짐승뼈 화석이 많이 나왔다. 그중 가장 많은 굴이 서로 얼기설기 이어져 있고 거미줄처럼 엮어져 있는 동굴유적으로는 청원군 가덕면 노현리 두루봉을 꼽는다. 이곳은 지난 60년에 걸쳐 발굴되었다. 부서진 상태로 보존된 몇개의 동굴을 겨우 찾아낸 것이다. 다시 말해 부스러기 굴들로 이뤄진 곳이 바로 두루봉동굴들이다. 이곳 또한 우리나라 선사문화의 연구에 커다란 도움을 주고 있다. 한편 흥수굴에서는 어린이 화석이 발견되었다. 완전한 몸체의 한 어린이화석과 머리뼈가 없는 몸체가 발굴된 것. 이는 무덤자리임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가장 오랜 무덤이기도 하다.

남쪽의 낙동강 갈래에서는 뚜렷한 유적을 찾는데 실패했다. 하지만 경남 거창군 남상면 임불리에서 후기구석기시대 유물이 몇 점 발굴되었다. 또 섬진강 줄기인 보성강의 곡천에서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발굴이 이어졌다.

구석기시대 사람들의 살림터는 대개 강가 동굴 바위그늘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선사유적지를 제대로 발굴하려면 좀더 깊이까지 내려가고 바닥바위까지 조사해 보아야 한다는 점이 제기되고 있다. 이땅에서 후기 구석기시대에 살았던 사람은 1만명쯤으로 추측된다.
 

머리털의 전자현미경 사진 비교. 석장리에서 찾아낸 머리털(왼쪽), 백인(가운데), 흑인(오른쪽)


머리 부피가 크다

구석기시대에는 강가 연못가 동굴 바위그늘이 살림터가 되었다. 당시 사람들은 서로 말로 의사교환을 하고 집안끼리 모여 살았다. 또 힘을 모아서 사냥하고 열매 풀 뿌리 낱알을 먹고 살아왔다. 돌을 떼어서 만든 석기를 사용, 사냥에 나서기도 했다. 또 석기는 짐승의 가죽 살 뼈를 가려서 먹는데 이용되기도 했다. 특히 뼈속의 핏집(골수)은 그들에게 영양이 많은 좋은 먹이였다.

이런 일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석기를 만들어야 했다. 뼈연장을 만들기 위해서는 뼈도 깨고 깎아야 했다. 또 나무를 잘라서 자루를 달고 뾰족하게 깎아서 창으로 쓰기도 하였다. 석기만들기 사냥하기(몰이사냥 덫사냥 함정사냥 팔매사냥 창사냥) 집짓기 등의 기술을 어린이에게 가르치면서 언제나 내일을 위한 삶을 그리게 하였다. 이같이 내일에의 꿈을 추구하며 살아왔기에 사람은 머리의 신경단위가 늘어나고, 머리의 부피가 커지고, 진화하여 온 것이다.

오늘날 우리 겨레의 머리부피는 큰편에 속한다. 특히 머리높이는 아주 높은 편에 든다. 인류의 진화과정에 있어서 머리부피가 커지는 것이 진화의 형질-체질상의 특징인데 그중 가장 두드러진 것이 머리높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의 머리높이가 가장 높은 편이므로 진화 선상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한다고 말할 수 있다.

석기의 아름다움을 놓고 볼 때 유럽인도 아프리카의 석기들이 높은 기술수준으로 평가된다. 반면 이땅에서 만들어진 석기들은 외양이 뒤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한 유명한 구석기학자는 유럽의 구석기인들은 미적 감각이 더 발달하여서 아름다운 석기를 만들었고 다른 지역의 구석기인들은 심성이 뒤떨어져서 덜 아름다운 석기를 만들게 되었다고 하였다. 물론 석기의 외양이 제조기술에 따라 차이가 나는 것도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같은 돌감을 가지고 석기를 만들 때만 비교가 가능하다. 기술이 부족해서 훌륭한 석기를 못만들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돌감에 따라 기술이 제약된다는 얘기다. 당시 구석기인들은 석기를 예술품으로 만들기 보다 삶에 필요한 연장으로 만들었다. 구실을 제대로 해내는 석기이면 그것으로 충분했으며, 모양새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특히 뗀석기(타제석기)는 오래 쓰는 것는 것이 아니었다. 떠돌이 삶을 주로 하던 당시 사람들은 어디에서든지 돌을 주어서 석기를 만들었고 쓴 뒤에는 버리고 갔다. 다른 곳에서 다시 필요하면 그 자리에서 돌을 주워 재차 떼어서 만들면 되었기 때문이었다.

