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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에세이 인공지능의 허와 실

인공지능은 인간과 똑같은 능력을 가진 기계를 만드는 것도 아니며, 껍데기만 인간을 흉내내고 속은 텅빈 꼭두각시를 만드는 것도 아니다.

일반적으로 기계는 반복적인 작업 또는 주어진 제약 조건 아래서 어떤 융통성도 갖지 않는 작업을, 인간보다 훨씬 잘 수행하는 것으로 알려져 왔다.

컴퓨터의 경우를 예로 든다면, 숫자 계산이나 정보저장 그리고 반복적 자료 처리는 인간이 컴퓨터를 따라 갈 수 없는 영역이다. 그러나 기계는 역시 기계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이, 창조성과 융통성을 발휘하는 작업, 다시말해 상황의 변화에 적절히 대처해나가는 것이 필요한 작업에 있어서는 인간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형편 없다고 한다.

기계와 비교하여 인간이 월등히 뛰어난 이런 측면을 우리는 '지성적'측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성의 뛰어난 측면을 기계(컴퓨터)로 재현시키려는 노력, 그리하여 보다 똑똑한 컴퓨터를 만들어보려는 시도, 이런 것들이 '인공지능' 이라는 연구분야의 핵심적 요소이다.

창조성과 융통성

창조성과 융통성을 갖는 것으로 알려진 지성은 다음과 같은 능력들을 갖는다고 한다.
△상황에 매우 유연하게 반응하며 △우연적인 환경의 조건을 이용할줄 알고 △애매하고 모순적인 이야기들에서 의미를 이끌어낼 줄 알며 △어떤 상황을 구성하는 서로 다른 요소들의 상대적 중요성을 파악하며 △상황들을 갈라놓을 차이점들에도 불구하고 그 상황들 사이의 유사성을 발견하고 △상황들을 연결시키는 유사점들에도 불구하고 상황들을 서로 구분지으며 △예전의 개념들을 가지고 그것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엮어서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낸다. 결과적으로 새로운 창조적인 생각들을 떠올린다는 의미이다.

결국 인공지능이란 넓게 이야기해서 위에서 제시된 능력들을 갖춘 기계를, 즉 지적(知的)인 기계를 만들어보고자하는 컴퓨터과학의 한 연구 분야이다.
그런데 도대체 사람처럼 똑똑하고 지능이 높은 기계를 만들 가능성은 있는 것일까?

과자로 만든 집

지금도 그렇지만 어릴적에 나는 과자를 무척 좋아했었다. 그래서 나에게는 소원이 있었다. 그것은 과자로 만들어진 집에서 사는 것이었다. 쵸콜릿으로 만들어진 지붕에다 비스킷으로된 문 같은 것은 상상만 해도 기가 막힌 것이었다. 그렇지만 나이가 들면서 그런 생각을 바꾸어야 했다.
집은 사람이 살아야 하는 목적을 위해 지어지는 것인데, 과자로 된 집은 너무 약해서 살기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배가 고파서 지붕이나 대문 등을 먹어 치워버린다면, 과자로 된 집에서는 살 수 없으리라는 어른스러우면도 좀 현실적인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집은 꽤 많은 재료로 지어지고 있다. 시멘트와 철근으로 지어진 집도 있고 돌로 지어진 것, 나무로 지어진 것, 흙으로 지어진 것, 갈대로 지어진 것 그리고 플래스틱 같은 것으로 집을 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이 들어가서 살기에 부족함이 없다면 어떤 것으로 집을 짓던 사실상 별 문제가 없는 것이라 여겨진다. 즉 집이라는 것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들어가서 살 수 있다는 점인데, 반드시 무슨 재료로 집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이야기는 거기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적인 능력들에 대해 이런 생각을 적용시킨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우리의 지적인 능력은 두뇌 활동의 결과이다. 그런데 이 뇌라는 것은 뉴런이란 신경세포로 이루어져 있고 그것은 결국 단백질과 몇가지 분자들로 이루어져 있을 것이다.

만일 신이 인간을 지금과 같은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돌이나 쇠로 구성된 존재로서 창조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어떠 했을까? 인공지능은 바로 이런 종류의 물음을 극단적으로 끌고간 결과 나타나게 된 분야라 보여진다.

