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를 되살릴 새로운 가치의 창조에 과학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 과연 과학은 가치중립적인가? 아니면 가치의존적인가? 그것도 아니면 가치가 과학의존적인가?
오늘날의 과학기술이 우리에게 물질적인 풍요와 생활상의 편의를 제공하고 있음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풀리지 않은 많은 문제들이 남아 있으며 매우 어렵고 심각한 새 문제들이 계속 생겨나고 있다.
개인간 사회계층간 그리고 민족간 국가간의 갈등 문제가 아직 풀리지 않고 있다. 또 종래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인구문제 공해문제 그리고 초강대국간의 군비경쟁에 의한 인류의 멸망 가능성 등이 심각한 새 문제들로 떠오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관련하여 더욱 염려스러운 점이 있다. 인류의 운명을 좌우할 이러한 문제들을 앞으로 어떻게 해결해 나갈 것인가 하는 방향설정에 대해서 조차도 아직 일반적인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들은 과학기술 그 자체를 탓하고 있다. 또 어떤 이들은 기술문명과 함께 팽배하는 탐욕과 향락주의를 비난한다. 또 다른 이들은 전래의 도덕심과 신앙심의 상실에 그 원인이 있다고 진단한다. 한편 강대국들의 패권주의와 팽창주의를 비난하는가하면 민족주의 분리주의를 탓하기도 한다. 이러한 여러 견해들이 적어도 어떤 부분적인 그리고 표면적인 진실을 말해주는 것은 사실이다. 허나 문제를 가장 객관적이고 근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우선 각자가 처해 있는 사회적 입지조건이나 이해관계 그리고 선입감 등을 떠나 사실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려는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 우리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제
저명한 두뇌 과학자이며 문화 비평가인 로저 스페리(Roger Sperry)는 그의 저서 '과학과 도덕적 우위'(Science and Moral Priority)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지구밖으로부터 우리 인간들의 이해관계나 선입감에 전혀 무관한 어떤 현명한 판정관을 모셔다가 우리 문제에 대한 의견을 물어 본다면 그는 지체없이 문제의 초점으로 우리가 지닌 가치관을 지목하리라는 것이다.
가치관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무엇을 덜 중요하게 여기는가 하는 심정의 내재적 기준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이러한 가치관에 따라 사물의 경중을 판단하고 행동의 방향을 설정하게 된다. 사람이 지닌 이러한 가치관은 물론 본인 또는 타인에 의해서 명시적으로 의식되기 어렵다. 또한 사람이 지닌 생리적 본능이나 욕망등으로부터 확연히 구분해내기도 쉽지 않다.
그러나 가치관이라는 것은 본능과 달라 생득(生得) 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장과정과 함께 형성되는 것이다. 또한 의식적 반성이나 외적 영향에 의하여 변형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한편 어느 개인의 관념속에 깊이 자리잡은 가치관은 그 개인의 모든 정신적 육체적 행위를 본질적으로 지배하게 된다. 서로 다른 두 가치관을 지닌 두 개인사이 또는 두 집단사이에는 설혹 객관적 사실이 동일하게 주어지더라도 상이(相異)한 가치판단과 함께 상이한 행동경향은 나타내게 된다. 때로는 서로 대립하는 입장에 서게 된다. 이것이 바로 현대 사회가 지닌 모든 갈등의 기본 원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한 사회의 모든 문제가 가치관의 통일에 의해서 모두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한 사회가 통일된 가치관을 가졌다고 하여 그 사회가 가장 바람직한 가치관을 가졌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가령 한 국가의 성원이 모두 그 국가가 세계를 제패해야 한다는 통일된 가치관을 지녔다고 하여 이것이 이 국가 또는 세계를 위하여 바람직한 가치관일 수는 없는 것이다.
다음으로 한 사회의 성원들이 동일한 가치관을 가졌다고 하여 항상 모든 사물에 대해 동일한 판단을 내리는 것은 아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정보 자료가 다를 수도 있고 또 결론으로 이끄는 추리과정이 다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는 정보 자료를 함게 확인하고 추리 과정을 함께 검증함으로써 쉽게 동일한 결론에 합의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현대 사회가 지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가장 바람직한 가치관을 찾아내고 여기에 모든 사람이 합의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 신가치관 형성의 주역
그렇다면 가치관은 어떻게 형성되는 것인가? 가치관 자체가 이와 같이 중요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가치관이 어떻게 형성되는 것이며 어떻게 보다 나은 가치관에 도달하게 될 것인가에 대해 충분한 연구나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듯 하다.
