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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취를 향한 힘찬 발걸음

정보문화 확산 글짓기 현상공모 최우수 당선작

정말 오랫만에 S빌딩에 위치한 컴퓨터 전시장에 들려 보았다. 몇 군데 달라지기는 했지만 나에게는 여전히 친숙하게 느껴지는 곳이었다.
전시장은 컴퓨터에 몰두해 있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열심히 키를 두드리고 있는 꼬마아이 하나가 눈에 띄었다. 가까이 가 보았다. 집에서 작성한 베이직 프로그램을 입력하고 있었다.

옆에서 가만히 보고 있으려니 문득 나도 저런 때가 있었다는 생각에 입가에 빙그레 웃음이 피어났다. 그리고 그때까지 머리 속 한구석에 잠자고 있던 나의 소중한 추억들이 전시장 여기저기에 되살아나 눈 앞에 어른거렸다.

벌써 4년전의 일이다.

국민학교 6학년 때, 우연히 친구를 따라간 곳이 지금 내가 서있는 이 컴퓨터 전시장이었다. 난생 처음 보는 컴퓨터라는 것이 너무도 신기해서 문을 닫을 때까지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 모를 정도였다. 자그마한 기계 하나로 과학도가 꿈이던 한 어린이의 가슴은 쿵쾅쿵쾅 방망이질 치고 있었다.

나와 컴퓨터의 첫만남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날 이후, 학교가 끝나면 교문에서부터 정거장까지 달음박질쳐 버스를 타고, 다시 전시장 까지 단숨에 뛰어갔다.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가서 자리를 차지할 욕심에서였다. 그러나 기를 쓰고 뛰어가도 나보다 먼저 온 사람들이 빽빽이 자리를 잡기 일쑤였다. '자리 좀 양보해 줄 수 없느냐'는 내 물음에 본 체도 안하던 사람들이 얄밉기도 했다. 그러나 그 사람들도 나와 똑같은 마음으로 전시장에 왔을 텐데, 자리를 양보해 달라는 것은 내 잘못이었다.

알기 쉬운 베이직이라는 책을 가지고 컴퓨터와 모니터를 작동하는 방법부터 차근차근 배우기 시작했다.
손가락 끝으로는 책의 예제 프로그램 리스트를 짚고 눈으로는 A자가 어디에 있는지 몰라 키를 하나 하나 찾아 가면서, 뜻도 모를 명령어들을 쳐 나갔다. 덩그러니 원하나를 그리는 프로그램이었지만 RUN 시킬 때마다 느껴지는 야릇한 희열감에 몇번이고 다시 RUN 시켜 보았다. 이 희열감은 나를 더욱 컴퓨터에 빠져들게 하였다.
 

국민학교 6학년 때 친구를 따라 갔다 우연히 들른 전시장에서 처음 컴퓨터를 접했다는 장재영군


언제부터인가, 전시장에 게임 붐이 일기 시작했다. '자동차 경주'니 '벽돌깨기'니 하는 것이 그 주인공이었다. 이런 것도 게임이냐고 비웃을 사람이 있을지 몰라도 그때는 지금의 MSX 메가롬 게임 만큼이나 흥미진진했었다.
나도 이 게임에 푹 빠져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새로운 게임을 하나라도 더 복사하려고 전시장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다. 손에는 베이직 입문서 대신에 공테이프를 가득 들고서……

컴퓨터를 배우고자 전시장을 갔던 것이 이제는 전자오락실에 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매일 먹으면 물리는 법이다. 서서히 게임이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나는 남이 만들어 놓은 게임밖에 할 줄 모른다는 생각에 자존심이 상했다.
'나는 영원한 사용자여야만 하는가? 개발자가 될 수는 없는가?' 드디어 나 자신의 게임을 말들기로 결심했다.
위에 우주선을 그리고 점수쓸 자리를 만들고…… 그런데 막상 프로그램을 작성하려고 하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당연한 결과였다. 베이직 공부는 뒷전에 두고 게임만 해온 내가 무슨 실력으로 프로그램을 짜겠는가? 우물에서 숭늉 찾는 격이었다. 아는 명령어라고는 SAVE, LOAD등 게임을 복사하는데 필요한 것들 뿐이었으니……

전보다 더 열심히 베이직을 공부했다. 꼭 게임을 만들겠다는 목표때문은 아니었다. 더 많은 것을 알려고 하다 보니 컴퓨터가 좋아져서 더 열심히 하게 되었다.
서너 달 후, 이제는 어느 정도 마음먹은 대로 베이직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전시장에서 안내를 맡아 보던 누나와 낯이 익을 정도로 열심히 했던 결과였다.

