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도 노벨 의학·생리학상 수상자로 미국 매서추세츠공대(MIT)교수인 일본과학자 '도네가와 스스무'(49세)를 선정했다는 발표가 나왔을 때 전문가들 사이의 반응은 뜻밖에도 조용했다. 1976년이래 3년간에 걸쳐 발표된 그의 면역에 관한 새로운 이론은 면역학분야에 하나의 혁명적인 업적이었다. 학계에서는 오히려 수상이 '뒤늦은 감'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상에 묻혀 지샌 10년간
도네가와는 이보다 앞선 지난 10년간, 수상의 퍼레이드속에서 지내다 시피 했다. 1978년의 막스 크로에타상(스위스)을 시작으로 18년에는 서독의 '아베리란드 슈타이너'상과 일본의 유전학대상, 82년에는 일본의 아사히상과 미국의 호로비츠상, 83년에는 일본의 문화공로상과 캐나다의가드너상 그리고 미국의 '모쉬 마티아'상, 84년에는 일본의 문화훈장, 86년에는 미국의 브리스톨 마이어즈상과 서독의 '코흐'상을 받았으며 87년 노벨상 수상자로 결정되기 한달전인 9월에는 노벨상의 최종관문이라고도 하는 권위있는 '라스카'상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당사자인 도네가와는 그렇게 기대를 걸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3년전인 1984년에 쾰러, 밀슈타인, 야네등 3명이 면역학분야의 업적으로 노벨 의학·생리학상을 받았기 때문에 당분간은 면역학의차례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더우기 단독수상이라는 소식을 들었을때 믿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도네가와는 "과학자란 운이 따라야 하는데 그런 점에서 나는 매우 운이 좋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의 말대로 라면 그는 노벨상을 탈 수 있는 행운의 인생역정을 걸어 왔다.
1939년 일본 오사카의 '시키시마'방적회사에 근무하는 쿄도대출신 엘리트 엔지니어의 차남으로 태어난 도네가와는 어린시절을 오사카에서 지냈으나 부친의 전근으로 도야마현과 에히메현등 지방에서 국민학교와 중학시절을 보냈다. 중학3년때 두살위인 형의 뒤를 따라 도쿄에 나와 숙부집에서 하숙하면서 대학진학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명문 히비야고교를 나왔으나 대학입학시험에 낙방하여 재수생이 되었다. 그런데 일본의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의 한사람인 '에자키'도 구제의 중학입학시험에 낙방한 경험이 있다.
●―「오페론」설에 감동
그는 해마다 도쿄대학에 가장 많은 입학생을 내는 히비야고교 출신이면서도 쿄도대학을 택한 이유를 '확실하게 들어갈수 있는 곳을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처음에는 고교시절부터 막연하게 품고 있던 유기화학에 대한 흥미에서 이학부 화학교실에 적을 두었으나 진작 들어 와 보니 유기화학은 '완성된 학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꿈이없는 학문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세상모르는 철부지의 어리석은 선택이었다고 스스로 꾸짖는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하루는 야마다라는 연구원으로부터 1961년 자코브모노(1965년 노벨 의학생리학상 수상)가 제창한 오페론(operon : 유전자의 형질발현에 관한 유전단위)설을 듣고 몇편의 논문을 읽고 나서 그 정연한 논리에 흡사 일급 추리소설과 같은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1962년 당시 쿄도대학 바이러스연구소 교수였으며 '일본분자생물학의 선구자'로서 이름을 떨치던 '와타나베'교수의 핵산에 관한 일련의 특강을 듣게 된 것을 계기로 분자생물학을 전공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는 천재형이라기 보다는 노력형에 가깝다. 대학시절의 그의 동급생이었던 '사사키'교수는 "주어진 테마는 강의와 실험을 통해 납득이 갈때까지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고 회상하고 있다.
1963년 쿄도대학 바이러스연구소의 대학원생이 되었으나 5월에 와타나베교수가 게이오대학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미국유학을 권했다. 그는 언젠가는 미국에 가고 싶다는 생각은 했으나 그렇게 일찍 갈수 있었던 것은 은사가 길을 터 준 덕이었다. "20대전반에 미국에 가게 된것은 무척 행운이었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같은 해 9월 미국 캘리포니아대학(샌디아고)대학원에 들어 갔다.
