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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 못써도 기죽지 말자

「보석글」로 정착하기까지

불과 몇년전만 하더라도 우리말 워드프로세서를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은 선택된 자만의 영광. 그러나 지금은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본래 성격이 급한 필자는 글씨를 급하게 쓴다. 어떤 때는 내가 쓴 글자를 못읽어서 며칠간 고생한 적도 있다.

그러나 보석글을 사용하고는 그런 걱정이 사라졌다. 보석글이란 한글을 사용할 수 있는 워드프로세서이다. 프린터 용지에 예쁘장하게 글자가 인쇄되어 나오기 때문이다. 원고지나 시험지에 썼던 내용을 보석글로 다시 쳐서 프린터로 찍어내면 읽기가 훨씬 쉽고, 깨끗하고 고른 활자체로 인쇄된 것은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다.

타고난 악필

타고난 악필로 부모님께 글씨 좀 천천히 쓰라고 야단맞으며 자란 덕에 내가 쓴 원고지를 남에게 보여주려면 기가 죽곤했다. 그러다 1968년 군대에서 번역일을 맡고나서 타자기를 배우게 되었다. 영어의 알파벳은 한글과는 비교도 안될만큼 꼬부랑거려서 아주 정확하게 그리지 않으면 자기가 쓴 알파벳을 자기가 다시 읽기가 힘들다는 당연한 사실을 확인하였다.

미국인의 손으로 쓴 영어 글자를 미국인이 잘 알아보지 못한다는 문제때문에 개발된 것이 영문타자기라는 사실 또한 알게 되었다. 물론 타자기로 치면 손으로 쓰는 것보다 빠르기 때문에 타자기가 발명되었다고 필자에게 주장한 미국인도 있었지만, 영어 문자 모양이 꼬불꼬불 한데다가 손가락 놀림이 동양인만큼 정확하고 민첩하지 못한 미국인이 쓴 글자 모양이 반듯할리가 없어서 일정한 활자체를 가진 타자기를 발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고백한 미국인도 있었다.

"아하 이렇게 글씨 못써도 타자기만 있으면 만사 OK구나" 라고 생각하여 타자를 열심히 배웠다. 타자용지에 깨끗이 타자된 원고를 보면서 글시 예쁘게 못쓴 덕분에 타자치는 법을 배우게 된걸 흐뭇해 하곤 했다. 십년이 지난 어느날 미국 잡지에서 개인용컴퓨터로 타자기 역할을 대신할뿐만 아니라 모니터 화면을 보면서 잘못 타자된 글자는 수정도 가능하다는 소식을 보았다. 하루 빨리 우리나라에도 개인용컴퓨터가 판매되어야 할텐데 하고 고대하던 중에 애플컴퓨터가 6년전에 국내에 처음 상륙하였을 때, 가장 반가워했던 사람중의 하나가 필자였다.

실망한 워드프로세서

개인용컴퓨터인 애플컴퓨터가 국내에 들어왔으니. 여기에 사용하는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만 있으면, 컴퓨터의 키보드를 눌러서 원고를 쓸 수 있고, 그 내용을 화면에서 확인하면서 수정할 수 있고, 제대로 되었으면 프린터로 종이에 인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애플 컴퓨터는 미국에서 개발된 것이므로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 역시 영문 편집용이었다. '워드스타'라는 좋은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도 한글을 사용할 수 없으니 그림의 떡에 불과할 수 밖에. 마침 컴퓨터 프로그램에 뛰어난 실력을 가진 캐나다 교포가 있어서 '한글III'라는 워드프로세서를 개발하였다.

타자기 역할은 물론 원고를 편집할 수 있는 편집기 역할도 하고 디스켓에 원고를 저장시키기도 하는 막강한 한글 워드프로세서가 출현하자 필자는 뛸듯이 기뻤고, 당장 '한글III' 프로그램을 샀다. 그 당시는 삼보컴퓨터에서 대리점을 맡고 있었다. 애플컴퓨터의 호환기종인 삼보컴퓨터(TG-20X)도 같이 구입했음은 물론이다. 원고를 키보드로 입력시키면서(키보드로 치지만, 사실은 키보드로 친 내용이 컴퓨터의 메모리로 입력되니까) 화면에 나타나는 글자들을 보고 신기해하며 '나도 최신 사무자동화 기계를 사용하는구나'하는 자부심을 느꼈다. 좋아하던 것도 잠깐, 2백자 원고지 20장 정도를 입력하다가 화면에 뭔가가 슬쩍 보이는것 같더니 화면이 깨끗이 지워진다. 화면만 지워진 것이 아니고 컴퓨터의 메모리도 지워진 것이다. 2백자 원고지 20장의 분량은 4천자인데 열심히 생각해서 그만큼 작성한 원고가 몽땅 없어졌으니 이를 어쩐다.

알고보니 '한글III'의 '버그'란다. 당시는 버그가 뭔지도 몰랐다. 프로그램이 잘못된 것을 버그가 있다고 한다나, 이런 현상은 2백자 원고지 10장 이내에서는 잘 안 일어나고 20장 근처가 되면 자주 발생하다는 것을 통계적으로 알게되고, 이것을 알게 되기까지의 과정에서 얼마나 화가 났겠느냐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긴다. 그러나 한장씩밖에 못치는 타자기보다 낫고, 또 오늘 입력된 원고를 보관시켰다가 내일 꺼내서 고칠수도 있고 한줄에 30자씩 프린터 용지에 찍었다가 맘에 안들면 한줄에 40자씩 찍을 수도 있었으니까 기대한 것보다는 못하지만 그럭저럭 사용하기는 하였다.

