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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DS보다 무서운 질병 유행성출혈열과의 한판

풀밭에 눕고 싶어도 안심하고 누울 수 없었다. 신(腎)증후출혈열로 이름이 확정된 한국형출혈열 때문.

'신의 형벌'. 체온이 40℃까지 올라가고 발병 후 4~5일이 지나면 신장이 파괴돼 소변도 볼 수 없었던 이 무서운 질병의 이름이 몇해 전에 확정되었다. 1913년 이래 출혈성신우염, 유행성출혈열 또는 한국형출혈열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다가 1982년 세계보건기구에 의하여 신(腎)증후출혈열로 통일 된 것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 1976년 나와 우리 연구팀은 유행성출혈열의 병원체인 한탄바이러스(Hantaan Virus)를 세계 최초로 발견했다. 그 뒤 한탄바이러스에 의한 질병은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여러 지역에서 발생하고 있음이 증명되었다. 그러나 각기 다른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불필요한 혼돈이 많았다. 그와 같은 혼돈을 피하기 위해서는 통일된 병명이 필요했던 것이다.

1982년 2월 일본 도쿄에서 개최된 세계보건기구(WHO) 출혈열전문가 회의에서 이 문제가 거론되었다. 당시 나는 좌장으로 주도권을 잡고 회의를 진행하였는데 우리나라 대표로는 전염병전문가인 가톨릭 의대 전종휘교수도 있었다.

그러나 병의 이름을 통일한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여러 이름들을 놓고 20여명의 학자들이 하루종일 거론한 결과, 세계 각국의 모든 학자들이 부담없이 사용할 수 있는 이름으로 하는 것이 좋다고 의견이 모아졌다. 그래서 한국형 등 나라이름이 붙지 않은 신증후출혈열이라는 병명으로 결정되었다.

우선 유행성출혈열이라는 무서운 전염병이 언제부터 지구상에 존재하였는지 알아보자. 또 현재 어디에서 얼마나 많은 환자가 발생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면 이병의 중요성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처음 기록된 출혈열환자는 1913년 소련 블라디보스톡의 한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받은 환자였다. 그 후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유럽에 주둔한 연합군 병사들, 특히 영국군에서 1만3천여명의 유행성출혈열 환자가 폭발적으로 발생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만주에 주둔한1백만 일본군에 유행성출혈열이 대유행, 1만2천여명의 환자가 발생하고 수천명의 병사들이 사망하였다. 그때부터 이병은 군사적으로 중요한 질병으로 알려지게 되었으며 이때 일본군은 인간을 실험에 사용, 후에 큰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이 병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것은 1951~1953년, 즉 6.25사변중이었다. 한국에 주둔한 UN군중 특히 미군에서 약 3천2백여명의 환자가 김화 철원 연천지역에서 발생하고 약 7백여명이 사망한 것이다.

그때부터 이병은 한국형출혈열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하여졌다. 최근 신문지상에 거의 매일 보도되는 AIDS와 같이 그 당시는 이 병이 연일 보도되어 세균전으로 의심받기도 하면서 세계의 큰 관심을 끌었다.

말라리아 간염 다음은?

천연두는 수년전 지구상에서 사라졌으나 아직도 지구상에는 무서운 전염병이 많이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사망자가 많아 문제되는 질병은 말라리아다. 매년 6백만명의 환자가 주로 열대지방에서 발생하고 약 1백만명이 사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이 간염으로 매년 1백만명 발생하고 수십만명이 사망하고 있다. 세번째로는 나의 일생의 연구대상이었던 유행성출혈열을 꼽는다. 매년 약 50만명의 환자가 아세아와 유럽대륙에서 발생하고 약 5만명이 사망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최근 문제되고 있는 AIDS에 의해서는 과거 8년간 8만명의 환자가 증명되고 약 2만명이 사망하였다. 이는 말라리아 간염 또는 출혈열에 비하면 약 1/20~1/100밖에 안되는 것이다. 그러나 AIDS는 만성질환으로 마약 동성연애 및 성교와 깊은 관계가 있으므로 사회적인 관심사가 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특히 이 병은 주로 발전한 나라의 백인에게 발생한다는 점 때문에 요란하게 보도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유생성출혈열은 아세아와 유럽대륙의 온대지방에서 주로 발생하고 있다. 특히 중국에서는 매년 약 40만명의 환자가 발생하고 수만명이 사망하고 있다. 다음으로 다발하는 지역은 소련인데 수천명의 환자가 매년 발생하고 있으나 확실한 숫자는 알 수 없다. 그 다음의 한국이며 매년 약 2천여명의 환자가 남한 전지역에서 발생하고 2백여명이 사망하고 있다.