게임을 하나 구상하고 작성해 나갔다. 그런데, 행이 길어지고 변수가 많아질수록 프로그램의 작성이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GOTO문이 늘어나 프로그램의 흐름이 혼동되고, 이곳 저곳에 서브루틴을 추가하다 보니 메인루틴과 연결이 잘 되지 않았다. 마침내 나는 작성하던 프로그램을 포기하고 말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나는 베이직의 명령어만을 공부했지, 어떤 문제를 나름대로 분석해 논리를 세우고 흐름도를 작성하는 것은 공부하지 않은 것이었다.

얼마전 기계어로 한글 프로그램을 완성했는데, 구상 때부터 철저하게 도표를 만들고 흐름도를 그렸다. 작성된 흐름도에 따라 프로그래밍을 했더니, 프로그래밍 시간도 단축되고 에러의 발견과 수정도 용이했다. 그래서 2주일 만에 큰힘 들이지 않고 완성을 보게 되었다. 흐름도의 중요성과 편리함을 절실히 느낀 산 경험이었다.
게임은 내가 컴퓨터를 배우는데 있어서 커다란 촉매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만약 내가 게임에만 빠져 컴퓨터의 참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컴퓨터는 값비싼 오락기라는 속단을 내리고 말았을 것이다.

국민학교 시절의 마지막 겨울방학이 다가왔다. 추운 겨울이었지만 나의 컴퓨터 열기는 추위를 녹일 만큼 충분했다. 손가방 하나를 들고 전시장 문도 열지 않은 이른 아침부터 손을 호호거리며 나보다 먼저 온 아이들 뒤에 줄을 서서 빨리 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렸다. 나까지 자리가 올려나? 컴퓨터 수와 줄을 선 사람 수를 세어 보면서……아침부터 늘어선 아이들의 행렬에 지나가던 사람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기도 했다. 야속한 전시장 누나, 어떤 때는 12시가 넘어서야 문을 열어 주었다. 개장시간은 분명히 10시 정각이었는데……

운좋게 자리를 잡는 날이면, 점심도 굶어가며 문을 닫는 오후 5시까지 하루종일 자리를 지켰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 속에서 오늘은 어제보다 조금이라도 더 실력이 늘었다고 생각하니, 배고픔 정도는 문제가 안되었다. 컴퓨터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정말 부러웠던 하루하루였다.
추운 날씨에 이른 아침부터 돌아다니다 보니 감기에 걸렸다. 감기가 합병증을 일으켜 축농증이 되었다. 병원신세까지 지면서, 그후 2년이 넘게 고생해야만 했다. 어머니게서는 이것이 모두 컴퓨터 때문이라며 전시장 출입을 못하게 하셨다. 그러나 나는 컴퓨터 때문이 아니라고 애써 변명했다.

그해 겨울이 지나고 나도 중학생이 되었다. 전시장에 가지 말라는 어머니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나의 발걸음은 전시장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학생이 되니 교과목 수도 많아지고 하교 시간도 늦어져 아무리 빨리 가도 전시장은 이미 문을 닫은 후였다. 텅빈 전시장을 뒤로 하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다.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을 잃어버린 나는 그저 암담하고 우울하기만 했다.
어려운 가정 형편에 비싼 컴퓨터를 구입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런 내 마음을 아셨는지 어머니께서는 내게 용기를 북돋아 주시며 꼭 장만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다. 기쁘긴 했지만 한편으로는 부모님께 짐을 지어 드린 것 같아 죄송스러웠다.

거의 6개월이 지난 후, 부모님께서 나에게 감격에 벅찬 선물을 안겨 주셨다. 모니터와 8비트 컴퓨터 1대를 장만해 주신 것이다.
"성취한다는 것은 쉽고도 험난하고 어려운 길이다. 성취, 그것은 꾸준한 노력과 기다림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라는 글과 함께……
나는 마음 속으로 "감사합니다. 꼭 성취하겠읍니다"하고 다짐했다.
어느날 컴퓨터 잡지를 넘기다가 S 전자에서 소프트웨어 공모전을 개최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컴퓨터에 관해선 스스로 실력자라고 일컫던 나는 자신의 실력을 평가해 볼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였다.

