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라이브러리









정상 우주론의 창시자 프레드 호일 FRED FOYLE

20세기천문학계에서 최대의 파문을 일으킨「프레드 호일」경이 노경에 정착한 영국북부 레이크지역의 산악지대를 산책하고 있다.


하층 계급출신으로 케임브리지 대학 장학생이된 호일은 학생으로도 관심거리였지만 나중 학문세계에서도 이단아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천문학에 대한 공헌은 지대한다.
 

20세기 천문학자중에서 가장 창의적이면서도 논쟁의 과녁이 된 여러 이론을 발표한 영국의 '프레드 호일'경은 '정상우주론'(正常宇宙論)의 제창으로 한때 천문학계에 최대의 논쟁을 불러 일으켰고 다시 오늘날 지구생물의 씨는 혜성에 실려 외계에서 온 것이라고 주장하여 과학계가 발칵 뒤집힐 정도로 큰 논쟁의 씨를 뿌렸다. 그는 요즘 천문학게에서는 외톨박이 취급을 받고 있으나 외계의 화학을 탐구하여 별들이 원소를 어떻게 변환시키는가를 밝혀 불멸의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그의 친구들과 숭배자들은 그를 가리켜 '르네상스 인'이라고 부르면서 괴벽스럽기는 하지만 몹씨 뛰어난 소질을 가진 호일경이 과학의 주류에서 비극적으로 고립된 사실을 아쉬워하고 있다.
 

그러나 호일은 언제나 자기의 독립성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그는 1916년 영국의 북부 공업지대인 '요크셔'에서 살기 위해 기를 쓰던 직물상의 장남으로 태어나 그곳에서 쭉 자랐다. 그는 어렸을때 아버지와 그의 친구들이 광학에 관한 책을 이해하려고 '씨름'하던 일을 회상하면서 "교육에서 외면당한 사람들이 배우려고 몹시 애쓰는 모습은 어린 마음에도 몹시 측은하고 안스러웠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자란 호일은 10살때 아버지에게서 자그마한 망원경을 선물받은 뒤로는 밤을 새워 가면서 별을 쳐다 보기 시작했다.

 

아버지한테 받은 망원경
 

호일은 2개의 장학금을 얻어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진학했다. 시골 사투리에다 근로자계급의 말투가 물씬한 그는 상류계급 자녀들인 급우들로부터 한때 놀림감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케임브리지대학 시절은 그에게는 더 없이 행복한 시절이었다. 호일은 두개의 장학금에서 수업료를 내고도 20파운드나 돈이 남아 돌아 '무한한 부자'같은 기분이 들었다고 말하고 있다. 대학을 졸업한 뒤 그는 이름난 이론 물리학자인 폴 디락(1933년 노벨물리학상 수상) 밑에서 핵물리학을 연구했으나 얼마 뒤 천문학으로 돌았다. 그는 '레이몬드 리틀턴'과 함께 별의 탄생과 진화를 연구하여 우주의 까만 먼지구름은 별로 응고되는 광대한 분자수소의 바다라고 주장하면서 종래의 이론을 뒤집었다.
 

종전에는 별들은 흡사 당구와 같은 것이며 당구공이 테이블위에 놓여 있는 것과 같이 우주에는 별들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호일은 별들 사이에는 무엇인가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1937년 호일은 평생의 반려자와 만나게 된다. 당시 영국 북부지방에서 교사로 있던 대학동창의 제자인 '바바라 클라크'라는 이름의 16세 소녀와 결혼을 하고 케임브리지에서 새집살림을 시작했다. 곧 2차세계대전이 터지고 호일은 영국해군성에서 한 팀의 과학자들을 이끌고 레이다 연구를 하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호일은 '허만 본디' 와 '토마스 골드'등 두 사람의 팀 멤버들과 함께 케임브리지로 돌아와서 다시 우주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1920년대에 천문학자들은 우주는 떨어지면서 날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은하들은 '빅 뱅'이라는 별명을 붙인 거대한 폭발을 기점으로 하여 외부를 향해 흡사 발사된 것처럼 서로가 멀리 떨어져 나가고 있었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선원리에 따르면 이 폭발은 하나의 탄생이며 이로써 에너지, 공간, 시간 및 물리학의 법칙까지 태어 나게 되었다. 그러나 호일은 이런 식의 창세(創世) 에는 찬성하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이 마치 마술을 하듯 창조되었다는 것은 우습고 불합리하다"고 주장했다.
 

