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맨해턴 섬 북쪽에 자리한 '브롱크스'구. 그곳 나지막한 근로자 아파트촌 넘어 저수지와 지하철고사이에는 웅크리듯 다소곳이 들어 앉은 빨간 벽돌건물이 있다. 지상층의 창문은 굵은 철망으로 내리고 간혹 깨진 유리창은 베니어 판자로 덮은 이 평범한 건물이 바로 세계에서 가장 이름난 과학영재교육의 요람인 브롱크스 과학고등학교(Bronx High School of Sciences)이다.
이 학교가 해마다 배출하는 8백여명의 졸업생들은 거의 모두(99%)가 대학에 진학 할 뿐 아니라 그중 20% 안팎은 하버드, MIT, 예일, 코넬, 컬럼비아 등 미국동부의 명문대학으로 들어 간다. 1938년 개교이래 거의 반세기에 걸쳐 이 학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의사와 이공계박사들을 배출하여 오늘날 '과학자의 산란장'이라는 이름이 붙여지고 있다.
그러나 브롱크스과학고등학교의 이름은 1979년 이 학교출신의 과학자 두사람(모두 1950년 졸업생)이 노벨물리학상을 나란히 함께 받으면서 더욱 떨치게 되었다. 고교시절부터 친구였고 하버드대학의 교수들이기도 했던 '셸든 글래쇼'와 '스티븐 와인버그'는 파키스탄출신의 '압더스 살람'과 함께 자연계의 4개의 기본적인 힘중의 '약한 상호작용'과 '전자력'을 하나로 묶는 통일이론을 발전시켜 마침내 노벨상을 타게 된 것이다. 이로써 브롱크스과학고등학교 출신의 노벨수상자는 1972년도의 '레온 쿠퍼'를 포함하여 3명으로 늘어 났다.
일찍 과학자의 꿈을 키워
글래쇼는 1932년 뉴욕 맨해턴에서 태어 났다. 그의 양친은 20세기 초 러시아에서 망명하여 뉴욕에서 자리를 잡은 뒤 부친은 배관업으로 성공했다. 글래쇼에게는 18년과 14년이나 연상인 두 형이 있었는데 글래쇼가 철들기전에 이미 의사와 치과의가 되어 있었다. 글래쇼의 양친은 그에게도 의사가 되기를 바랬으나 고교입학 무렵 이미 과학자가 되겠다는 글래쇼의 꿈을 한사코 꺾지는 않았다. 그는 15세 때 집의 지하실에 꽤 좋은 설비를 갖춘 화학실험실을 갖추었다.
브롱크스과학고등학교에는 해마다 12월이 되면 뉴욕시 전역에서 7천명 이상의 영재들이 모여들어 1시간반의 입시를 치룬다. 평균 7~8대 1의 어려운 관문을 뚫고 들어 온 글래쇼는 곧 '와인버그'와 '제랄드 파인버그'(현 컬럼비아대학 물리학교수)와 가까이 지내게 된다. 이들을 묶은 것은 물리에 대한 공동 관심이었다. 글래쇼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그때는 물리학과는 오늘날의 수준에는 이르지 못해 우리끼리 독학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글래쇼는 이미 고교시절부터 대학의 물리교과서를 읽기 시작했다. 이들 세 학생중 한사람이 "어제 저녁 양자론을 읽어봤는데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어"라고 말하면 다른 두학생은 어찌나 부러웠던지 곧 책방으로 달려가서 양자물리학 교과서를 사서 자습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브롱크스과학고등학교 학생들은 과학(생물, 화학, 물리)은 4년간, 수학은 3년간 배우는 외에도 영어와 사회과학을 4년간, 외국어는 3년간 그리고 일본어와 도시생태학 등을 포함한 1백여개의 선택과목중 4과목을 1년간 거쳐야 한다. 인문계학과의 내용도 예컨대 중세고전인 초서(Chaucer)와 같이 수준이 매우 높다.
1학년에서 특별하게 과학적 소양이 뛰어 나다는 것을 보여주면 2학년 과학과목을 들을 수 있고 거기서부터 3학년의 독립연구로 들어갈 수 있게 되어 있다.
글래쇼는 당시 브롱크스과학고교의 수학교육은 꽤 훌륭했다고 말하고 있다. 다만 미분과 적분은 가르치지 않아 점심시간에 '단그린버거'와 같은 친구들에게서 배웠다. 그래서 학교의 정식교육보다는 친구들끼리 토론하면서 배운 것이 더 많았다고 말하고 있다.
글래쇼는 공부외의 여가활동으로 'SF클럽'을 만들어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폈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글래쇼는 대학에서 무엇을 전공하겠다는 것을 이미 결정해 놓았다. 그것은 소립자 물리학이라는 학문이었다. 그가 이 분야를 전공하기로 결심한 배경에는 여러가지 사연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직전인 1945년 여름 일본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을 때 그는 13세였으나 이 폭탄에는 그가 평소 관심을 갖고 있었던 물질이 사용되고 있어 원폭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라디오에서 떠나지 않고 경청했다. 또 SF잡지에 나온 원자핵의 결합에너지 곡선에도 비상한 관심을 갖고 검토하기도 했다. 그는 소립자이론에 관한 유명인의 강의가 있을 때마다 참석하여 과학자들의 토론을 들었다.
