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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위성발사에 성공한 중공의 우주과학

미국과 소련 그리고 한국을 위협한다

중공의 천문 우주과학은 최근에 이르러 세계각국의 관심을 끌고있다. 동양천문학의 시조로서 3천5백년이란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거니와 그네들은 로킷도 사상처음으로 발명하였다.
 

최근에는 가장 힘든 일의 하나인 정지위성(靜止衛星)을 발사 하는데도 성공하였다.
 

중공과 인접한 나라의 하나인 한국으로서는, 우주시대에 살고 있는 오늘날, 괄목할만한 그네들의 발전상을 그대로 남의일같이 모르고 지낼수는 없다. 여기서 그네들이 이룩한 성과를 파악하고 그 뿌리를 찾아보기로 한다.
 

북경시 중심에 아직도 남아있는 1442년에 건립한 천문대위에 설치된 각종 천문기기들(위), 북경천문대위에 설치된 경위의(經緯儀)의 모습(아래)


 

역사적 배경
 

현대의 중공천문학은 전통에 빛나는 고대중국천문학의 배경위에 서있다. 은·주시대의역법(曆法)으로서 태음태양력이 상용화되어, 1년의 길이를 365$\frac{1}{4}$일로하는 4분역법(四分曆法)이 시행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B.C.14세기에는 갑골문으로된 월식관측의 기록을 남겼다. 진(秦)통일시대로 부터는 제정력(制定曆)을 채택하기에 이르렀으며 한대의 회남자(淮南子)라는 저서는 우주창조까지 논급하였으며, 과학적인 우주관인 개천설(蓋天說)이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이 유명한 개천설을 기술한 주비산경(周髀算經)의 저작연대가 아직 명확하지 않지만 그러나 한나라 이전의 저작물이라는 것엔 틀림없다. 이것은 '서양의'프톨레미'(Ptolemy)가 내놓은 천동설과 쌍벽을 이루는 것으로서 사각형의 지(地)위에 갓모양(蓋)의 천(天)을 생각한 것이 골자내용이지만, 독자적인 동양천문학의 우주론을 내세운 중국의 위치가 이미 2천여년전에 확립된 것이라 하겠다.
 

중국천문학에 있어서는 천체의 위치는 적도(赤道)를 상대로 하는 것에 비해, 서양것은 황도(黃道)를 기준으로 하고 있음이 두드러진 차이점이다.
 

B.C1세기에 유흠(劉歆)이 중국최초의 천문표(天文表)를 완성하였다. 이것은 삼통력(三統曆)이라 불리우는 것으로서 1년을 365$\frac{385}{1539}$일, 한달을 29$\frac{43}{81}$일로 한 기본상수뿐만 아니라, 일식의 예보와 행성위치의 계산에 필요한 상수도 제공하였다. 그 삼통력이후 중국역사를 장식하는 수많은 왕조의 흥망과 더불어 역법의 개선도 이에 못지 않게 되풀이 되었던 것이다.
 

고대중국의 관측기기라면 주로 규표(圭表)또는 비(髀)라고 불리우는 것으로서, 수평판에 세워진 수직주(柱)같은 모양을 한것 뿐이었지만 제법 효과적인 도구였다. 이 판을 수평으로 잘 놓고, 남중시(南中時)에 그 기둥길이가 가장 짧을 때를 측정하여 동지(冬至)를 결정하였다.
 

그러나 혼의(渾儀=渾天儀)를 사용한 일도 전한시대에 있었음이, B.C.104년 태초력(太初歷)이 제정됬었을때 낙하굉(落下閎)이라는 천문학자가 그것을 사용한 관측자로 기록되어 있다.
 

후한시대엔 장형(張衡)이 혼천의의 구조를 설명한 기록, 그리고 3세기엔 전조(前趙)의 천문학자인 공정(孔侹)이 혼천의를 사용했음도 알려져 있다.

원(元)시대의 곽수경(郭守敬)은너무나도 유명하다. 그는 많은 천문관측 기기를 제작하였지만 그 중의 대표적인 것이 간의(簡儀)였다.
 

