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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지 우랄산맥부근에서 서쪽으로 민족 대이동을 시작, 다뉴브강연안에 정착한 마자르민족의 나라. 자유와 평화를 위해 피의 항쟁을 거듭해온 그들은 이제 개방시대의 첫주자로 한국과 손을 맞잡았다.

리스트의 헝가리언 랍소디와 브람스의 헝가리무곡 등으로 귀에 익은 헝가리, 1956년의 반소봉기로 '부다페스트의 봄'을 부르짖으며 시민들이 피를 흘렸던 나라 헝가리. 이 나라는 지금 동구권에서는 처음으로 우리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어 좀더 가까와지게 되었다.

동방에서 이주한 헝가리인

수도 부다페스트의 영웅광장에는 깃털로 장식한 투구를 쓰고 긴 망토를 설치고 말을 탄 국부 '아라파드'의 동상이 아름다운 거리를 내려다보고 서있다.

'아라파드'가 이끄는 마자르족(헝가리인)이 티사강 상류일대를 휩쓸고 헝가리 왕국을 세운 것은 9세기 말이었다.

마자르족은 원래 우랄산맥 서남쪽 우크라이나 초원에 살던 민족으로 약 5세기 동안에 걸친 민족대이동시기를 거쳐 '카르파티아'산맥을 넘어 티사강 유역의 대초원에 이르러 정착했다.

현재의 국토면적은 9만3천36㎢, 인구 1천70만. 국토의 중앙을 북쪽에서 남쪽으로 다뉴브강이 흐르고 있다. 바다는 없다. 북부에 1천m 정도의 높은 지대가 약간 있을 뿐 산다운 산도 없는 평원의 나라다.

헝가리 주변에는 멀리 우랄산맥쪽에서 온 마자르족과는 전혀 다른 민족들로 둘러 싸여 있다. 즉 남과 북은 슬라브인, 서쪽은 게르만인, 동쪽은 동방라틴인이라고도 할 수 있는 루마니아인이다.

언어는 우랄어족에 속한다. 그러나 지금의 헝가리땅으로 이동하는 동안 여러종족과 접촉하여 그 영향을 받았다. 특히 투르크계의 오노구르(Onogur)족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으며 오늘날의 헝가리인(Hungarian, Hongrois, Ungar) 이라는 명칭도 이 오노구르에서 나온 것이다.

다뉴브강과 그 지류인 티사강 사이에는 최근에 공업지대가 건설되었으나 전체적으로는 건조한 평원의 나라다. 그 속에 단 하나 오아시스와 같은 곳이 있다. 부다페스트에서 남서쪽으로 자동차로 1시간 거리에 있는 발라톤호가 그것이다. 중부유렵 최대의 이 호수주변에는 포도밭과 오래된 농가와 사원이 있다.

이 나라의 노동조합은 이 일대의 오래된 농가와 풍차막을 별장휴양지로 조성하여 외국관광객을 부르고 있다.

다뉴브강 연안의 또 하나의 명물은 수도 부다페스트이다. 그곳에 있는 국회의사당은 마치 웨스트민스터 사원과 같다.

국내 전체 급여소득자의 5분의 2, 당산부급의 3분의 2, 예술가의 4분의 3이 이곳에서 산다. 그들을 위한 위락시설도 완비되어 있다. 상점마다의 쇼윈도우도 동구제일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어도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이 나라의 동쪽 반을 차지하는 헝가리 대평원은 전설의 헝가리의 고향이며 지금도 목축업이 성하고 있다. 소 말 돼지나 나사같이 틀린 긴 뿔이 있는 라카(양의 일종)가 떼지어 놀고 있고 목동들은 안장없는 말을 타고 짧은 채찍을 휘두르고 있다.

들판에는 띄엄띄엄 부락이 있다. 흰벽과 짚으로 인 지붕의 농가에는 작은 뜰이 있고 현관에는 반드시 꽃이 피어 있어 건조한 갈색의 초원과 조화를 이룬다. 마을과 마을사이에는 길이 따로 없다. 이런 황야에서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두레박틀이 있는 우물과 그 주변의 나무 몇 그루 뿐이다.

역사를 얘기해주는 유적과 박물관

부다페스트에서 발라톤호로 가는 도중에 세케시페헬바르 마을이 있다. 이곳의 옛이름은 '아르바 레기아'로 옛 왕국의 중앙에 위치하는 고도였다. 이 때 각 왕조는 서구에서 건축가와 예술가를 초빙하여 이곳에 성과 사원을 세웠다. 지금은 이 마을이 제조업의 중심지가 되어 옛모습을 찾아볼 수 없지만 박물관에 가보면 이 마을의 옛모습을 알아볼 수 있다.

