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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푸트니크 충격은 나를 우주세계로…

노오현(盧五鉉·49)박사는 서울대 조선항공공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뉴욕대학에서 항공우주공학 박사학위를 받은 후 그곳에서 연구원으로 재직했다. 1973년 귀국하여 1년간 국방과학연구소의 책임연구원으로 있다가 1974년에 서울대로 옮겨 항공공학과 교수로 후학들을 양성중이다. 전공분야는 공기역학(Aerodynamics)이며 저서로는 <;최신 압축성 유체역학>; 등이 있다.

나는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 서당에서 한문 공부를 하고 있었다. 내게 한문을 가르치시던 훈장 선생님은 이웃 마을까지 알려진 박식한 분이었다. 한문 공부는 훈장 선생님이 읽는대로 그대로 따라서 읽고 외우는 것이었는데 나는 그것이 아주 질색이었다. 겉으로는 따라 외우는 척 했지만 언제나 눈과 마음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다섯 살때 일로 기억된다. 하루는 천자문의 '하늘 천, 따 지, 검을 현, 누루 황'을 훈장님께서 일부러 '하늘 천, 따 지, 검은 솥에 누룽지'로 선창하셨다. 얼른 그대로 똑같이 소리내어 외었더니 훈장님께서 내 머리를 툭 치면서 '바위야 뚫려라'라고 말씀했다. 너는 학문에는 무망하니 땅이나 파먹고 살라는 것이었다.

그때 내 인생에 새로운 전환기를 가져 온 해방을 맞게 되었다. 해방이 되자 개화의 물결이 시골까지 밀려 왔고, 그 결과 나는 국민학교에 들어가서 신(新)식 공부를 하게 되었다.

국민학교에서의 공부는 무조건 외우는 식이 아니었다. 그림 같은 것을 보고 문제가 뜻하는 바를 생각하여 답을 찾아내는 방식이었으니 나에게는 무척 재미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연히 열심히 공부하게 되었다. 이처럼 흥미를 가지고 6학년 전 과정을 끝마치게 되었는데, 졸업때 받은 통지표에는'장래가 유망함'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누구의 판단이 옳았는지? 그러나 훈장님이 내게 하신 그 말씀을 지금까지 깊이 마음에 새겨 두고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고 있다. 그것은 나의 능력과 욕망의 한계를 미리 암시하여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노오현 박사

●―키가 작았던 탓에 공학으로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읍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고등학교 진학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 당시는 시골에서 중학교에 진학하는 학생만도 몇명 되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행운이 뒤따랐다. 중학교 졸업을 한달여 앞두고 갑자기 서울로 유학(?)올 수 있는 기회가 생겨서 학업의 길을 잇게 되었던 것이다.

서울고등학교에 배짱 지원한 것이 운좋게 합격하였다.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낮에는 공부하고 저녁에는 상점에서 일을 하였다. 이를 테면 고학을 한 셈이었다.

2학년이 되자 학교에서 이과반과 문과반으로 나누어 반편성을 따로 하였다. 이때 한 선생님이 나를 가리키면서(그 당시 내 키가 작았던 탓으로 맨 앞에 서 있었다) 이과반 희망자는 내 위치를 기준으로 하여 줄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결국 그냥 그 자리에 서 있었던 것이 공학을 택하게 된 결정적 동기가 되었다. 지금 생각하면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같은 얘기라고나 할는지.

마침내 입학 원서를 써야 하는 매우 중요한 순간이 다가 왔다. 담임 선생님은 서울공대 기계공학과에 응시하라고 권했다. 나는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선생님이 추천해 주시는대로 입학원서를 제출했으나 그 결과는 낙방이었다. 자신의 의사나 의지와는 관계없이 철새처럼 인기를 따라 옮아 다닌 것이 패인이었다.

●―'피없는 진주만 공격'에 깜짝 놀라

낙방하고 시골 집에서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우연히 소련이 인류 역사상 최초로 인공위성 발사에 성공했다는 기사를 접하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스푸트니크충격'이라고 표현되는 이 기사를 읽게 된 것이 내 일생의 학문을 정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당시 시사만화에는 소련의 인공위성에서 보내오는 삐 삐 삐 신호소리에 잠이 깨어 어쩔줄 모르고 뛰는 코 큰 미국 아저씨가 등장했다. 소련의 인공위성 발사를 '피 없는 진주만 공격'이라고 아우성치는 미국 국민들의 모습도 그려졌다. 항공·우주분야의 과학 기술자를 하루 빨리 양성함과 동시에 강력한 로킷의 개발을 위한 집중적인 연구가 필요하다는 여론이 미국을 들끓게 하였다.