명(明)나라 시대에 만들어진 정교한 혼천의와 간의가 (1439년 제작) 북경에 건립된 천문대(1442년)에 설치되었고 그 이후 청조때 귀화한 펠비스트(Fellbiest=南懱仁)가 제작한 서양식 관측기기도 현재 여기에 설치된채로 남아 있다.

이들 관측기기는 청동제로서 그 규모가 장대하였고 중국적인 장식이 가공돼있어 서양의 과학과 중국의 예술이 완전하게 융합된 작품이라 할수가 있다.
 

그러나 이 기기들은 북청사변(北淸事變)당시 독일과 프랑스군이 나눠, 전리품으로서 약탈해 갔다가 제 일차대전후에 반환해 주었다.
 

북경의 북쪽에 있는 큰 저수지의 섬에 세워진 북경천문대 소속의 태양망원경. 7층건물높이의 탑위에 건립된 망원경으로 관측결과를 컴퓨터로 해석한다.

 

현대 중공의 천문활동
 

중국에 있어서의 신천문학 연구활동은 1922년10월30일, 중국천문학회가 북경에서 발족함으로써 시작이 되었다고 할수있다. 1926년엔 중산(中山)대학에 수학천문학과가 설치되었고, 그 대학천문대가 1929년에 세워졌다.
 

1928년 중앙연구원이 창설되면서, 그 산하단체로서 천문연구소가 발족하여 현대식 천문대가 처음으로 남경(南京)의 자금산(紫金山)천문대이름으로 1934년에 건설되었다. 초대대장은 여청송(余靑松).
 

60cm반사망원경이 주력관측기기였다. 그러자 일본이 시작한 중국침략 전쟁때문에 연구활동은 중단되었다가 1949년중국천문학은 근대화를 위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다.
 

이해에 중국과학원이 설립되어 천문연구소는 자금산천문대로 개명되었고, 운남의 곤명(昆明)시 부근에 있는 봉황산 천문대는 곤명천문관측소로 이름을 바꿨다. 상해근처에 있던 서가회(徐家匯) 및 서산천문대는 제2차대전 이전까지는 프랑스인 선교사가 경영하고 있었는데 국영으로 접수했다.
 

1952년엔 중산대학의 천문학과와 제로(齊魯)대학의 천문·수학과가 남경대학의 천문학과로 합병되었다.
 

이러한 정리작업은 보다 효과적인 일관된 연구활동의 기능을 갖게 하기 위한 처사였다고 볼수가 있다.
 

1953년, 드디어 본격적인 연구·관측활동이 시작되었고 새로운 기기도입이며 기구확장도 활발히 진행되었다. 그후, 10년간에 국가가 접수했던 서가회등의 천문대는 새로이 상해천문대로 발족 하게 되었고 북경천문대, 운남천문대, 섬서천문대 및 3개소의 인공위성 관측소와 무창의 측시(測時)관측소 등이 연이어 건립되었다.
 

한편, 교육기간에도 전문인원 양성을 위한 노력이 계속되어 1909년에 세워진 전통있는 북경사범대학 천문학과, 북경대학에 지구물리학과와 천체물리학과를, 그리고 중국과학기술대학에는 천체물리 연구실등이 신설되었으며, 남경엔 1958년 천문관측기기제작소까지 만드는 의욕을 보여주었다.

1957년에는 중국자연과학사 연구실을 설립하여 그속에 천문학사연구조(組)를 두고 중국고대천문유산의 발굴연구를 기함과 아울러, 같은해엔 천문학계몽·교육을 위한 북경천문관도 개관하기에 이르렀다.
 

현재 이러한 다각적인 노력의 결과로 천문학전공 및 관계연구 사업에 종사하고 있는 인원수만 해도 1천여명이 넘는다고 한다.
 

출판물로서는 1953년 중국천문학회의 학회지로서 천문학보(Acta Astronomica Sinica)의 중영문(中英文)판이 간행되었고 1981년부터는 천체물리학보(Acta Astrophysica Sinica)의 중영문판이 창간되어 세계의 이분야 전문가들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이렇게 1949년이래로 중공천문학이 이만큼의 발달을 이룩하게 된것은, 역시 몇사람의 숨은 공과 희생적 노력없이는 이뤄질수가 없는것이었다. 중공천문학계는 특히 다음의 세사람, 고로(高魯) 여청송(余靑松) 및 정무(程茂)의 공헌에 대해서 높이 평가하고 있다.
 

