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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을 위해 태어난 사람 카를로 루비아 CARLO RUBBIA

루비아는 넘치는 정력 때문에 칭찬과 비난을 함께 받고 있다.
CERN은 루비아때문에 고에너지물리학분야에서 미국을 앞서게 되었다.



지난 1월 미국의 물리학자이며 저술가인 ‘개리 토베스가’가 펴낸 한권의 책은 세계 과학계뿐 아니라 일반 독서계에도 큰 파문을 일으켰다. “노벨상의 꿈─권력과 사기와 종국적인 실험”이라는 이름의 이 책은 노벨상을 타기 위해 얼마나 속세의 술수가 판을 치고 있는지를 폭로했다. 진리탐구를 위해서는 사심없는 사람들이라고 비쳤던 종래의 과학자에 대한 신화같은 이미지를 이책은 크게 뒤흔들어 일반에게까지 큰 화제가 되었다.

카를로 루비아


이 책의 주인공은 바로 W와 Z입자를 발견하여 1984년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이탈리아출신 과학자인 ‘카를로 루비아’이다. 저자 토베스의 주장에 따르면 1964년 루비아는 제네바의 유럽핵연구센터(CERN)의 한 세미나에서 실제로는 있지도 않은 실험결과를 제시했다는 것이다. 당시 그와 함께 일했던 2명의 동료 과학자들은 “아마도 그가 숫자를 창작해 낸 것같다”고 말하고 있다. 1970년대 중반에는 루비아가 미국 시카고근교의 페르미연구소에서 2명의 미국인 과학자와 ‘뉴트리노’라고 불리는 유령과 같은 입자의 작용에 대해 실험을 하고 있었는데 이 팀의 다른 과학자들은 의문을 던졌으나그는 어떤 결론을 도출하여 중요한 발견이라고 공개했다. 이것은 결국 뒷날 잘못된 것이었다는 사실을 다른 과학자들이 밝혀냈다는 것이다.
 

W와 Z입자의 발견도 정치적인 책략으로 달성된 것이라고 토베스는 꼬집고 있다. 1979년 글래쇼우와 동료 2명에게 노벨물리학상을 안겨준 ‘전자약력이론’은 이런 입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실증할 필요가 있었다. 가장 앞선 도전자는 루비아와 그의 동료들이었으며 이들은 초양자 싱크로톤(SPS)이라는 가속기와 함께 사용할 UA1이라고 불리는 2천만달러의 입자탐지기를 만들었다. CERN의 두번째 팀을 이루는 물리학자들은 UA2라고 알려진 탐지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루비아는 UA1팀을 무자비하게 혹사했을 뿐 아니라 확인을 하는 어려운 분석을 하기전에 벌써 비공식적으로 발견 뉴스를 퍼뜨렸다. 이 작전은 UA2 그룹이 간혹 먼저 발견했다고 선취권을 주장했어도 이것을 효과적으로 봉쇄하자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토베스는 주장하고 있다.
 

루비아는 노벨상을 탄 뒤에도 그의 전술을 바꾸지 않았다. 1984년에는 물질의 기본적인 구성블럭인 톱쿼크와 새로운 입자인 모노제트를 발견한 것처럼 비쳤으나 이것은 근거가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비난하는 측의 주장은 요컨대 루비아는 비윤리적이며 기회주의자라는 것이다.
 

그러나 루비아는 이런 주장에 대해 대형의 협동연구의 메카니즘을 잘 몰라서 하는 소리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넘기고 있다. 이 분야의 경쟁은 너무나 치열해서 불행히도 남에게 욕을 먹는 사람들만이 영향을 줄만한 업적을 남긴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과연 노벨수상자 카를로 루비아는 뱃심좋고 얼굴이 두꺼운 과학자일까? 또 소립자분야의 실험물리학자는 그렇게 행세를 해야만 그 분야에서 성공할 수 있는 것일까?
 

루비아는 1934년 이탈리아의 트리에스트 근처의 작은 도시에서 전기 기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10살이 되었을 때 제2차대전의 전화로 그의 집은 파괴되었으며 어린 시절을 비극속에서 지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전쟁은 루비아의 과학적 호기심을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는 15세가 되자 분주하게 시골을 싸다니면서 군대가 남기고 간 많은 최신장비를 모았다. 이런 장비를 가지고 노는 동안 그는 전자에 대한 재주를 키웠고 이것은 오늘날까지 물리학자로서 하나의 장기가 되었다.
 

