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기원을 둘러싸고 분자생물학자들과 인류학자들이 뜨거운 논쟁을 벌이고 있다.
인류의 조상은 지금부터 약20만년전 아프리카 사하라부근에 살던 한 검은 피부의 여인이었을지 모른다. '이브'라는 이름을 가진 이 여인은 구약성경의 '이브'(5천9백92년전)가 아니라 굳이 말한다면 '미토콘드리아 이브'이다.
분자생물학자들의 도전장
작년 12월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미국인류학대회'는 '이브논쟁'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분자생물학으로 무장한 일단의 과학자들이 인간의 진화를 연구하던 기존의 과학자들에게 도전장을 냈던 것.
이제까지 고인류학자들에 의해 널리 받아들여진 인류진화의 경로는, 적어도 1백만년전에 인류의 조상이 아프리카를 떠나 세계 각지에서 천천히 각자 현대인으로 진화해 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전학자들을 필두로한 새로운 견해는 이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즉 고생인류에서 현대의 호모사피엔스로 진화한 것은 20만년전 아프리카에 살던 '이브'의 한 가계(家系)에서 뿐이며, 9만~18만년전에 '이브'의 자손이 전세계로 퍼져 오늘의 인류를 이루었다는 것이다. 이 견해에 따른다면 인류는 대단히 '어린 종(種)'으로서 인류의 조상으로서 우리에게 친숙했던 네안데르탈인 자바원인 북경원인 등은 인류의 직접적 조상의 계보에서 지워지게 된다.
인류의 진화의 신비를 풀려는 고인류학자들의 노력은 주로 고생인류의 화석과 유물의 채굴에 집중되어왔다. 이러한 노력이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아직도 인류의 기원과 진화과정을 명쾌히 설명하지는 못하고 있는 형편. 이에 비해 분자생물학자들은 인간의 유전자를 추적해 거슬러 올라가는 방법을 통해 인류의 기원에 관한 깔끔한 데이타를 제시함으로써 학계를 놀라게 하고 있다.
인류의 진화를 연구하는 고생물학계에 새로운 바람이 불어온 것은 60년대부터였다. 전통적인 고생물학 외에도 생태학자 분자생물학자 동물학자 화학자 물리학자들이 이 분야 연구에 가세했다. 새로운 바람의 중심은 분자생물학이었고 그 기수는 뉴질랜드출신의 미국 캘리포니아대(버클리) 생화학교수인 '앨런 윌슨'(57).
그는 1967년 유전학을 이용해 침팬지와 인간의 혈액단백질을 연구해 이 둘이 놀랄만치 유사하다는 결론을 이끌어냈다. 진화의 가지에서 인간과 침팬지가 갈라진 것은 이제까지 널리 알려진 1천5백만년전이 아니라 불과 5백만년전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충격적인 결과는 전통적인 인류학자들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쳤으나 화석을 통해 사실임이 입증됐다.
'윌슨'은 또한 진화의 원동력이 환경변화라는 외적요인 뿐만 아니라 고등동물의 모방·창조하려는 능력도 크게 작용한다는 주장을 펴 주목을 끌고 있다. 두뇌용량이 큰 포유류나 조류의 경우 두뇌의 활동이 '진화의 압력'으로 작용한다는 것. 전형적인 예가 길들여진 가축의 유전형질 변화와, 인간이 우유를 소화시킬 수 있게 된 것을 들 수 있다. 인간은 가축을 기르기 시작하면서 불과 5천년만에 우유를 소화시킬 수 있는 유전자를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분자시계」로 「이브」의 생일 계산
유전학자들이 힘겨운 발굴지 탐사를 하지 않고도 실험실에서 전통적 고생물학자보다 정확한 자료를 얻어내는 비결은 '분자시계'를 활용해 세포차원에서 진화를 연구한다는데 있다.
어떤 생물의 집단이 격리돼 유전자의 교환이 이루어지지 않은채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서로 교배가 불가능한 다른 종이 된다. 이때 두 종이 얼마나 다른지는, 두 유전자의 차이를 통해 알 수 있다. 다시말해 유전자의 변화량을 알면 두 종이 갈라지고부터 경과한 시간을 측정할 수 있다는 것. 한편 유전자의 변화를 일으키는 돌연변이는 오랜시간에 걸쳐 매우 일정하게 일어남이 알려져 있으므로 (1백만년에 2~4%) 유전자가 얼마나 변화했나로부터 종의 기원을 역산해 측정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런 '분자시계'의 개념을 이용해 미국 하와이대의 '레베카 칸'은 캘리포니아대의 '윌슨' '스톤킹'과 함께 인류의 유전자를 통해 최초의 선조인 '이브'를 찾는 작업에 착수했다. 이들은 아프리카 유럽 중동 아시아 출신의 임산부 1백47명으로부터 태반을 제공받아 조직을 분쇄한 다음 미토콘드리아의 DNA를 추출했다. 미토콘드리아는 세포속의 작은 기관으로서 세포에 에너지를 공급하는데, 이곳의 DNA는 보통 핵의 DNA와는 달리 어머니를 통해서만 유전돼 가계를 추적하는데 적합하다.
