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인우주비행계획까지 발표하여 우주개발 선진대열에 나선 중공의 우주개발 현황과 지도층 과학자들의 프로필을 살펴본다.
「통팡홍」의 멜러디가 세계에 흘렀다
1970년 4월24일 유라시아대륙의 중앙부에서 발사된 로킷이 은색으로 빛나는 둥근 물체를 인공위성궤도에 올려 놓았다. 무게 1백73kg인 이 위성은 궤도상에서 전세계를 향하여 모택동사상을 찬양하는 '동방홍'(東方紅)의 멜러디를 송신하여 전세계를 놀라게 했다.
자랑스러운듯이 흘러 나온 이 멜러디는 소련(1957년 10월), 미국(1958년 1월), 프랑스(1965년 11월), 일본(1970년 2월)에 이어 중공이 자력으로 인공위성을 발사한 5번째의 나라가 되었음을 전세계에 알린 것이었다.
일본이 최초로 인공위성을 발사하기 보다 불과 두달뒤였으므로 중공은 약간의 차이로 4번째 나라가 되지못한 것이다. 실제 최근에 밝혀진것이지만 중공은 바로 그 전년 11월에도 위성발사를 시도했었다. 중공이 일본을 앞설 가능성은 충분히 있었던 셈이다.
그로부터 18년. 중공의 우주개발은 독자적인 길을 꾸준히 걸어왔다.
지금까지 중공이 발사한 위성은 모두 21개다(일본은 39개).
우주비즈니스에 진출한 중공
중공의 우주개발이 앞서가는 분야가 있다. 위성발사의 상업화다. 다른나라의 위성을 유료로 발사해주는 상업활동을 활발히 벌여 이미 미국 스웨덴의 민간회사로부터 주문을 받아 놓고있다. 물론 미국 소련 유럽우주기구(ESA)에서도 이런 상업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그 수주경쟁은 다른 무역경쟁과 마찬가지로 치열함이 더해가고 있다.
중공의 로킷은 모두 자체기술로 개발한것이다. 같은 공산권이면서도 소련의 원조나 기술지원을 전혀 받지 않았다. 모택동이 부르짖은 '자력갱생'을 캐치프레이즈로 문자 그대로 스스로의 힘만으로 만들어낸 로킷이었다.
흔히 중공인의 가장 뛰어난 장기는 요리와 상업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스스로 만든 로킷이 실용화되었을때 그것을 상업에 응용하려고 한다해서 조금도 이상할것이 없다. 그렇게하여 지금 중공의 우주상업은 활발히 진전되고 있다.
일본을 앞선 액체수소 엔진
로킷의 기원은 11세기경의 중국 무기화전(火箭·포첸)에서 비롯되었다고 알려져있지만 중공에서는 지금도 로킷을 포첸이라고 한다.
중·소 대립이 노골화된 1960년경 중공은 현대의 포첸, 즉ICBM 개발에 착수했다.개발을 지도한 사람은 미국에서 학위를 받고 1940년대 미국에서 로킷개발 중심인물의 한사람으로 활약했던 '첸슈에센'(錢学森)박사였다.
물론 중공우주개발의 공적이 그 한사람만의 것은 아니다. 지도자격의 사람들 속에는 미국 소련 유럽 각국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
사진으로 본 이들의 모습은 첨단의 과학자라기보다 마치 어린이들을 좋아하는 시골 국민학교 교장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그런 사람들이 개발한 로킷에는 '장정'(長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서방측 여러나라에서는 이것을 직역하여 '롱 마치'(long march)라고 부르지만 중공에서는 외국용어용으로 장정(Chang Zheng)의 머릿글을 따서 CZ를 그이름으로 쓰고 있다.
CZ-1은 사정거리 7천km급의 초기의 ICBM을 전용한 것이다. 크기는 직경 2.25m, 중량 3백kg정도 였으며 저고도에 쏘아올린 성능이 좀 낮은 것이었다. CZ-1은 2개의 위성을 운반했을 뿐이지만 개량형인 CZ-1C가 서방측을 향한 상업로킷으로 각광을 받고 있다.
대형 3단 로킷을 완성
1971년에 두번째 위성을 쏘아 올린후 문화대혁명기의 혼란으로 세번째 발사까지는 4년 이상의 공백이 있었다. 그리고 1973~74년에는 미사일의 개발 조차도 정체되었다.