●―이민법이 준 행운
캘리포니아 대학에서는 히야시교실에서 5년간 있으면서 연구 방법을 배웠다. 1970년 박사 학위를 받은 도네가와는 달베코박사(1975년 노벨의학생리학상수상)의 쇼크연구소에 들어가 암 바이러스연구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달베코는 바이러스학자이지만 쇼크연구소에 오기 전에는 캘리포니어공대에 있었다. 그곳에서 분자생물학의 창시자인 델뷔리크(1969년 노벨 의학생리학상 수상)의 영향을 받은 달베코는 분자생물학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유학비자로 미국에 온 도네가와는 일단 학업이 끝난 뒤에는 미국 이민법에 따라 미국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이것은 그를 노벨상으로 향하는 궤도로 진입시키는 기회를 제공했다. 도네가와는 처음에는 캐나다로 가 볼까도 했으나 달베코가 "앞으로 면역분야가 재미 있을 같다" 고 권하면서 스위스의 바젤연구소를 소개해 준 것이다.
마침 유전자조환법이 개발된 무렵이어서 달베코는 분자생물학의 방법을 면역현상에도 사용할 수 있는 시대가 왔다는 대국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추세는 종래 박테리아를 대상으로 하던 분자생물학이 유전자조환법의 개발로 고등생물의 유전자를 해석할 수도 있게 되고 발생학이나 암연구에도 사용하게된 것이다.
1971년 면역학에서는 세계최고수준을 걷고 있던 스위스 바젤연구소에 입소하여 연구원이 된다. 그런데 바젤연구소는 계급이 없고 50명의 연구원이 모두가 멤버라는 직함을 갖고 있었다. 당초 2년간 계약으로 입소한 도네가와는 해마다 계약을 갱신했으나 언제 쫓겨 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몹시 불안했다. 또 분자생물학이 전공이어서 면역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많지 않은 그는 귀한 존재가 될 수 없었다. 다만 달베코의 명성덕에 그의 제자로서 인정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차츰차츰 일의 성과가 오르면서 마지막 몇해동안은 7-8자리밖에 없는 퍼머넨트 멤버가 되하다.
●―노벨상을 타게한 연구업적
면역에 대해서는 생소한 편이었던 도네가와는 면역이 당면한 문제점은 무엇이며 해결의 가능성이 있는 문제는 어떤 것인가를 우선 찾아내는데 애를 먹었다.
면역의 특징은 다양한 병원균(항원)에 대해 다양하게 반응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이 경우 반응이라는 뜻은 분자와 분자가 화학반응을 한다는 것이며 외부에서 친입하는 병원균(분자)와 항체(분자)가 반응을 한다. 흡사 열쇠구멍의 관계와 같이 이때 병원균의 종류가 다르면 항체구조도 이와 맞지 않으면 반응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병원균의 종류가 매우 많다는 것은 바꿔 말해서 우리 고등생물의 신체가 다양한 항체를 만들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 된다. 예컨대 박테리아의 구조를 인공적으로 바꿔 종래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던 박테리아를 만들어서 침입시키면 면역반응이 일어난다.
항체는 단백질이며 단백질을 만드는 청사진이 유전자이므로 유전자 청사진에 따라 단백질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항체의 종류가 다르다는 것은 단백질의 종류가 다르다는 것이며 다시 단백질의 종류가 다르다는 것은 청사진인 유전자의 종류가 다르다는 뜻이 된다. 예컨대 1억개의 항체를 만들 능력이 있다는 것은 당연히 1억개의 유전자가 필요하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인간이나 마우스등 고등동물이 갖고 있는 유전자의 수는 정해져있고 우리의세포는 수만개의 유전자밖에 만들 수 없다. 그렇다면 수만개 밖에 없는 유전자가 어떻게 1억개의 항체를 만들 수 있을까? 이 수수께끼는 오랫동안 설명할 수가 없었다.
도네가와는 마우스의 유전자를 해석한 결과 항체유전자와 항체와의 관계는 종래 과학자들이 받아 들였던 원리와는 다르다는 사실을 밝혀 냈다. 종래에는 "몸 세포에 있는 유전자의 유전정보는 모든 생명현상의 기본이며 일정불변한 것이다. 생식세포이건 근육세포이건 림프구이건 유전자의 배열은 전혀 같은 것이며 유전자는 불변, 부동한 것이다"라는 개념을 과학자들이 받아 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도네가와는 전혀 다른 결론을 얻었다. 우리의 몸은 양친으로부터 항체유전자를 완성된 상태로서가 아니라 항체유전자의 부품으로서 물려 받는다. 양친으로부터 1천개 정도의 부품을 물려받은 뒤 항체를 만드는 림프구가 성숙하는 과정에서 부품의 여러 조합으로 모여지는 것이다.
