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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중국 전통과학의 한계 왜 제자리 걸음만 했나


중세까지만 해도 서양보다 앞선 면이 많았던 동양의 과학이 뒤쳐지게 된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최근 들어 과학이 야기하는 많은 문제점들이 주목을 받게 되면서 현대과학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이 커져 가고 있다. 그리고 현대과학이 원래 서양에서 유래한 것이었다는 인식으로부터 탈피, 서양 이외의 문화권의 과학으로 눈을 돌려서 현대과학에 대한 대안(大案)을 찾으려는 경향이 자라나고 있다. 그중에서도 동양의 과학과 자연철학에 대한, 그리고 그 핵심을 이루는 중국의 전통과학과 자연철학에 대한 관심이 퍼져가고 있다.

우리나라의 학계 일각에서도 이야기되고 있는 이른바 '신과학운동'이라는 움직임도 동양의 과학과 사상에서, 무언가 현대과학의 문제들로부터의 출구를 찾아보려고 하는 일면을 볼 수 있다.

중국문화권에 속해왔던 우리 자신으로서는 우리 자신의 전통과 연결된 중국의 과학과 자연철학에 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의 전통과 연결되었다고 해서 우리가 중국의 전통과학과 자연철학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대부분은 어려서부터의 교육과 생활을 통해 서양에서 유래한 현대과학의 여러 요소들에 아주 깊이 젖어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서양의 과학전통보다도 중국의 전통과학에 대해 더 무지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물론 중국의 전통과학과 자연철학에 관한 글과 책은 얼마든지 나와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중국의 전통에 대해 착실하고 정확한 이해를 추구하는 대신 동양의 것이라고 해서 무작정 지나치게 호의적이거나 열광적인 태도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현대과학의 탈출구?

이같은 글들은 때로는 중국의 전통과학이나 자연철학의 여러 요소들이 현대과학의 기본 관념들과 더 부합된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예를 들면 양자역학(量子力学)이나 상대성이론이나 진화이론같은 것의 기원을 중국의 전통사상에서 들춰내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중국의 전통과학과 자연철학이, 수많은 문제들로 인해 딜레마에 빠져 있는 현대과학에 탈출구를 열어 줄 수 있으리라는 느낌을 제시하기도 한다.
결국 동양의 것에 대한 지나친 열광은 중국 전통과학이 현대과학의 중요한 특성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와 동시에 현대과학의 문제들을 해결해 줄 수도 있는, 거의 '만병통치약'같은 성격을 지닌 것으로 미화시키고 말았다.

물론 사실이 그러하다면 우리로서는 얼마든지 기분좋은 일이다. 그러나 기분좋은 일이라고 해서 사실이 그렇지 않은 것을 그렇다고 믿을 수는 없다. 이같은 생각은 대부분 서양과학 자체에 대한, 그리고 서양과학을 낳은 서양의 문화적 전통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비롯된 것이다. 여기에 중국의 전통과학과 자연철학에 대한 아주 피상적이고 부정확한 지식이 합류하고 있다.

현대과학의 어떤 측면과 중국 전통과학의 어떤 요소와의 사이에서 볼 수 있는 지극히 피상적인 유사성으로부터 그것이 마치 중국 전통과학이 지닌 심오한 '현대과학적' 성격을 드러내 주는 것으로 결론짓는 일을 우리는 자주 보게 된다.

예를 들어 뉴턴역학에 바탕한 근대 자연관에 비해 양자역학 상대성이론 등에 바탕한 현대과학이 결정론적이고 인과론적인 색체가 약해졌다고 해서, 전통중국의 비결정론적·비인과론적 자연관이 현대과학과 부합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지나친 비약이다.

또한 중국의 전통과학에는 지금 현대과학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들이 없었고 그것이 현대과학과 뚜렷이 다른 성격을 지녔다는 이유만으로 현대과학이 지니고 있는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거기서 찾으려는 것도 같은 정도의 큰 비약이다.