1946년 어느날 저녁 호일등 세사람의 친구들은 '밤의 죽음'이라는 영화를 보고 난 뒤 우주창세의 딜렘마에서 빠져나오는 방법을 찾게 되었다. 이 영화는 4개의 이야기가 원형식으로 짜여져 있어 영화의 끝은 다시 영화의 시작으로 이어졌다. "우주가 이 영화처럼 만들어 졌다고 생각할 수는 없을까?" '골드'가 먼저 물었다. '호일'과 '본디'는 처음에는 이 말을 비웃었으나 골드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밝힐 수도 없었다. 호일은 "사람들이 변화가 없는 상태를 평형상태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 유령영화를 보고 난뒤 종래의 잘못된 개념은 제거되어야 한다고 깨닫게 되었다. 예컨대 매끄럽게 흐르는 강과 같이 다이나믹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상태를 가질 수도 있는 것이다"는 생각이 떠오르게 되었다.
 

이 결과는 정상우주론으로 정립되었다. 호일은 은하가 서로 떨어져 날아간다는 사실은 부인하지 않았으나 그의 이론에서는 새로운 물질이 계속 창조되어 뒤에 남은 이 허공을 채우고 있어 우주는 언제나 거의 같은 상태로 남아 있는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1948년 이 이론을 발표하자 세사람의 젊은 천문학자들은 뜨거운 논쟁의 과녁이 되었다. 다른 천문학자들은 이 이론에 대해 맹렬하게 반박하고 나섰다.

 

정상우주론과 우주 진화론의대결
 

그렇다면 우주는 큰 폭발로 시작되었는가 또는 영원히 존재했던 것인가? 이 논쟁이 불꽃 튀듯 가장 치열했던 곳은 케임브리지였으며 교회의 설교 대상까지 올랐다. 이 논쟁에서 쌍방의 주장(主將)은 '호일'과 '마틴 라일' 이라고 하는 케임브리지의 젊은 전파천문학자 였다. '라일'은 우주가 진화하고 시간과 더불어 변화한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호일의 정상우주록과 대결했다. 전파천문학자들은 많은 은하들이 강력한 전파를 발산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라일은 가까운 곳보다 먼 거리에 더 많은 우주전파원이 있다고 주장했다. 먼곳의 은하에서 오는 신호는 수십억년전에 전파원을 떠난 것이므로 이것은 곧 우주가 오늘날 보다 더 젊었을 때 더 많은 전파 은하가 존재했다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우주가 진화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이 논쟁에서는 과학외의 요소가 충돌하고 있었다. 훤칠한 키에 귀족티가 나고 말수가 적으며 옥스포드대학교수가문에서 태어난 라일은 골수의 케임브리지풍 학자였다. 재기가 넘치는 라일은 자기 이론이 논박을 받으면 고함까지 지르는 버릇이 있어 감정이 매우 예민한 과학자였다. 한편 헝클어진 머리에 야성적인 맛을 풍기면서 근로계급의 말투로 이야기 하는 호일은 케임브리지대학 풍토에는 잘 어울리지 않았으나 양보하는 아량이 있었다. 호일의 그룹은 여러 토론에서 라일의 주장에 도전했으나 논쟁마다 서로간에 고함으로 끝났다. 한번은 호일이 특정한 전파관측을 하자고 제의했으나 라일은 호일을 초청한 뒤 호일이 사용할 전파 망원경은 스스로 마련하라고 주장했다.
 

호일과 라일의 이름이 과학계에서 널리 알려지면서 이들의 논쟁은 싸움으로 번졌다. 라일은 강의 도중에도 기회가 있을 때 마다 호일의 정상우주록을 반박했으며 자기의 연구내용도 같은 동료교수인 호일에게는 절대로 비밀로 붙였다. 그래서 호일은 라일의 펄서(전파천체) 발견에 관해서 그 논문이 '네이쳐'지에 발표되기까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1974년 라일과 그의 동료인 '안토니휴이쉬'는 전파천문학에 관한 연구로 마침내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으며 1년뒤에 싸움은 학계의 테두리를 넘어서 번져 나갔다. 호일은 펄서가 내는 규칙적인 소리를 처음 발견한 사람이 휴이쉬의 전 대학원학생이던 '조실린 벨 버넬'이었다고 주장하면서 그가 노벨상 수상에서 제외된 사실을 비난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라일'과 '휴이쉬'는 호일을 제소하려고 했다. 그러나 호일이 공개적으로 인신공격할 의도가 없었다고 해명함으로써 일은 가라 앉게되었다. 라일은 호일이 다루기가 몹시 거북하고 어려운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으나 호일의 적들도 그의 정상우주론이 이론상으로는 독창성과 우아함이 돋보인다고 입을 모아 칭찬하고 있다.
 

