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턴시대의 과학자는 마음은 편했을 것이다. 모름지기 연구만 열심히 하면 됐으니까. 하지만 애써 만든 신물질이 화학무기로 둔갑할 수도 있는 지금, 연구자들은 또다른 고민에 빠진다.
택시를 탈 때 택시기사 아저씨와 그날의 주요 화제나 신변잡기를 서로 물어보거나 대화를 나누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다. 이제는 마치 관습으로 자리잡을 정도니까. 나 또한 이 관습에 예외가 아니어서 가끔 이런 대화를 나누곤 한다.
"손님, 실례지만 근무하시는 곳이 어디입니까?"
"네! 과학기술원에 근무합니다."
"아! 대단한 곳에서 근무하시는군요. 거기에는 제가 알기론 수재들만 들어간다고 하던데요."
"수재들만 들어가긴요. 누구나 노력하면 들어갈 수 있는 곳이죠."
여기까지 택시기사 아저씨와 대화를 나누면 평범한 보통사람인 나는 택시기사 아저씨에겐 '대단한'사람으로 인식이 된다. 실제로 택시기사 아저씨는 존경과 흠모(?)의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곤 한다.
그러나 이렇게 이어지는 대화속에서 나는 상당한 당혹감에 휩싸이게 된다.
"그러면 손님, 과학기술원에 근무하신다고 하니 제가 하나 여쭤볼 말이 있읍니다. 다름이 아니라 전국에 있는 교통신호등을 컴퓨터로 조절하여 교통난좀 해소하는 방법이 없읍니까?"
"글쎄요? 한번 생각해 볼만한…."
"아니 글쎄요라뇨? 과학기술원에 근무하시는 분이 그런 것도 몰라요?"
이쯤되면 이전에 존경받던 나의 위신은 여지없이 추락하게 된다.
●―만능해결사로 잘못 인식돼
이렇게 많은 일반 국민들은 한국과학기술원(KAIST)을 마치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하는 신비의 보물창고로 인식하고 있다. 동시에 이 곳에 근무하는 사람은 모든 문제의 만능해결사로 알고 있는 것이 오늘의 실정이다.
그리고 그러한 우리 국민들의 질문에 명확한 대답을 하지 못할 때마다 웬지 모를 당황속에서 씁쓰레한 감정을 숨길 수 없다. 이는 아마도 KAIST에 종사하는 수많은 과학기술자들의 솔직한 느낌일 것이다.
내가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발전에 이바지한다는 푸른 꿈을 가지고 과학기술원에 들어온 것은 따지고 보면 결코 우연일 수 없는 몇가지 사건들이 있다.
70년대 초 당시 과학기술원의 전신인 한국과학원이 설립될 때 우리 아버님께서는 과학원의 교수아파트를 신축하는데 잠시 근무한 적이 있으셨다. 당시 아버님께서는 한국과학원의 자랑을 쉴새없이 늘어놓으셨으며 이러한 곳의 건물신축에 당신이 참여하셨다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셨다.
그후 약 10년의 세월이 지나 내가 한국과학기술원에 입학시험을 치르고 합격하였을 때 아프신 몸에도 불구하고 온동네를 돌아다니시며 자랑을 늘어놓기에 여념이 없으셨다. 이제 그러한 아버님도 세상에 안계신 지금 나는 택시기사 아저씨의 질문과 아버님의 생전 모습을 생각하며 몇가지 논점을 머리에 그려 보았다.
먼저 한국사회에서의 과학기술자는 사회에서 바라보는 시각만큼이나 엄청난 사명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택시기사 아저씨나 나의 아버님이 한국과학기술원을 그렇게 대단하게 생각한 것은 단지 과학기술원이 좋은 직장이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경제발전이 이루어지려면 과학기술의 발전이 반드시 선행돼야 하는데 한국과학기술원이 그 중추적인 기관이 되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리라.
즉 50년대 전쟁의 시대를 지나 60년대의 보리고개 시대를 경험한 우리 윗세대 어른들에게는 나라의 발전(경제발전)은 절실한 염원이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뚝딱 만들어내는 과학기술자가 필요했다. 과학기술자가 자신들의 염원을 반드시 실현시켜주리라 믿었던 것이다.
●―제2의 에디슨을 꿈꾸며
내가 택시기사 아저씨나 우리 아버님의 모습에서 느낄 수 있는 또 하나의 생각은 과학기술자에 대한 그들의 인식이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태어나는 모든 사람은 어릴 적에 과학기술자에 대한 꿈을 한번씩은 다 가진다고 하여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나자신도 어릴 때 저 유명한 에디슨의 전기를 읽고 발명의 꿈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래서 주위의 못쓰는 기계부속품이나 라디오 등을 분해하였다가 어른들께 야단을 맞곤 했었다. 어른들이 나에게 장래 희망을 물어보면 자신있게 과학자라고 답변했었다.