루비아는 피사대학에서 보낸 대학시절을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학교는 흡사 수도원같이 운영되었다. 그속에 가둬 놓고 공부만 시켰는데 그것은 바로 내가 바라던 것이었다”.루비아는 그곳에서 물리학을 공부하던 미래의 부인 ‘마리사’를 만나게 된다.
 

루비아는 피사대학을 마친 뒤 뉴욕시로 건너가 당시 고에너지물리학연구에서 가장 활발하던 컬럼비아대학 대학원에 입학했다. 당시 컬럼비아대학의 젊은 물리학자들중에는 ‘스티븐 와인버그’(1979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현 페르미연구소장인 ‘레온 레더맨’ 그리고 현 브룩헤븐 국립연구소장인 ‘니콜라스 사미오스’가 있었다.
 

1961년 루비아는 유럽으로 되돌아 가서 당시 발족 7년이 되는 CREN에 참여하게 된다. 그는 국제협력에 바탕을 두고 출발한 이 연구소에 커다란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전쟁의 잿더미에서 유럽이 회생하기 위해서는 싸워 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고 루비아는 당시의 심경을 회상하고 있다. 이런 다국적 테마는 루비아를 평생 따라다니고 있다. 그는 이탈리아어는 물론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등 4개국어에 유창하다.
 

루비아는 1970년이래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가르쳐 왔으나 결코 미국에 귀화하지 않고 이탈리아 시민권을 그대로 간직하면서 부인과 가족은 제네바의 호화스런 아파트에 살고 있다. 부인은 고등 학교에서 물리학을 가르치고 딸은 제네바대학의 의과대학을 나왔다.
 

1969년 루비아는 미국 펜실바니아 대학에서 ‘알프레드 만’과 ‘데이비드 클라인’을 만난다. 이 두사람은 페르미연구소의 새 가속기로 W입자연구를 하려고 루비아를 끌어들였으며 이 가속기는 3년뒤 완성됐을 때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가속기가 되었다. 그러나 페르미연구소에서의 실험은 다음 10년간 루비아의 명성을 퇴색시켜 버렸다. 이곳에서의 실험 1A의 당초 목표는 W입자를 발견하는 것이었으나 1971년 물리학자들이 ‘전자약력이론’이 옳은 것같다고 믿기 시작하자 이 목표를 바꿔버렸다. 이 이론은 전기적으로 중성인 Z입자가 관련된 중성전류로 알려진 새로운 종류의 약력작용을 예언했다. 루비아와 그의 동료들은 W입자는 제쳐두고 중성전류를 찾아 내기로 했다.
 

이 연구는 고 에너지 물리학에서 가장 큰 경쟁의 과녁이 되었다. 페르미연구소의 루비아와 그의 팀과 겨룬 것은 ‘가르가멜’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포상(泡箱)탐지기로 연구를 하고 있던 CERN의 물리학자들이었다. 1973년 ‘가르가멜’팀은 중성전류의 존재를 비치는 증거를 자료에서 발견하여 그해 7월에 발표했다.
 

이 CERN발표로 루비아와 그의 팀은 굉장한 압력을 받기 시작했다. 바로 이 무렵 루비아의 말을 빌면 “큰 비극이 발생했다.”루비아의 비자 기간이 만료되어 미국을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루비아가 스위스에서 새로운 비자가 나올때까지 기다리고 있는 동안 CERN연구결과를 불신하고 있던 일부의 연구진은 두번째 실험을 했으나 중성전류를 찾지 못했다. ‘가르가멜’팀이 발표한 논문은 잘못된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하여 CERN의 물리학자들은 풀이 죽었으나 페르미연구소팀은 중성전류가 없다는 논문을 준비했다.
 

그런데 사태는 다시 뒤집혔다. 실험의 결함이 발견되어 중성전류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새로운 데이타가 나온 것이다. 루비아 그룹은 ‘가르가멜’팀의 발견을 확인하는 최종논문을 제출했다. 그래서 과학계에서는 루비아의 그룹이 발견한 것은 “교류의 중성전류인가 보다”고 빈정대기도 했다.
 