그 결과 인종사이의 유전적 차이는 거의 없음이 밝혀졌고, 아프리카인의 DNA에서 보다 많은 다양성이 발견됨에 비추어 가장 오래된 가계는 아프리카임이 밝혀져, 인류의 뿌리가 아프리카에서 출발했다는 것을 확인했다. 버클리의 연구팀이 이룩한 가장 큰 성과는 DNA에서 일어난 돌연변이의 수를 세어 '이브'의 생일을 계산해 낸 것. 계산에 따르면 적어도 유전학적으로 볼 때 지금의 모든 인류는 약 20만년전(14~29만년전)에 살았던 '운좋은' 한 여인 '이브'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 당시 인류가 '이브' 한명이었을리는 없다. 그러나 어떤 이유에선지 나머지 다른 여자들의 DNA는 모두 후세에 전달되지 못하고 단절됐다. 이런 일은 남자의 '성'(性)이 20세대를 거치면서 1백개중 90개가 사라진다는 통계적사실과 마찬가지로 설명된다.
한편 미국 에모리대의 '더글러스 왈라스'팀도 4개 대륙출신 7백명의 미토콘드리아DNA를 조사, 현생 인류의 뿌리가 15~20만년 전이라는 결과를 얻어 버클리대학 연구팀과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나 '왈라스'팀은 '이브'의 고향은 중국 남동쪽인지 모른다고 주장했다. 물론 그는 이 결과가 데이타에 대한 한가지 해석일뿐 다른 가설에 따르면 그곳은 아프리카가 될 수도 있음을 부인하지는 않고 있다.
아직도 남아있는 수수께끼
만일 이들 유전학자들의 가설대로라면 우리들은 인류진화의 또다른 계통을 그려야 한다. 이 관점에서 인류진화의 과정을 한번 더듬어 보자(앞면도표참조).
약 5백만년전 고대인류는 침팬지의 조상으로부터 갈라져나와 또다른 진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3백50만년전에서 2백50만년사이에는 원숭이와 인간의 중간형태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살았음이 이디오피아에 발굴된 화석 '루시'와 탄자니아에서 발굴된 '라에트리' 발자국에서 입증됐다. 이들은 작은 뇌를 가졌지만 땅위에서 생활했고 직립보행을 했으며 나무나 자연물을 도구로 사용했다고 추정된다.
그후 '루시'와 비슷하지만 뇌용량이 보다 큰 '호모하빌리스'가 1백75만년전까지 살았다. 1백50만년전부터는 오늘날의 인간의 모습과 보다 비슷하고 뇌용량이 더 늘어난(8백cc) '호모 에렉투스'가 출현해 석기를 만들었고 수렵을 했다고 생각된다.
고생 '호모사피엔스'는 약 50만년전부터 나타나 자바원인 북경원인의 화석이 출토되었다. '이브'가 살았던 시대에는 이들 고생인류의 후손과 3만4천년전에 멸종한 네안데르탈인이 함께 살고있었다.
여기서 학자들의 견해는 엇갈린다. 9만~18만년전 아프리카에서 나와 세계의 여러곳으로 흩어진 '이브'의 후손들과 그때까지 진행해온 다른 고생인류의 후손들이 어떤 관계를 맺고 진화했는가가 미스테리로 남는 것. 학자들의 견해는 크게 3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현대인의 조상이 나머지 고생인류의 후손을 모두 멸종시켰다는 이론이며, 나머지 둘은 여러 인종이 각각 삼지창의 창날처럼 별도로 혹은 그들사이에 복잡한 관계를 맺으면서 진화해왔다는 이론들이다.
버클리의 생물학자들은 첫번째 견해로서, '이브'의 후손들만이 무언가의 이유로 차차 멸종해간 네안데르탈인이나 다른 고생인류의 후손들을 제치고 살아남았다고 보고 있다. 여러 고생인류의 후손이 각각 독립적으로 진화했다고 보는 견해는 오늘날 유럽인이 네안데르탈인, 중국인은 북경인, 그리고 호주원주민은 자바원인과 형태적 특징이 유사하다는 점을 근거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이 이론은 진화의 중간단계를 설명할 화석이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유사점보다는 차이가 많다는 점이 드러나 설득력이 부족한 편이며, 게다가 인종주의라는 비난의 표적이 되고 있다.
한편 분자생물학자들에 대한 가장 신랄한 비판가의 하나로 꼽히는 미시간대학의 고고인류학자 '월포드'는 아프리카에서 나온 '이브'의 후손이 그 지역의 다른 인류와 혼혈을 이루지 않았다는데 찬동할 수 없다며, 여러갈래의 인류의 조상들이 서로 복잡한 유전자의 흐름을 통해 서로 연결돼 진화해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아담」을 찾아서
아뭏든 분자생물학자들의 새로운 이론에 대해 의심스러워하는 고고인류학자들은 꽤 많은 편이다. 이들의 화석에 대한 애착은 뿌리가 깊어보인다. 실상 몇가지 가설만 바꾸면 DNA시계에서 '이브'의 탄생을 수십만년 뒤로 돌려놓을 수 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분자생물학자들이 중요한 진보를 이룩했음에는 분명하다. 학자들은 이미 20만년전의 화석을 찾아내는데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하지만 분자생물학자들은 그 결과를 기다릴 여유가 없다. 벌써 영국 프랑스 미국의 연구자들은 '아담'을 찾아나선 것이다. 세포속에 있는 'Y크로모좀'이란 물질은 남성을 통해서만 유전된다. 따라서 '이브'에서와 마찬가지로 거슬러 올라가면 '아담'을 찾을 수 있게 마련이다. 과연 '아담'과 '이브'는 동시대인으로 판명될 것인가? 만일 두사람의 생일이 크게 다르다면 이제까지의 분자생물학자들의 기세는 크게 누그러질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