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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타령하는 농민을 보고


한인규(韓仁圭·54)박사는 서울대 축산학과를 졸업하고 이희박사(영향학 전공) 학위를 받았다(1965). 귀국후 23년간 재직중. 한국축산학회 회장, 한국영향학회 회장, 아태(亞太)축산학회 회장, 세계축산학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그동안 발표한 논문이 3백50여편, 저서는 15권에 이른다.


일제말기 국민학교 4학년 때의 일이라고 기억된다. 당시 나의 담임선생님이셨던 김용철선생님(최근 사퇴한 대법원장)께서 나에게 학교 가축 축산반의 책임을 맡기시면서 닭과 돼지를 잘 기르라고 하셨다. 그때부터 끼니가 되면 짐승부터 먼저 먹이고, 계사와 돼지우리를 깨끗이 청소해주는 일 등으로 매우 재미있는 나날을 보냈던 것이다.

둥지에서 계란을 꺼내서 바구니에 모아두는 일, 새끼돼지가 무럭무럭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보람을 느끼곤 하였다. 여름철에는 부근에 있는 논밭가나 제방에서 풀을 베어다가 넣어 주기도 하였는데, 내가 길렀던 닭과 돼지는 그 풀을 너무나 잘 먹어 퍽 인상적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짐승을 사랑했고 그것들을 보살피는 일에서 동물애호정신이 자라게 되었는지 모른다.

●- 법대, 의대의 권유를 뿌리치고

중학교를 다닐 때 주위에 계시된 어른들은 내가 동물을 좋아한다는 것을 아시고 의과대학으로 가서 의사가 되라고 권유하셨다. 그래서 나도 그 분야에 관심을 두어보려고 노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교과서나 참고서에 나오는 피부병이나 염증이 담긴 그림을 보면 소름이 끼쳤다. 뿐만 아니라 비위가 약한 탓인지 밥을 먹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의사가 되면 매일 상대하는 사람이 다 병든 사람뿐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이 들어서 의사가 되려던 생각은 점점 회의에 빠지게 되었다.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6.25동란을 겪어야 했고 우리도 피난을 가야만 했다. 이 과정을 통해서 나는 농민은 무척 가난하고 농촌은 황폐한 곳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5일마다 섰던 어느 장날에 우연히 한농민의 '한'(恨)을 보았다. 보리를 한가마 시장에 지고와서 판 이 농민은 아이들에게 줄 고무신을 사고 남은 돈으로 고기 한근이라도 사가지고 가려 했다. 하지만 돈이 모자라서 고등어 한손(2마리)밖에 살 수 없었던 것이 한스러워 막걸리를 한잔 마시고는 구슬픈 목청으로 신세타령을 하는 것이었다. 그 농민이 부르던 그 노래소기가 왜 그리도 슬프게 들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무렵 시골에서 학교를 다니는 상당수의 학생들은 집안 형편이 어려워 도시락을 제대로 싸가지고 다닐 수가 없었다. 도시락을 싸오는 학생의 경우에도 꽁보리밥에 된장과 고추장을 찬으로 해서 먹어야했던 학생이 많았다.

이렇게 못먹는 백성과 가난한 농민을 위해서 나는 내 인생을 바치기로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농촌에서 태어난 사람이 농촌과 불우한 농민을 도우면서 살겠다는 것은 오히려 당연한 것이 아니냐는 생각을 했다.

우선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으로 진학하여 자신을 발전시켜야 되겠다고 결심하였다. 담임선생이나 부모님들께서는 한결같이 법대나 의대를 가라고 권유하셨다. 그러나 내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농대가 아니면 진학을 포기하겠다고까지 강한의지를 보였던 자신의 지금 생각해도 대견스럽게 여겨진다.

가난한 농민이 더 먹고 싶어하는 고기, 우유, 계란과 같은 동물성 식품을 생산하고, 나아가서 가축을 사육하여 농민이 소득을 올리게 해주려면 축산학을 전공해야 되지 않겠느냐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래서 대학 2학년에 올라가면서 분과(分科)할 때에 축산학과를 택하게 된것이다.

물론 어릴 때부터 짐승을 좋아하는 천성과 같은 마음이 함께 작용했으리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때 축산학과를 지망한 학생의 수가 정원보다 많아서 농학과 이은웅교수님을 찾아가서 꼭 축산학과로 갈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을 드린 적이 있다.