이 조합은 매우 다양하고 이른바 소자와 같은 것을 계승하여 다양한 항체유전자를 하나 하나 개체의 일생동안 만들어 낸다. 이렇게 만든 항체유전자는 생식세포외에는 예컨대 피부나 근육세포의 유전자가 다음 세대로 전달되지 않는 것처럼 1대로 그쳐버리고 다음세대에는 물려주지 않는다.
한편 생식세포내의 항체유전자는 부품이 흩어진 상태대로 다음 세대로 인계된다. 그래서 1대마다 림프구를 만드는 과정에서 항체유전자를 다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도네가와는 마우스를 사용하여 고등생물의 면역계가 이런 메카니즘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요컨대 인간의 몸은 한정된 유전자정보를 유효하게 사용하여 장차 출현할지 모르는 무한한 외적에 대항하기 위한 시스팀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이 증명으로 면역계의 오랜 수수께끼가 풀리게 되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생물학전반에 걸쳐 중요한 사실은 개체가 발생하는 과정에서 DNA의 재구성을 통해 유전자가 만들어진다는 종래에는 생각할수 없었던 개념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 이로서 유전자는 불변, 부동이 아니라 면역계에서는 재구성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도네가와의 이론은 생물학에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을 가져왔다. 그의 이론으로 면역학은 가속적으로 진보하게 되었으며 면역은 단순히 '역(疫)에서 면(免)'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물이 발생하고 성장하며 생명을 유지하는데 가장 근간이 되는 중요한 메카니즘이라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그래서 많은 생명현상은 면역의 메카니즘을 원용하지 않으면 설명할 수 없게 되었다. 예컨데 사람 세포의 DNA로 침입하는 에이즈(AIDS) 바이러스는 그 자체가 움직이는 유전자라고 할 수 있다. 또 최근에는 발암유전자 주변에서 DNA의 다이너믹한 조환이 일어남으로써 암유전자가 비정상적으로 발현하여 암발생의 방아쇠구실을 한다는 현상이 발견되었다.
또 생물이 어떤 메카니즘으로 진화해 왔는가를 설명하는데 새로운 유전자의 개념이 크게 돕게 되었다. 예컨대 어류에서 별안간 양서류가 탄생했다고 할 때 단기간에 일어나는 급격한 적응을 설명하자면 DNA의 돌연변이에 의한 완만한 진화로서는 설명하기 어렵다. 거기에는 보다 다이너믹한 유전자의 변화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다시 미국으로
일이 순조롭게 진척되면서 도네가와는 바젤연구소에서도 가장 많은 연구원이 참여하는 그룹을 이끌게 되었고 사용하는 연구비도 가장 많았다. 소장인 '닐즈 야네'(1984년 노벨의학생리학상 수상)의 신임도 두터워 바젤의 마지막 4~5년간은 마음먹은 대로 연구생활을 보냈다.
1981년 바젤연구소 10년의 생활을 마치고 다시 미국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컬럼비아대학, 하바드대학 그리고 MIT등 세군데에서 오퍼를 받았으나 MIT에는 '루리아'(1969년 노벨의학생리학상 수상)가 이끄는 암연구소가 있어 그쪽으로 마음을 굳혔던 것이다.
통계적으로 노벨상 수상자와 함께 일한 사람들이 노벨상을 타는 확률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매우 높다. 도네가와의 경우도 달베코, 야네, 루이아등 노벨 수상자들의 제자였거나 그들 밑에서 함께 일하는 행운을 얻었던 것이다. 그는 현재 MIT에서 뇌에 관한 연구를 하고 있다. 언뜻 보기에는 뇌는 면역이나 DNA와는 직접 관련이 없는 것 같지만 뇌가 무한에 가까운 정보를 기억하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은 신경이 결합되는 부분에는 항원-항체반응과 같은 메카니즘이 존재하고 있을지 모른다. 뇌는 분자생물학적으로는 거의 손을 대지 못한 분야이다.