아뭏든 스푸트니크호의 성공은 내게도 큰 충격과 자극을 주었다. 항공우주분야의 과학자가 되고 싶은 강한 충동을 받은 것이다. 당시 한국의 항공우주산업의 장래를 예측하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전망도 불투명했다. 하지만 재수 일년 동안 고통속에서 내 스스로 정한 결심이었기에 아무런 두려움과 망설임이 없었다. 스스로 택하고 좋아서 간 길이기에 설령 지금까지 아무 것도 이룬게 없다 할지라도 한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이듬 해에 서울대 항공공학과(그 당시에는 조선·항공공학과)에 응시, 합격의 기쁨을 누렸다. 일단 입학은 했지만 6·25가 끝난지 얼마 안된 때라 체계적으로 공부하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또 4·19와 5·16을 치루었고, 사회혼란은 극도에 달했다.

이런 변혁기에 대학 4년을 보냈으니 어느 학기치고 강의가 제대로 진행된 적이 없었다. 따라서 교과서 한권을 끝까지 강의한 경우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그 당시에는 공학 서적은 원서뿐이어서 책을 구하기조차 어려웠다. 그래서 입학하기만 하면 졸업은 자동적으로 된다는 유행어가 생겼는지도 모른다.

●―유학길 비행기를 통해 비행원리 익혀

막상 졸업을 하고 나니 졸업후가 더 막막하게 느껴졌다. 그때만 해도 우리 나라의 공업수준이 전반적으로 낮았을뿐만 아니라 산업기반도 약하기 그지 없었다. 그래서 공과대학 졸업후에 할 수 있는 일도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기껏해야 공장에서 외국산 기계를 작동 지시서에 따라 움직이게 하거나, 작동을 감독하는 정도였다.

직접 설계에 참여할 수 있는 분야는 매우 간단한 기계에 불과했다. 지금처럼 연구 개발에 참여하는 것은 상상도 못할 떄였다. 더욱이 항공분야는 대한항공이 생겨서 정비기술자를 필요로 한 것 외에는 전공을 살려 들어갈만한 곳이 없었다.

마침내 미국에 유학갈 결심을 했다. 당시 항공공학과 교수로 계시던 한만섭박사님(현재 보잉 항공회사)과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막 끝내고 귀국하신 성기수 박사님(현재 과학기술원 시스템 공학센터 소장)은 보스턴 교외에 있는 탑쓰 대학교를 추천했다. 그런데 그 대학에는 항공공학과가 없어서 기계공학과에 원서를 제출하였더니 입학허가서에 동시에 장학금을 주겠다는 편지를 받았다. 이로써 꿈에만 그려보던 대망의 미국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다.

시골에서 논 세마지기를 팔아서 그 돈으로 항공기표를 샀다. 여기에다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바꾸어 주는 돈, 50달러가 나의 전 재산이었다. 비행기를 타고 보니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도 없지 않았지만 내가 탄 비행기의 동체에 눈길이 갔다. 대학에서 항공기의 뜨는 힘은 날개에서 발생한다는 것을 배웠기 때문에 이륙할 때의 날개를 자세히 주시하여 보았다. 그처럼 무거운 동체가 뜬다는 사실은 원리는 이해하고 있지만, 아직도 내게는 항상 불가사의처럼 여겨진다.

탑쓰대학원 기계공학과에서 미국 생활의 첫 학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때 가장 절박한 문제로 대두된 것이 언어 장벽이었다. 처음에는 교수님의 강의를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강의 줄거리를 근거로 교과서와 참고서적을 열심히 읽어서 보충하려고 했으므로 자연 잠자는 시간을 줄일 수 밖에 없었다. 하루에 4시간 정도 잤는지 모르겠다.

미국의 대학에서는 과목마다 강의계획을 미리 알려주고 있었다. 강의계획에 따라 강의가 진행됐고 계속해서 숙제를 내주었다. 숙제 결과는 철저하게 체크했으며 대개 3번 이상 시험을 치르도록 되어 있었다. 시험 내용은 철저하고 근본적인 물리적 이해를 토대로 합리적이면서 논리적인 이론 전개나 그 응용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국내에 있었을 때에는 공식만을 열심히 암기하여 두면 시험을 잘 치룰 수 있었는데…. 그래서 국내에서 잘 하던 학생이 미국에서는 실패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나는 T.A (Teacher Assistant)라는 장학금을 받았는데 학부 학생들의 실험을 도와주는 대가였다. 말이 잘 통하지 않으니 직접 실험을 도와 주지는 못했고, 실험 장치를 미리 준비하고 실험이 끝나면 실험기기들을 제 자리에 갖다 놓는 일을 한 것이다. 처음에는 무척 힘이 들었으나 여러 최신 기기들을 접할 수 있어서 나중에 석사 논문을 준비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슈퍼 컴퓨터도 해결 못하는 것에 도전

내가 탑쓰에서 석사 논문을 끝낼 무렵, 인간의 달 착륙 계획인 아폴로 프로그램이 거의 완성 단계에 있었다. 그래서 나는 원래 꿈대로 박사 과정은 항공우주공학과가 있는 대학으로 옮기기로 했다. 옮긴 곳은 뉴욕시에 소재한 뉴욕대학교의 항공우주공학과였다.