그러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나는 커서 자연계 대학을 마쳤고 과학기술원도 졸업했다. 그동안 연구실에서 수많은 약품과 씨름하면서 느낀 과학기술자에 대한 생각은 어린 시절과 비교할 때 너무나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다.
어릴 때는 학교를 졸업하고 과학자가 되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내 손에서 만들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꿈일 뿐이었다. 지극히 조그만 부분까지도 내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너무나 많았다. 이런 좌절을 겪으면서 과학자란 남들이 알듯이 도깨비 방망이를 휘두르는 직업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과학자란 자신과 미지의 어려움과의 싸움을 통하여 하나하나를 쟁취해 나가는 고난의 길임을 알게 된 것이다.
실제로 나는 '과학=고난의 길'임을 증명하는 하나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86년 여름 그 무덥던 날에 나는 연구실에서 너무나 쉬우면서도 어려운 문제에 봉착한 적이 있었다. 당시 나는 신물질합성을 연구하여 마침내 합성에 성공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이제 자료만 간추려서 발표하기만 하면 되는, 환희의 순간을 맞이하기 직전이었다. 그때의 설레임이란….
나는 신물질합성에 너무 신이 나서 정신이 혼미할 정도였다. 간신히 마음을 수습하고 다시 한번 신물질합성의 근거가 될 수 있는 데이타 작성작업에 들어갔다. 그런데 구체적인 데이타 작성에서 나는 쓰라린 패배를 맞이하고 말았다. 모든 자료를 근거하여 볼 때 신물질임은 틀림없었는데….
패배의 원인은 증거부족에 있었다. 이 신물질이 어는점은 너무 낮고 증류점은 너무 높아 원소분석이 불가능한 것이었다 (신물질의 합성인 경우 반드시 원소분석을 하여 일정한 정확도내에 들어가야 한다). 한마디로 말하여 이 신물질은 합성만 할 수 있었지 그 합성을 객관적으로 뒷받침할수 없었다. 다시 말해 순도높은 순수물이 얻어지지 않았던 것이다.
당시 이 신물질은 이미 생물학적 검사를 거쳐 그 효능을 인정받고 있었다. 따라서 객관적인 자료만 갖추면 일약 외국논문에 실리는 것은 물론이고 특허를 낼 수도 있었다. 나는 과학자로서 절호의 기회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냉가슴만 앓았던 것이다.
물론 그로부터 정확하게 7개월 뒤에 나는 온갖 방법을 다 동원, 신물질의 객관적인 데이타를 작성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 생각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신물질을 만들어놓고도 7개월간이나 어찌할 수 없었으니, 그야말로 미칠 지경이었다.
이런 상황은 사실 다른 과학기술자들의 고생에 비하면 오히려 덜한 편이다. 죽어라고 몇개월 동안 시도해도 되지 않던 반응이 뜻밖에 풀리는 경우도 있었다. 화가 나서 며칠 동안 쉬고 난 뒤 실험을 했더니 신통하게 반응이 일어났다. 이처럼 연구자를 울리고 웃기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과학기술자가 연구하여 얻은 결과물이 세상에 공포되면 모든 사람들은 놀라움과 찬탄을 금치 못한다. '우수한 두뇌' 운운하면서 칭찬에 열을 올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 과학적 업적의 배경에는 그야말로 각고의 노력이 숨어있음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과학을 도깨비 방망이로
최근에 나는 신문보도를 보고 깜짝 놀라곤 하는 일이 매우 많아졌다. 홍수처럼 밀려드는 과학기술과 관련된 기사에서 큰 충격을 받고있는 것이다.
'고리원전침전지 오염확인, 한전에 책임묻기로', '원전종사자 암발생 파문', '수도권 대기오염업소 무더기 적발', '한반도 비핵지대화 촉구' 등등.
특히 이러한 신문기사들은 한결같이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폐해를 심각하게 거론하고 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어린 시절 도깨비 방망이로까지 생각했던 과학기술이 어째서 이러한 모습을 보이는가?
문득 나는 과학기술원 재학시절 모 교수님이 강의하신 내용이 떠올랐다.
당시 교수님은 강의가 끝난 후 수수께끼 형식으로 우리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셨다.
"4cm×4cm의 흰종이에 보다시피 점이 20개가 찍혀 있다. 그러면 지금 1cm의 원을 몇개를 그리면 이 점들을 전부 원속에 집어넣을 수 있는가?"
물론 우리들은 그 문제를 전부 해결하여 즉시 답을 제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교수님의 말씀은 다음과 같이 계속 이어졌다.
"여러분들이 모두 문제를 잘 풀어 주었는데 오늘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 문제의 답이 아니라 이 문제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묻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교수님은 수업의 종료를 선포하시고 밖으로 나가셨다.