단지 한가지 확실한 것은 있다. 가치관이라는 것이 객관적 사실에 대한 지식을 통해서 논리적으로 도출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또 한가지 확실한 것은 객관적 사실에 대한 지식이 당사자의 가치관 형성에 결정적인 기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얼핏보아 모순되는 이야기같으나 사실은 모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한 사람이 지닌 객관적 지식이 그의 가치관에 연결되는 것은 인간 심성이 지닌 기본 속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연결은 본질적으로 두뇌의 신경세포망이 지닌 연결 구조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한편 사실 파악을 위한 지식의 논리는 가치의식과는 무관하게 서술형태로 표시되는 엄격한 독립 논리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지식 자체의 객관성 확보를 위해 취해진 선천적 사고 양식 속에 그 바탕이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이렇게 하여 파악된 지식의 내용은 심성 속에서 지식의 내용과 가치 의식을 연결하는 어떤 마음의 자리를 통과함으로써 가치기준 형성에 영향을 주는 것이다 과학이 가치중립적인가 가치의존적인가하는 논란의 해답도 바로 지식가 가치사이의 이러한 미묘한 관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과학이 가치중립적이라는 말은 과학의 논리와 내용이 가치관에 직접 영향을 받지 않는 한 중립적 구조를 가졌다는 것을 뜻한다. 과학이 객관적 사실 자체를 엄격히 추구하고 서술하기 위해서는 사실상 이러한 중립적 구조를 가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과학자가 어떤 것을 연구의 주제로 삼으며 어떠한 방향으로 연구를 진행시킬 것인가 하는 행위의 결정은 필연적으로 그의 가치관에 의존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과학은 가치의존적이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과학적으로 확인한 객관적 지식내용은 다시 우리의 가치관을 형성하는데 영향을 주게 된다. 이러한 점에서 가치관의 과학의존성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러나 불행히도 지금까지 가치관의 과학의존성은 지나치게 경시되어 왔다. 가치관은 마치 과학적 지식에 전혀 무관하게 형성되는 것인 양 잘못 인식된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인식으로 인하여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제인 새 가치관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과학이 기여할 길이 부당하게 차단되거나 충분히 활용되지를 못하고 있다.
현재 우리가 지니고 있는 전통적 가치관은 자연과 인간에 대한 소박한 경험적 지식을 기반으로 형성된 가치관이다. 따라서 현대 가치관이 지닌 문제점은 바로 이러한 가치관이 과학을 광범위하게 활용한 현 기술문명사회에 적합하지 않다는데에 있는 것이다.
한편 현대과학을 통한 자연과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는 우리의 기술문명을 향상시키는 데에만 활용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시대에 적합한 새로운 가치관을 형성시키는 데에도 크게 기여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현대과학이 이룩한 새로운 지식을 기존의 가치관에 따라 기술향상을 통한 산업발전에만 활용하고 있다. 보다 적절한 새 가치관 형성에는 활용하지 않음으로써 현대 사회는 심각한 생존의 위기에 놓이게 된 것이다.
●- 현대인들의 착각
그렇다면 현대과학은 가치관 형성을 위하여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가? 물론 실험실에서 새로운 물질을 하나 합성한다든가 암석속에서 새로운 구조 하나를 찾아 낸다고 하여 우리의 가치관이 새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이것보다는 지금까지의 단순한 상상이나 사변적인 추측만으로는 파악힐수 없었던 자연과 인간의 우주적 존재양상을 실측적 자료와 합리적 이론을 바탕으로 생생하게 보여 주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현대인으로 하여금 삶의 의미를 다시 깨닫고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가치관을 추구하도록 촉구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아울러 현대 기술문명이 지향하는 방향을 무비판적으로 추종할 경우 부딛치게 될 여러 위험을 과학적 방법을 통해 엄밀히 검토하고 이를 엄숙히 경고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현대인들에게 스스로의 가치관에 대한 심각한 반성을 촉구할 수도 있다.
현대과학은 우리에게 우주의 엄청난 시간적 공간적 규모와 그안에 성립되는 엄격하고 조화로운 자연의 법칙들을 보여주고 있다. 또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전개되어 나아갈 지구상의 신비로운 각종 현상들을 밝혀내고 있다. 특히 우리 자신들의 삶에 직접 관련되는 생명의 발생 및 성장(진화)과정들을 수 십억년의 먼 과거까지 소급하여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러한 생명의 연장으로 정신현상과 문화현상이 과학의 바탕위에 어떻게 이해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아울러 이를 주체적으로 영위하는 우리 인간은 과연 어떠한 의미를 지니는 존재일 것인가를 깊이 음미해 볼 많은 자료들을 제공한다.