또 이곳에는 저명한 '안토니오 페리'교수가 재직하고 있었다. 나의 박사학위 논문심사를 맡았던 그는 초음속과 극초음속 공기역학 분야에서 세계적인 권위자였다. 나는 연구조교로 나사(NASA)로부터 지원받은 연구프로젝트에서 일하면서 논문을 썼다. 박사학위 논문은 유도탄이나 초음속 항공기의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원추 주위의 초음속 경계층류의 해석에 관한 연구였다.

초음속 또는 극(極)초음속 난류, 경계층류의 해석은 수학적으로 매우 복잡한 것이다. 게다가 방정식의 특징이 비선형이므로 정확한 공기 흐름에 대한 해석은 극히 난해한 분야에 속한다. 그래서 첨단의 슈퍼 컴퓨터로도 완전한 해답을 구하지 못하고 있을 정도다. 아마도 신의 비밀이 최후까지 보존된 자연 현상들 중의 하나가 아닐가?

나는 박사학위를 마치고 얼마간 뉴욕대학교 항공우주연구소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우주선과 같은, 지구 재돌입 비행체의 유동해석과 초음속 항공기의 충격파에 의한 '쾅'하는 소리현상에 관하여 연구하였다.

●―왜 항공우주공항이 첨단인가?

항공우주공학은 지구 대기권의 안팎을 안정하게 비행할 수 있는 비행체(항공기, 유도탄, 우주선 등)와 관련되는 물리적 원리를 탐구, 이를 실제 설계에 응용하는 공학이다. 역사가 짧은 항공공학은 1903년 라이트형제에 의해 출발했다. 하지만 당시의 기록은 비행시간 13초, 고도3~4m, 비행거리 40m에 불과한 것이었다.

현재에는 소리속도보다 3배 이상 빠른 초음속 항공기, 음속의 30배 이상이며 지구 대기권 내외를 넘나드는 우주왕복선에 이르고 있다. 1세기도 채 안된 짧은 기간동안 비행시간, 고도, 비행거리면에서 상상을 초월할 만큼 발달해 온 것이다.

이같은 혁신을 가져온 기술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공기역학분야에서는 고속비행에서 항력을 최소화하면서 양력(뜨는 힘)을 최대로 발생시킬 수 있는 임계익형과 같은 날개를 개발했다. 구조분야에서는 가볍고도 높은 강도를 갖는 특수 합금을 만들었다. 또 수천도의 고온에도 견딜 수 있는 특수 세라믹재료와 하니콤 구조개발에 성공했다.

한편 추진 기관에 있어서의 발전도 괄목할만 하다. 연료소비율과 소음이 적은 터보팬 엔진, 제트엔진과 프로펠러엔진을 결합한 프로팬 엔진이 등장했다. 그리고 항공우주선과 같은 극초음속 항공기(소리속도의 25배 빠르기)에 장착하게 될 제트엔진과 로킷엔진을 결합한 복합엔진 등이 이미 사용되고 있거나 개발중에 있다.

항법 조종기술 분야에서는 레이저의 도플라 효과를 이용한 레이저 관성항법장치를 고안, 비행오차를 극소화시키는데 기여했다. 또 컴퓨터에 의한 전기적 신호로서 비행운동을 제어 조종할 수 있는 플라이-바이-와이어(fly-by-wire) 등을 신기술로 꼽을 수 있다.

그리고 오늘날 널리 알려진 컴퓨터에 의한 설계 및 제작(CAD/CAM)이 제일 먼저 항공우주공업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여기서 개발된 기술이 현재 다른 분야에도 널리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항공우주공업의 대상인 항공기와 우주선은 공학적 시스팀인 동시에 경제적 시스팀이다. 따라서 항공우주공학은 기초과학 및 공학은 물론이고, 사회 인문 등의 학문과도 밀접히 연계돼 있다. 이처럼 항공공학이 여러 학문의 집합체이기 때문에 여타의 공업과는 다른 특징들을 갖는다.

항공우주공업은 노동 및 기술집약적인 공업이다. 또 산업구조의 선진화를 통한 무역구조의 향상에 필수적인 공업이다. 동시에 연구개발형 공업으로서 한 국가의 전반적인 기술 수준의 향상에 선도적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공업이다. 뿐만 아니라 국방력의 척도이기도 하며, 신흥공업국과 선진국간의 적절한 수평 분업으로 세계 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 공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이유에 의해 신흥공업국인 브라질, 이스라엘, 싱가포르, 대만, 인도네시아, 인도 같은 나라들은 국가적 차원에서 항공우주산업을 중점 지원하고 있다.