다뉴브강 오른쪽 기슭의 체코슬로바키아 국경 가까이에는 에스테르곰 마을이 있다. 이곳도 11~13세기의 고도로 이스트반1세(재위 997~1038년)가 창건한 성당이 동쪽 언덕위에 있다. 지금 있는 건물은 19세기에 재건한 것이지만 헝가리의 사원중 최대규모를 자랑하는 것이다. 왕궁도 헝가리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었으나 투르크군의 포화로 무너지고 남은 부분이 지금은 박물관이 되어 있다.

수도 부다의 언덕 북쪽은 아퀸쿰이라는 로마시대의 식민지였던 곳이다. 지금도 이곳 폐허에는 당시의 난방과 배수시설의 흔적이 남아 있어 로마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이나라의 곳곳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거리나 마을에 남아 있는 1514년 농민봉기때의 상흔이다. 농민들이 불지르고 무너뜨린 성채의 잔해같은 것이다. 이 농민대봉기는 투르크군 침입과 관련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오스만투르크의 침공위협을 느낀 헝가리의 성직자와 귀족들은 농민들을 무장시켜 대비하려했다. 그러나 농민들은 도리어 귀족들을 습격했다. 지도자 '도자'를 앞장세운 농민들은 그때까지의 귀족들의 압정에 반항하여 일어나 전국의 성을 불태우고 무너뜨렸다. 그러나 이틈에 밀고온 투르크군에 점령당하자 농민들은 북쪽으로 이동했다가 1699년의 강화조약 이후 초원으로 돌아왔다. 지금 볼 수 있는 기하학적 촌락은 그때 돌아온 농민들이 이룬 것이다.

이 밖에도 파괴된 시청사와 성채를 비롯한 석조건축의 잔해 등 18세기초 오스트리아군 탄압의 흔적도 전국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이것도 이나라 역사 속의 중대사건이었다.

이런 역사는 각지의 박물관에 있는 유품들이 생생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에스테르곰 박물관에 있는 장식품과 사원의 귀중품 농민들의 자수와 신부의상 등…. 이런 것은 헝가리인들의 고유문화에 대한 집착의 표현이다. 그리고 몇몇 박물관은 박물관 그 자체가 중세를 말해주고 있다.

그 많은 여러 유물중에서 부다페스트의 마티아슈사원 지하예배당에 있던 다이아몬드를 잔뜩 박은 왕관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1949년 민드젠티추기경이 당시 집권자에게 체포되기 직전에 빼돌려 감춰뒀다가 헝가리의 자유화가 진전된 1978년 1월에 다시 제자리에 갖다둔 것이다.

티사강에서 발라톤호까지

헝가리에서는 간선도로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농촌세계다. 온통 오물투성이인 돼지를 막대기로 몰고가고 있는 농민을 쉽게 볼 수 있다.

동북부의 티사강은 과수원과 밭 그리고 언덕과 숲사이를 지나 흐르고 있다. 이 강의 모래색깔은 밝은 황금색이어서 '브론즈 미인'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이 붙어 있다. 이 티사강과 소련 국경사이에 있는 지대는 헝가리 특유의 서민적 분위기가 짙은 농가가 많은 지방이다.

그리고 이일대 작은 마을 예배당의 목제천정에는 수레국화 석류 튤립 등의 꽃이 그려져있고 뜰 한쪽에는 목제의 종루가 조용히 서 있다.

조금 남쪽으로 내려가 루마니아 국경에 가까운 니르바토르마을에도 독특한 성당이 있다. 이 성당에서는 매년 콘서트가 열린다. 부근의 민가는 빨간색과 검은색의 벽돌을 섞어 배열한 오래된 양식이 이채롭다. 이 벽돌은 착색한 뒤에 구은것으로 나무로 지은 성당과 함께 빼놓을 수 없는 이지방 특유의 풍물이다.

서쪽으로 눈길을 돌리면 발라톤호수가 있다. 호수주변의 구릉지대에는 옛날 귀족들의 오래된 성채와 성당이 남아 있다. 그 건물의 정면은 나무잎 모양이나 물방울 모양의 장식으로 화려하게 꾸며져 있다. 얼핏보아 바로크양식 같은 성당도 자세히 보면 오래된 로마네스크나 고딕의 면모가 남아 있는 것이 보통이다.

발라톤호 북쪽 10km에 있는 베스프렘마을은 중세 바로크풍의 마을이다. 여기서 바라보는 호수경관은 절경이다. 호수 서쪽기슭의 케스트헤이 마을은 오래된 큰 마을이다. 14세기에 세운 고딕성당, 18세기의 궁전(지금은 박물관), 지질학과 고고학 자료로 가득찬 발라톤호 박물관 등이었다.
 