작품을 하나 접수시키고, 장려상은 맞아 놓은 것과 같고, 혹시 우수상…?"하며 발표일을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나 나의 기대와는 달리 보기좋게 낙방해버렸다. 그러나 한번쯤은 떨어질 수도 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고 다음 공모전을 기약했다.
그렇지만 다음 공모전도 마찬가지였다. 또 낙방이었다. "실력자라고 자칭하던 내가 두번씩이나 낙방을 하다니…그렇다! 나는 참된 실력자가 아니다. 다만 다른 사람들보다 컴퓨터를 조금 먼저 알았을 뿐이다."

제6회 공모전.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만든 '국사공부'라는 작품을 접수시켰다. 담담한 마음으로 발표일을 기다렸다. 결과는 장려상이었다. 비록 장려상이었지만 컴퓨터를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받는 상이라 우수상 못지 않았다.
"국사공부…장재영" 이라고 뚜렷이 새겨진 상패를 받았다. 그러나 공모전 출품을 통해 얻은 중요한 것은 상패가 아니었다. 2장의 낙방 통보서……나는 지금도 이것들을 서랍 속에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그리고 가끔씩 꺼내어 보면서, 지금의 내 모습을 반성하고 앞으로를 다짐하는 채찍으로 삼았다.

어느덧 나도 중3이 되어 고교 입시의 관문 앞에 서게 되었다. 그동안 너무 컴퓨터에만 빠져 학교 성적이 오르지 않았다. 진학이 우선이라는 생각에 나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컴퓨터와 모니터를 상자에 넣어 눈에 보이지 않게 다락으로 올려버렸다. 컴퓨터를 잠시 잊고 공부에만 전념한 덕분에 어려움없이 고입선발고사를 치뤘다. 컴퓨터를 다시 꺼내던 날, 헤어졌던 가족과 상봉하는 것 이상으로 무척 반가왔다.

고입시험이 끝나니 시간의 여유가 생겼다. 그동안 사용해 오던 베이직에 속도의 한계를 절실히 느껴오던 나는 기계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행번호도 없고, 변수도 없고, 곱셈 나눗셈도 직접 할 수 없는 이 언어를, 베이직만 써오던 나의 사고방식으로 이해하기란 너무도 복잡하고 어려웠다. 이때 구세주가 나타났으니, 그것이 바로 컴퓨터 잡지의 '기계어 연재강좌'였다. 비교적 쉬운 설명과 풍부한 예제는 나에게 무척 큰 도움이 되었다.
기계어의 습득은 나의 프로그래밍 수준에 놀라운 발전을 가져왔고, 또 그때까지 몰랐던 컴퓨터의 여러 분야를 이해하는데도 한몫을 톡톡히 해줬다.

고등학교에 입학한 후,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를 구입하게 되었다. 컴퓨터를 구입할때 만큼이나 힘들었지만 그만한 가치는 있었다. CP/M을 사용하게 되면서 dBASE Ⅱ나 MBASIC도 사용해 보고 또 FORTRAN, TURBO-PASCAL 등 새로운 언어에도 눈을 돌리게 되었다. 특히 TURBO-PASCAL에 상당한 매력을 느끼게 되어 요즘은 이것을 배우려고 노력 중이다.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으로 시작하였지만 이제는 내 생활의 중요한 일부가 된 컴퓨터. 그러나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더욱 깊어지는 것이 컴퓨터인듯 싶다. 학원에서 체계적으로 가르쳐주는 컴퓨터 교육을 받아 보지 못해 아쉽기는 하지만 나혼자 탐구하고 경험을 쌓으면서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직도 모르는 것이 너무도 많다. 그래서 앞으로 대학에 진학하면 컴퓨터 관련학과를 선택해 계속 공부할 계획이다.

요즘은 16비트 PC에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데 상당한 흥미를 느끼고 있다. 하루빨리 값싼 퍼스널 컴퓨터가 출현했으면 좋겠다.
오늘 내가 이만큼이나마 컴퓨터의 참모습을 맛보게 되었음은 항상 충고와 격려를 아끼지 않으시고 여러모로 나를 도와 주신 부모님 덕분이다. 늘 감사한 마음이다.

앞으로 내 계획은 IBM이나 APPLE에 버금가는 세계적인 컴퓨터 기업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욱 열심히 공부해야겠다.
성취! 그것은 꾸준한 노력, 기다림으로 이루어진다는 어머니의 말씀을 상기하면서 오늘도 나 자신의 성취를 위해 힘찬 발걸음을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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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10월 과학동아 정보

  • 장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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