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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복 안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낸 송 교수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는다.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희끗희끗한 머리카락과 알이 두꺼운 안경, 체크무늬 넥타이가 연구실 창밖으로 누렇게 물든 은행나무와 어울려 늦가을 정취를 물씬 풍긴다.
그리고 그의 손에 들린 휴대전화. 폭이 넓은 은색 테이프를 칭칭 감은 흰색 휴대전화는 10여 년 전 유행하던 길쭉하고 뚱뚱한 초창기 모델이다. 배터리와 본체를 연결하는 이음새가 떨어져나가 테이프로 고정시켜놨단다. 광통신을 연구하는 공대 교수라기에 ‘얼리어답터’일 것이라 지레 짐작했는데,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다. “아직 쓸 만하다”며 그는 씨익 웃는다.
15년 지기 필름카메라 니콘 FM2
연구실 한쪽에서 송 교수가 카메라 가방을 들고 왔다. 지난 4월 서울 인사동에 있는 갤러리에 전시한 과학사진들이 저기 담긴 카메라에서 나왔다. 사진전까지 열었는데 당연히 크고 멋진 최신식 디지털카메라 정도는 들어 있으리라.
그런데 그가 가방에서 꺼낸 카메라는 작고 평범한 구식 필름카메라다. 니콘 FM2. 1990년대 초 서울역에서 대구행 기차를 기다리며 남는 시간에 카메라 가게를 둘러보다 옆에 있던 손님의 추천으로 ‘충동구매’ 했다고. 중고였지만 당시로선 거금인 35만원을 들였다. “수동이라 장시간 노출시킬 수 있어 별이나 달 사진을 찍기에는 최고에요.” 송 교수는 20년 지기 필름카메라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1997년 3월 9일 부분일식 때 찍은 사진입니다.”
그는 연구실 벽에 걸린 사진 한 장을 가리켰다. 인사동 갤러리 전시 때 공개한 대표작이다. ‘해가 있는 밤’이란 제목이 눈에 띈다. 역설적인 표현이다. 해를 찍기 위해 투과가 매우 적은 필터로 촬영했더니 밤처럼 어둡게 나와 붙인 제목이란다.
작품 설명도 재밌다. 각종 미사여구 대신 숫자와 기호가 가득하다. ‘해가 있는 밤’에는 ‘10:58 GMT+9, 대구광역시 앞산공원 고산골 35°49´29.21″N 128°36′08.72″E’이란 설명이 붙었다. 한국시각으로 10시 58분에 사진을 찍었고(10:58), 이 시각을 국제표기인 그리니치 천문대 평균 시각을 기준으로 하면 9시간 앞서며(GMT+9), 이때 위치는 북위 35도49분29.21초, 동경 128도36분8.72초라는 뜻이다.
이렇게 복잡한 설명을 단 데는 이유가 있다. 당시 송 교수는 전시 주제를 시간과 공간의 조우(遭遇)로 정했다. 과학과 사진의 만남을 표현하기 위해 시간, 공간, 만남이라는 키워드를 잡았고, 사진에서 뿐만 아니라 사진설명에도 이 키워드를 나타내자는 의도에서 촬영한 시각과 장소를 넣었다.
그렇게 전시된 작품이 총 7점이다. 이중 5점은 그간 찍어둔 사진이 아니라 송 교수가 전시를 위해 직접 아이디어를 내고 새로 촬영한 사진들로 채웠다. 가령 ‘가이아의 스핀’은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본다는 가정 아래 지구본으로 지구의 자전 운동을 표현했다. ‘시간과 공간 이해의 선각자들’에서는 역사적으로 시간과 공간 개념을 이해하는 데 큰 공헌을 한 과학자 5명(유클리드, 갈릴레오, 데카르트, 뉴턴, 아인슈타인)을 선정해 그들의 사진과 관련 업적을 소품으로 배치했다.
“아인슈타인 사진 옆에 바가지가 있는데, 그 속에 시계와 공을 넣었습니다. 시계는 시간을, 공은 공간을 의미하고, 이 둘이 우주라는 한 바가지 속에서 만나는데, 이것이 바로 시간과 공간의 조우라는 전시 주제를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사실 송 교수가 어릴 때부터 ‘사진광’이었던 건 아니다. 그의 성장기를 한단어로 표현하면 차라리 ‘실험광’에 가깝다.
“돌이켜보면 중학교 때 실험책이 꽤나 좋았어요. 한국전쟁 때 피난 왔다가 경주에 정착한 선생님이 손으로 직접 쓰고 그려서 책을 만들었는데, 이 책으로 3년 내내 실험했으니까요.”