현재 전 세계의 분포되고 매년 발생하고 있는 전염병 중에서 앞으로도 계속 문제가 될 것으로 생각되는 전염병은 유행성출혈열과 AIDS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전 세계의 쥐들이 한탄바이러스나 이와 유사한 바이러스를 가지고 있고 AIDS 바이러스도 전 세계적으로 분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유행성출혈열은 70년전부터 전염병학자들의 관심사였고 또 해결하여야 할 과제였다. 그래서 6.25사변이 터진 1년 후인 1954년부터는 약 2백여명의 미국 학자들이 15년 간에 걸쳐 미국의 연구소에서 뿐만아니라 한국과 일본에 주둔하면서 연구를 수행했다. 연구비만도 약 4천만달러를 투입했으나 불행히도 병원체를 발견하는데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유행성출혈열이라는 무서운 질병이 우리나라에 있고 많은 병사들이 이 병에 걸려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1951~1953년 서울의대 학생시절에 알았다. 그후 1951년 대학을 졸업하고 군의관으로 입대한 뒤 이 병에 대하여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학문적으로 이 병에 대한 연구를 직접 시작한 것은 연구비의 지원을 받게 된 1969년 여름부터였다.
6.25때만 해도 국내에는 많은 전염병이 유행하였다. 때문에 나는 전염병을 전공하는 내과의사가 되어 죽어가는 환자들을 치료할 결심을 하였다.

전염병 환자를 치료하고 예방하려면 전염병의 병원체인 미생물에 대한 지식이 필수적이라는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미생물학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내과의사가 되는 것이 순서라고 생각했다.

이를 실천하기 위해 나는 의대를 졸업하던 해인 1954년에 다시 서울대 대학원 미생물학과에 입학하였다. 대학원에서 나는 저명한 미생물학자이신 기용숙교수 밑에서 1년반 동안 미생물에 대한 기본지식과 연구방법 등을 배우면서 조교로 일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나는 운좋게도 1955년 9월, 교환교수의 일원으로 미국 유학길을 떠나게 되었다. 미네소타대학교에서 바이러스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당시 나에게 부과된 연구과제는 우리나라에서 매년 여름 수천명의 환자가 발생하고 수백명이 사망, 큰 문제가 되고 있던 일본뇌염이었다. 연구내용은 원숭이를 실험동물로 하여 뇌염의 발병메커니즘을 파헤치고, 뇌염예방 주사약을 만드는 것 이었다.

1959년 나는 연구를 마치고 미생물학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뒤 1960년에 귀국하여 다시 서울의대에 돌아왔다. 내과의사가 아닌 미생물학 강사로 나의 연구생활과 교수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그후 나는 10년 간에 걸쳐 일본뇌염모기에 관한 연구와 뇌염바이러스에 대한 연구를 계속하였다.

마침내 예방주사약이 개발되고 보급되면서 우리나라에서 그 무서운 일본뇌염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유행성출혈열 환자는 매년 증가, 많은 군인과 농민들이 희생되고 있었다.

일본뇌염에서 출혈열로
 

출혈열의 보균동물로 밝혀진 등줄 쥐. 이 들쥐를 이용하여 이호왕교수팀은 한탄 바이러스를 찾아내는 개가를 올렸다.


연구과제를 일본뇌염에서 유행성출혈열로 변경하게 된 것은 세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 이 병이 우리나라에서 매년 유행하고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병에 대한 연구를 하는 학자가 별로 없다는 점이었다. 둘째는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해결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셋째는 이 병이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에게 많이 발생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연구비를 미국에서 받을 수 있을 가능성이 컸던 것이다.

1969년 가을에 미국의 연구비 지원을 받게 되면서 이 병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때만 하더라고 시설이 별로 없는 곳에서 연구하는 한국인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사람은 거의 없었다. 나 자신도 그런 야심은 갖지 못했다. 꿈에서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다만 우리의 문제를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해결하려는 노력은 있어야 한다는 사명감이 나의 가슴을 눌러왔다. 솔직히 말해 병을 옮기는 보균동물만이라도 발견하면 큰성공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이 처음의 목표였다.