돌의 질이 균일하고 낱알이 고우며 유리질이 많이 들어 있을수록 잘 떼어진다. 이 세가지가 좋은 돌감의 자격요건. 이같이 좋은 돌감일지라도 돌결이 좋아야 멋진 석기를 만들 수 있다. 불에 달궈진 것이면 더욱 좋다. 따라서 화산폭발 결과 얻어진 흑요석(유리질 최다 함유)이 석기의 가장 훌륭한 돌감이 된다.

흑요석으로 만든 석기는 무척 얇게 떼어지므로 매우 날카로운 석기를 만들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사람이 만들어낸것중에서 가장 잘 날이 서는 칼로 흑요석 돌날을 꼽는다. 이처럼 흑요석은 빛깔 떼임새 아름다움에 있어서 최상이므로 흑요석으로 만든 석기는 예술품으로 여져질 정도이다.

다음으로 좋은 돌감은 부싯돌(프린트)이다. 이는 바다 속에 가라앉은 고은 규산이 눌리고 열을 받아서 생긴 돌이다. 이 돌은 흑요석보다는 떨어져도 결이 곱고 낱알도 가늘어 구석기시대 사람이 즐겨 쓰던 돌감이었다. 특히 이돌은 유럽에 많이 퍼져있었다. 따지고 보면 유럽의 석기들이 아름다운 것은 부싯돌을 쉽게 얻을 수 있었기 때문.

부싯돌은 곧선사람 슬기사람 슬기슬기사람들이 꾸준하게 써왔다. 반면 흑요석은 주로 슬기슬기사람들에 의해서 찾아지고 사용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물론 신석기시대 사람들도 부싯돌이나 흑요석을 즐겨 썼다.

다음으로 좋은 돌은 개차돌(차돌모래가 눌리고 열을 받아서 생긴 규암)이다. 이는 차돌(석영)보다 낫다. 유리질이 많은 것은 차돌과 비슷하나 개차돌은 차돌처럼 결정으로 이루어진 게 아니라 잔모래 낱알로 구성된다. 그리고 차돌은 결정으로 된 것이 많기 때문에 개차돌보다 떼임새가 못한 것. 국내의 금굴 전곡리 가월리 주월리의 석기는 개차돌이 많고 석장리 두루봉 곡천의 석기는 차돌이 많다.

물론 석기는 모든 돌로 만들 수 있다. 뗀석기는 단단하고 낱알이 곱고 결이 좋은 돌로 만들었다. 하지만 떼임새가 나쁜 돌(바슬바슬한 돌, 결정이 생긴대로 나가는 돌, 여러가지 암질이 마구 섞여 있는 돌)들은 날을 세우는데 쓰지 않았다. 대신 망치돌 모루돌로 사용했다. 옛사람들은 돌감을 가려내는데 뛰어난 눈을 지니고 있었다. 부모나 식구들로부터 배우고 실험을 통해서 알게 되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후기 구석기 시대에 돌날떼기(대고떼기 간접떼기) 기술을 발명하게 된 다음부터는 돌날떼기에 알맞는 흑요석 부싯돌 규질화된 켜바위들을 찾으려고 애를 썼다. 이돌 들은 신석기 시대 사람들도 즐겨 쓰게 되었다. 가볍고 날카로운 날을 만들수 있었기 때문이다.

슬기인들의 팔매질

구석기시대 사람들인 곧선사람 슬기사람 슬기슬기사람의 살림은 어떻게 달랐을까? 매우 궁금한 이야기이다. 전기 구석기사람인 곧선사람이 사라질 즈음에 이르면 나뭇가지로 집을 지울 수 있게 되었지만 그들은 대부분 동굴이나 들판에서 살았다. 또 그들은 주로 큰 짐승을 사냥했으므로 돌연장도 크고 무거운 것이 많았다. 무거운 석기가 많이 발굴된 금굴 1문화층에서 볼 수 있는 석기는 곧선사람들의 작품.

