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시절에는 즐거운 서클활동도 했다. 적당한 시기에 공부에 매달린것이 큰 도움이 됐고…
"여학생이 왜 공대에 들어가게 됐어요?" 아마도 내가 대학에 입학한 후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질문에 대해 만족할 만한 답변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어릴 때부터 유명한 과학자가 되겠다거나 인류에 기여할만한 큰 업적을 남기겠다는 거창한 이상을 가진 적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내가 공대를 동경하게 된 것은 중학교 1학년 때 였다. 그 때 접한 수학과 물상이 내게 굉장한 흥미를 주었다. 물론 다른 과목보다 공부하기가 지겹지 않다는 정도였겠지만 수식으로 표현되는 현상들이 무척 신기했다. 또 그렇게 간단하게 설명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그래서 경이로운 '수식의 세계'로의 입문을 주어진 운명이라고 여겼다. 아뭏든 그때부터 난 6년간 변함없이 공대 진학의 꿈을 키웠으니까.
이상한 것은 그 당시의 나는 순수하게 이론을 연구할 수 있는 자연과학분야보다는 실제로 응용되는 공학계열이 훨씬 매력적으로 느껴졌다는 점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 때는 공학이란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지조차 몰랐다. 순수과학과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는지 개념조차 안 서 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공대를 선망하게 된 것은 그때 일기 시작한 전자공학의 붐을 탄, 순전히 유행을 쫓는 심리에서였다. 이러한 생각이 확고하게 자리잡기 시작한 것은 역시 고등학생이 되면서부터였다.
나는 지금도 나의 고등학교 시절을 무척 만족하게 생각한다. 내가 살아온 짧은 시간중에서 가장 즐거웠고 유익한 시기였다. 또한 내가 하고 싶은 많은 일들을 실제로 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
당시 나는 미래의 진로와 이상을 실현할 계획을 세우기 보다는 공부 이외의 생활에 빠져 있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고 서클활동 등으로 정신없이 바쁜 생활을 했던 것이다. 나는 비중있는 서클활동을 두 가지나 하고 있었다.
그러니 자연, 공부는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었고 학과공부는 정상적인 궤도를 찾지 못했다. 그 때 갑자기 이러다간 그 즐거운 시간들을 후회하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나는 내가 선택한 생활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 공부를 시작했던 것이다.
게다가 2학년 때 배우기 시작한 물리과목이 내게 뜻밖의 의욕을 불러 일으켰다. 나는 물리야말로 학문다운 학문이며 물리 이외의 과목은 학문이라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자만심과 허영심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순수과학을 전공하는 것은 거부하고 있었다.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슬럼프를 깨기 위해 수학을 집중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어느 한 과목을 열심히 하면 그것이 모든 과목에 연관된다는 확신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학에 몰두한 이후 내 생활은 공부하는 것을 추가, 훨씬 알차게 되었다.
여러가지 공식들을 공부해서 새로운 문제들을 풀어나간다는 것은 큰 기쁨이었다. 전혀 새로운 문제에서 해답을 얻을 때의 기쁨이란….
학력고사가 다가오고 모든 과목이 교과서의 마지막 부분을 정리하고 있었다. 물리 교과서의 끝부분이었던 현대물리는 결국 나의 진로를 결정해 주었다. 'E=m${C}^{2}$'. 이 식의 충격적인 매력. 핵분열과 엄청난 에너지! 이렇게 해서 6년간의 방황은 순식간에 끝나고 나는 최종적으로 '원자핵공학과'를 선택하게 되었다. 그 동안 아마도 나는 공대의 모든 과를 지망했었으리라.
다행히도 합격은 했다. 하지만 입학을 하고 보니 주위의 많은 사람들의 걱정대로 나는 원자핵공학과의 유일한 여학생이었다. 말하자면 홍일점인 셈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각오를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혼자라는 특수한 상황은 결코 쉽게 헤쳐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비슷하게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동성친구가 아쉬웠다. 또 전혀 새롭고 갑작스러운 변화는 나를 상당히 당황하게 만들었다.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는 성격인데도 말이다. 여학생이 한 명만 더 있었더라면 하고 되뇌었던 적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지금은 과 친구들과 많이 친해져서 거의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때때로 무언가 벽을 느끼게 되고, 너무나도 생소한 사고를 지닌 남학생들과 부딪치게 될 때는 캠퍼스에 무리지어 다니는 여학생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대학이란 스스로 찾고자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한없이 열려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무척이나 두려운 곳이 될 수 있다. 이곳에서는 혼자 해결해야 하고 스스로 발견해야 한다.
그러기에 고등학교식의 주입식 공부방법은 대학에서는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다. 지금 나는 간단한 공식들을 알고는 마치 온 세상의 이치를 파악한 것처럼 생각했던 시절을 더듬어 본다. 그 때 좀더 깊은 이해가 있었더라면, 조금만 더 '원리'를 알고자 노력했더라면….
그러나 이미 지난 일이다. 이젠 새로운 사실들 앞에서 지난 날의 앎이 얼마나 단편적이었나 점검해볼 시점이다. 그 중 하나는 내가 공학이란 학문에 대해 얼마나 잘못 이해하고 있었나 하는 점이다.
공학이란 순수과학과는 실로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다. 물론 기본적으로 물리적 이론에 바탕을 두어야 하지만 공학은 실제적 응용에 중점을 두고 있다. 즉 이미 이론화 되어 있는 물리적 사실에 경제성을 부여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최근 각 계에서 반(反)핵의 소리가 드높고 원자력의 안정성에 대해 많은 시선이 모아지고 있다.
핵공학이란 원자핵반응에서 얻어지는 에너지와 방사선의 실용적 응용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는 크게 핵분열 핵융합 방사선의 세 분야로 나누어진다. 이 중 실용화되어 에너지를 공급하는 것은 분열반응인데 이 반응의 안정성 문제가 많이 거론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겨우 걸음마 단계에 있으면서 이러한 문제를 언급한다는 것은 주제넘은 일이다. 어쨌든 원자력 산업은 미래의 에너지원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리라 생각한다.
대학은 내게 많은 것은 요구하고 있다. 내가 가진 기존의 관념들을 깨뜨리기를 요구했고, 좁은 사고의 영역에서 벗어날 것을 촉구했다.
나는 낭만과 지성이 넘쳐흐른다고 그렸던 '대학의 그림'을 수정해야만 했다. 많은 갈등이 있었고 방황이 뒤따랐다. 이것이 직접 체험한 대학의 실상이었으나 나는 이런 모습의 대학을 사랑한다. 갈등하고 고민하면서 진정으로 성장해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가을 하늘이 드높다. 신학기도 꽤 지나갔고 모두들 공부에 바쁜 모습으로 되돌아 가고 있다. 이렇게 새로운 가능성을 가진 채로 경쾌하게 움직이는 모습들이 마냥 좋아 보인다.
벌써 제출해야할 리포트가 산더미같이 밀리기 시작한다. 이제 또 당분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겠지. 하지만 이것이 내가 선택한 길이고 내 소망을 이룰 수 있는 길이기에 자꾸 감기는 눈을 열며 다시 책장을 넘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