그런데 호일은 최근 까지도 라일과의 논쟁에서 이긴 것은 자기라고 주장하고 있다. "라일의 실험과 측정은 잘못된 것이기 때문에 그의 주장은 떳떳하지 못하다"는 것이 호일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1965년 천문학자들은 하늘을 그득 채운 희미한 전파소음을 발견하고 이것은 빅 뱅의 메아리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온세계의 전파 안테나를 통해 들려온 이 소리는 정상우주론의 종말을 고하는 조종(弔鍾)의 소리였다.
 

호일은 그동안 그의 이론을 줄기차게 옹호하는 가운데 그 이론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결과를 창출했다. 그것은 우주의 화학원소의 기원을 설명한 것이다. 빅 뱅 이론이나 정상우주론은 모두가 가장 간단한 원자인 수소의 형태로 창조된 물질이 어떤 방법으로 오늘날의 우주를 만든 복잡한 화학원소로 진화할 수 있었을까를 설명하는 문제와 당면하게 되었다. '조지 가모프'와 '랄프 알퍼'는 빅 뱅이 일어나는 동안 격렬한 핵합성으로 원소들이 창조되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호일과 다른 사람들은 이 반응에서는 헬륨보다 더 복잡한 것은 만들어 낼 수 없었다는 사실을 실증했다.

 

「호일」이 지은 책들


빅 뱅에서 헬륨이
 

호일은 그 해답이 별속에 있으며 수소를 태워 헬륨을 만들고 별을 반짝이게 하는 에너지를 발생하는 열핵반응과정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의 견해는 별은 원자의 재순환공장이었으며 우주에 있는 원료 수소나 헬륨을 압축하여 이것을 요리한 다음 초신성 폭발로 무거운 원소를 우주로 다시 뿜어 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공대의 핵 물리학자'윌리포울러'(1983년도 노벨 물리학상 수상)와 힘을 합쳐 이문제 해결에 나섰다. 그결과 우주에 있는 원자의 10%는 헬륨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호일은 별속에서 형성되는 헬륨은 모든 은하가 태어난 이래  방출한 것보다 10배나 더 많은 엔지를 방출했다고 추정했다. 호일은 1964년 대부분의 헬륨은 이른바 빅 뱅에서 형성된 것이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리게된 것이다.
 

호일은 천문학자이면서 과학 픽션을 써서 돈을 벌었다. 그의 상상력은 과학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다른 영역에까지 미치고 있다. 1957년 '까만 구름'이라는 책을 처음 출간한 이래 수십편의 과학픽션을 퍼냈다. 그는 또 취미 삼아 희곡에도 손을 대어 '큰 곰자리의 로켓'이라는 어린이 연극은 큰 성공을 거두기도 했다. 그는 '사랑의 연금술' 이라는 오페라의 대사도 썼다.
 

마침내 호일과 영국의 과학관료제도 및 케임브리지의 경쟁자들과의 충돌은 더욱 잦아졌다. 그는 왕립천문학회의 배타적인 디너 클럽에서 배척되어 떨어져나갔고 연구비를 얻기는 더욱 어려워졌다.1961년에는 케임브리지 대학에 이론 천문학 연구소를 설립하려던 그의 제안이 묵살되었다. 그런데 6년 뒤인 1967년 호일이 미국으로 이민갈지 모른다는 소문이 나돌이 시작하면서 케임브리지 대학은 마지못해 이 연구소의 설립을 인가하게 되었다.
 

그의 오랜 친구인 '허만 본디'경은 "음모가 날뛰는 케임브리지와 같은 곳에서 그처럼 솔직한 사람이 그만큼이라도 견뎌냈다는 것은 용한 일이다"고 말하고 있다. 스스로 철저한 보수주의자로 자처하고 있던 호일도 케임브리지가 자기와 같은 보수주의 교수가 있기 어려운 곳이었다고 술회하고 있다.
 

호일의 연구는 그를 외톨이로 만들어 가고 있었다. 그는 차츰차츰 그의 정상우주론을 소생시키려고 했다. 그가 구상한 새로운 정상우주론의 바탕은 호일과 그의 대학원학생인 '제이안트 나리카'가1960년대에 발전시키기 시작한 중력의 이론에 두었다. 이 이론은 이를테면 나무잎은 조명하는 빛이 있을 때만 색깔을 갖는 것과 마찬가지로 입자는 주위의 우주로부터 운동량이나 질량과 같은 특성을 끌어 낸다고 추측한 오스트리아의 '에른스트 마하'의 철학적인 원리에 근거를 둔 것이다. 아인슈타인도 마하의 원리를 일반상대성이론에 통합하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했다.
 