사냥할 때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둥글게 다듬은 포환 크기의 돌도 출토되고 있다. 이 돌 2~4개를 칡줄기로 만든 끈, 또는 짐승 힘줄을 말려서 만든 끈으로 잡아맨다. 그뒤 빙빙 돌려 던져서 짐승을 잡는 것이다. 이같은 팔매돌은 석장리 전곡리 상무룡리 가월리 주월리 등의 유적지에서 잇따라 발굴되고 있다. 이땅의 중기 구석기 사람인 슬기사람들이 대체로 이 방법을 통해 사냥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짐승을 잡고 푸주간 일을 하는데 사용된 것으로 추측되는 주먹도끼 찍개등은 거친 모습의 석기. 이또한 상무룡리 전곡리 가월리 주월리 석장리 금굴 두루봉 등에서 나온다. 주먹도끼는 전기 곧선사람, 중기 슬기사람의 유적에서 많지는 않지만 조금씩 나오고 있는 것이다. 슬기사람의 유적에서 발견된 석기는 그전의 석기보다 작아진 게 특징.

슬기슬기사람에 이르러서 데고떼기 기술이 발명되었다. 주머니칼 모습의 돌날을 떼어내서 사용한 것이다. 그들은 가볍고 날카로운 석기를 만들었고 이 석기를 이용, 물고기를 잡았다. 또 비늘을 벗기고 속을 빼내는 일까지 할 수 있게 되었다. 주거환경도 크게 발전, 기둥을 세워 집을 짓고 화덕에 불을 피우고 땅바닥을 후벼파서 고래모습을 만드는 일도 가능하게 되었다(석장리).

황해가 모두 육지로

구석기인들이 살았던 시기는 빙하기 간빙기 빙온기인데 기후가 크게는 10만년, 작게는 1만년 사이를 두고 바뀌었다. 바닷물의 높이도 6~10m까지 상승, 많은 육지가 물에 묻히기도 하였다. 심지어는 육지가 80~1백20m까지 하강, 지금의 황해가 모두 육지였을 때도 있었다. 또한 짐승과 나무의 종류도 기후에 따라 달라졌다. 이러한 자연환경의 변화에 따라 석기만들기 사냥기술 집짓기는 물론이고 사고의 영역마저 변했다. 구석기인들은 고생을 이겨나가면서 내일을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그 결과 머리부피가 커지고 기술을 발전시키게 된 것이다.

이땅의 구석기문화는 강줄기와 깊은 관계가 있다. 강줄기가 이어지는 석회암동굴에는 옛사람의 살림터가 있는데 그곳에서 가장 많은 구석기 문화유산을 찾을 수 있다. 특히 석회암동굴은 염기성이므로 뼈나 다른 유기질이 석회석 성분과 함께 쌓이게 된다.

강줄기를 따라 유적들을 더듬어 보자.

두만강 줄기의 동관진 굴포리 부포리엔 슬기사람 슬기슬기사람의 자취가 남아 있다. 대동강 줄기에는 곧선사람(검은모루), 슬기사람(덕천 역포), 슬기슬기사람(만달)들의 살림터가 남아 있다. 한탄강 줄기에는 슬기사람(전곡리), 슬기슬기사람(가월리 주월리 동파리 장파리)유적이 있다. 임진강 줄기에도 슬기슬기사람(다율리)이 살았다.

한강 줄기인 도곡강 가지에는 슬기슬기사람 (궁뜰) 유적이 있다. 북한강줄기에선 슬기사람(상무룡리)이 살았다.

남한강 줄기에는 곧선사람 (금굴), 슬기사람(상시 구낭굴 명오리 금굴 용굴), 슬기슬기사람(수양개 금굴 창내)의 살림터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금강의 줄기에는 곧선사람(석장리), 슬기사람(석장리 두루봉 2굴과 9굴)들이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섬진강 줄기인 보성강가의 곡천에는 슬기사람과 슬기슬기사람이 살았던 자취를 엿볼 수 있다.