그들의 토론내용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어도 그런 분위기속에서 표현할 수 없는 흥분을 느끼곤 했다. 그는 마침내 가장 기본적인 과학은 소립자물리학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 것이다. 1950년 봄 글래쇼는 브롱크스 과학고등학교를 상위권 10%이내의 성적으로 졸업했다. 그의 말을 빌면 "아무리 잘 보아도 가장 우수한 학생은 못되었다".
하버드에서 낙방하고 코넬대학으로
글래쇼는 하바드대학에서 낙방하고 코넬대학에 들어 갔다. 코넬이 MIT나 예일대학보다는 좀 낳게 보여 그렇게 택한 것이라 한다. 와인버그도 함께 코넬에 진학했다. 그러나 영재학교의 분위기에 젖어 온 글래쇼우에게는 코넬의 교육제도가 못마땅했다. 물리학과에서는 우수한 학생들에게는 필요하지도 않은 기초과목을 억지로 이수하게 할 뿐 아니라 좀 앞질러 진도를 재촉하는 학생에게는 좋은 얼굴로 대하지 않았다. 글래쇼와 같이 발랄한 성격의 학생은 이런 교육제도를 억지로 감수하지 않았다. 대학 4학년때의 일이었다. 글래쇼는 대학 1학년생이 듣는 역사강의실에 들어 갔다. 교수는 못마땅한 얼굴로 글래쇼를 쏘아보더니 "글래쇼군은 1학년생 클래스에 들어 온 유일한 4학생이다"라고 빈정댔다. 그러나 글래쇼는 곧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되받았다.
"저는 이런 식으로 학점을 따는 과목이 여러개 있는 걸요. 당구장에 너무 드나들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물리학자로 성공한 사람들은 대부분 고고하게 배우고 싶은 것만 배웁니다"
노벨상과 이어지게 된 박사학위논문
글래쇼는 코넬을 졸업한 뒤 하바드대학 대학원으로 진학했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의 테마는 '소립자붕괴에 있어서의 벡터 중간자'였다. 그는 이 박사학위논문의 서문에서 "시인의 마음에는 두가지 있다. 하나는 우화를 만들어 내는 마음이며 다른 하나는 그것을 믿으려고 하는 마음이다"는 갈릴레오 갈리레이의 말을 인용했다. 그 이유는 이 테마가 매우 명상적이며 투기적인 멋을 풍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그는 뒷날 말하고 있다. 아뭏든 이 논문의 테마가 계기가 돼 그뒤 오랜 연구끝에 마침내 노벨상을 타기에 이른 것이다. 글래쇼의 연구를 지도한 물리학자 '줄리안 슈와잉거'는 '약한 상호작용'과 '전자력'과의 관계를 '게이지 이론'으로 알려진 단일의 복잡한 수학적이론으로 설명하는데 관심을 갖고 있었다. 글래쇼의 테마도 그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이었으며 결국 뒷날 '약한 힘과 전자력의 통일이론'을 유도하는 출발점이 된 것이다.
1960년께까지 글래쇼우는 약한 힘과 전자력을 통일하여 설명하기 위한 게이지이론(최근에는 흔히 전자약이론이라고 불리고 있다)구성에 크게 이바지했다. 그러나 거기에는 큰 결함이 있었다. 양자론에서 말하는 '매개입자'의 질량은 그 힘이 미치는 거리에 반비례되어야 한다. 그래서 전자력은 무한한 범위에 미치기 때문에 이것을 매개하는 광자의 질량은 도달거리에 반비례하여 제로가 되어야 한다. 한편 '약한 힘'이 미치는 범위는 극소이기 때문에 그 매개입자의 질량은 매우 큰 것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광자의 약한 힘의 매개입자는 이를테면 형제관계는 될 수 없어 이 두개의 매개입자를 하나의 행복한 가족의 일원들로서 통일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던 것이다. 글래쇼는 이 역설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러나 1967년 와인버그가, 그리고 다음 해인 1968년에는 압더스 살람이 각각 독자적으로 약한 힘과 전자력을 통일하는 새로운 게이지이론을 제창하여 이 질량문제가 해결되었다. 이들이 도입한 것은 '대칭성의 자발적인 파괴'라는 개념이었으며 오늘날 소립자 물리학에서 매우 중요한 사고방식의 기초가 되고 있다.
이 개념은 비교적 식어서 온화한 오늘의 세계와 지구가 생성될 때의 뜨겁던 시기와는 물질의 물리적인 행동에는 차이가 있게 마련이라는 생각이다. 그래서 우주가 생성될 초기의 매우 높은 에너지 하에서는 모든 힘이 동일하고 구별할 수 없을 정도의 전체적 대칭성이 성립되지만 우주가 냉각되면 그 대칭성이 깨진다는 것이다.