1975년에야 겨우 성공한 제3호위성 발사에는 '풍폭(Feng Bao)1호'(FB-1)이라는 신형의 2단식 로킷이 쓰였다. 이것은 미국의 ICBM,타이탄Ⅱ와 거의 같은 크기의 것이다.
FB-1을 개선하여 발사능력을 2.5t에서 3t으로 향상시킨 것이 CZ-2로 제 4호 위성이후 오늘날까지 쓰이고 있다. 그리고 FB-1은 그뒤 3회 쓰이고 끝이났다.
1984년의 제14호 위성발사에는 더욱 발전된 CZ-3이 사용되었다. 이것은 CZ-2를 3단식으로 만든것으로 능력면에서 보면 유럽우주기구(ESA)의 아리안Ⅰ과 같은 수준의 것으로 보인다.
CZ-3에서 새로 쓰인 제3단에는 액체수소엔진이 장비되었다. 액체연료는 발생 에너지가 크고 로킷에는 이상적이지만 섭씨 ―253도 이하라는 극저온이어서 다루기가 대단히 어렵다. 그러나 중공은 이런 난점을 빨리 극복하여 일본이 처음으로 액체연료 로킷을 발사한것 보다 약 2년을 앞섰다. 이런 점에서도 중공 로킷 기술수준의 높이를 엿볼수가 있을 것이다.
논 속에 있는 우주기지
중공에는 2개의 우주기지가 있다. 하나는 고비사막의 남쪽 감숙성서묘(甘肅省西廟)에 가까운 북위 40도25분, 동경 99도50분에 있다. 실크로드 부근으로 여기에서 서쪽으로 가면 돈황(敦煌), 옥문관(玉門關), 로브노르(Lob-Nor·신강 위그르 자치구 타림분지 속의 사막에 있는 소금호수)와 누란(樓蘭)에 이른다.
처음에는 미사일 실험장으로 개설되었으며 뒤에는 동풍(東風)기지라 불렀다. 서방측에서는 이 주변의 지명을 따서 쌍성자(双城子)기지라 부르고 있으나 중공에서는 서방측에 상업활동을 시작하면서 주천(酒泉)기지라는 이름을 쓰고 있다. 그 주천시는 이곳에서 1백50km 떨어져있다.
주천기지는 제1호 위성발사이래 계속하여 사용되고 있으나 정지위성 발사에는 대단히 불편한 곳이다. 정지위성 궤도는 적도 바로위에 있으므로 위도가 낮은곳에서 발사할수록 유리한 것이다.
그래서 1984년 부터 CZ-3의 발사에는 사천성서창(四川省西昌) 가까이에 있는 새로운 기지를 쓰게 되었다. 북위 28도, 동경 102도 부근으로 정지위성 발사에 휠씬 유리하게 되었다. 이 위치는 위도상 미국의 케이프 카내베랄과 거의 같다.
서방측의 위성발사에도 이 서창기지가 사용되므로 상업시책의 일환으로서 이 기지는 외국관계자나 기자들에게 적극적으로 공개하고 있다. 메마른 사막 가운데에 있는 주천기지와는 대조적으로 서창기지는 습지대 속에 있다.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은 천년이 넘는 오랜동안 변함없이 무소가 갈이질을 하고있는 논속에 최첨단의 우주시설이 여기 저기에 있는 광경에 놀라게 된다.
19개국 39개사와의 발사 상담
중공이 위성의 유료발사상담을 서방측에 공개한것은 1984년 4월 15회째의 위성발사를 성공한 직후였으나 처음에는 별로 반응이 없었다. 그때는 스페이스셔틀이나 ESA의 아리안도 순조로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1986년에 스페이스 셔틀에서 시작하여 델타로킷, 아리안으로 계속된 사고로 발사예정이 모두 허물어져 버렸다. 이렇게 되자 세계 각국의 위성통신이나 위성방송 업계에서 중공에 새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중공과 처음으로 발사계약을 체결한 것은 스웨덴의 통신사로 소형의 통신위성을 중공의 위성과 함께 싣게 되어있었다. 이어 미국의 3개회사가 잇달아 CZ-3에 의한 발사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이란과도 게약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중공은 이밖에도 브라질, 캐나다, 아르헨티나, 나이지리아 등 19개국의 39개회사와 상담을 벌이고 있다.
