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공주 석장리에 한국인의 첫 조상이 사용한 것으로 추측되는 석기 좀돌날몸돌이 발견됐다.후기 구석기시대로 알려진 2만여년 전의 일이다.좀돌날몸돌은 이후 중석기 시대와 신석기시대를 거치며 점차 개량돼 나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는 사람들이 언제부터 살아왔으며, 이들의 생활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자기’와 ‘인간’이라는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흔히 떠오르는 의문이다.
사람들이 살면서 생활에 필요한 연모를 만들어 쓰고 먹거리를 마련하며 잠자리를 준비해 문화를 만든 첫 시대를 우리 학계에서는 ‘구석기시대’로 인정하고 있다. ‘구석기시대’는 1974년에 개편된 국정교과서 ‘국사’에서 처음으로 게재됐다. 사실 그로부터 10여년 전 이미 전공 학자들이 유적을 발굴해 구석기시대에 문화가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데에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된 것이다. 그만큼 수십-수백만년 전의 일을 추측하기란 여간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이후 새로운 자료와 발전된 고고학적 연구방법이 응용되면서 구석기문화의 시작 연대는 점차 거슬러 올라갔다. 현재의 국사 교과서에는 약 70만년 전부터 충북 단양 금굴에 사람이 살았다고 기록돼 있다. 최근에는 남·북한 학자들이 제각기 과학적으로 연구한 결과 50만년·40만년 전(평남 평양 룡곡동굴 1·2문화층)·20만년 전(경기 연천 전곡리)·18만년 전(단양 금굴 2문화층) 등의 연대들이 밝혀지고 있다.
‘70만년설’의 문제점
하지만 ‘70만년 전 시작설’도 문제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단양은 한반도의 중부 내륙 지방에 해당한다. 과연 여기에 살던 사람들이 가장 오래 된 연대와 역사를 갖고 있을까. 한반도에 누군가 외부에서 이주해와 첫 발을 내디뎠다면, 내륙의 중심보다 주변부에 먼저 정착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단양에서 살던 사람보다 더 오래된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또 주변 나라인 중국과 러시아의 구석기문화는 우리에 비해 훨씬 오래 전의 일로 기록돼 있다. 즉 중국은 2백50만년 전, 러시아는 1백50만년 전에 구석기시대가 시작됐다는게 정설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구석기 연대와 너무 많은 차이가 난다. 그러나 분명한 고고학적 자료가 넉넉하지 못한 형편이기에 의문을 말끔히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사실은 70만년 전 한반도에 살았던 사람들이 바로 ‘우리의 조상’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는 점이다. 이 시기는 인류의 진화계통상 ‘곧선사람’(Homo erectus, 1백20만년 전-40만년 전)이 활동하던 때에 해당한다. 현생 인류의 직접 조상으로 여겨지는 ‘슬기사람’(Homo sapiens sapiens)은 지구에 20만년-15만년 전 정도에 처음 출현한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의 진정한 조상은 최소한 그 이후에 한반도에 정착했던 사람이어야 한다는 의미다.
고고학에서는 인류의 조상을 추적할 때 유적지에서 어떤 생활 도구가 발견되는지를 중요한 판단 근거로 삼는다. 문자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역사 이전의 시대, 즉 선사시대를 구분할 때 인간이 사용한 주요 연장의 재료가 돌인지, 청동인지, 아니면 철인지에 따라 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로 나누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렇다면 고고학적 관점에서 우리의 조상은 어느 시기에 살았던 사람일까. 이 질문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당연히 가장 앞선 석기시대다” 라고 답할 것이다. 하지만 문제가 그리 간단치 않다.
석기시대에도 종류가 있다. 단순한 돌연장이 사용된 구석기시대와 토기문화(빗살무늬토기 등)로 대표되는 신석기시대, 그리고 그 가운데를 연결하는 중석기시대다(한국에서 중석기시대가 어떤 형태로 존재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많은 연구가 진행되지 않았다). 그런데 구석기시대와 중석기·신석기 시대 사이에 중요한 차이가 존재한다. 바로 기후다.
