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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시계에서 불시계까지 시계의 발달 시계의 발달①

시간을 재려는 인류의 노력은 어떤 발자취를 남겼을까. 이번 호에는 그 전반부로 해시계에서 기계시계까지를 알아본다.

오늘 지구상에 있는 모든 시계가 갑자기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시간이 정해준 공통된 규율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거대한 조직체인 현대사회는 갑자기 혼란에 빠지고, 간단하게 처리되던 일들이 아주 복잡해지는가 하면 적어도 시간에 있어서만큼은 인류의 역사가 어린 아이에서부터 다시 시작해야할 상황에 직면할지도 모른다.

학교도 직장도 또 가정에서의 모든 생활, 개인의 작업이건 공동의 작업이건, 작은 일에서부터 큰 일에 이르기까지 사회를 통일적으로 움직이게 하던 기준이 일거에 사라져버렸으니 말이다.

물론 이러한 경우야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우리는 거꾸로 이러한 추리를 통해 '시계'의 중요성, 그에 투여되어온 인류 노동의 고귀함을 쉽게 절감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마치 어머니의 존재를 잊고 지내던 어느날 어머니가 먼 여행을 떠났을 때 느끼게 되는 것과 흡사하리라.

우리의 하루하루의 삶 속에서 가장 가까이 일상과 결부되어 있으면서도 우리의 관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던 부분, 밀접하면서도 또한 그렇게 때문에 그 중요성을 쉽게 간과해 온 영역의 하나가 바로 '시계'가 아닐까?

우리의 무디어진 일상에 대한 관심을 두드려 일깨워 보자. 시계발달에 얽힌 뒷 얘기는 '달력의 역사'에 이어 인류의 '시간에 대한 싸움의 역사'를 가리키고 있다. 이것은 인류에 자연에 대한 지배의 역사, 인간사회를 통일시키고 발전시키려는 인간 요구에 기초한 싸움의 역사이다. '시계발달사'로의 여행을 시작해보자.

●-그림자로 재는 태양의 시간

모든 과학의 역사가 그러했듯이, 시계의 발명도 일하는 자의 필요와 요구에 따라 진행돼왔다. 그러나 계절의 달력이 이 필요를 직접적으로 충족시키는 소박하고 느슨한 발견이었다면, 시계는 보다 정밀하게 세분화된 시간의 공통화를 요구했던 데서부터 비롯된다. 그것은 하루를 보다 정밀하게 측정하려는 요구에 관련된 것이었다.

인간의 일상생활은 너무나도 구체적이어서 계절의 절기 등을 구분하는 것만으로는 규칙적인 삶들을 보다 정확하게 묶어내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일하는 동료들과 알차게 하루의 삶을 공동으로 계획하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하루를 세밀하게 구분하는 것이 필요했다. 인간은 바로 이러한 필요에 따라 보다 정밀한 시간측정으로 먼길을 떠났던 것이다.

물체의 움직임은 '변화'를 의미한다. 사람들은 변화하는 자연적인 물체에 자신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물 해 달 모래 등의 변화는 시간 측정의 유용한 도구가 되었다.

해시계는 다른 모든 것에 앞서 '관찰의 용이함'이라는 이점을 지닌데서 최초의 시계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낮은 자연에 대해 의식적인 행위를 가하는 즉 노동하는 인류에게는 밤보다 훨씬 유리한 환경이었다. 빛이 있는 시간은 곧 노동의 시간이었던 것이다. 아울러 인류를 기아로부터 해방시켜 주고 그 자신을 재생산시켜줄 기본적인 원동력(식량)을 찾아내 줄 희망의 시간이었다.

인류는 태양빛으로 인해 생겨난 나무의 그늘에서 또는 누군가가 세워둔 작은 기둥의 그림자에서 해시계의 첫 발명의 아이디어를 얻었던듯하다. 나무 그늘은 해의 움직임의 변화에 따라 그 길이를 달리했다. 해가 머리 바로 위에 있을 때 그늘은 아주 짧았고,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갈수록 그늘은 길어졌다. 나무그늘, 서있는 사람의 그림자, 땅을 향해 수직으로 선 기둥들의 그림자는 태양의 시간을 재고 있었다.

●-해시계가 정한 로마의 출근시간

그림자가 있는 것이면 모두 태양의 시간을 잴 수 있다는 사실은 단순하지만 놀라왔다. 사람들은 이를 인용해 그림자 시계 즉 해시계를 만드는데 열중했다.