그같은 현대과학의 문제들은 서양의 과학이 현대에 이르는 동안 거치게 된 전문화 제도화 실용기술화 거대화의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러므로 이같은 과정을 겪지 않은 중국 전통과학의 요소들로부터 현대과학의 문제점들을 해결하겠다는 생각은 너무나 소박하고 비역사적인 태도인 것이다.

특히 서양과학과 중국 전통과학의 차이라고 흔히 이야기되는 것들 중에는 지나치게 단순화되거나 왜곡되어 있는 게 많다. 이는 서양과 중국 양쪽 모두에 대한 몰이해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러한 몰이해가 드러나는 좋은 예들은 16 17세기 발생, 근대과학을 출현시켰던 과학혁명이 왜 중국에서는 일어나지 않았나 하는 질문과 관련된 수많은 논의들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그러면 이제 이 질문을 중심으로 해서 중국 전통과학의 여러 측면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니덤」의 반박

현대에 와서 중국문명을 돌이켜 보면서 가지게 되는 가장 흥미있는 질문 한가지가 "왜 중국에서는 과학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나?" 또는 이보다 조금 완곡한 형태로 "왜 중국에서는 근대과학이 독자적으로 발전되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최근에 와서 중국에도 오랜 세월을 두고 독자적인 과학적 기술적 지식이 존재했고 발전해 왔으며, 적어도 12 13세기경까지는 서양에 비해 여러 면에서 훨씬 앞서 있었다는 것이 인식되면서 이 질문은 더욱 자주 반복되었다.

그리고 비단 중국사학자들만이 아니라 아인슈타인이나 러셀(Bertrand Russell)로부터 중국의 호적(胡適)등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철학자 과학자들까지도 이 질문에 관심을 가지고 제각기 해답을 제시해왔다.

1950년대에 들면서 중국과학사학자 '조셉 니덤'(Joseph Needham)은 '중국의 과학과 문명'(Sience and Civilization in China)이라는 제목의 방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그의 연구는 중국의 과학적 기술적 전통의 풍부함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그의 연구의 밑바닥에서도 자연히 앞에서 설정한 질문이 깔려 있다. 그 동안 니덤은 이에 대한 몇가지 해답을 제시해 왔다.

먼저 니덤은 그 질문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제시한 몇가지 해답들을 살펴보고 그것들을 반박한다.

첫째 중국에는 수학, 특히 기하학의 발전이 없었고 이것이 근대과학의 성립을 방해했다는 견해에 대해서 반박하고 있다. 그는 중국에 수학의 발전이 없었던 것은 아니며 특히 대수학 분야에서는 상당한 발전이 있었다는 점, 그리고 항상 기하학적 방법만을 통해서 모든 문화권의 과학이 발전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오히려 대수학의 방법이 현대과학과 더 부합되고 그 발전에 더 기여했다는 점을 들어 이를 반박한 것이다.

중국에는 실험이 없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현대과학과 비교해 보면 중국에서의 실험적 활동은 미미했다. 그러나 중국에서도 과학혁명 이전에 서양에서 행해졌던 정도의 실험은 행해지고 있었다. 또한 서양에 있어서조차도 근대과학의 성립에 있어 실험의 역할이 그렇게 절대적으로 컸다고는 볼수 없는 것이다.

중국에 정확하고 논리적인 추론의 전통이 없었음을 이유로 드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것도 정도 문제일 뿐 중국에 그런 추론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와 관련해서 중국어 자체가 단수 복수 남성 여성 및 주격 소유격 목적격 등의 여러 문법적 구별을 갖지 못해서 엄밀한 과학적 논리전개에 부적당했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필요한 경우에는 엄밀한 논리전개를 중국사람들이 할 수 있었다는 증거는 얼마든지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중국인들이 합리적인 이해보다는 직관적인 통찰을 중요시했고 이것이 과학발전을 저해했다고도 이야기 한다. 그러나 이 또한 수많은 중국 유학자(儒学者)들의 극도로 합리적인 글을 살펴보면 타당치 않다는 것을 곧 알수 있다. 그들의 글이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지나치게 합리적이고 실용적인 면까지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중국인들의 시간에 대한 관념이 직선적인 아니라 순환적이어서 '발전'이라는 생각이 스며들 소지를 막았다는 주장까지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사실과 거리가 멀다. 많은 중국의 유학자들은 순환적 시간개념에 반대했다. 또 설사 그들이 순환적 시간개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과학발전을 방해해야만 할 분명한 이유가 없는 것이다.
 