현재 인공위성의 궤도연구에대한 그들의 실질적 업적으로 보아 국제적인 평가를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가지 특기할것은, 장춘(長春)인공위성 관측소의 소장은 한국출신의 최두성(崔斗星)이란 사람이다. 그는 우수한 천체역학의 이론연구가로서 미국 예일(yale)대학에서 수련을 쌓은 경험도 갖고 있다.
 

예절바른 한국말을 잘 구사하는 그는 조선한국을 항상 그리워하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중국천문학계는 별의 고유운동, 변광성 및 식변광성의 광전측광, 태양의 물리학적연구에 상당한 의욕을 보이고 있으며, 모든 천문대는 광학, 전파관측기기를 동원한 태양연구부가 반드시 설립되어 있는것이 특징인데, 그네들의 연구성과는 세계적으로 대단한 비중을 지니고 있다.
 

현재 그들은 2백16cm(85인치) 반사망원경의 자작완성을 서두르고 있다. 내년에 설치예정인 이 망원경이 활동을 개시하게되면, 동양에서는 최대구경을 자랑하는 것이 될 것이다.

 

로킷의 원형은 중국에서
 

로킷이 언제, 누가 발명했는가의 기록은 확실치 않다. 그러나 많은 역사가들은 중국의 송나라시대(960~1279)에 몽고로 부터의 침공을 막기위해 싸울때 사용한, 화전(火箭)이라는 것이 오늘날의 로킷의 원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것이 명나라(1368~1644)에 전수되어, 그때의 군서(軍書)인 무비지(武備志)라는 책속에, 로킷무기로서 화룡출수(火龍出水)또는 신화비아(神火飛鴉)라는 이름으로 2단식 로킷이 만들어졌던 것이, 유럽으로 전해지고 근대에 이르러 로킷으로 발전했다 함은 누구나도 인정하는 사실이다.
 

1957년10월4일, 소련이 사상최초로 인공위성 스푸트니크1호를 쏘았을때의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지만, 묵묵히 이것을 보고 어떤 결심을 한 사나이가 중국에 하나 있었다. 그의 이름은 모택동.
 

'우리도 이것을 우리의 힘으로 만들어 띄워야겠다'하고 그는 1958년 행동을 개시했다. 그는 1958년에 우주개발사업에 착수하여 전문위원회를 조직하고 (중국과학기술원)실험기지건설에 착수하는 한편, 로킷과 인공위성의 연구 및 제조개발에 나섰다.
 

현재까지도, 중공의 로킷발사기지(基地)의 소재는 완전히 비밀로 되어 있어 알길이 없지만, 고비(Gobi)사막 어느곳에 있는것은 틀림없고, 공표된 사진자료를 보면 엄청난 규모의 '우주개발도시'가 건설되어 병원, 극장, 상점, 학교, 농장마저 구비한 것으로 되어 있음을 알수가 있다.
 

1958년엔 몇10km 떴다 떨어지는 과학관측 로킷개발서부터 시작하여 그 경험을 살려서 보다 더 강력한 로킷·엔진과 제어기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였고, 드디어 지구를 도는 인공위성 발사의 실력을 비축하였다.
 

도플러(Doppler)효과를 이용하여 인공위성을 관측하는 안테나

 

1970년 위성발사에 성공
 

그리고 1965년 부터 1970년까지의 제2단계 개발계획(인공위성발사준비)은 1970년4월24일, 중공이 인공위성 1호를발사함으로써 성공리에 끝났다. 이 인공위성은 유명한 동방홍(東方紅)이란 곡(曲)을 20.009 MHz의 주파수로 전세계에다 뿌렸다. 단파 라디오를 갖고 있던 세계사람들은 이 낯선 곡을 우주공간으로부터 수신하고 깜짝 놀랐다.
 