해시계는 그 정확성보다는 장치와 사용 그리고 측정의 용이성 때문에 16세기경까지 수세기에 걸쳐 세계적인 시간측정기구로 사용되었다. 원시사회에서는 단순히 기둥의 그림자를 이용한 기둥시계만을 사용했지만, 고대사회로 접어들면서 노예노동과 이웃 공동체사회에서 약탈한 물질을 기반으로 보다 복잡하고 풍부하며 거대한 제국사회가 생겨나면서 해시계를 정밀화하려는 노력도 배가되었다.

기원전 1500년 고대 이집트의 토마스3세 때의 유적은 기둥의 그림자를 발전시켜 이를 정밀화하고자 했던 예를 보여준다. 이 장치는 한 자 가량의 T자형 수평봉을 통해 그림자를 측정했는데, 아침 이른시간이나 오후 늦은 시간이면 그림자가 너무 길어져서 눈금으로 표시된 영역만 가지고는 제대로 그 시간을 측정하기 곤란하였다.

기하학에 능통했던 그리스인들은 해시계 구상에서 더 많은 진보를 이룩했다. 기원전 1세기경 그리스인 공공건축가 '비트루 비우스'(Vitru Vius)는 팔각탑 해시계를 고안했다. 팔각탑 위의 각각의 여덟방향은 바람(Wind)의 방향을 상징했으며 각각의 표면에는 해시계가 장치되어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A.M.(Ante Meridiem)과 P.M.(Post Meridiem)이라는 말은 로마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기원전 로마인들은 하루를 두 부분 즉 '정오 전'과 '정오 후'로 나누었다. 이에 따라 집정관의 조수가 태양이 정오를 지날 때 이를 통지하고 법률가들이 정오 전에 궁전에 나와야한다는 규정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요즈음으로 치면 출근시간에 해당하는 규정이었다.

이후 하루의 두 부분을 각각 반으로 나눠,이른 아침(mane)과 오전(ante meridiem), 오후(de meridie)와 저녁(supre)으로 규정했고 여타의 세분화된 시간들은 시실리의 카나타로부터 가져왔던 해시계에 따라 '임시의 시간'으로 사용했다. 이것은 기원전 164년 감찰관 '마르시우스 필립푸스'(Marcius Philppus)에 의해 로마인의 생활에 적합한 것으로 변형되면서 보다 정교하게 발전해가게 된다.

그러나 해시계가 갖는 보편적인 약점은 해시계 자체만으로는 인류의 보다 정밀하고 보편적인 시간측정이 어렵다는 점이었다. 빛의 변화와 그것의 대립되는 성질로서의 그림자를 이용한 시간측정은 때때로 많은 어려움과 한계에 부딪쳐야만 했다. 가령 밤이나 흐린 날, 눈이나 비가 오는 날에는 시간측정이 불가능했다.

어둠은 인류에게 많은 곤란함을 가져다주는 것이기도 했지만 해시계의 한계를 가르쳐주는 선생이기도 했다. 해가 뜨지 않는 밤에 해가 뜨게 해서 시간을 시간을 측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람들은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이 어둠의 시간을 또한 잴 수 있을까?

●-밤의 시간을 재는 방법

해의 변화에 주목했던 사람들은 태양의 노예상태로부터 탈출하는 그 첫번째 계기를 '변화'라는 일반성에서 찾아내기 시작했다.

모든 움직이는 것은 그 '변화'를 측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간의 흐름을 알려주었다. 물이나 모래의 흐름 또는 양초가 타는 동안의 변화로부터 시간의 흐름을 측정할 수 있었는가 하면 램프의 기름 소모량으로도 시간을 측정할 수 있었다. 이것들은 인간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태양보다 훨씬 다루기 쉬운 용구였다. 더우기 이 용구들은 해시계의 정밀한 사용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어둠의 시간을 재는데 최초로 도입된 것은 '물'이었다. 물은 '흐름'을 알려주는 두번째의 신이었던 것이다.

흐르는 매체인 물은 아주 작은 그릇에도 쉽게 잡아넣을 수 있는가 하면 낮과 밤에 걸쳐 빨리 또는 천천히 흐르게 할 수도 있었다. 사람들은 그 흐름을 규칙적이고 일정한 단위들로 나누어 측정했다. 이제 해의 변덕스러움을 벗어나 보다 보편적인 시계가 태어났다. 물은 적도나 툰드라, 겨울이나 여름, 밤이나 낮을 가리지 않고 똑같이 흐르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8세기 초 추시계의 정교함이 등장하기 까지 수세기 동안 어둠의 시간을 재는데서 출발했던 물시계는 낮과 밤에 걸쳐 인류의 매일매일의 삶을 통제했다.