이후 우리 어리석은 제자들은 교수님의 말씀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길이 없어 교수님을 찾아뵙고 답변을 청취하였다. 그 답변은 정말 놀라운 것이었다.
어느 한 지역에 최소의 원을 그려 점을 전부 포함하는 문제는 다음과 같은 두가지 결과로 당장 발전할 수 있었다. 첫째 어느 한 지역에 여러 개의 부락이 흩어져 있는데 폭탄 몇개를 투하하면 이 지역의 부락들을 없앨 수 있는가? 둘째 어느 한 지역에 여러 마을이 있는데 이 마을의 치안을 위하여 몇개의 파출소를 세워야 하는가?
처음에는 점에 불과했던 문제가 응용에 따라 위의 두가지 경우와 같은 현실적인 문제로 바뀔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교수님은 이런 말씀을 마지막으로 들려주셨다.
"이와 같이 과학기술은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인간을 위하여 큰 도움이 될 수도 있고 큰 악이 될 수도 있다."
요즘 신문기사에 오르내리는 과학기술에 관한 기사를 보면 당시 교수님이 우려하신 일들이 현실로 나타났다고 느껴진다. 간단한 수학문제가 전쟁시에 인명살상의 효율성을 논할 수 있듯이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원전문제나 공해문제도 실험실에서 지극히 간단하고 기초적인 연구가 축적되고 응용된 결과, 출발한 문제들인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과학기술은 매우 중요하고 뚜렷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 중에서도 첨단과학기술이 인류의 미래를 선도해 가고 있는 것은 이제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게 되었다.
그런데 과학기술은 야누스처럼 두개의 측면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밝은 미래를 약속하기도 하고 어두운 면을 드러내기도 한다. 전자는 '기술적 메시아주의' 라고도 하는데 장미 빛 미래상을 펼쳐준다. 반면 후자는 과학기술이 인간의 불행의 원인이며 결국 인류의 자멸을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우리는 과학기술이 사회에 거대한 물질적 풍요를 가져옴을 확신하고 있다. 동시에 과학기술이 선도할 미래사회가 전면적이면서도 파격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사회임을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론 현재의 과학기술이 많은 부정적 모습을 내포함을 인식하여야 한다. 이러한 조짐이 현재 이미 상당수 나타나고 있음을 과학자라면 당연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항암제 대(對) 화학무기
신문기사에 자주 오르내리는 여러문제들, 즉 모든 산업의 점진적인 자동화로 인한 구조적 실업문제, 기계문명의 발달로 인한 인간의 소외화, 군사과학의 발전 등은 결코 우리가 소홀히 넘어갈 수 없는 부분이다.
내가 연구실에서 하나의 신물질을 합성하려고 밤잠을 설치는 일이 중요하다면 그 신물질이 향후 인간에게 어떻게 사용되는가는 더 중요하다. 굳이 노벨의 예를 들지 않더라도 현대 과학기술의 여러 모습은 그 중요성을 잘 증명하여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현대의 과학기술자는 새로운 고민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과거에는 과학기술의 발전을 위하여 각고의 노력을 다하였던 과학기술자가 이제는 과학기술의 이용에 대해서도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이전까지 국민들에게 존경과 흠모를 받던 과학기술자가 이제 자칫 잘못하면 지탄과 비난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음을 뜻한다.
가슴에 손을 얹고 곰곰히 생각을 해보자. 젊은 과학기술자 이인우가 만든 신물질이 인류의 불치병중 하나인 암의 치료제로 쓰인다면 이인우란 이름은 세계적으로 찬사를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신물질이 인류가 배격하는 일급 화학무기로 사용된다면 아마도 이인우란 이름은 모두의 규탄대상이 될 것이 분명하다.
이미 해가 저물었다. 어두운 밖을 내다보며 나는 실험실에서 비이커와 시약등을 바라본다. 다시금 생각을 다진다. 기필코 내가 원하는 아니 인간에게 필수적인 약품을 만들어 내리라. 이런 결의와 아울러 이 약품이 인간에게 유익하게 쓰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는 결심을 다지는 것이다.
어릴 때는 과학기술의 요술같은 힘에 이끌려 과학기술자가 되겠다고 결심했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요술같은 과학기술의 힘을 어떻게 올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과학기술자가 되련다.
서울의 지하철에서 개찰업무가 처음에는 역무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다가 기계적인 개찰기를 거쳐 최근 전자식 개찰기로 대치되어 있다. 이 일은 누가 하는가? 다름아닌 우리 과학기술자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한 편리한 변화를 위하여 지금도 우리 옆의 연구실은 밤새도록 불이 켜져 있다. 또 그방 안에는 고민에 빠져있는 젊은 동료 과학기술자가 있다.
연구실 문틈 사이로 새어나오는 불빛은 항상 나로 하여금 새로운 각오를 갖게 해준다. 다시 힘을 내어 졸음을 깨고 연구과 노력을 하라는 '각성제'가 돼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