침술은 중국 의술의 기본이었다.


여러가지 답변과 타당성

이런 해답들을 비판한 니덤은 그 대신 주로 사회적 요소들에서 해답을 찾으려했다.

니덤이 가장 중요시한 요인은 유교사상에 바탕을 둔 중국의 관료제이다. 유교자체가 주로 인간과 사회의 문제에만 관심을 둘 뿐 자연세계에 대해서는 관심을 지니지 않았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상류 지식층은 관료가 되기만을 원함으로써 과학 기술 분야에 인재가 유입되지 못했다는 점도 들고 있다.

반면에 도교(道敎)는 자연에 대한 관심도 훨씬 많았고 그 사상도 과학과 훨씬 잘 부합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도교는 유교 관료제에 억눌려 사회의 하층부에 머물게 되었고, 그 때문에 본격적인 과학의 발전에 기여하지 못했다고 니덤은 생각한다. 또한 니덤이 중국에 상인계급이 형성되지 못한 것을 한가지 요인으로 드는 것도 그가 지닌 같은 종류의 생각으로 볼 수 있다.

또한가지 니덤이 강조하는 점은 중국에 전지전능한 창조주로서의 신(神) 이라는 개념이 없었다는 점이다. 신은 세상의 모든 사물을 창조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창조한 사물들이 만족해야 할 자연법칙까지도 만들었다. 따라서 신에 대한 이러한 믿음은 자연세계에 합리적인 사고가 있고, 그것을 인간이 알아 낼 수 있다는 확신을 준다고 니덤은 생각했다. 그러므로 자연현상을 살피고 거기서 신이 부여한 법칙을 탐구해 내는 일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게 되는데, 중국에는 이런 개념이 없어서 과학의 발전이 여의치 않았다는 것이다.

이같은 니덤의 생각에서도 역시 잘못을 찾을 수 있다. 우선 도교가 자연과 친근하고 조화를 유지하려는 경향을 지니고, 이에 따라 자연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자연현상의 적극적인 관찰로 이어졌던 것은 아니다. 더구나 그로부터 실험이 연유한 것은 아니었다.

반면 유교가 인간위주였음은 사실이지만 인간의 주위환경으로서의 하늘 땅 우주에 관한 일반적이고 합리적인 관심과 탐구는 유학자들 사이에 지속되었다. 만약 중국에서 근대과학이 일어났다면 도교에서보다는 오히려 유학의 전통에서 연유했을 것으로 필자는 생각한다. 실제로 17세기에 이르면 많은 유학자들이 과학에 적극적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상인계급과 관련해서도 니덤의 견해는 합당하지 않다. 서양에서 상인계급의 대두와 근대과학의 성립이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 사이에 뚜렷한 인과관계는 찾을 수 없다. 설사 인과관계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똑같은 관계가 중국에도 있었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신'에 관한 생각 역시 비슷한 잘못을 지니고 있다. 신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고 해서, 자연현상을 탐구하지 않고 자연세계에서 질서와 법칙을 찾지 않아야 할 이유는 없다. 그러한 신의 개념이 없이도 중국의 유학자들이 자연세계에 질서가 있음을 믿었던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들의 믿음이 서양과 달랐던 것은 이 질서를 엄밀한 자연법칙으로서가 아니라 훨씬 모호한 이(理), 태극(太極)등의 개념으로 나타냈다는 것 뿐이다.