그러나 연구가 계속되면서 욕심(?)이 생겼다. 이 병의 병원체를 규명하여야만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한 것이다. 동시에 야생동물 중에서 보균동물을 밝혀내야만 예방대책이 가능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1970년대 초까지 개발된 모든 새로운 미생물학적 기술과 기구를 동원, 병원체 발견에 전력을 다하였으나 결과는 실패의 연속이었다.

연구라는 것은 일정한 목표를 세워놓고 책정된 예산과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인력으로 일정기간 내에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작업이다. 나는 1969년부터 1975년까지 6년간 약 30만달러의 연구비를 미국에서 지원받아 연구를 하였으나 연구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1976년부터는 연구비 지원이 중단될 위기에 놓여 있었다. 6년간의 연구기간 동안 우리가 거둔 작은 성과들 중 하나는 출혈열환자 다발생 지역인 연천 근처에서 잡은 들쥐 중에 유행성출혈열의 보균동물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나는 경기도 연천지역에서 정기적으로 들쥐를 잡은 동물채집원이 유행성출혈열에 걸려 1개월간이나 치료를 받았다는 사실을 주목했다. 그래서 연천들쥐를 잡아 실험실로 가지고 왔다. 이 실험결과 들쥐 중에는 출혈열의 보균동물이 있다는 확증을 갖게 되었다.

연구 중 연구원이 출혈열에 걸린 적도 있다. 나의 실험실에서 그동안 9명의 연구원이 고통받은 것이다. 책임자로서 그때의 심정은 필설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였다. 순간 연구를 중단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다행히도 연구원들은 이내 건강을 되찾았다.
두번째 성과는 유행성출혈열 환자의 혈청 속에서 감마 글로블린이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 것이다. 이는 환자의 몸안에서 병원체에 대한 항체가 형성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결정적 단서가 되었다.

연구비 중단위기를 느끼던 1974년, 우리는 마지막 카드로 당시 새로 발명된 형광항체법을 사용, 미지의 병원체를 찾아나섰다. 환자에게서 추출한 재료와 들쥐의 조직을 세밀히 살폈던 것이다.

마침내 1975년 12월 초 행운의 여신은 우리 앞에 서서히 그 모습을 나타내기 시자했다. 미지의 세계가 형광현미경하에서 반짝이는 미세한 반점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등줄쥐의 폐장과 신장 조직세포 내에서 이때까지 보지 못한 은하수처럼 빛나는 별들이 발견된 것이다.


한탄강은 출혈열연구의 메카. 한탄바이러스의 전자현미경 사진


남들이 주목하지 않는 곳에서

돌이켜 보건대 우리의 행운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었다. 연구 중 병에 걸려 사경을 넘으면서도 포기하지 않았고, 실험에 쫓겨 밤잠을 이루지 못했던 7년간의 고생과 노력의 결실이었던 것이다. 특히 빈틈없고 과학적이고 조직적인 연구방법과 치밀한 관찰이 어우러진 합작품이었다고 생각된다.

우리들은 등줄쥐의 모든 장기를 하나도 빠짐없이 검사하였으나 다른 나라 학자들은 쥐의 폐장조직을 검사에서 제외시켰다. 외국 학자들은 특히 신장조직에 중점을 두었는데 그 이유는 환자의 신장이 많이 파괴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다른 학자들이 눈여겨 보지 않은 폐장조직에서 미지의 병원체를 처음 발견한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미지의 '별'을 발견하였지만 그때부터 우리는 더욱 바빠지기 시작했다. 별같이 빛나는 미지의 항원은 진짜 새로운 것인가? 또 이 별들은 어떤 미생물일까? 이런 의문들을 밝히기 위해 그해 겨울은 정말 분주했다.

특히 이 발견이 잘못된 발견이 아니라는 증거를 확보하는데 주력했다. 그 결과 미지의 별(병원체)이 있는 조직은 항상 환자의 혈청하고만 반응하지, 정상인의 혈청과는 반응하지 않는다는 증거를 얻었다. 번호를 달리 한 재료들을 백번 천번 조사하여도 언제나 똑같은 결과가 나왔던 것이다.