부디페스트 한가운데를 가르고 흐르는 다뉴브강 위의 강상 레스토랑


대음악가와 대화가의 고향

이나라의 서부는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페르티호(노이지드라호) 서쪽에 있는 쇼로프론마을과 국경선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간 곳에 있는 케세그마을에는 옛날 그대로의 풍정이 남아 있다.

쇼로프론의 거리에는 문장이 달린 중세풍의 집들이 네모난 뜰을 둘러싸고 있는 모양으로 나란히 줄지어 서있다. 성당의 종루는 바로크양식이다.

쇼로프론에서 동남쪽으로 약 25km 떨어진 곳에 있는 페르테드는 작은 마을이지만 에스테르하지가의 화려한 궁전이 있다. 이 바로크양식의 궁전에서 하이든이 오랜동안 지내면서 교향곡과 오페라를 지휘했다. 지금도 이곳에서는 매년 여름이면 하이든기념음악회가 열리고 있어 많은 사람들이 모인다.

남부최대의 마을은 페치. 이곳에는 14세기에 창립된 대학과 대성당과 모스크도 있다. 추상파화가 '바샤레이'는 1908년 이 도시의 카프타란거리에 있는 오랜 집안에서 태어났다. 1976년이래 그의 생가는 미술관이 되어 그의 작품은 물론 헝가리출신 예술가의 그림과 조각이 전시되어 있다. 1970년에는 부다페스트에서 처음으로 그의 회고전이 열렸다. 사회주의 국가에서 부르조아예술의 상징과 같은 전람회를 열었다 하여 당시 전 유럽의 화제가 되었다.

오스트리아 국경에서 발라톤호 서쪽으로 흐르는 자라강 일대에서는 석유와 천연가스가 나와 파이프라인이 전국 각지로 뻗어 있다. 수도 부다페스트를 비롯하여 데브레첸 세게드 등 공업화를 서두르고 있는 대도시에서는 교외의 공장건설에 급피치를 올리고 있다. 그러나 카로차 부근에는 산업시설이 거의 없고 곡물과 야채재배 목축이 성하며 특산물은 거위다. 그리고 포장마차가 자주 눈에 띄며 집시의 노래가 심금을 울린다.

집시는 옛날엔 보헤미안이라고 했다. 보헤미아왕으로부터 여권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방랑민은 10세기경이래 인도북쪽에서 각지로 이동했다. 그들은 정복자도 아니고 이동유목민도 아니다.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떠돌아다닌 그들은 평화를 사랑하는 자유민이다. 각지의 음악을 모아 자신의 음악으로 만들었다. 스페인에 흘러든 사람들은 플라멩고를 만들어 냈고 헝가리에 떠들어온 사람들은 동양적인 선율과 마자르의 리듬을 섞고 때로는 향토색 짙은 템포를 가미하여 독자적인 음악을 창조했다. 브람스 리스트 사라사테 바르토프가 모두 이 영향을 받았다. 그들의 용감하면서 슬픔이 배어있는 바이올린음은 바로 그들 조상들의 생활과 체취가 담겨 있는 '초원의 음악'인 것이다.
 

동구권국가에서 최초로 태극기가 걸린 대한무역진흥공사 헝가리 무역관. 부다페스트 라마다호텔에 있다. 태극기 옆은 호텔기와 헝가리국기.


합병되어 생긴 수도 언덕의 부다, 평지의 페스트

멧테르니히(19세기초 오스트리아의 정치가)는 '빈에서 동쪽은 아시아다'라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헝가리의 수도도 아시아에 속하게 된다.
멧테르니히의 이말은 터키에 대한 격한 적개심을 강하게 나타낸 것이다. 즉 "터키따위에게 점령당했던 곳은…"하는 의식이다.

이런 표현에 반발이라도 하듯 헝가리는 19세기전반에 부다페스트를 할 수 있는데까지 서구화하여 빈을 능가하려고 했다. 프랑스나 이탈리아에 가서 르네상스와 네오클라식양식을 배워왔고 파리의 도시계획가 오스만남작을 초빙하여 도시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부다와 페스트를 갈라 놓고있던 다뉴브강에는 19세기초까지만해도 다리가 없었다. 과학아카데미를 창설한 자유주의자이며 대부호인 '세치니'백작이 영국인 건축기사 2명을 고용하여 다뉴브강에 첸다리를 가설한 것은 1848년이었다. 지금 이 다리의 양쪽 끝에는 4마리의 사자상이 합쳐진 두 마을 부다와 페스트를 지켜보고 있다.

부다페스트의 현재 인구는 약 2백만명. 근대화를 위한 도시 조성은 자연히 콘크리트와 유리로 된 건축의 격증으로 나타났으나 최근 10여년이래 생각을 달리한듯 오래된 양식의 건축물이 차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코린트식의 원주나 아트라스상 화려한 프레스코화 네오고딕의 성당 등을 복원하거나 수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도시의 전체인상을 고전적인 풍취가 나게 다듬으려 애쓰고 있다.