불이 나지 않은 까닭

결국 "왜 중국에서 근대과학이 발전하지 못했나?"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모두 미흡한 점이 발견된다. 따라서 질문 자체에 대한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즉 "왜 중국에서 근대과학이 발전하지 못했나?"를 묻는 것보다 "왜 서양에서 근대과학이 출현했나?"를 묻는 것이 옳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어떤 역사적 사건이 어디서나 당연히 일어나야 할 성격의 것이 아닌 한, 왜 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나를 묻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아울러 서양에 근대과학을 성립시킨 16 17세기의 과학혁명이 어느 문화권에나 있을 수 있는 보편적이고 당연한 사건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심지어 어떤 학자는 마치 불난 집에 불이 난 이유를 묻지 않고 불이 나지 않은 집에 왜 불이 나지 않았나를 묻는 것과 같은 잘못이라고까지 이야기한다.

물론 그럴 듯하게 들리긴 하지만 이 역시 지나친 비유이다. 지구상의 아무 문화권에 대해서난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에스키모문화나 인디언문화를 두고서 우리는 그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 위의 질문은 중국이 굉장히 성숙한 문화를 지니고 있었고, 정치 경제 기술 예술 등에 커다란 발전을 보였으면서 과학만은 등한시했거나 발전이 뒤떨어진 것이 특이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던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위의 질문의 형태가 잘못된 것만은 사실이다. 따라서 질문의 형태를 약간 바꿔 보면 훨씬 무리가 없고 타당한 질문을 얻게 된다. 즉 "왜 서양과학은 과학혁명을 거쳐 근대과학으로 발전해 나갔는데 중국의 과학은 다른 형태로 발전했고 근대과학을 성립시키지 못했는가?" 하는 것이다.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해답들은 거의 예외 없이 과학 외적인 요소들, 예를 들어 사회적 사상적 정치적 종교적 배경이나 과학의 방법 등이었고, 실제 과학의 내용에 관한 것은 없었다.

마치 서양에서 존재했던 과학 외적인 요소 한가지가 중국에는 없어서 과학발전이 저해되었다는 식의 해답이 얻어졌던 것이다.

물론 앞에서 본 요소들이 모두 서양과 중국 두 문화권의 과학발전의 차이에 어느 면에서 얼마만큼씩 기여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기여는 대부분 간접적이고 부분적인 것이다. 이보다는 실제로 중국의 과학과 자연관의 내용을 살피고 거기서 서양과의 유사점 및 차이점을 찾아보는 작업이 훨씬 더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인체내의 기관보다 그 기능을 중요시 했다.


기능을 중요시한 동양의술

실제로 중국에는 몇몇 분야들에 오랜 과학적 전통이 존재했다. 수학 역법(曆法) 화성학(和聲学) 의술(醫術) 점성술 연금술 풍수술(風水術)등의 분야들이 중국전통 사회에서 일정한 수준의 방법과 내용상의 전문성을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전문가들의 집단도 형성하면서 지속적으로 추구되어 왔으므로, 이 분야들을 중국 전통과학을 구성하는 '분야'들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런데 이 분야들을 서양 전통과학의 분야들, 또는 현대과학의 분야들과 비교해 보면 이내 뚜렷한 차이점이 드러난다. 우선 분야의 분류 자체가 크게 다르다. 뿐만 아니라 서양에는 존재했으나 중국 전통과학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분야(예를 들어 물리학), 그리고 거꾸로 서양에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중국에 존재했던 분야(예를 들어 풍수술)를 볼 수 있다.

특히 점성술 연금술 풍수술처럼 현대과학의 입장에서 결코 '과학'이라고 부를 수 없는 분야도 있었다. 그러나 이 분야도 중국전통 사회에서는 성행했을 뿐 아니라 어느 정도 수준에 달해 있었다.