이로써 병원체에 감염된 등줄쥐의 폐장조직과 환자혈청만 있으면 출혈열 환자를 진단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해 세계최초로 유행성출혈열의 혈청진단법을 수립한 것이다.

1976년3월부터 우리는 이 새로운 발견을 학회에 발표할 준비를 시작하였다. 그때 나와 같이 3년간 고생한 이평우조교는 상기된 얼굴로 나를 쳐다보면서 "선생님! 드디어 성공한 것 같습니다. 1976년은 선생님의 해임이 틀림없습니다"라고 한 말은 지금도 생생하다. 나는 그때 웃으면서 "이것은 우리 모두의 노력의 결과요. 나 혼자만의 것은 아니오"라고 하면서 두손을 꽉 쥐었다.

1976년 4월 유행성출혈열 병원체 발견에 관한 논문은 대한미생물학회 학술대회에서 보고되었다. 동시에 각 언론은 이를 크게 보도하였다. 보도기관의 관심과 반응은 상상외로 컸으며 1976년 4월29일자 동아일보는 제1면의 톱으로 이 기사를 다뤘다. 당시의 흥분과 감격어린 발표장면을 찍은 사진을 볼 때마다 나는 기쁘기도 하고 창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발표 1주일 후에는 미국 뉴욕타임즈와 와싱톤포스트지 등에도 관련기사가 나갔다. 그 뒤에는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기자가 직접 1주일간 우리 연구소를 방문하고 연구결과를 확인했다. 그리고 그해 6월23일자 타임지에 게재하였는데 이는 국내 학자가 이룩한 업적이 처음으로 타임지에 보도된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출혈열 병원체 발견은 세계의학의 50여년간의 숙제를 푼 중요한 사건이었다. 1976년에는 미국 육군본부에서 프렌치(French)중령이라는 미생물학자가 우리의 연구결과를 직접 확인하러 왔다. 우리 연구소에서 1주일간 머문 후 그가 서울을 떠나면서 한 말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많은 미국학자들은 당신의 발견을 의심하고 있습니다. 특히 미국 육군본부 연구개발부 내에서는 당신이 연구비를 계속 지원받기 위해 쇼를 하는 것이라고 의심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프렌치중령은 직접 우리의 발견과정을 확인하였고 또 6.25 때의 유행성출혈열 환자혈청을 미국 정상인혈청과 혼합하여 내 놓았다. 둘을 구별해내라는 일종의 테스트였다. 물론 우리는유행성출혈열 환자 혈청만을 쪽집게같이 집어냈다.
 

은하수처럼 반짝이는 한탄바이러스


세균전연구, 중지하라

이 사실을 놓고 미국 육군본부 의학연구진과 미국학자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6.25 때 2백여명(이중에서 3명의 노벨의학상 수상자가 배출되었다)의 학자들을 동원, 모든 방법을 사용하여도 해결하지 못했던 일을 한국인 학자가 별로 신통치 않은 시설과 인원으로 해냈다는 사실은 두고두고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1977년 나는 미국에 초청되어 여러 연구소에서 출혈열 병원체 발견결과에 대하여 강연하였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인정 받게 되기까지는 약 2년이라는 세월이 걸렸다. 또 발견한 병원체가 이미 알려진 미생물이 아니고 전혀 다른 새로운 것임을 확인하는데 4년이나 소요되었다.

1980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이 병원체의 이름은 등줄쥐를 채집한 곳, 또 6.25 때 우리나라에서 출혈열 환자가 처음 발생한 곳, 그리고 나의 동물채집원이 들쥐를 잡다가 병에 걸린 곳의 이름, 즉 한탄강을 따서 '한탄바이러스'(Hantaan Virus)라고 명명되었다.
당시 우리의 발견은 정말 학문적인 '한강의 기적'이었고, '개천에서 용이 났다'는 속담에 비유될 정도였다.