그런데 호일과 '나리카'에 따르면 새로 탄생한 입자는 전혀 아무 질량도 없이 태어 나지만 주변의 우주를 알게 되면서 무거워진다는 것이다. 호일은 "어떤 마력으로 우주의 먼곳에 있는 부분의 반을 제거한다면 지구는 오늘날보다 태양 쪽으로 더욱 가까워지고 태양은 1백배나 더 밝아질 것이며 사람의 몸은 2배나 더 무거워 질 것이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신물질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호일은 퀘이사(항성모양의 큰 천체)에서 온다고 생각했다.

 

화이트 홀의 개념
 

케임브리지 대학에서(1966)


종래의 우주론자들에 의하면 퀘이서는 우주에서 가장 먼 곳에 있는 정력적인 물체이며 이 젊은 은하의 핵심은 거대한 블랙 홀속의 망각(忘却)을 향해떨어지는 물질에서 힘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호일과 소수파에 속하는 천문학자들은 일부 퀘이사는 더 가까운 곳에 있으며 이웃의 은하에서 산출된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는 퀘이사가 블랙 홀의 정반대가 되는 에너지와 물질의 원천인 '화이트 홀'이며 이곳으로부터 새로운 창조물이 폭발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호일은 빅 뱅도 하나의 '화이트 홀'이라고 말하면서 무한의 거의 안정된 우주에서 번져 나간 여러개의 '뱅'중의 하나에 지나지 않다고 주장했다.
 

호일과케임브리지대학간의 '폭발'은 호일이 바로 나이트의 작위를 받은 1972년에 발생했다. 호일의 이론연구소는 케임브리지의 관측시설과 통합되어 새로운 천문학연구소로 출발했다. 그러나 라일의 전문전파학자들은 독립한채 남아 있었다. 호일은 호주로 여행하는 도중 비행기에서 라일의 부하가 새 연구소의 소장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래저래 케임브리지에서 실증을 느꼈던 호일은 오랜 세월을 두고 등산을 즐기던 스코틀랜드의 산악지대로 이사할 생각도 잠깐 해 보았으나 자식과 손자들과 가까운 곳에서 살기로 했다. 그래서 영국 북부인 컴브리아 지방의 호수지역에 정착하기로 하고 바람이 세차게 부는 언덕위에 커다란 독립가옥을 지었다. 이 집에는 겨울철 폭풍으로 길이 막혀도 오래동안 견딜 수 있는 땔 나무와 천연가스와 식량을 잔뜩 쌓아 두었다. 호일 부부는 거의 바깥 나들이를 하지 않았으며 이따금 찾아오는 자식들과 손자들과 즐겼다. 그는 은둔생활에 지극히 만족하면서 "케임브리지대학을 40세에 그만두고 이곳에 왔더라면 더 많은 업적을 내놓을 수 있었을 것" 이라면서 늦게 온 것을 아쉬워 했다. 그는 이곳에서 웨일즈의 유니버시티 대학과 관련을 맺고 의 제자였던 이 대학의 '찬드라위크라마싱에'와 함께 성간구름에 대한 새로운 연구를 착수했다.

 

우주생명론
 

이들은 물, 알콜 및 암모니아와 같은 우주에 떠 다니는 유기분자는 먼지 알갱이와 쉽게 결합하여 생명체의 구성물질인 아미노산을 만든 뒤 박테리아 형태로 생명이 창조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처음에는 동면상태에 있던 박테리아가 따뜻한 수분이 많은 혜성속에 들어가서 비속에 섞여 지구로 운반된다는 것이다.
 

호일은 생명체가 스스로의 힘으로 우주 전체로 번져 나갈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이 우주생명론과 함께 호일은 아직도 그의 정상우주론에 대한 미련을 잊지 못하고 새로운 접근으로 이론 전개에 정력을 쏟고 있다. 그러나 케임브리지의 '마틴 리즈'교수는 "영국 천문학계에서 그의 말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빈정대고 있다. 호일도 새로운 정상우주론에 관심을 가지는 천문학자들이 별로 없다는 사실을 시인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존재가 현대 과학발전을 작극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이들은 "소수의 과학자들이 자극적인 아이디어를 많이 제공한다는 것은 과학계의 활성화와 발전을 위해서는 매우 바람직하고 또 건전한 일이다"고 생각하고 있다. 프레드 호일은 평생을 두고 바로 이런 역할을 해왔다는데 이의를 내세울 사람은 많지 않다.

1987년 08월 과학동아 정보

  • 현원복 과학 저널리스트

🎓️ 진로 추천

  • 천문학
  • 물리학
  • 화학·화학공학
이 기사를 읽은 분이 본
다른 인기기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