이들 분야는 구체적 내용이나 방법면에서도 서양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먼저 수학은 중국전통에서는 산학(算学) 이라고 불리었고 역법이나 실용적인 목적의 계산에 주로 사용했다. 따라서 그 내용과 방법에 있어서 고대 그리스에서 유래해서 발전한 서양의 전통수학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숫자나 크기의 성질과 그것들 간의 관계에 대한 이론적 고찰보다는 실제 계산을 압도적으로 중요시했던 것이다. 따라서 기하학보다는 대수학의 성격이 아주 강했다.

역법은 글자그대로 달력(曆)을 계산하는 방법이었는데, 전통중국에서의 '달력'은 오늘날 우리가 달력이라고 부르는 것에 해당하지 않는다. 즉 해 달 별 등의 주어진 시점에서의 위치표를 통칭했었고 그에 따라 천문현상에 대한 관측과 계산을 필요로 했다.

이 분야도 서양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서양의 전통천문학이 우주구조에 대한 기하학적 모델을 세우고 그에 바탕한 설명과 계산을 수행한데 반해 중국의 역법은 여러 천문현상의 반복에서 경험적으로 관측된 주기(周期)들을 사용한 계산법에 의존했다.

전통중국에서는 예악(禮樂)이라고 하여 음악을 예(禮)와 결합, 매우 중요시 했다. 그래서 음악의 기초가 되는 화음(和音)에 대한 논의, 즉 화성학은 율학(律学)이라고 이름지어진 하나의 전문분야를 이루었다.

화음을 이루는 음을 내는 현이나 관의 길이들 사이의 간단한 숫적 관계가 중국의 역대 정사(正史)에서 항상 취급되고 있을 정도다. 아울러 황실에 대한 의식(儀式)적 정치적 중요성때문에 그와 비슷한 특성을 지닌 것으로 생각된 역법분야와 결합, 율력(律曆)이라고 불리우기도 했다.

중국의 전통의술은 건강과 질병에 관한 이론적 탐구와, 약물 및 기타 처치법에 의한 질병의 치료를 수행했다. 아울러 일반적 섭생과 여러 건강비법들을 중요시했다. 의술 속에 포함시킬 수 있는 본초(本草) 라고 불리는 분야는 동물 식물 무기물의 약효를 포함한 많은 지식을 분류 정리하고 있어서 오늘날의 생물학 광물학 등에 해당된다.

그리고 침 뜸 등의 처치법은 중국에만 독특했던 분야였다. 이러한 전통중국의 처치법이 인체에 대한 체계적 지식에 바탕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중국인들은 인체내의 기관들보다 그 기능들을 중요시해서 서양과 큰 차이를 보였다.

그들은 간(肝)이나 신(腎) 같은 용어로 구체적 기관들만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그 기관과 관련된 기능들을 가리켰다. 심지어는 해부학적으로 그 위치를 정확이 알 수 없는 삼초(三焦)와 같은 것까지 이야기했다.

금(金)과 불로장생

하늘에서의 현상이 지상의 현상과 연결되어 있고 서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성술의 기본 믿음은 세계 여러 전통문화들에 있어서 공통된 경향이다. 전통중국에서도 천문(天文) 이라는 말이 오늘날의 천문학이 아니라 점성술을 의미했을 정도로 특히 중요하게 여겨졌다.

중국 점성술은 하늘과 인간세계의 질서가 서로 연결되어 있고 황제가 그것들 사이의 중재자라는 믿음에 바탕했다. 따라서 하늘에서의 이상(異常)현상은 황제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경고로 해석되었다. 천문 기상의 이상현상의 관측과 해석이 큰 정치적 중요성을 띠게 된 것이다. 반면에 서양 점성술에서 중요시했던, 천상의 현상과 개인의 운명과를 연결짓는 믿음은 중국에서는 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서양의 연금술이 비천한 금속으로부터 금을 얻어내려는 목적에서 추구되었던데 반해 중국의 연금술은 불로장생약을 목적으로 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물론 현대에 사는 우리에게 이들 두가지 시도들은 모두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것들은 서양과 중국의 전통적 자연관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했다.