지질학적 시대의 관점에서 볼 때 구석기시대는 신생대 제4기의 갱신세에 해당한다. 당시에는 여러 차례 추운 빙하기와 따뜻한 간빙기가 되풀이되고 있었다. 마지막 빙하기로 알려진 뷔름빙하기는 바로 구석기시대의 마지막과 때를 같이 한다. 이후의 지구 기후는 현재와 비슷하게 변하게 된다.
돌날을 떼내는 방식
빙하기가 우리의 조상을 찾는데 중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한반도의 경우 뷔름빙하기를 기점으로 구석기문화와 신석기문화가 단절됐다는 것이 현재까지의 보편적인 생각이다. 빙하기가 끝날 무렵 날씨가 따뜻해지기 시작해지자 이전의 추운 기후에 적응했던 동물들이 북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동물은 당시 인류의 중요한 양식이었으므로, 후기 구석기인들 역시 먹이를 좇아 추운 북쪽으로 올라갔을 것이다. 이런 이유로 어느 정도의 시간 동안, 즉 신석기문화가 시작되기 전까지 한반도는 ‘무인지대’로 남아있었다는 설명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후기 구석기문화를 이끌었던 사람들을 우리의 조상이라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신석기인들이 과연 이들의 직접적인 후손인지 장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구체적인 고고학적 증거를 통해 우리 조상의 연원을 추적해보자.
사실 한반도에서 구석기시대의 슬기사람이 사용했다고 판단되는 유물이 발견된 일은 여러차례 있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후기 구석기시대(3만년 전 - 1만2천년 전)에 보편적으로 사용된 독특한 석기제작방법이 단양 금굴에서 발견된 일이다.
구석기시대에 돌을 연장으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모양과 크기의 돌을 얻어야 했다. 특히 짐승을 잡거나 움막을 짓기 위해서는 끝이 날카로운 돌날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돌날떼기’(blade technique)라는 기술이 발달했다. 말 그대로 커다란 몸돌로부터 적절한 형태의 돌날을 떼내는 기술이다.
전기·중기 구석기시대의 돌날떼기 방식은 망치(돌망치·나무망치·뼈망치 등)를 몸돌에 직접 내려치는 직접떼기 수법이었다. 이에 비해 후기 구석기시대의 돌날떼기는 몸돌에 날카로운 짐승 이빨이나 쐐기를 대고 망치를 내려치는 간접떼기 방식이었다. 이를 통해 훨씬 모양새가 좋고 깔끔한 연모를 만들 수 있었다.
단양 금굴에서 발견된 석기제작방법이 바로 간접떼기 수법이다. 약 2만6천년 전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사실만으로 우리의 기원을 2만6천년 전으로 규정짓기는 어렵다. 중요한 것은 간접떼기 방식이 이후의 석기제작방법으로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간접떼기 방식을 사용한 사람들이 과연 한반도에서 신석기문화를 이끌어간 동일인일까. 이를 고고학적으로 증명하기 위해서는 간접떼기 방식이 다음 단계의 석기제작방법과 연계돼 있다는 증거가 필요하다. 하지만 한동안 그런 증거는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그런데 충북 공주 석장리에서 새로운 사실이 발견됐다.
문화의 증거
약 2만년 전에 새로운 석기 ‘좀돌날몸돌’(細石核, micro-blade core)을 제작하는 기술이 한반도에 들어와서 유행했다는 점이 밝혀진 것이다. 좀돌날몸돌의 연대를 정확히 확인한 결과 정확히 2만8백30년 전의 것이었다. 또 이 시대의 사람들이 살았던 집터 세채가 발견돼 당시의 생활 모습을 웬만큼 복원할 수 있게 됐다. 중요한 점은 좀돌날몸돌 제작기술이 후기 구석기부터 시작해 신석기까지 이어진다는 증거가 곳곳에서 발굴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좀돌날은 길이 3-5㎝, 넓이 5-7mm 정도의 작은 연모로, 나무와 뼈에 꽂아 작살처럼 만드는데 사용됐다. 이를 만들기 위한 재료에 해당하는 큰 돌이 좀돌날몸돌이다. 간접떼기로 만들어진 기존의 돌연장에 비해 훨씬 정교하고 세련된 형태였다.