플래스틱으로 집을 만드는 것이 하등 이상할 것이 없는 것처럼 뉴런이 아니라 실리콘·칩으로 된 두뇌를 생각하는 것이 이상스럽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란 이야기이다. 집이 나무로 지어졌건 돌로 지어졌건 사람이 그·안에서 살 수 있는 한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인간이 가진 지적인 능력, 즉 줄여서 지능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이 똑똑해서 어려운 문제를 척척 풀어내는 것이라면 뉴런으로 되었건 실리콘 칩으로 되었건 문제될 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좀 어려운 이야기로 해보자. 집이라는 것은 여러가지 방식으로 실현될 수 있다. 돌로 실현된(지어진) 집도 있고 나무로 실현된 집도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적인 능력들(계산하고 추리하고 판단하는 능력들)도 여러가지 방식으로 실현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지적인 능력의 실현 방식 중 한 가지가 우리의 두뇌이고 또 한 가지가 컴퓨터라면 컴퓨터에 대해서도 당연히 똑똑하다거나 지능을 갖고 있다거나 생각하고 있다는 말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란 것이다.

인공지능 연구가들은 우리의 두뇌와 우리의 정신(또는 지능)과의 관계는 컴퓨터에 있어서 하드웨어(Hardware)와 소프트웨어(Software)의 관계와 같다고 본다. 즉 그들은 정신의 작용은 컴퓨터의 프로그램과 같은 수학적이고 논리적인 문장들로 나타내어질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런 문장들은 집을 짓는데 필요한 설계도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마치 우리가 설계도에 지시된 지시사항을 만족시키면서 여러가지 다른 재료로 집을 지을 수 있는 것처럼(설계도에 어떤 재료를 특별히 사용하라고지시 된 경우도 있겠지만), 우리의 정신 작용도 그것의 중요한 측면들을 망가뜨리지 않으면서 두뇌를 통해 실현될 수도 있고 컴퓨터를 통해 실현될 수도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의 신체의 일부분인 두뇌는 우리의 지적인 능력을 표현하는 수학적이고 논리적인 문장들로 이루어진 프로그램(즉 소프트웨어)이 얹혀지는 하드웨어에 불과하게 된다.

그래서 하드웨어가 두뇌인 인간과 하드웨어가 컴퓨터 본체인 컴퓨터라는 기계는 그것들을 움직이게 하는 최종 명령인 프로그램이 지적인 능력을 드러내개끔 꾸며진 것이라면 꼭 같이 지적인 것들(영리하고 똑똑하고 판단력있는 것들)이라 볼 수 있게 된다.

이렇게 해서 똑똑하고 영리한 기계를 만들어 보려는 시도가 행해지게 되고 그 결과 매우 지능이 높은 컴퓨터가 나타나기에 이르렀다. 여러가지 증세를 입력했을 때 우리 신체에 어떤 병이 생겼는지를 알려주는 컴퓨터(전문가 시스팀)가 생겼는가 하면 자동으로 외국어를 모국어로 번역해 주는컴퓨터가 만들어 지기도 했고 부분적으로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컴퓨터도 만들어졌다.

이렇게 나간다면 머지않은 장래에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컴퓨터가 대신해 줄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다. 급기야 장래의 문제들도 상담할 수 있고 고독할 때 말벗이 되어 줄 수 있는 컴퓨터도 나타날 것이다. 그야말로 내가 과자로 된 집을 꿈꾸었던 것보다 훨씬 멋진 세상이 막 시작되려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찬사와 두려움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런 컴퓨터의 위력에 한편으로는 찬사를 보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걱정스러움과 두려움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기계가 우리의 생활을 많이 바꾸어 놓으리란 것이다.

만약 실제로 매우 지능이 높고 똑똑한 컴퓨터가 만들어졌다면, 그리고 우리가 그 기계와 서로 대화를 나눌 수 있고 함께 일할 수도 있게 된다면, 우리는 그 컴퓨터를 친구로서 생각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떻게 인간이 아닌 기계를 사람처럼 생각할 수 있을까 여길 것이다. 하지만 인공지능의 정신을 충분히 따른다면 그런 컴퓨터를 모래 덩어리나 쇳조각으로 생각하는 것은 넓은 의미의 인종차별이 된다. 인종차별이란 종족 간의 신체적 조건(머리카락 색깔, 피부색, 눈의 색깔 등등)의 차이를 가지고 특정한 사람들을 차별 대우하는 것을 말한다. 이런 인종차별이란 것은 물론 옳바른 것은 아니다.