시내에 있는 표고 2백35m의 게레스트 언덕에 올라가보면 눈아래에 이 수도 전체가 펼쳐진다. 바로 앞을 가로 흐르는 다뉴브강이 더없이 아름답고 그 건너쪽에는 국회의사당이 우뚝 서있다.

다뉴브강 오른쪽 기슭의 부다지구는 구릉위에 있고 왼쪽 기슭에 펼쳐진 페스트지구는 평지다. 그리고 희미하게 보이는 변두리는 대평원과 이어져 있다.

페스트지구의 도시형태를 이해하는데는 다뉴브강을 중심으로 동심반원호(弧)를 몇개 그린 것으로 생각하면 쉽다. 가장 안쪽의 반원호 안이 구시가이고 가장 바깥쪽의 반원호는 마르기트다리와 페테피다리를 잇고 있다. 방사선으로 뻗은 도로는 반원호를 가로지르고 있다. 북쪽으로부터 바츠이로(路) 공화국로 라코치로 바로슈로 우츠로이로 등의 순으로 뻗어 있다. 그리고 각 방사선 사이에는 작은 도로가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외국과의 교통망은 공로로 서구 여러나라와 이어져 있고 런던 쮜리히 로마와는 급행열차로 이어져 있다.

이 도시에는 '사회주의 국가이기 때문에…'라는 선입관을 뒤집듯 디오르전문점이나 서방세계 제품인 텔리비전을 비롯한 전자제품 판매점도 있다. 라코치로에는 고급액세서리점 고급양장점 골동품점 등이 들어선 아케이드도 있고 바나카페도 있다.

스탈린 사망 이전까지는 이 나라에서도 개인기업이 금지되어 있었다. 점포에는 철제셔터가 굳게 내려 있었고 거리에는 쓰레기가 쌓여 마치 죽음의 도시와 같았다.

그 뒤 1956년의 헝가리반소봉기로 얼어붙는 듯했으나 차츰 자유화시책이 정착하여 부다페스트에 활기가 살아났다.

페스트지구의 아라파드상이 서있는 영웅광장 뒤에는 삼림공원이 있다. 그 속에 있는 봐이다프냐드성은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의 모든 양식이 섞여 있다. 이 고성을 찾았던 관광객은 성바로 앞에서 지하철을 타면 베레슈마르티광장으로 가게 된다. 이 3km의 지하철은 1894년에 생긴 유럽 최초의 지하철이다.

부다의 언덕에 올라

페스트지구에서 벗어나 오래된 바로크양식의 저택이 줄지어 있는 사이로 난 조용한 언덕길을 올라가면 부다지구로 들어간다. 부다언덕과 다뉴브강가에 이어진 정원에는 강남콩과 완두콩을 많이 심어놨다. 베치·카프광장에는 성 야노슈네포무크상과 함께 키케로와 베르길리우스상이 서있다. 그리고 이런 작은 광장을 잇는 길을 따라 줄지어 있는 저택의 벽에는 장미와 등나무꽃이 피어 있다. 이렇게 부다지구는 조용한 저택의 거리이다. 이곳에는 헝가리풍 레스토랑도 있다. 바이올린 피리 팀바룸(목금의 일종)으로 이루어지는 민속음악을 들으면서 구야슈를 곁들인 햄 소시지는 실로 맛이 독특하다. 음악이 잠깐 끝났을 때는 새소리가 들린다. 사원의 종소리가 은은히 들려오고 멀리 아래쪽 페스트지구의 '거리의 소란'이 반향되어 온다.

좁은 언덕길을 올라가면 성벽 끝에 부다의 왕궁이었다. 원래는 아르파드의 성이었던 곳으로 지금은 역사박물관과 미술관이 되어 있다.

거기서 언덕길을 더 올라가면 '어부의 성채'가 있다. 이 이상한 이름은 19세기에 시민군이 왕궁을 지켰을 때 어부들이 그 측면수비를 담당했던데 유래하는 것이다. 네오로마네스크양식의 이 성채에서의 전망도 아름답다. 이 성채의 일부는 레스토랑이 되어 있고 가끔 민속풍의 결혼식을 올리기도 한다.

부다의 언덕위에는 이런 옛날 건물과는 어울리지 않는 건물이 하나 있다. 제2차세계대전 때 독일의 폭탄이 떨어져 폐허가 되었던 곳에 1977년에 새로 지은 힐튼호텔이 그것이다. 호텔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13세기의 성채와 15세기의 수도원의 일부가 발견되어 지금 7층 호텔건물 옆에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지도
 

1989년 02월 과학동아 정보

  • 이희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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