흥미롭게도 공주 석장리뿐 아니라 단양 수양개에서도 놀라우리만큼 많은 양의 좀돌날몸돌과 좀돌날이 발견됐다. 그런데 수양개의 좀돌날 제작 시기는 석장리의 경우보다 약간 늦은 1만8천3백년 전 - 1만6천4백년 전이었다. 또 제작 방법을 조사한 결과 석장리의 좀돌날 방식을 더욱 세련된 형태로 계승했다는 점이 밝혀졌다. 특히 수양개 사람들은 ‘날씬한 마름모’ 형태의 좀돌날인 슴베연모(tanged tool)를 발달시켜 독특한 수양개 문화를 전개시켰다(그래서 필자는 이를 ‘수양개식’(Suyanggae type)이라고 부른다). 슴베연모는 당시에 사냥기술이 대단히 발전했음을 알려준다.
놀라운 점은 좀돌날몸돌은 후기 구석기시대를 뒤이은 중석기 문화시기에도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1990년대 초의 조사로 새로 발견된 공주 석장리의 좀돌날몸돌은 후기 구석기시대의 그것보다 훨씬 작은 크기였으며, 작은 좀돌날도 잔손질이 매우 많이 간 정교한 석기였다. 또 강원도 홍천 하화계리에서도 단양 수양개에서 발견된 것으로부터 계승됐다고 보이는 좀돌날이 출토됐다. 이 외에도 북한의 평양 만달리 유적·경남 거창 임불리 유적에서도 비슷한 좀돌날이 발굴됨에 따라 많은 수는 아니라도 같은 문화적 성격을 갖는 중석기문화가 우리나라에 넓게 펼쳐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이런 발굴을 토대로 과연 한반도에 중석기문화가 존재했는지에 대한 의문이 어느 정도 해소될 수 있었다. 단양 금굴에서 발견된 중석기 유적은 약 1만1천년 전의 것임이 확인된다.
흥미로운 점은 이 시기에 벌써 토기를 제작하는 신석기문화가 확인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좀돌날 기술은 중석기 이후 신석기시대까지 연계된 것이다.
중부 지방에서 주변으로 확산
강원도 양양 오산리 유적의 사례를 살펴보자. 애초에 이곳에서는 8천년 전의 신석기시대 유물이 발견됐다. 그런데 최근의 연구 결과 그 밑의 층에서 출토된 숯이 1만2천년 전의 것으로 밝혀졌다.
이 자료는 지금까지 확인된 신석기 연대로는 가장 앞섰다는 점에서 학계의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더욱 놀라운 점은 이와 유사한 신석기 자료들이 일본의 여러 유적, 그리고 러시아의 연해주 부근 20여곳에서 확인됐다는 사실이다. 동해를 중심으로 한, 그래서 ‘환동해문화권’(環東海文化圈)이라고 부를 수 있는 토기 제작 집단이 적어도 1만2천년 전에 널리 분포돼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할만한 것은 바로 연해주의 우스티노브카 유적에서 출토된 중석기시대의 좀돌날몸돌이다. 제작방법으로 봐서 수양개 유적의 좀돌날몸돌과 연결돼 있고, 연대로 따지면 1만5천년 전으로 추정됐다. 초기 신석기시대에 토기를 만들어 사용하던 집단이 중석기시대와 연계돼 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증거다.
그렇다면 우리 한민족을 구성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문화집단은 좀돌날몸돌을 만들었던 집단이었을 것이다. 시기로 따지면 공주 석장리의 유적을 볼 때 적어도 2만년 전에 한반도에 문화를 만들고 있었다. 현재로서는 이들이 중부 지방으로부터 점차 주변으로 확대돼 나갔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앞으로 다른 지역이나 나라와의 비교 연구가 진행돼 보다 구체적이고 고고학적인 연구결과를 얻는다면, 한국인의 조상에 대한 고고학적 해석은 더욱 풍부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