하지만 가슴아팠던 기억도 있다. 병원체발견 발표 후 3회에 걸쳐 괴전화를 받은 것이었다. 그 내용은 "엉터리 같은 거짓말은 하지 말라! 미국의 앞잡이로 세균전 연구를 중지하라"는 내용이었다. 또 북한방송도 남조선에서 이호왕이라는 미생물학자가 미국의 세균전 무기연구를 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내 자랑을 늘어놓는 격이지만 아뭏든 한국학자가 세계 최초로 유행성출혈열의 병원체를 발견하고 그 이름을 한탄강의 이름을 따 명명한 것은 우리 의학사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후 세계 각국의 많은 학자들이 우리 연구소에서 기술을 배웠으며 세계보건기구는 우리 연구소를 유행성출혈열 연구협력센터로 지정하였다. 또 WHO는 세계 여러 나라에서 발생하는 출혈열에 대한 자문과 기술을 제공해달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지금도 우리 연구소는 이 기능을 수행하고 있으며, 한탄강은 출혈열 연구의 메카로 영원히 흐를 것이다.

그뒤 나는 출혈열 환자에 유효한 치료약 개발을 착수했다. 병원체 발견 이후 수년간 치료약 개발에 매달렸으나 성공에 접근하지 못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아직까지 바이러스에 대한 특효약은 발견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우선 예방을 위한 대책이 시급함을 인식, 백신개발을 시작했다. 1980년의 일이다. 이때부터 수년간의 연구 끝에 약독화(弱毒化)한 한탄바이러스를 조직 배양세포에서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마땅한 실험동물이 없어 이를 증명할 길이 없었다. 그렇다고 사람을 실험대상으로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결국 남은 길은 안전한 사멸백신을 개발하는 것 뿐이었다. 그래서 1983년부터 사멸백신연구를 시작했다. 젖먹이 쥐의 뇌에 접종한 한탄바이러스로 백신을 개발했는데 수천 마리의 쥐를 실험에 사용하였다.
1987년 우리 연구팀은 일본뇌염백신정도로 효력이 있는 유행성출혈열 예방백신을 개발하는데 일단 성공하였다. 또 동물실험에서 효과를 증명하였다.

요컨대 다량의 한탄바이러스를 쥐의 뇌에서 배양한 다음, 설폰아미드와 초고속 원심침전법을 사용, 순수한 바이러스를 추출했다. 이어 포르말린과 열처리를 해서 사멸백신을 탄생시킨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1988년 7월, 서울에서 개최된 태평양과학자회의에서 처음 보고 했다. 사멸백신에 대한 연구는 이후로도 계속되어 최근엔 일본뇌염백신보다도 훨씬 순수하고 안전하며 효력이 높은 백신을 개발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백신도 동물실험에서 그 효력이 증명되었다. 현재 사람에서의 면역효과를 조사하고 있는데 유효함이 점차 증명되고 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진행되면 1989년 가을에는 백신이 대량 생산되어 유행성출혈열이라는 병을 예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한 질병은 극복하기 위한 투쟁의 드라마는 20년간의 싸움 끝에 과학자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될 것이다.

과학자와 외교관의 인식차

유행성출혈열이라는 이름과 관계되는 에피소드같은 경험담 하나를 소개한다. 학자들은 보통 자기가 발견한 병이나 병원체 이름에 자기 이름이나 조국의 이름을 넣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예를 들면 일본뇌염 볼리비아출혈열 가와사키병 등이 있다.

그러나 정치가나 외교관들의 해석은 다른 것 같다. 1981년 나는 일본 정부 초청으로 일본의 유명한 8개 대학의 실험동물 시설들을 시찰하고, 출혈열의 예방에 대하여 특강을 한 일이 있다. 그런데 그 당시 일본의 신문들은 연일 한국형출혈열환자가 일본 여러 대학의 실험실에서 발생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한국대사관을 예방한 일이 있는데 당시 대사관 직원으로 재직하던 분의 항의는 놀랄만한 것이었다. 그는 왜 하필이면 사망률이 높은 질병의 이름을 한국형출혈열이라고 명명했느냐고 따졌다. 이 질병이 한국에서 일본으로 건너와 일본 사람들을 겁주고 있어 한국의 이미지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볼멘 소리를 했다. 그는 또 병명에서 한국을 떼줄 수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이때 비로소 학자와 정치인의 생각이 크게 다를 수 있음을 느꼈다. 그러나 지금도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 판단하지 못하고 있다. 학자에게는 조국이 있으나 학문에는 국경이 없기 때문이다.

1989년 04월 과학동아 정보

  • 이호왕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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