한글 워드프로세서를 프로그래밍할 정도의 실력을 갖고도 왜 한글III의 잘못된 버그를 고치지 않느냐고 알아보았더니, 글쎄, 캐나다 교포는 한국측의 사용자는 생각하기도 싫다는 입장이었다. 작년에 저작권 조약에 가입하였으므로 지금은 그런 일은 없지만 당시만해도 프로그램을 저자의 허락없이 복사를 하여도 법적으로 하자가 없었으니, 비싼 값(10만원 선이었다고 생각한다)의 한글III 프로그램을 삼보컴퓨터에서 사는 것이 아니고 3천~4천원을 주고 복사판을 사는 사용자가 많았던 탓이다. 자업자득이지 누굴 탓할 수도 없고, 필자같이 비싼 값의 원본을 산 사람도 도매금으로 결점이 있는 한글III 프로그램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자리를 빌어서 한글III를 만든 회사나 그 한국대리점은 선의의 사용자에게 피해를 준 점에 대하여 미안하게 느끼라고 충고를 하고 싶다.

친절한 도움말

고생하며 한글III를 사용하다가 세월이 흘러 드디어 IBM-XT 컴퓨터가 국내에 판매되기 시작하고 제대로 생긴 한글 워드프로세서가 탄생한다. 그 이름이 '보석글I'. 2백자 원고지 20장이 아니라 2백장까지 한번에 사용하게 되었으니 이기쁨을 누구에게 전하랴. 더군다나 2백장이 넘어서 더 이상 안되면 먼저번처럼 예고도 없이 벼란간에 메모리에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친절한 안내문이 나오면서 디스켓에 지금까지의 내용을 저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단 한가지 불편한 점이 있다면 워드프로세서를 사용하는 도중에 화면에서 도움말을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결점(버그)이 없는 한글 워드프로세서를 얼마나 기다렸던가. 사용법이야 책을 보면될 것이지 사치스럽게 화면에서 꼭 볼 필요야 없는 것이고.

보석글I(T-Maker)을 만든 사람은 '피터 로이젠'인데 미국의 10대 컴퓨터 천재중에 끼는 대단한 젊은 친구이다. 도움말이 없어서 불편하다는 소리가 사용자에게서 들리자 즉시 보석글II(T-Master)를 개발하였다. 얼마나 사용자를 존경하는 행동인가. 이 글도 보석글II로 작성한 것이다. 컴퓨터의 초보자도 한글로 된 도움말이 있어서 배우기 쉽고, 문장의 편집 기능이 다양하고, 대부분의 프린터로 인쇄해낼 수 있으니 정말 깜찍한 워드프로세서가 보석글II이다.


(그림1) 보석글Ⅱ 편집 화면(차림표 선택시)

(그림2) 보석글Ⅱ 편집 화면(자수 계산표를 볼 때)

(그림 3) 보석글 Ⅱ에서의 문자체 지정


모든 한글을 표시

개인용컴퓨터의 워드프로세서 프로그램에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크게 2가지로 나룰수 있다. 그래픽 한글을 사용하는 것과 한글카드 한글을 사용하는 것인데, 한글카드 한글을 사용하는 워드프로세서는 자기네 회사의 컴퓨터에서만 사용할 수 있어 배타적이다. 반면에 보석글II는 한글카드를 별도로 구입하지 않고도 사용할 수 있다. 원래 삼보컴퓨터에서 개발한 프로그램이지만 삼보컴퓨터와 호환기종의 컴퓨터에서는 다 사용할 수 있다. 사실 삼보컴퓨터 호환기종이라기 보다는 IBM-XT 화환기종이라고 해야 정확한 말이겠지만.

보석글II(Version 1.26)는 그래픽 한글을 사용하므로 모든 한글을 다 표시할 수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글카드를 사용하는 컴퓨터에서는 한글카드에 내장된 글자수 한도내의 글자만 화면에 표시한다. 예들들어 2천5백자 한글카드라면 한글을 2천5백자밖에 표시하지 못한다. 물론 메이커측이나 행정전산망 컴퓨터를 만든분들이야 일상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한글은 2천5백자면 충분하다고 하지만 "지금 '쐤'소리가 났읍니다" "소가 투레질을 하면서 퉬퉬퉬합니다" "돼지가 꽥꽥, 꽥꽥, 꿀꿀댑니다"와 같은 의성어, 의태어 등을 표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초성 중성 종성을 조합하면 1만자가 넘는 글자를 만들수 있는데 2천5백자로 제한하다니.

그런데 보석글II는 모든 한글을 다 표시할 수 있어서 진정한 애국자이다. 이것은 사실 워드프로세서의 문제라기보다는 오히려 컴퓨터 자체의 성능 문제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어쨌거나 조합형 한글의 특성을 살려서 모든 글자를 화면에 나타내주는 것이 우수한 컴퓨터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다행히도 요즈음엔 모든 한글을 다 표시할 수 있는 한글 카드도 개발되고 있어서 안심이 된다.

주옥같은 보석글이지만 기능이 추가 되어야할 것이 있다. 맡줄이 그어진 밑줄 문자나 글자가 하얗고 바탕색이 까만 역상 문자는 모니터 화면에서도 그대로 나타나지만 세로로 2배 확대한 문자나 가로/세로 둘다 2배 확대한 문자, 축소 문자는 화면에서는 보통 문자와 다르게 표시만 되고, 글자 크기가 확대 또는 축소되지 않는다. 물론 프린터로 인쇄하면 확대 또는 축소가 다 되지만. 최근의 경향이 인쇄되는대로 화면에서도 똑같이 확대 또는 축소되어 보여주는 것이므로 보석글에서도 이 기능이 빨리 이루어지길 바란다.

1988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이기성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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