인간은 인간인 이상 그런 여러 조건의 차이에 구애 받음이 없이 동일한 가치를 갖는 존재로서 대접 받아야한다는 것은 민주주의적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받아들이게 되는 생각이다. 이 생각을 보다 넓게 확장시킨다면 인간과는 몸체 구조가 다르지만 보통의 인간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또 인간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으며 인간을 돕고 있는 기계도 사람처럼 대접해야 된다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무슨 황당한 이야기냐고 하겠지만 인간만이 할 수 있다는, '인간'이라는 생물학적인 종(種)으로서의 아집을 버리고 보다 개방적인 자세로 우리의 생각을 넓게 확대시켜본다면 그렇지만은 않다. 같은 인간이지만 피부색의 차이때문에 차별대우를 받는 것이 부당한것 처럼, 비슷한 지능을 갖고 서로 의사소통을 하고 있는 존재들을, 그것들을 구성하고 있는 분자들이 다른 것들이라고 해서, 심하게 차별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아직까지는 무리하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오래된 고정관념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기계라는 것을 볼트와 너트 그리고 기어와 피스톤과 크랭크 같은 것으로 이루어진 우악스런 구조물로서 먼저 떠올리거나, 한치의 오차도 없고 융통성도 없는 인정사정 모르는 차가운 어떤 것으로 생각해온 것이 보통이었다. 이곳 저곳으로 움직여갈수 있고 몸체도 부드럽고 유연하게 구부려질 수 있고 상황에 따라 다른 판단도 내릴 수 있는 보다 사람에 가까운 기계가 우리 주변에 가득하다면 생각이 바뀔지도 모른다.

게다가 과학이 더욱 발전하게 될 경우, 신체의 상당한 부분을 기계의 힘을 빌어 움직일 수 밖에 없게될 사람들에게는 더욱 쉽게 생각을 바꿀 기회가 오게 될 것이다. '육백만불의 사나이'같은 존재를 우리는 단순히 기계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편리한 기계의 양면성


편리한 기계의 양면성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기계가 우리의 생활을 바꾸어 놓게 된다면 걱정스러운 일도 많이 생길 것이다. 시키는대로 일하는 기계가 아니라 생각하는 기계가 활개를 친다면 그것이 혹시나 인간을 해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설사 그런 위험은 없다하더라도 적어도 인간은 그때부터는 기계가 시키는대로 따를 수 밖에 없는 그런 존재로 전락하지 않을까 하고 걱정할 수 있다.

그런 기계가 등장함으로써 (만약 등장한다면), 한쪽에서는 편리함과 안락함이 주는 인간적인(?) 여유가 탐스럽게 보이는 미래가 서 있기도 하겠지만, 다른쪽에서는 만물의 영장으로서의 인간의 위치에 대한 심한 회의가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런데 생각하는 기계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아무리 컴퓨터 과학이 발전한다고 해도 사람만큼 똑똑한 기계를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똑똑한 컴퓨터란 단지 인간의 지적(知的)인 행동을 흉내내고 있을 뿐이지 참으로 뭔가를 알고 있다고는 할 수 없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상대성 이론으로 유명한 아인슈타인 박사가 각지로 강연을 다니고 있을 때였다. 아인슈타인 박사는 늘 자동차를 타고 다녔는데, 항상 박사를 모시는 그 차의 운전사는 수없이 강연을 들을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너무도 자주 강연을 듣다보니 그 운전사는 강연 내용을 깡그리 외울 정도가 되었고 강연에 있어서 만큼은 아인슈타인 박사 못지 않게 잘할 자신도 생겼다. 그래서 어느날 그는 아인슈타인 박사에게 자신도 그 정도의 강연은 능히 할수 있겠다고 말하고, 박사 대신 한번 강연을 해보겠다고 청했다.

드디어 그는 박사의 허락을 얻어 어느 대학의 강단에 서게 되었다.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아인슈타인 박사를 가장하고 나선 이 운전사는 오히려 물리학의 대가보다 훨씬 잘 강연을 해냈다. 그런데 강연끝에 어느 학생이 좀 어려운 질문을 하고 말았다. 자신의 신분이 들통나게 될 이 순간 운전사는 다음과 같은 말 한마디로 위기를 모면한다. "그 문제는 너무 쉬워서 저기 있는 내 운전사도 다 아는 것입니다. 그에게 물어보십시오." 이런 말을 하고선 진짜 아인슈타인 박사를 가리켰다.

우리를 놀라게 한 컴퓨터 또는 인공지능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이 운전사의 경우처럼 단지 어떤 행동을 흉내내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다. 그래서 인공지능이란 것은 잘 살펴보면 '빛 좋은 개살구'나 '속 빈 강정' 같은 연구가 아니냐는 혹평을 하는 사람도 있다.