이런 개념 덕에 전자력과 약한 힘이 상호 작용을 미칠 때 무슨 이유로 전혀 성질이 다른 매개입자를 사용할 수 있는가의 수수께끼를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곧 전자력은 질량이 없는 광자가, 그리고 약한 힘은 질량이 있는 W+, 이다. 곧 전자력은 질량이 없는 W-, Z˚가 매개하는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이런 매개입자의 차이는 냉각된 오늘날의 에너지상태아래에서 출현하지만 만약에 우주가 원시의 초고 에너지상태로 되돌아 가면 그 차이는 소멸된다는 것이다.
와인버그-살람-글래쇼우의 '전자력과 약한 힘의 통일이론'은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입자가속기속에서 간접적이나마 차례로 확인되어 갔다. 그러나 이들의 통일이론의 가장 중요한 부문인 W+, W-, Z˚의 3가지 종류의 입자가 확인된 것은 이들이 노벨상을 탄 뒤의 일이었다. 1983년 1월 카를로 루비아는 W입자가 존재한다는 증거가 밝혔고 그해 봄에는 Z입자까지 발견한 것이다.
과학대중화에 남다른 재능보여
소립자물리학자중에는 소립자가 그렇듯이 별난 사람들이 많다. 진지하고 금욕적인 사람, 재능이 철철 넘쳐 대하기 어려운 사람, 깊은 묵상에 잠겨 언뜻 보기에는 무능하게 보이는 사람, 기회 있을 때마다 쿼크를 내세우는 사람등 기인(奇人)도 많고 재사도 많다.
글래쇼는 그중에서 어느쪽도 아니다. 교실에서 강의할 때나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나 또는 가정에 있을 때를 막론하고 어디에서나 체하는 티가 없고 언제나 쾌활하다. 특히 어려운 소립자이론을 쉽고 재미있게 풀어서 이야기 하는 그의 솜씨는 학교강의실은 물론 대중강연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모으고 있다.
실상 그의 강의를 듣고 있으면 누구나 재미있는 이야기에 매혹되지 않는 사람이 없다고한다. 그의 강의실에는 언제나 터질 정도로 학생들이 많다.
'시인을 위한 물리학'이라는 하버드대 강의는 그중에서도 가장 인기있는 강의.
"학생 여러분! 좀 어리석은 흉내를 내 보겠어요. 여기 있는 가스를 드리 마시겠어요. 그래서 성대에서 생기는 소리가 공기와는 다르다는 것을 보여줄테니 잘 보아요", 학생들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이상한 소리가 나오면 박수를 쳐요. 내가 쓰러지면 의사를 불러줘요." 그는 고무관을 잡고 마음껏 드리 마신 뒤 큰 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런데 그 목소리는 흡사 도널드 덕의 소리같다. "목소리가 좀 이상 하지 않아요?"
학생들은 신이 나서 "네에"하고 일제히 합창한다. "이걸 들이마시면 상습자가 돼요. 헬륨의 밀도는 공기의 7분의 1밖에 안돼요" 그는 일부러 얼굴을 찌그린다. 다음에는 플루오르화황을 드리마신뒤 소리를 내보인다. 이번에는 흡사 무덤에서 나오는듯한 신음소리와 같다. 학생들은 일제히 웃음을 터트린다. 웃음소리가 잔잔해질 무렵 그는 "플루오르화항은 공기보다 4배나 밀도가 많기 때문이죠"라고 설명한다.
글래쇼는 미국의 과학기술과 이공계교육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그는 "우리들, 현재 기술사회에 살고 있고 사람들은 첨단기술의 혜택을 흠뻑 받고 있으나 일반대중은 기술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 미국은 한때 산업기술의 중심이었으나 이제 많은 산업이 어려운 상태에 있다. 철강, 조선, 제화, 스테레오, 기계는 말할 것도 없고 폴랜드의 로봇까지 수입하고 있는 형편이다"고 말하면서 그 원인을 다음과 같이 내세우고 있다.
"이런 상태가 된 책임은 미국의 수학과 이과교육의 질에 있다. 내가 가르치고 있는 하버드대학 학생들중에도 수학을 두려워하는 학생들이 많다. 내가 가보기만하면 알레르기증세를 일으키는 '실독증'(失読症) 이라는 병이 만약에 있다면 수학을 다룰 수 없는 것도 하나의 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숨은 병들이 이제는 널리 번져 심각한 상태에 이르고 있다. 미국고교의 이과계 교사들을 대상으로 한 앙케트조사에서 〈대학의 공부만으로 교단에 설 준비를 갖출 수 있었다고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51%가 '아니오'라는 답을 보내왔다." 그가 어렸을 때 그의 아버지는 1910년 지구와 접근했던 핼리혜성을 본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이번에 혜성이 다시 돌아올 때는 미국에서 반드시 탐사기를 보내 그 혜성의 수수께끼를 풀게 될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으나 1986년 회귀한 이 혜성에 본격적인 탐사기를 보낸 것은 미국이 아니라 유럽과 일본 그리고 소련이었다고 글래쇼는 씁쓰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