과학이 발달했던 고대 이집트에서는 해시계가 사용된지 5백년 만에 물시계가 등장했다. 이집트인들의 배움의 신, 측정의 신, 물의 유출과 유입을 관장했던 신 '토트'(Thoth)는 물시계의 모델격이었다. 유출형 물시계는 물이 떨어지는 바닥근처에 구멍이 하나 있고 안쪽에 눈금이 기록되어 있는 석고그릇이다. 물이 줄어듬에 따라 안쪽 수평면은 한 표시로부터 다음표시로 내려가 시간의 경과가 측정된다. 이보다 뒤에 발명된 유입형은 그릇 속의 물이 올라가는 것이지만 유출형만큼 널리 사용되지는 않았다.

어떤 기구든 자주 사용되면 그것이 지닌 결함이 쉽게 드러나는 만큼 보완도 빠른 법이다. 유출형 물시계도 예외는 아니었다. 한 예로 밑이 평평한 그릇일 경우, 시간이 지나 물이 바닥에 가까와질수록 압력의 차이가 발생한다. 그 결과 처음의 물의 속도가 그대로 유지될 수 없었다. 궁리 끝에 이집트인들은 평평한 그릇대신에 밑으로 갈수록 좁아지는 그릇을 사용했다. 그러면 물이 줄어도 물이 더 작고 좁은 곳으로 집중됨에 따라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 그리스 법정의 물시계

시민사회를 형성하고 있었던 고대 그리스의 법정에는 어김없이 물시계가 있었다. 아테네 궁전의 법정에 있는 시계들은 약 6분간 흐르도록 장치되어 있었다. 권리의식을 존중했던 말많고 똑똑한 그리스인들에게 변론의 시간을 제약하기 위해 고안된 이 규정을 가장 유효적절하게 파고들어 이용했던 재미있는 예가 있다.

'데모스테네스'(Demosthenes)는 변론의 시간을 제약하는 데만 이 규정이 해당된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법정연설에서 종종 법률문안이나 조서를 읽는 동안에는 물의 흐름을 멈춰줄 것을 요구했다. 요구는 정당했기 때문에 받아들여졌다. 그래서 그의 연설시간은 항상 남아돌았다고 한다.

처음에는 안개낀 날이라든가 눈·비가오는 날 혹은 밤에만 물시계를 사용하기는 로마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로마인들에게 이 시계의 사용상의 편리함과 시간측정의 정확성이 인지되면서 이들의 생활에도 필수적이고 보편적인 대중적 시계로서 물시계가 자리잡아나갔다.

근대에 접어들기 이전 그 장구한 세월에 걸친 시계의 역사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은 무엇보다도 모래시계로서 아주 짧고 고정된 간격을 재는 데 실용적이었다. 물론 모래는 물보다 유동적이지 않다는 점 때문에 초기에는 인류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어느날 사람들은 물이 어는 기후에서도 모래는 흐른다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모래를 어떻게 사용하면 보다 정확할지를 알 수 없었던 당시로서는 용도를 놓고 많은 혼란을 겪기도 했다.

하루의 시간 전부를 재기 위해 모래의 흐름을 이용했을 때, 프랑스의 샤를르 대제는 그것을 12시간에 단 한번만 돌리면 되도록 시계를 크게 만들 것을 명령했다. 시계가 작으면 모래의 마지막 한알이 떨어지는 정확한 순간에 자주 돌려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큰 시계의 불합리성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시도를 그만두게 했다. 그러나 모래시계는 어떤 것으로도 측정하기 힘든 가장 짧은 간격을 재는 데 있어 물시계보다 훨씬 유용했다.


짧은 간견 재는데 유리한 모래시계


●- 짧은 간격 재는데 유리한 모래시계

1483년 영국에서는 하원의 투표시간을 알리는 벨을 울릴 때 2분짜리 모래시계를 썼다. 또 채석공들은 그들의 노동시간을 재기 위해, 교수들은 강의 시간을 재기위해 이를 널리 사용했다. 17세기경 모래시계는 이미 부엌에서 짧은 간격을 재는 데 사용되고 있었다.

16세기 이후에는 배의 속도를 재는데 모래시계가 사용되기도 했다. 선원들은 출항을 할 때면 배 말미에 밧줄을 묶고 밧줄 끝의 통나무 조각을 물속으로 던졌다. 배와 통나무 조각을 연결하는 밧줄은 일곱 '길' 간격으로 매듭이 지어져 있었다. 작은 모래시계가 30분을 잴 동안 물위로 드러나는 매듭의 수를 센다. 만약 매듭 5개가 30분동안 통과되었다면, 그 배는 5노트의 속도로 가는 셈이었다. 19세기까지도 범선들이 여전히 '통나무를 던졌던 것'은 매시간 속도의 진행을 알기 위해서였다.