자기 스스로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복잡한 프로그램에 지시된대로 움직이는 컴퓨터가 설혹 매우 뛰어난 지능을 요하는 작업을 잘 해내고 있다고 해서 컴퓨터를 영리하고 똑똑한 녀석이라고 칭찬해 줄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마치 아인슈타인 박사의 운전사가 상대성 이론을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인공지능이라는 분야의 대담한 계획에 대해 회의를 품고 있는 사람들은 또 다른 문제를 제기한다. 즉 그들은 컴퓨터가 생각하는 방식과 사람이 생각하는 방식은 전혀 다르다고 주장한다.
컴퓨터는 주어진 문제를 논리적인 순서에 따라 처리에 나가서 정확한 답을 찾아낸다고 한다. 그런데 사람은 가끔 그런 방식을 따르고 있지 않는 듯하다.


'휴리스틱'(Heuristic)


바둑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바둑을 둘 때 컴퓨터는 엄밀한 논리의 법칙을 따라서 한수 한수가 야기하게 될 전세의 유리함과 불리함을 다 따져서 가장 좋은 수를 선택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런 것을 따져 볼 충분한 시간이 없다. 컴퓨터가 이런식으로 한수를 두려고 한다면 바둑을 수십판 혹은 그 이상의 판을 끝낼 만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니까.

반면 사람은 모든 결과를 다 생각하고 한수 한수를 두지는 않는다. 몇 수 앞을 대충 내다보고 그상황에서 가장 좋다고 생각되는 수를 두는 것이 보통이다. 물론 합당한 수가 오직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때에 따라서는 함정을 놓고는 어설픈 수를 미끼로 던질 때오 있고, 상대방 실수로 횡재를 얻는 때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잊어선 안될 점은, 컴퓨터가 수를 선택하는 과정과 비교해 볼 때 사람들은 마치 주먹구구 식의 계산을 하는 듯 보이지만 사람이 바둑을 두는 이런 방식에도 분명 그 나름의 논리가 존재한다는 점이다. 거기에도 우리의 생각이 따르고 있는 독특한 길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바둑을 배워가면서 차츰 잘 둘 수 있게 되는 것이고, 바둑의 명인이나 대가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인공지능에 대한 반론은 그리 좋은 것은 아니다. 문제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여러 다른 생각의 방식들을 인공지능에서도 많이 받아들이고 발전시키고 있다. '휴리스틱'(Heuristic)이라는 기법도 그런 방식의 일종이다.

너 자신을 알라

이 밖에도 인공지능이나 생각하는 기계에 관련된 논쟁은 매우 많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매우 오래 전에 소크라테스라는 철학자가 한 이야기와 관련이 깊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고 외쳤다고 한다. 몇 천년이 지난 지금 인공지능을 논하는 이자리에서 그처럼 단순한 말을 떠올리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똑똑하고 영리한 기계를 만들기 위해서 보다 많은 관심과 노력이 인간 자신에게로 돌려져야겠다는 필자 자신의 느낌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인간처럼 생각하는 기계, 상황에 따라서 적절히 융통성있는 판단을 내릴 줄 아는 기계, 지능이 높은 기계, 이런 기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인간의 두뇌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먼저 잘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와 가장 가깝게 있는 바로 우리 자신을 우리가 제대로 잘 알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 있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 이렇게 잘 모르게 된 데에는 하나의 큰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예전부터 인간의 정신이라고 불리워 온 좀 애매한 것 때문이리라. 인간의 육체에 관해서는 과학적인 연구가 오래전부터 진행되어 왔었다.

그러나 우리가 보통 정신 혹은 마음이라고 부르는 측면에 대해서는 과학적인 접근이 그리 쉽지 않았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고 감추어진 듯한 것이어서 그러했겠지만, 그보다는 모든 것을 물질로 보는 과학적인 입장과 정신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입장은 서로 자리를 같이 할 수 없는 것으로 보여졌기에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금세기에 들어와 과학자들은 우리의 심리상태나 과정은 단지 두뇌안에서 일어나는 화학변화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그도 그럴 것이 두뇌의 특정한 부분을 제거하거나 자극을 주면, 그에 따라 다른 심리상태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견해에도 문제가 있다. 우리의 심리상태나 과정은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기도 하지만 일정한 동일성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내가 지금 '하나 더하기 하나는 둘이구나'하고 계산을 머리 속으로 했다고 하자. 그 때 옆에 있던 내 친구도 '하나에다 하나를 더하면 둘이 되는구나'라고 생각했다. 이 경우 나와 내 친구는 꼭 같은 생각을(꼭 같은 심리상태를) 하고 있었다고 이야기할 수있다.