어렵게 축산학과에 들어갔는데, 6.25동란 중인데다가 그 당시 교수진이 약하고 대학시설이 파괴된 상태여서 우리는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졸업을 하게 되었다. 모자라는 감이 있어서 대학원에 진학을 하여 석사과정까지 마쳤으나 학문에 대한 나의 갈증이 해소되지 않았다는 것을 속일 길이 없었다.

유학을 가서 공부를 더하기로 결심하고, 군대문제를 하루라도 빨리 해결하기 위하여 입대하였다. 자유당 말기였던 1961년 2월에 드디어 유학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미국 유타주립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에 들어갔었다.

1년후에는 축산학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코넬대학교로 옮겨서 영양학을 공부하게 되었던 것이다. 모처럼 좋은 대학에 온 김에 많은 전공과목 학점을 취득하고 싶어졌다. 그런데 수강신청을 하려면 지도교수님은 한국에서 다 공부한 과목을 뭣하러 중복해서 공부하려는가라고 하시면서 못 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배운 것이 없어서 속을 좀 채워 가겠다는데 남의 사정도 모르고 못듣게 하다니! 이때 나는 행여 내가 교수가 되면 열심히 가르쳐 줌으로써 나와 같은 학생이 다시는 없게 해야지라고 스스로 다짐하곤 했었다.

●- 축산업은 내일의 농업

유학시절에 나는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다. 수강하는 과목마다, 모든 교수님들이 강의계획서에 나타난대로 열심히 가르치는 모습을 보고 경의를 표했다. 휴강 한시간 없이 강의하고 그렇게 자주 퀴즈와 시험을 치는데도 불평없이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의 태도를 보고 나는 망연자실하였을 뿐이었다.

ROTC사열을 해도 점심시간에 했고, 개교 1백주년 기념행사를 하는데도 강의가 없는 토요일이나 야간에 해서 휴강사태가 없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축제니 뭐니 하면서 1주일은 잘 놀았을 것인데"하면서 비교해 보기도 하였다. 누구나가 그러했듯이 코피를 쏟아가면서, 내가 왜 유학을 왔던가 자신을 원망하면서 공부했던 얘기는 접어두기로 하자.

여기서 두가지 강하게 느꼈던 일을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는 미국사람들의 짐승을 사랑하는 이른바 동물 애호사상이다. 어린아이가 잠자리에 들 때는 인형곰을 껴 안고서야 비로소 잠이 드는 것을 보았다. 집에서는 개(강아지)도 식구로 간주되어 얼마나 귀여움을 받는지 모른다. 개가 아픈데 가축병원에 입원시키는 친구를 보고 보신탕을 먹는 우리나라 사람들과는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어린아이로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살펴보면 애완동물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둘째로 느낀 것은 미국 농업의 중심이 축산이라는 사실이었다. 옥수수같은 곡류생산의 주목적도 가축을 기르기 위함이었다. 그들의 주식이 고기, 우유, 계란같은 축산물이고 보면 너무나 당연한 농업의 한 형태일른지 모른다.

쌀을 중심으로 한 주곡농업을 하는 우리의 농업형태와 비교하면 엄청난 차이를 발견하게 되었다. 잘 사는 나라의 농업은 축산이고 못사는 나라의 농업은 쌀농사인가라는 생각을 하고 보니 자신의 더욱 불쌍하게 느껴졌다. 우리도 언젠가는-지금보다 더 잘 살게 되면-고기, 우유, 계란같은 고급식품을 더 많이 먹게 될 것인즉 결국 주곡농업이 어제의 농업이라면 축산농업은 내일의 농업이 아니겠느냐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1965년에 귀국하여, 모교의 축산학과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각종 국제학회나 국제회의에 30여회 참석했다. 또 수십개의 나라를 방문한 경험이 있는데 쌀농사나 누에를 치지 않는 나라는 있어도 축산을 하지 않는 나라는 보지 못하였다. 따지고 보면 축산이야 말로 만국공통의 농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생산에서 가공까지 다루어야 하는 축산업은 부가가치가 매우 높은 산업이다. 학문적으로 말하더라도 고기, 우유, 계란, 모피 등의 생산을 뒷받침하는 응용부문이 있거니와 수정란 이식, 생명과학 등을 다루는 기초부문 내지 첨단과학부문도 있는 것이다.

짐승을 기르는 이른바 동물농업의 범주도 지금까지는 양계, 양돈, 낙농 등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밍크, 여우, 사슴, 물고기, 실험동물의 생산 등 매우 다양해지고 있다.