수업시간에 건너뛰는 실험은 집에서 구할 수 있는 온갖 잡동사니를 모아 직접 해야 직성이 풀렸다. 가솔린 엔진의 원리를 알아보겠다며 소주병에 라이터 기름을 넣고 퓨즈 대용으로 알루미늄 필름을 잘라 전기를 일으켜 소주병 뚜껑이 방 천장까지 튀어 오르는 바람에 어머니를 깜짝 놀래키는가 하면, 로켓 발사랍시고 학교에서 구한 화학약품을 볼펜 껍데기에 넣어 폭발력을 테스트하기도 했다.
‘실험광’이 ‘사진광’ 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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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3학년 때 받은 ‘특별 과외’도 빼놓을 수 없다. 과학경진대회에 내보낼 학생을 뽑기 위해 불시에 치른 과학시험에서 그는 6명 안에 들었고, 그때부터 매일 수업이 끝난 뒤 2시간씩 과학선생님에게서 ‘특훈’을 받았다. 당시 과학경진대회는 연필로 문제를 푸는 종이 시험이 아니라 직접 실험을 하는 방식이었다. 교과서에 있는 실험을 일일이 해보고 선생님과 실험결과를 토론하길 9개월, 그는 도대회에서 3위로 입상했다.
경북대 전자공학과(현 전자전기컴퓨터학부)에 진학한 뒤에도 그의 실험은 계속됐다. 학교 근처 하숙집이 아지트였다. 한번은 빛에 반응하는 감응소자와 트랜지스터로 새벽녘 어슴푸레 동이 트면 알람이 울리는 라디오를 만들었는데, 구름이 잔뜩 낀 탓에 알람이 울리지 않아 학교에 지각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실험을 하다가 자연스레 사진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사진에 입문한 계기를 물어보자 그는 석사과정 시절 기억을 더듬었다. 학부를 졸업한 뒤 그는 당시 최신 분야였던 광통신을 공부하기로 마음먹고 한국과학기술원(KAIST)에 진학했다. 마침 미국에서 광통신을 전공하고 막 돌아온 교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연구를 하기 위해 광섬유 특성을 오실로스코프로 측정하는 실험을 했다. 그러다보니 오실로스코프에 나타난 결과를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을 찍었다. 한 장, 두 장, 세 장…. 처음엔 단순히 결과를 기록할 요량이었지만 찍다보니 욕심이 생겼다. 접사링을 끼워 렌즈를 필름에서 살짝 띄우면 가까이서 찍어도 초점이 잘 맞았다. 폴라로이드카메라로 찍어 사진을 바로 확인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사진의 매력에 홀딱 빠진 일은 그로부터도 한참 뒤였다. 니콘 FM2를 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침 동쪽 하늘에 혜성이 나타났다. 카메라 성능을 시험할 생각으로 혜성을 찍었다. 작지만 선명하게 혜성이 잡혔다.
그럼 별자리도 한번 찍어볼까. 오리온자리부터 카메라에 담았다. 사진에 나온 오리온자리는 예상 밖으로 아름다웠다. 광량이 작아 맨눈으로는 색깔 구분이 어려운 오리온자리의 별들이 사진에서는 서로 다른 색을 뽐내며 반짝이고 있었다. 옛 기억을 더듬었다. ‘지구과학시간에 별 색깔이 다르다고 배웠는데 그게 사실이었구나. 기록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라고 깨닫는 순간이었다.
그때부터 그의 옆엔 늘 카메라가 있었다. 2000년 호주에서 열린 학회에 참석하기 위해 여장을 꾸릴 때도 FM2를 넣었다. 남반구의 별자리를 언제 또 찍을 기회가 있겠냐 싶었다.
낮에는 학회에 참석하고 밤에는 도시 이곳저곳을 배회했다. 남십자자리와 켄타우루스자리를 찾아 셔터를 눌러댔다. 책에서만 보던 ‘석탄자루’로 불리는 콜색(은하수 중에서 암흑성운이 별빛을 가려 검게 보이는 부분)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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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과학 얘기하면 재밌어
“사진과 연구, 사진과 실험이 별개가 아닙니다. 연구에서 기록은 매우 중요해요. 사진은 중요한 기록매체 중 하나죠. 게다가 카메라는 광통신을 연구하는 제게 광학의 기초를 공부할 수 있는 광학기기이기도 합니다.”
그는 요즘 강의할 때 아예 카메라를 가져가 열어서 보여준다. 셔터시간도, 조리개에 따라 심도가 달라지는 이유도, 역광이 문제가 되는 이유도 카메라로 설명하면 학생들이 쉽게 이해한단다. 그가 지난해 책임지고 집필한 교재인 ‘기초전자물리학실험’에는 실험 준비물로 디지털카메라가 포함됐다.
“어떻게 하면 학생들이 과학을 쉽게 이해할까 고민했죠. 요즘 학생들은 디지털기기에 익숙해 디지털카메라를 잘 다루고 흥미도 느끼더군요. 실험 내용을 디지털카메라로 찍으면 컴퓨터에서 결과를 분석해줍니다. 요즘 실험답죠.”