자, 그런데 실제로 나와 내 친구의 두뇌 속에서 일어난 화학변화는 꼭 같은 것이었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그럴 것 같지는 않다. 이런 식으로 생각을 진행하면, 인간의 마음이나 정신을 그것이 나타나고 있는 구체적인 화학변화에서 부터 떼어서 따로 그것만을 다룰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하나의 심리상태나 과정은 여러 다른 화학변화로서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니, 인간의 마음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은 구체적인 화학변화를 관찰하는 것보다는 인간 사고의 추상적인 구조를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일단 우리의 마음을 이런식으로 생각하게 되면 기계적으로 실현된 마음, 즉 컴퓨터를 생각하는 것도 그렇게 무리는 아니게 된다.

인간의 정신을 논리적(?)으로 표현

인공지능 연구가들은 인간마음의 작용이나 생각의 구조는 논리적이고 수학적인 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이것이 적당한 물질적인 기반(컴퓨터나 두뇌 속)에서 힘을 발휘하면 글자 그대로 추리나 판단인나 생각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문제는 있다. 즉 인간의 사고의 폭은 깊고 다양해서 그 사고과정 속에는 논리적이고 수학적인 식으로 표현될 수 없는 부분이 적지 않을 것이다. 예를들어 계산을 하는 경우를 보자. 이 경우는 우리의 생각이 따르고 있는 규칙이 무엇인지 분명히 드러낼 수 있다. 즉 생각의 구조를 어떤 특정한 공식으로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이 다른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경우를 보자.

김씨 부인은 시내 중심가에서 김씨를 기다리고 있다. 김씨 부인은 약속 시간 정각에 도착했다. 김씨는 20분 정도 늦게 도착했다. 김씨 부인은 약간 신경질이 나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김씨 부인 : 당신은 왜 날 이렇게 기다리게 만들어요?
김씨 : 아 그렇지! 당신은 늘 정각에 나타나곤 했던가?

이 경우 김씨는 항상 늦다가 어쩌다 한 번 일찍 나와서 신경질을 부리는 부인을 비꼬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비꼬는 말의 이해는 어떤 일반적인 공식의 적용만으로 충분히 달성될 것 같지 않다. 어떤 말을 비꼬는 말이 되게 하는 것은 그 말의 글자 그대로의 뜻 때문은 아니다. 그것은 그 말을 하는 사람이 놓인 특정한 관점이나 상황 때문인데, 이런 것들은 하나의 공식으로, 즉 논리적이고 수학적인 식으로 구성된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지기 무척 어려운 것들이 아닌가 한다. 관점이란 늘 다수의 입장을 전제하는 것이고 상황이란 것은 늘 일회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끌어들여 인공지능이 가망없는 연구를 하고 있는 분야라는 것을 주장하고자 하려는 것은 아니다. 비꼬는 말도 다 알아들을 수 있는 컴퓨터가 나올 수도 있다. 문제는 인간은 수없이 다른 방식으로 생각한다는 것이고 그래서 인간이란 존재의 참된 정체를 아는 것이 정말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 때문에 인공지능에 대해서 우리는 혼란된 인상을 받기 쉽다. 마치 인공지능을 인간과 꼭 같은 능력을 가진 기계를 만드는 일을 하는 분야인 것처럼 생각하거나, 혹은 그 반대로 껍데기만 인간을 흉내내고 속은 텅빈 꼭두각시를 만들어 사람을 속이는 일을 하는 연구분야로 생각하는데, 이 두가지 생각은 꼭 같이 잘못된 것이다. 인간, 더 자세히는 인간이 생각하는 방식과 구조에 대한 현재까지 나온 믿을 만한 지식이, 뭔가 큰 결론을 내리기전에는 형편없이 적고 빈약하고 단편적인 한에 있어서 인공지능의 연구 역시 불완전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반도체 기술의 발달로 인한 정보 처리 시간이나 연산시간의 어마어마한 단축조차도 인공지능 분야에서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인공지능을 중세의 연금술에 비교하기도 한다. 중세의 연금술은 '여러잡스런 금속에서 금을 만들어볼 수 있지 않을까'하는 허황된 희망에서 시작해서 결국 제 갈 길로 가지 못하고 좌초한 학문이다. 이런 학문처럼 인공지능도 한갖 불가능한 꿈을 위해 이리저리 헤매다니다가 뒤늦게 잘못을 깨닫는 그런 분야가 될 것인가? 그럴지도 모르고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악의 경우라도 잃는 것보다는 얻는 것이 많으리라 본다. 중세의 연금술이 근대화학의 성립에 크나큰 공헌을 한 것처럼 인공지능도 그것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에 관계없이 가치있는 작업이 될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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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석봉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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