이 일로 중공은 소련, 미국, 프랑스와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당당히 다섯번째의 자력 인공위성발사국이 된것이었다.
 

1971년3월3일엔 인공위성2호가 하늘을 날았다. 이것은 그후 8년간이나 지구를 돌며 1979년6월16일에 떨어질때까지 과학관측의 자료를 보내왔다.
 

1982년 10월중순, 중공은 잠수함으로부터 해상의 목표물을 겨냥한 미사일 로킷발사에 성공했다. 이것은 서방자유진영엔 큰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1984년9월까지 중공은 16개의 인공위성을 발사하는데 성공했고 그 가운데 6개는 계획했던 예정대로 영토내에서 지상회수를 하는데 성공했다. 이 기술은 미국, 소련에 이어 세번째의 보유국이 된 셈이다.
 

또하나의 놀라운 성과는 한개의 로킷으로 몇개의 인공위성을 동시에 발사하는데도(1981년9월2  0일)성공한것이다. 이 기술은 일본도 해내지 못했던 것.
 

중공은 현재까지 3종류의 로킷을 개발했다.
 

첫번째는 로킷의 제1 제2단엔 액체추진제, 제3단엔 고체추진제를 사용한 3단식로킷'CZ-1'이다.1970년의 중공최초의 인공위성은 이것으로 발사되었다. 이것으로 약 3백kg까지의 위성을 지구위성궤도에 올려 보낼수가 있다.
 

두번째것은 2단식 로킷으로서 제1 제2단모두가 액체연료를 사용하는 'FB-1'이다. 이것은 추진력이 강하여 1천2백kg까지의 위성을 2천km까지의 위성궤도에 태울수가 있다.
 

세번째것은 'CZ-3'이라고 불리우는 것으로서, 액체 3단식 로킷이다.이것은'FB1'보다 더 강력한 것으로서 1984년4월8일에 이른바 실용통신위성을 발사하는데 사용되어 8일이 지난 4월16일, 정지궤도(靜止軌道)에 올라서게 하는데 성공했다. 정지궤도란 지구로부터 3만6천km나 되는 엄청난 고도의 위성궤도로서, 이 궤도를 도는 위성은 그 주기가 지구의 자전주가와 똑같아 지구에서보면 그 위성은 마치 정지하고 있는것 같아서 이렇게 이름이 붙은 것이다.
 

이 일을 성공시켰다는 것은 중공이 자력으로 통신위성, 로킷, 관제문제등 모든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했다는 저력을 과시하는 것이다. 이것도 일본보다 3년이나 앞섰다.
 

중공은 인공위성추적을 위하여 중국의 광범위한 땅위에 삼각형의 정점에 해당하는 곳인 우루무지(鳥魯木齊), 광주(廣州), 장춘(長春)에 각각 인공위성추적관측소를 설치하여 중공것은 물론, 남의 나라의 것들도 관측 감시하고 있다.

 

위성발사능력에 세계가 주목
 

세계의 열강이 중공의 인공위성 발사능력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이유는 곧 그것을 우주공간에 운반하는 수단인 로킷의 능력때문인 것이다. 인공위성대신에 핵탄두를 적재하면 곧 핵 미사일이 되며 통신위성을 정지궤도에 올렸다는 뜻은 곧 대륙간 미사일(ICBM)을 개발 협상 테이블에 참가 시켜야한다는 것이다. 그만큼의 발언권이 중공에 주어졌다는 셈이 되니까 서방측의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인공위성에 실린 센서(sensor)가 소련·미국의 주요시설탐지에 큰 몫을 할터인즉 이것도 골치거리가 되었다.
 

물론 이문제는 한국 측으로서도 보다 절실한 두통거리가 아닐수가 없다. 한국은 중공의 직격사정거리에 놓여지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이에 맞서는 과학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하루라도 빨리 그네들에게 보여줘야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급선무가, 우리나라도 이 우주과학·우주개발사업에 보다 더 적극적인 투자가 있어야 되겠다는 것이다. 이번 대통령선거에 나선 입후보들 치고 어느 누구 하나 이점을 얘기하지 않고 있으니 한심한 노릇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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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2월 과학동아 정보

  • 동아일보사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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