사진 전시회도 그런 목적이 가장 컸다. 사진을 매개로 과학의 재미를 알릴 수 있지 않을까. 그는 전시회 기간 중 주말에는 직접 마이크를 잡고 작품 설명을 자처했다.
“어린 학생들이 설명을 들으며 과학에 흥미를 보여 너무 기쁘고 보람있더라구요.”
그 웃음에 매년 과학과 사진을 접목한 전시회를 열 용기도 얻었다. “플라스틱 막대기 안으로 레이저를 쏴 전반사의 원리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학생들이 매우 즐거워합니다.” 대구경북여성과학자협회 지원으로 진행되는 이공계 연구실 탐방에 참여하고 있는 송 교수는 학생들에게 광섬유 통신을 설명하면서 그들이 어떤 내용을 좋아하는지 노하우를 꽤 쌓았다. 지난해부터 그의 실험실을 다녀간 초·중·고등학생 팀만 5개다. 기대해보자. 어쩌면 내년엔 광섬유 통신을 멋들어진 사진전으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재치만발 돌발문답 3
15년 된 카메라는 딸에게도 안 주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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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나도 과학자가 될 것 같다. 사진은 예술이다. 내게 예술적인 감각과 능력은 부족한 것 같다. 대신 과학자의 눈으로, 공학자의 눈으로 사진을 찍으면 예술성은 떨어지겠지만 사진작가는 표현할 수 없는 과학적인 메시지를 담을 수 있지 않을까. 일반인이 과학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사진을 계속 찍고 싶은 것이 내 꿈이다.
2. 필름카메라만 고집하는 이유가 있는가?
꼭 필름카메라만 고집하는 건 아니다. 예전에 ‘똑딱이’로 별 사진을 찍었는데 잘 안 나왔다. 그 기억 때문인지 아직은 필름카메라가 좋다. 하지만 하늘을 기똥차게 찍을 수 있는 DSLR이 있다면 살 생각은 있다. 요즘 디지털 기술이 굉장히 발달해서 어떤 면에서는 아날로그를 능가하기도 한다. 다만 DSLR에는 필름카메라의 향수(鄕愁)가 없어 아쉽다.
3. 니콘 FM2를 팔아야 한다면 가격은 얼마로 책정하겠는가?
애환이 담긴 카메라라 가능하면 절대 팔고 싶지 않다. 딸아이도 달라고 조르는데 주지 않고 있다(웃음). 만약 꼭 팔아야 한다면 350만 원 정도? 니콘 FM2를 살 당시 35만 원이었는데, 지금까지 이 카메라가 내게 적어도 10배의 부가가치는 제공하지 않았을까.
생생현장 따라잡기
달 사진 찍으려면 용감해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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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3월 29일부터 ‘시간과 공간의 조우’ 전시회가 예정돼있었고, 당시 나는 전시회에 출품할 사진을 준비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저녁에 수련회 일정이 끝나고 밤 11시쯤 홀로 수련원 뒷산을 찾았다. 뒷산에 올라 달과 별을 촬영할 생각이었다. 뒷산을 오르는데 곳곳에서 형광 막대기가 눈에 띄었다. 학생들의 담력을 키우기 위한 야간산행을 할 때 길을 잃지 않도록 꽂아 놓은 것들이었다.
한참을 올라 산길에서 벗어나 적당한 촬영 장소를 찾았다. 카메라와 삼발이를 설치하고 바로 달과 별을 찍기 시작했다. 그날이 음력으로 거의 보름이라 달이 매우 밝았다. 이때 찍은 사진이 ‘달과 가이아의 스핀’이다. 카메라를 삼발이에 고정시켜 놓고 30분 간격으로 지구 자전에 의한 달의 이동을 담았다. 아쉽게도 별 사진은 달빛이 너무 밝아 많이 담을 수 없었다. 북쪽 하늘의 북극성 근처에만 셔터를 눌렀다.
카메라가 사진을 찍을 동안 산 아래를 내려다보니 밤풍경이 장관이었다. 멀리 구룡포항의 불빛이 아련히 반짝이고, 일렁이는 파도도 저 멀리서 철썩였다. 1시간쯤 지났을까. 시계는 오전 12시 30분을 가리켰고, 학생들의 야간산행도 다 끝났는지 사방이 고요했다. 주위엔 불빛하나 없고 오로지 달빛만 휘영청 밝게 빛나고 있었다.
사진 찍기에 정신이 팔려 별 생각이 없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달밤에 캄캄한 산속에 혼자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밤에 무서움을 잘 안타는 편이었지만 나도 모르게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래도 사진은 마저 찍어야했다. 용기를 내 달과 별 촬영을 계속했다. 천체 사진을 잘 찍으려면 담력부터 키워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편집자 주
‘과학계 다빈치를 찾아서’는 이번 호로 마칩니다. 그동안 ‘과학계 다빈치를 찾아서’를 지켜봐 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