이렇듯 다방면에 쓰였던 모래시계도 밤시간을 재는 데는 인기가 없었다. 시계를 자주 돌려야 하는 불편함 때문이었다. 때때로 이 문제를 풀기 위한 수단으로서 사람들은 조명장치와 시계를 결합하고자 했다. 수세기 동안, 밤을 밝히면서 또한 밤에 시간을 잴 수 있는 '불'을 사용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발명품들은 실용적이지 못했다. 그것들은 모래시계처럼 짧고 고정된 단위들을 측정할 수는 있었지만, 비용이 많이 들고 때때로 위험스럽기까지 했으며 낮시간에는 널리 사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 불을 사용한 시간측정

그러나 불을 사용하여 시간을 재려는 인류의 노력은 많은 발명과 발견을 낳아왔다. 옛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전설에 따르면 유명한 양초시계는 독실한 신자 알프레드 대왕을 돕기위해 구상되었다고 전해진다. 그가 실권했던 시절, 그는 만약 그의 왕국이 재건된다면 신에게 봉사하기 위해 하루의 1/3을 바치리라고 맹세했었다. 본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이 맹세를 지키기 위해 양초시계를 만들 것을 명령했다.

이에따라 왁스로 30cm(12인치) 짜리 양초 6개가 만들어졌다. 양초에는 1인치마다 각각 표시가 되어 짧은 단위를 재는 기능도 겸하게 되어 있었으며, 각각의 양초는 4시간씩 탈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6개의 초들은 차례로 돌아가면서 빛났고 마지막 6번째 초가 다 탔을 때는 24시간이 지났다. 그러나 알프레드 대왕이 약속대로 매일 두 개의 초길이 만큼은 종교적 의무에 충실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양초나 램프기름을 사용할 여유를 가졌던 프랑스의 챨스 5세와 스페인의 필립 1세가 시계램프를 실험했던 이후, 밀라노의 의사 '지로라모 카르다모'(Girolamo Cardamo)는 실용적인 휴대용 시계램프를 발명했다. 일정한 기름의 흐름을 빨아들이게 하기 위해 진공의 원리를 이용해서 기름통에 기름이 공급되는 장치를 발명했던 것이다. 카르다모의 램프는 18세기말까지 편리하고 대중적인 조명장치로 공급되기도 했다.

시간을 재기위해 불을 사용한 예에서 한국 중국 일본은 꽤 다른 경향을 보였다. 향을 피우는 관습은 그들에게 소박하고 아름다운 장치들을 강구하는 실마리를 주었다. 정교한 향로속에서 허공으로 끝없이 기다란 자욱을 뿌리며 타들어가는 향은 그 그윽한 향내와 함께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

시간은 향불이 타들어가면서 가리키는 향로의 표시된 지점에 의해 측정된다. 가장 세분화된 것은 1073년 중국에서 발명된 1백등급으로 표시된 향로였다. 가뭄이면 우물들이 말라버려 전통적인 물시계를 사용할 수 없었을 때, 중국인들은 그들의 풍속으로부터 '향시계'라는 새로운 지혜를 얻었던 것이다. 중국의 나중 세대는 계절에 따라 변하는 임시적인 시간들 속에서 보다 일반적이고 정교하게 시간을 측정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이들은 불시계를 착안했고 이러한 시도에 대해 향시계는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며 이들 세대를 격려했다.

가장 쉽게 관찰할 수 있고 또 사용할 수 있었던 '해시계'에서 출발했던 시계발명의 역사, 시간을 더욱 정확하게 사용하려는 인류의 끊임없는 요구는 물시계, 모래시계를 비롯하여 불시계의 발명과 사용으로 발전해 왔다. 각 시대 각 나라마다 전통과 생산력 발전의 정도에 따라 시계의 내용과 형태는 달랐지만, 항상 '일보의 전진'은 이전의 발견을 토양으로 한 것이었다.

전(前) 근대사회의 시계발명은 근대사회의 '기계시계'를 낳는 토양이 되었다. 물론 기계의 발달이 가져다 준 성과와 여타의 과학발전에 힘입어 시계발명의 지혜는 새로운 진보의 길로 접어들게 될 것이다. 시계는 정교화되고 간편하게 되었을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활동공간 깊숙히 자리잡게 되었다.

과거로부터 축적되어 온 시계발명의 역사를 오늘 우리의 손목 위로 옮겨 놓게 되기까지 근대사회는 어떤 발전의 과정을 거쳐간것일까? 근대 '추시계'의 발명은 시계의 역사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며, 근대 시계발명사 속에는 또 어떤 얘기들이 숨어있을까?

다음 호에는 근대사회를 향했던 우리의 발걸음을 더듬어 보기로 한다.

1988년 03월 과학동아 정보

  • 동아일보사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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