전자현미경이 새로운 무기로

우리 나라의 구석기 연구는 유적지를 찾을 때마다 새로운 방법을 발전시켜 왔다. 처음에는 석기의 생김새, 만듬새에만 관심을 가졌으나 점차 연대를 암시하는 퇴적층에 주의를 기울였다.(석장리 굴포리). 한 걸음 더 발전해서는 퇴적층의 꽃가루 화석을 찾아서 옛사람이 살던 시기의 기후를 알아내려고 시도했다 (석장리).

동굴에서 짐승뼈 화석이 발굴되기 시작한 다음부터는 짐승화석을 가지고 짐승의 습성, 당시 기후와 시기를 따지게 되었다. 이어 옛사람들의 사냥이나 살림들을 헤아려보는 수준에 이른다 (상원 검은모루, 제원 점말용굴). 꽃가루와 숯을 활용하게 되면서부터 늘푸른 나무 중 넓은 잎 또는 바늘잎을 가진 나무가 자라는 환경을 추정할 수 있었다. 특히 이를 통해 옛사람의 생활 환경을 따질 수 있게 되었다(용굴 두루봉 상시바위 그늘). 또 짐승뼈를 가지고 사냥된 짐승의 종류를 알아내고 나이와 마리수를 헤아리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그 짐승들로부터 얻어지는 고기의 양을 합산, 영양분의 부피를 산출한다.

살림터의 너비나 사람수를 따져 몇사람이 얼마동안 살았는가를 계산하고 옛살림을 복원하기도 하였다.

절대연대를 찾는 일도 차츰 정확하고 세련돼지고 있다. 방사선 탄소를 사용, 최초로 석장리의 연대측정을 한 이래 여러 측정기법들이 도입된었다. 용굴 상시에서는 토륨-우라늄방법으로 연대를 측정했고, 이 밖에도 아르곤-칼륨 방법, 열형광방법(전곡리)등을 이용하고 있다. 최근에는 전자회전반응방법 (ESR)이 상원의 검은모루(1987)와 금굴(1988)의 연대측정에 사용되었다.

한편 석기의 용도를 추정하는 연구도 이뤄지고 있다. 구석기인들이 석기를 만들었지만 이를 실제로 어떻게 썼는지 알아내야 당시 사람들의 행동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 이때 주사전자현미경(Scanning Electron Microscope)이 활약한다. 이 현미경으로 석기를 자세히 보고 사진 찍어서 비밀을 밝혀내는 것이다. 실제로 상노대도 상시 두루봉유적의 석기가 이 현미경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뼈연장연구에 있어서도 전자현미경은 유용하다. 뼈를 어떻게 사용했나를 밝혀주는 것이다 (점말용굴). 연구 결과 많은 뼈연장이 발견되었는데 이는 국제학회에서 주목되기도 하였다.

뼈에 새겨진 가는 금들을 전자현미경으로 찾아내기도 하였다(점말 용굴). 또 흑요석의 본래 산지를 찾아내는 작업도 현재 진행중이며(상무룡리 전곡리 신답리 양평 석장리 수양개 상노대도 연대도 오산리 등이 후보지역) 사람의 머리털을 전자현미경으로 분류, 사람의 갈래를 가려내는 작업도 하고 있다(석장리).

이같은 연구는 아직 미흡한 수준이다. 게다가 모두 학자 개인의 노력으로만 진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앞으로 우리 선사문화의 발굴과 보존에 대해서 사회의 관심이 좀더 커져야 하고 이를 뒷받침할 기구가 생겨야 한다. 최소한 선사문화연구소와 역사고고학연구소가 세워져야 하는 것이다. 최근 대만에서는 중화민국 선사박물관을 만들기위해 매우 많은 예산을 배정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우리나라 구석기 유적의 분포
 

이 기사의 내용이 궁금하신가요?

기사 전문을 보시려면500(500원)이 필요합니다.

1989년 06월 과학동아 정보

  • 손보기 소장

🎓️ 진로 추천

  • 역사·고고학
  • 문화인류학
  • 지구과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