이 중에서 발사예정이 가장 빨랐던 것은 미국의 위성방송회사 도미니언사의 위성으로 1987년 12월에 발사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현재(1988년 4월) 발사는 실현되지 않고 있으며 도미니언사의 위성이 중공에 반입되었다는 정보도 없다. 이유는 분명하지 않으나 위성의 중공반입이 대공선권 수출통제조정위원회(Co-Com·미국 일본등 서방측 선진 15개국이 참가한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자본주의 국가로 부터의 수출을 통제하는 위원회. 본부는 파리)의 규정에 위반된다고하여 미국정부가 중지시켰다는 해석이 나돌고 있다. 그렇다면 중공 위성 발사 상업의 전도도 어려울것 같다.
손오공의 나라의 유인우주비행계획
87년8월에 발사된 제20호위성의 회수캡슐에는 프랑스 마투라사가 개발한 우주실험장치가 탑재되어 있었다. 무중력 환경에서의 담수단세포생물의 번식을 조사하는 실험으로 마투라사에서 중공에 유료로 발사를 의뢰한 것이다. 중공은 위성뿐만 아니라 이러한 우주실험장치의 유료발사도 서방측에 공개했다. 마투라사의 우주실험장치에 의한 실험결과가 좋으면 마투라사는 유럽에서의 중공 창구역할을 맡게되어 있다.
상업위성 발사를 제외하고는 중공의 우주개발은 실용분야에 중점을 두고있다. 1975년 11월의 제4호위성 이래 10개의 위성이 궤도에서 회수된 것이다. 이런 위성은 모두 지표를 촬영한 필름이 내장되어 있어 중공은 자원탐사용이라고 발표하고 있다. 이것은 군사목적도 겸한것임이 틀림없다. 중공에서는 제3호위성 이후 위성의 중량을 공표하지않고 있는데 이것도 군사적인 배려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랜새트와 같이 화상(畫像)을 궤도위에서 전송하는 방식의 자원탐사 위성도 개발되어있다. 또 극궤도를 도는 기상위성이나 정지기상위성도 개발중으로 극궤도위성은 1~2년 이내에 발사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통신위성에서는 2개의 정지통신시험위성(STW)을 사용하여 관제나 통신 실험을 했다. 국토가 넓고 인구가 분산되어 있는 중공에서는 통신위성이나 방송위성에 기대하는바가 크다. 개발도상국의 예와는 달리 중공에서는 텔리비전은 단순한 오락만이 아니고 국민계몽의 수단이며 국민통합에 도움이 되는 것이다. 이 텔리비전을 중공 전국에 보급시키는 방법은 방송위성에 의존할수 밖에 없을 것이다.
20세기 안에 셔틀도 발사
가끔 뉴스로 서방측에 알려지고 있는 중공의 유인우주비행계획은 어떤 상태일까.
지금까지 몇번인가 중공이 유인우주비행을 계획하고 있다는것이 보도되었고 중공에서도 이를 시사하는 단편적인 정보나 사진을 공표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보도가 있은 뒤에는 항상 중공당국 책임자의 부정적 발언이 있었다. 지금까지 밝혀진것은 연구기관에서 자체 추진한 연구내용 뿐이었던것 같다.
그렇지만 87년 말에 전하여진 바로는 이것이 사실인것 같다. 무엇보다도 국가 과학기술위원회 주임'손첸'(宋健)이 유인우주비행계획이 있다는것을 인정한것이다.
손첸에 의하면 1990년대 말경까지 우주스테이션과 연락용의 스페이스 셔틀을 발사한다는 야심적인 계획이 있는것 같다.
이를 뒷받침 하듯 장정3호의 몇배나 되는 능력의 대형 로킷개발구상도 밝혀지고 있다.
중국인들은 옛날에 어느 민족보다 먼저 화약을 사용한 무기인 화전을 만들어냈으며 또 '서유기'(西遊記)와 같은 전례가 없는 모험 설화를 만들어 냈다. 그 자손이 우주로 진출하여 도대체 무엇을 할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