만일 현대인이 과학이 보여주는 이러한 광범위하고 종합적인 새 세계관을 마련하고 실천한다면 더할 나위없이 바람직한 일이다. 또 전통적 가치관의 바탕이 되어 온 종래의 세계관이 얼마나 편협하며 임의로웠던가를 파악하게 되면 새 가치관이 모색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나의 예로서 우리는 지금까지 개개의 사람은 독립된 존재로서 이들 개개의 인격에 절대적인 가치가 부여되는 것으로 생각해 왔다. 하지만 과학이 보여주는 새로운 세계관에 의하면 사람의 생명뿐 아니라 동식물을 포함한 '모든 개체의 생명이 모두 하나의 뿌리에 연결된 존재로 파악된다. 따라서 개개의 생명은 단지 여기에 소속된 하나의 가지나 잎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요컨대 개별적 생명보다는 이 '전체적인 생명'에 보다 높은 가치를 부여해야 하리라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일단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시야가 넓어진다. 이른바 환경문제도 우리 생활에 불편을 주거나 우리의 생존에 위험을 초래한다는 의미에서 중요하다기보다 소중히 여겨야 할 '전체적인 생명'에 위해를 가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심각한 우려의 대상이 된다.
현대과학은 또한 긴 진화과정을 통하여 인간의 신체 및 정신이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가에 대해 많은 새로운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은 길게 잡아서 수 십만년의 문화사(史)적 과정을 밟아 왔다. 그 과정에서 오늘날의 가치관을 형성하는 많은 경험들이 축적되었다. 하지만 이보다 앞서 다시 수 십억년의 진화사(史)적 과정을 통해 인간의 신체적 정신적 활동을 가능하게 한 모든 삶의 바탕이 마련되어 왔다.
따라서 인간의 욕망과 가치의식을 포함한 모든 정신적 성향들도 모두 이러한 진화사 및 문화사의 전(全)역사적 과정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욕망과 가치의식에 대한 비판적 검토도 바로 이러한 전 역사적 과정에 비추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된다.
또한 인간이 살아온 이러한 전 역사적 과정을 밝혀 봄으로써 과연 인간의 본래적 생존양식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한다. 또 현재 우리는 이것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나고 있는지 그리고 이러한 벗어남이 어떠한 위험을 초래할 것인지에 대해 깊이 살펴보지 않으면 안된다.
인간은 오늘날 현대 기술문명을 통하여 그 생활방식을 크게 바꾸어 나가고 있다. 또 현대인은 이것이 마치 보다 인간다운 삶의 방식을 찾아 가는 길인듯이 착각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야말로 현대과학이 보여주는 인간의 참모습을 통해 깊이 반성되어야 할 점이다.
●- 과학자의 새 사명
현대사회는 새로운 가치관을 시급히 요청하고 있으며 현대과학은 이러한 새 가치관 형성을 위하여 많은 기여를 할 수 있다.
그러나 과학은 현재 이미 위험스런 단계에 들어선 기술문명을 더욱 위험스런 경지로 끌어 올리는 데만 기여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에게 절실히 요청되는 새 가치관의 창조를 위해서는 별로 큰 기여를 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가장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 새로운 가치관이란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지 못하는데 기인한다. 더욱이 새 가치관의 모색을 위해서 과학이 가장 커다란 기여를 하리라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따라서 현재 과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기여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명이 바로 여기에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 과학을 공부하는 목적이 단지 과학적 지식을 통한 기술의 개발이나 지식추구 그 자체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과학을 통하여 종래에는 볼 수 없었던 우주와 인간의 새로운 모습을 보고 그안에서 보다 바람직한 삶의 방향을 찾아 나가는데에 과학의 궁극적인 목적이 있다는 사실이 우리 모두에게 널리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불행히도 오늘날의 과학 교육이나 과학 연구 제도안에서는 이러한 방향의 노력을 찾아 보기가 매우 어렵다. 과학의 모든 분야들을 단편적으로 세분화시켜 놓고 분야별 전문가를 양성하거나 분야별 전문내용만을 연구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를 통해 하나의 통일된 세계관을 파악하기도 어려울 뿐 아니라 새로운 가치관을 모색한다는 것은 아예 시도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현대 인류 앞에 가사서는 무서운 위험을 생각할 때 이러한 방향의 노력은 이 시대의 과학자들이 지닌 가장 중요한 그리고 더 이상은 방치해서는 안될 긴박한 사명임을 우리 모두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