'시험관 아기'란 말은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가? 진작부터 축산번식학 분야에서는 인공수정이 발달하였다. 따로 채취한 정액을 냉동건조했다가 추후에 인공수정을 시킴으로써 자연교배를 시키지 않더라도 새끼를 가지게 하였던 것이다. 지금은 수정된 난자를 고도의 기술을 동원하여 분할, 수정란이식시대가 온 것을 실감케하고 있다.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여 새 생명을 이룩하고 이렇게 이루어진 생명이 성장하고 발전하는 과정은 알에서 병아리가 나오는 현상에서도 볼 수 있다. 또한 임신한 어미 가축의 배에서 자라는 돼지새끼와 송아지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신비한 생명현상을 공부하는 소재로 축산보다 더 좋은 대상은 없다. 그래서 동물생식품 생산과 생명과학분야를 합하여 동물생산학 또는 Animal Science라고 하지 않는가?

가축의 먹이를 생산하는 배합 사료생산업은 우리나라 농수산분야에서는 가장 큰 산업으로 알려져 있다. 연간 배합사료 생산량은 약 1천만톤이다. 8백만톤에 불과한 우리나라 식량생산량보다 훨씬 많고 연간 매출액만도 1조8천억원이나 된다.

또한 국내 곳곳에 산재해 있는 유가공장과 육가공장은 식품가공업의 핵심적 부분이라 하겠다. 최근에는 유전공학기법으로 새로운 가축의 품종이 육종되고 있다. 또 새로운 동물약품의 양산이 가능해졌다. 따라서 첨단과학이 꽃피울 수 있는 분야의 하나가 바로 축산학분야라 믿는다.

이렇게 보면 축산학은 단순한 가축의 생산으로부터 고도의 첨단과학이나 생명과학은 물론 식품가공의 요체까지 포함하는 학문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 보다, 앞으로 더 발전할 분야의 학문이고 그 내용에 있어서나 다양성에 있어서도 날로 새로워질 것이다.

우리나라는 그동안 미곡중심의 농업을 해왔고, 축산업은 부업규모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지난 20년동안 국민의 소득이 증가하고 생활수준이 향상되면서 축산물의 소비량이 크게 늘어났다. 국민 1인당 연간 육류 소비량은 5㎏에서 17㎏으로, 우유는 1㎏에서28㎏으로, 계란은 60개에서 2백개 정도로 늘어났다.

이렇게 늘어나는 축산물을 생산하기 위해서 가축의 사육두수 또한 대폭 증가했다. 한우는 1백60만두에서 2백30만두로, 젖소는 1만두에서 40만두로, 돼지는 1백30만두에서 4백30만두로, 닭은 1천1백만수에서 5천3백만수로 늘어났다. 또한 배합사료 생산량은 20만톤에서 1천만톤으로 늘어났다.

이러한 물량면에서의 성장뿐만 아니라 축산분야의 대부분의 시설이 근대화 되었다. 특히 사료생산분야는 거의 다 컴퓨터화되어 있어서 질적인 발전 또한 괄목할만한 것이다. 농업의 산업적 비중은 날이 갈수록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지만 그 속에서 축산업의 비중은 날로 커 가고 있는 것이다.

농가소득중에서 축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20년전만 해도 불과 2~3%이던 것이 지금은 30%를 상회하고 있다. 이같은 경향은 앞으로도 계속되어 2000년대 초반에 이르면 50%를 웃돌 것으로 추정된다.

1945년 해방 당시에는 우리나라에 축산학과가 서울대학교 한군데에 있었을 뿐이다. 지난 40년동안 축산관련학과의 수는 40개이상으로 늘어났고 매년 2천명 이상의 졸업생이 축산업 전선으로 배출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 서울대학교의 경우에는 정원이 50명으로 농대 17개 학과중에서 가장 많지만 지난 10년동안 지속적으로 이른바 졸업생 품귀현상이 발생했다.

졸업생 부족현상을 부채질하는 하나의 요인은 해마다 10여명 이상이 대학원으로 진학하기 때문이다. 축산분야의 기술수준이 향상되고 각종 기술연구소의 개설이 현저하여 석사학위 이상의 고학위 소지자를 많이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친 사람중엔 국내에서 박사학위 과정을 이수하는 사람도 있고, 외국, 주로 미국 대학원에 가서 더욱 체계적인 학문을 공부하는 사람도 있다.

국민소득이 3천달러에 육박하는 지금도 대다수의 농민은 도시민에 비하여 여전히 가난하게 산다. 또 농촌은 문명의 혜택이 덜 미치는 곳인 것 같다.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지만 아직도 조금은 불우하게 사는 농민과 함께 살고자 하는 사람, 자연을 사랑하고 짐승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웃을 내몸같이 사랑하고자 하는 젊은이, 양심을 지키며 정직하게 살고자 하는 사람, 생명의 신비를 심도있게 파헤치고자하는 독자에게 생을 바쳐 공부할만한 분야로 축산학을 권유한다. 소음과 먼지로 시달리는 현대인은 룻소의 말대로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을까?