●―과학은 예술이다
도네가와는 과학이라는 것은 창조적인 활동이라는 면에서 예술과 매우 닮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과학자는 보통의 샐러리맨과는 기본적으로 달라서 급료를 얻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과학이 좋아서 과학을 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과학자가 그대로 연구실에서 일생을 보내는 것을 어쩐지 쓸쓸하기 때문에 테니스도 하고 휴가도 취하기로 한다면 그는 이미 과학자가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과학자에게는 실링이 없다는 것이다. 스스로 한계를 설정했을 때는 이미 과학자가 아니며 언제나 꿈과 모험정신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고있다. 지금은 안되어도 언젠가는 반드시 성취하고만다는 꿈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예술가의 경우도 언젠가는 좋은 그림을 그리고야 말겠다거나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음악을 작곡해 보고야 말겠다는 생각을 가질때 그는 비로소 화가이며 음악가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그래서 과학자의 인생은 예술가와 마찬가지로 언제나 욕구불만에 차 있으며 언제나 무엇인가 쫓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노벨상을 탄 뒤 일본의 매스컴이 자기를 어떤 고정된 이미지의 과학자상으로 묘사한데 대해 불만을 터뜨렸다. 예컨대 "도네가와는 스위스의 바젤연구소 시절에는 밤낮없이 연구에 몰두했다"는 표현에 대해 "나에게는 낮과 밤이 있었다. 다만 낮과 밤이 다른사람과는 거꾸로 되어 저녁부터 연구실에 나가 아침까지 연구를 했는데 이런 '밤형'연구자는 얼마든지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또 어떤 매체에서 "밤중에 후딱 일어나서 연구소에 갔다"고 보도한데 대해 "어떻게 보면 기인(奇人)처럼 만들었는데 일어날 시간이 되니깐 일어 난 것뿐"이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연구가 중대한 국면에 접어 들었을 때는 잠을 참고 연구실에 간 일은 있다고 말하면서 "일이 중요한 고비에 들어 서면 침착하게 식사같은 것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이 창조적인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흔히 있는 일이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것을 기이하게 생각하는 과학자라면 그사람은 과학자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뛰어난 집중력과 아이디어
그러나 그의 부인 '마유미'여사의 눈에 비친 남편의 모습은 그렇지 않다. 그는 뛰어난 집중력과 풍부한 아이디어의 소유자였다. 예컨대 집의 부엌을 개축했을 때 건축가를 고용했으나 도네가와는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일일이 계측하여 건축가가 만든 도면의 틀린곳을 하나하나 지적했다. 캐비넷의 스페이스에서 전기배선의 위치에 이르기까지 꼼꼼하게 도면을 그리면서 밤을 새웠다는 것이다. 그는 한번 하기로 결심하면 빈틈없이 일을 해치우는 완벽주의자라는 것이다. 그는 완벽하게 일을 조립하는 구축력과 아이디어의 창출력에 있어서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는 과학자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일본인이 존중하는 이른바 '화(和)'의 정신은 독창적인 과학연구에는 장해가 된다고 비판하고 있다. 독창적인 과학은 본래 구미의 비판적이며 합리적인 정신에서 발달되었으나 화의 정신은 이와 상반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화의 정신이 낭비를 하지 않는 능률적인 사고방식에서 나온 것이며 자원이 빈약한 일본에서는 많은 사람들을 키우는데 이런 정신이 필요했을지 모르지만 창조적인 일을 하는데는 어느 정도의 낭비가 필요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일본의 우수한 학생들이 대학원과정은 미국에 유학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미국의 일류대학 대학원생은 장학금을 주기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아도 공부를 할 수 있으며 일본처럼 대학원생이 아르바이트를 하다보면 훌륭한 연구자가 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또 일본의 일부 교수들의 권위주의에도 매우 비판적이다. 흔히 일본교수들은 활달한 젊은이들을 '건방지다'고 나무라지만 자기의 권위에 따르지 않는다고 이렇게 야단친다는 것은 인간의 질적은 문제라고 주장하고 있다. 권위같은 것으로는 훌륭한 인간관계를 맺을 수 없으며 달리 아무것도 없을 때 내세우는 것이 권위라고 주장하고 그는 있다.
그는 1985년 당시 일본방송협회(NHK)의 특별프로그램담당 책임자였던 '마유미'여사와 결혼했으며 그들 사이 돌을 갖 넘긴 아들을 두었다. 마유미부인은 현재 MIT의 '뇌 및 인지과학(認知科学)' 학부 3년에 재학하면서 생물학과 컴퓨터 사이언스를 전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