우리 정부에서도 고급두뇌를 십분 이용하는 항공우주산업을 중점 육성할 필요성을 인식, 행정 지원을 위한 관계법 (항공우주산업개발촉진법)을 제정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민간 기업체들도 기술집약적이면서도 노동집약적인 항공우주산업에 차츰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국내유수의 대기업인 삼성, 대우, 한진그룹 등이 적극 참여하고 있는 상황이다.

머지않아 우리나라도 막대한 세계 항공 우주 시장의 주요 수출국으로 진입해야 함은 물론이다. 아울러 우리나라 지형조건에 맞는 한국형 전투기를 우리나라 기술진에 의하여 직접 설계 제작할 날도 멀지 않다고 본다.

●―협동력이 뛰어난 사람을 요구

항공우주공학자는 비행체 시스팀에 대한 근본적인 설계는 물론 신뢰성과 안정성에 대한 최종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 따라서 이 학문을 전공하고자 하는 사람은 책임감이 강하고 신뢰성과 리더쉽을 갖추어야 한다. 동시에 치밀하고 조직적인 두뇌를 가져야함은 두말할 나위없다. 또 모든 물리적인 현상과 그 변화에 흥미와 관심을 가지고 이를 탐구하려는 진취적인 정신이 있어야 한다. 더 욕심을 낸다면 수학에 대한 적성과 지식이다. 공과대학내의 다른 학과들과 견주어볼 때, 항공공학이 한층 수준 높은 수학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주지하듯이 항공기나 우주비행체는 뛰어난 한 사람의 노력과 지식만으로 제작되는 것이 아니다. 여러 분야의 사람들이 모여서 자신의 전문 분야의 특성과 지식을 모아 토론하고 협조하며 때로는 양보하여야 마침내 우수한 작품이 만들어진다. 따라서 항공과 우주를 전공하고자 하는 사람은 독선적이지 않아야 한다. 자기의 능력과 특성을 살리되 다른 사람들과 협조 할 줄 알며 함께 모여서 하나의 공동 목표를 향해 나갈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현재 항공공학을 전공한 졸업생들은 대개 국내 항공회사의 정비, 설계, 제작, 가공 등의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또한 졸업생들 가운데는 국방과학연구소, 과학기술원, 한국기계연구소, 천문우주과학연구소 등에서 연구하고 있는 사람도 많다. 해외로 유학하여 선진국의 항공우주분야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런가 하면 일부 졸업생들은 항공분야와 가까운 기계공업과 자동차공업의 기업체에 취업해 있다.

●―인간발전의 열쇠를 쥔 우주정거장

향후 20여년간 계속될 것으로 보이는 항공분야의 궁극적인 목표는 항공우주선(Aerospace Place)의 개발이다. 항공우주선은 일명 '오리엔트 특급'이라고도 불리워지는데, 이착륙은 항공기와 같은 방식으로 하고 대기권 밖에서는 우주선과 같이 비행하게 되어 있다. 비행 속도는 음속의 25배 정도이며 뉴욕과 동경간 비행에 약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될 예정이다.

이렇게 되면 실질적으로 지구가 일일 생활권으로 축소되며, 세계여행이 지금의 서울―부산간의 여행보다 편리하고 간단하게 될 것이다. 이와 비슷한 계획이 구체화된 국가들로서는 프랑스를 중심으로한 EC우주기구와 일본이 있다.

우주분야에서는 우주정거장 건설과 개방세계 개발이 활발하게 진행될 것이다. 우주정거장 건설은 이미 1984년에 미국 정부에 의하여 확정된 프로그램으로 1990년중반 건설 완료를 목표로 착실히 기반을 다져가고 있다.

우주정거장은 무중력상태의 안정된 연구 분위기속에서 새로운 세계로의 지혜와 기술과 상상력을 넓히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아울어 아이디어를 창출하고 창의력을 키울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결국 21세기에는 방대한 규모의 우주정거장이 건설되어 주거, 연구, 생산활동에 이용될 가능성이 높다. 회전에 의한 원심력을 발생시켜 지구와 똑같은 인공중력을 갖게 되어, 지구와 하등 차이가 없는 생활조건이 마련될 것이다. 이렇게 하여 지구환경의 개방 즉 우주로 향한 개방세계가 개발될 게 분명하다. 아마도 지금은 꿈같은 얘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항공우주공학의 발달 속도로 볼 때 21세기에는 꿈들이 현실로 나타날 것이 확신된다. 왜냐하면 이 길이 인간의 발전을 위한 유일한 길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1988년 06월 과학동아 정보

  • 노오현 교수
  • 사진

    김광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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