특히 중국의 연금술 과정은 실제 자연에서는 주로 감춰진 채 일어나는 오랜 시간 동안의 변화들을 짧은 시간과 좁은 공간 속에서 인간의 힘으로 일으키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사람들이 거주하는 가옥 도시 등과 조상들의 무덤자리가 자신들의 운명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중국 특유의 믿음인 풍수(風水)는 전통중국에 있어서의 또하나의 전문 과학분야를 형성했다.

물론 이러한 믿음도 현대과학에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그러나 전(全)우주가 기(氣)로 이루어졌다는 자연관을 받아들였던 중국인들에게는 이것이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실제로 이같은 원칙에 바탕해서 전문적이고 기술적인 풍수이론을 발전시켰고 풍수가라는 전문직업을 탄생시켰다.

지금까지 살펴본 분야들을 그것들이 사회에서 지녔던 위치에 따라 두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니덤이 제안한 '정통'분야들과 '비정통'분야들 사이의 구별이 그것이다.

역법과 화성학은 중국의 역대 왕실이 특히 중요하게 여겼다. 정부에 이를 전담하는 부서와 관리들이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들 분야와의 관련 때문에 점성술과 수학도 정부에서 주도했다. 따라서 수학 역법 화성학 점성술의 네 분야를 정통분야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주로 민간에서 행해졌던 연금술과 풍수술 같은 분야는 비정통분야였던 셈이다. 한편 의술은 정부와 민간 양쪽 모두에서 널리 행해졌으므로 정통분야와 비정통분야의 중간에 위치했다고 볼 수 있다.
 

중국인들은 세계에서 처음으로 종이를 만들었다.


기(氣)는 분석기능을 저해

중국 전통과학 분야들의 밑바탕에는 그 기초를 이루는 전통중국의 독특한 사상적 요소들이 깔려 있다. 지금부터 '기'(氣)라는 한가지 구체적 예를 통해 중국 전통 자연철학과 서양 전통자연철학과의 차이를 비교해보자.

중국 전통사상에서 기는 세상의 모든 사물을 구성하고 모든 현상을 일으키는 기초였다. 그러나 기는 서양의 물질의 개념과는 달랐다. 그것은 물질 비물질의 구별없이 모든 사물을 구성하고 모든 현상을 일으킬 뿐 아니라, 불활성(不活性)인 서양의 물질과는 달리 운동을 하는 능력을 그 자체내에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기 속에 운동의 능력이 내재한다는 사실은 중요한 결과를 빚었다. 기가 수많은 작용과 운동을 해서 수많은 현상과 성질들을 만들어내지만 이런 작용과 운동들은 기의 본질적인 성질일뿐, 외부 원인의 작용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중국인들은 어떤 자연현상이든 그것이 기의 어떤 작용과 운동 때문에 일어났다고 이야기되면 충분히 설명되었다고 생각했다. 그에따라 기의 여러가지 작용과 운동들에 대한 자세한 분석을 행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기의 작용과 운동들에 의해 일어난 여러 자연현상들은 중국인들에 의해 그냥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이 점은 서양과 다르다. 물질의 여러가지 운동들의 원인에 대한 끈질긴 탐구가 끝내는 16 17세기 과학혁명의 핵심이었던 근대역학을 낳았다는 사실과 비교해보면 그 차이는 여실히 드러난다.

서영과학위주의 사고에서 벗어나야

물론 우리가 중국의 전통과학과 자연철학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이유는 그에대한 이해가 현대과학의 문제들과 관련, 우리의 사고를 도울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서이다. 그러나 그러한 도움을 얻기 위해서는 중국의 전통과학과 자연철학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그 자체로서 정확한 것이어야 한다.

현대과학의 바른 이해를 위해서 우리는 전통중국의 전문 과학분야들과 자연철학을 깊이 살펴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서양과 서양과학 위주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동양의 전통에 대한 보다 폭넓은 이해를 얻는 데 크게 도움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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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06월 과학동아 정보

  • 김영식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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