●- 공부나 실컷하다가 인생을 마쳤으면…

농촌에서 태어나서 자랐고, 지금까지 30년이란 세월동안 축산학을 연구하고 강의하는 일만 해온 외곬 인생이기에 대학 바깥의 일은 바보스러울 정도로 모른다. 당구, 바둑, 낚시, 장기나 골프하느 일로 시간을 보낸 일은 물론 없다. 한때 건강관리를 위해서 배우던 테니스도 이른바 3T교수론이 나온 이후에 집어 치웠다.

가히 불구 인생이라고나 할까? 이런 내가 학자의 길을 말할 수 있겠는지? 자칫하면 어느 부분 자랑하는 추태를 보이지 않을런지 걱정스럽기도 하다.

지난 32년간의 나의 학자로서의 생활은 실로 파란만장의 그것이었다. 뼈를 깎는듯한 노력의 연속이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연구용 기구가 제대로 갖추어진 것도 아니고, 동물시험용 시설이 완비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연구를 수행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어떤 기계가 고장나면 고치는데만도 수삼개월이 걸려야 했고 잦은 정전이나 단수로 인하여 실험을 망가뜨리는 일은 그 얼마였던고. 정말 고생스럽고 고달픈 길이었다.

남이 이해하지 못할 때 느껴야하는 고독감을 극복할 줄 알아야 했고, 시샘을 하는 주위 사람의 눈살을 참을 줄도 알아야 했다. 길고 험한 자기와의 투쟁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어느 한해는 열심히 하고 어느 한해는 게으름을 피워서 되는 것이 아니라 30년을 하루같이 열심히 일해야 하는, 어떻게 보면 긴 마라톤과도 같은 것이 학문의 길이 아닐까? 이리하여 그동안 3백50여편의 학술논문을 국내외 학술지에 발표하였고, 76명의 석ㆍ박사학생을 배출했다. 굳이 공자의'인생3락'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부족한 나에게는 커다란 성과라 하지않을 수없다. 따지고 보면 제자들과 함께 쌓아 올린 금자탑이라 할 수 있다.

15권의 저서는 그 어느 것이나 나의 시력을 갉아먹지 않은 것이 없다. 그동안 30여회에 걸친 국제학술회의에의 참가는 우리 학문을 외국의 그것과 비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물론 우리 학문을 홍보하는 기회로 삼기도 했다.

또 1985년에 아세아ㆍ태평양 축산학회(AAAP)를 우리나라에서 개최했던 일이나 금년부터 영문으로 된 국제학술지인 아태(亞太)축산학회지를 우리나라에서 간행하게 된 것도 매우 보람있는 성과로 기억된다.

축산학자로서 스스로 고달픈 길을 걸어온 또 하나의 연유는 강의활동이다. 그렇게 대단했던 대학의 소요사태에도 불구하고 지난 30년동안 강의계획서에 나타난대로 강의를 마치지 않았던 학기가 없었던 것을 특별한 축복으로 안다. 내 강의를 들은 학생이면 누구나 재학시에는휴강이 없고 시험이 잦은 강의방법에 대하여 조금씩 불만을 토했다고 한다.

내가 가르치는 영양학과 사료학은 축산학의 기초분야이기 때문에 이것을 소홀히 하면 다른과목의 이해가 어려워진다. 더욱이 중요한 것은 우리졸업생의 50% 이상이 이 분야에 취업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학생을 가장 확실히 사랑하는 방법은 열심히 가르쳐서 많이 알고 졸업하게 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열심히 가르치고 부지런히 연구했다고 승진을 더 빨리한 일도 없고, 월급을 더 많이 받아본일도 없다. 더욱이 누가 알아주기를 바란 일도 결코 없다. 그저 후회없는 학자의 길을 소신대로 걸어왔을 뿐이다.

이제 백발이 성성해졌다. 그동안도 노상 공부를 해 왔지만 소원이 있다면 불꺼지지 않는 캠퍼스에서 공부나 실컷 하다가 인생을 마쳤으면 하는 것이다. 더 좋은 연구환경과 강의 분위기 속에서 후배교수들이 더욱 수준높은 논문을 발표하고 한층 알찬 강의를 할 수 있는 날이 속히 오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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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07월 과학동아 정보

  • 전민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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