「전자력과 약한 힘의 통일이론」으로 1979년 노벨물리학상을 탄 글래쇼우(왼쪽)와 함께


소립자물리학의 역사는 한마디로 혼돈속에서 질서를 발견하려는 엄청난 고난의 역사였다. 이런 노력중의 하나가 수많은 소립자를 정리해서 2~3개의 기본적인 구성입자로 환원시키려는 것이었다. 이와 밀접한 관걔를 가진 다른 하나의 노력은 소립자 서로간에 작용하는 4개의 힘을 기술할 수 있는 하나의 수학적이론을 구축하는 일이었다. 이것은 자연계의 4개의 기본적인 힘인 전자력, 중력, 강한힘, 그리고 약한 힘을 하나의 이론으로 통일하는 시도였다. 이런 시도는 4개의 힘의 크기나 범위, 지배하고 있는 대상이 전혀 다르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던 일이 여러번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에 글래쇼우, 와인버그, 살람등 3명의 젊은 이론물리학자들은 ‘전자력과 약한 힘의 통일이론’을 발표하고 이 전자력과 약한 힘이 서로 작용을 미칠 때 전혀 성질이 다른 플러스와 마이너스의 W입자와 중성 Z라는 3종류의 입자가 매개한다고 내세웠다. 이 이론을 확인하자면 이런 입자들을 찾아 내야 했다.
 

1978년 유럽핵연구기구(CERN)는 이 발견작업에 착수하기로 했다. 그로부터 3년간 수백명의 과학자와 기술자들이 동원되어 이 연구소의 거대한 양자가속기를 개조했으며 물질과 반물질의 두 개의 비임이 원형 트랙에서 서로 반대방향으로 돌게 했다. 이 비임이 만나면 물질과 반물질 입자가 서로 충돌해서 전멸되고 막대한 양의 에너지가 방출된다. 이 에너지는 물질의 새로운 입자가 되는데 과학자들은 이런 과정에서 W와 Z입자의 흔적을 찾아 냈다. 이것은 전자약력 이론을 종국적으로 확인하는 것이었으며 20세기의 지적모험의 극치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발견은 치밀한 팀웤과 신념이 넘치는 탁월한 지도력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소립자 물리학분야에서 유명해지려면 가장 크고 강력한 가속기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다. 수백명의 과학자가 관련되고 수억달러의 돈이 드는 이런 사업을 계획하고 설득을 하려면 물리학보다 더 많은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 루비아의 주장이다.
 

루비아는 W입자를 만들자면 반물질과 물질을 충돌시켜야 한다는 신념에서 이런 계획을 페르미연구소에 제안했으나 퇴짜를 맞았다. 그는 다른 동료와 함께 충돌장치에 관한 논문을 물리학계의 대표적인 학술지인 ‘피지칼 리뷰 레터즈’에 제출했으나 편집자들은 출판을 거부했다. 페르미연구소가 그의 제의를 거부하자 루비아는 CERN과 접촉했다. 그는 정치적인 수완을 발휘하여 CERN 가속기의 물리학자들의 막강한 힘을 업고 마침내 CERN을 움직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과학자들중에는 그의 충돌장치가 제대로 일을 치를 것일까 의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두개의 입자 비임이 서로 충돌하여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하는 미국의 과학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루비아와 그의 네덜란드인 동료인 ‘반 데르 미르’는 마침내 이 거대한 작업을 성공적으로 마쳤으며 루비아의 충돌장치는 2차대전이 일어나기 전부터 미국이 지배해 오던 고에너지물리학분야의 세력균형에 변화를 가져 왔다.
 

이제 유럽은 이 분야에서 앞장을 서게 되었으며 미국과학자들은 뒤쫓는 위치에 서게 된 것이다. 이 업적을 통해 루비아는 ‘빅 사이언스’의 왕좌에 올라서게 되었으며 물리학계에서는 가장 화려한 인물로 등장하게 되었다.
 

레더맨은 “루비아는 물리학을 파악하는데 뛰어난 재능을 가졌을 뿐 아니라 엄청난 공격 에너지를 함께 겸비한 인물이다”고 격찬하고 있다. 루비아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그의 우수성은 시인하고 있으나 그의 스피드와 다산(多産)성이 실패를 가져오는 일이 흔히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구상은 너무나 빨라서 하던 일을 중도에 그만 버리고 다음 아이디어를 쫓기 바쁘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물리학을 생활양식과 비교하기도 한다. 과학자들은 오늘날 정규적으로 전세계에서 열리는 회의에 참가하고 있으나 그의 경우는 너무나 잦아서 ‘알리딸리아’항공사는 그를 영예이사로 추대했을 정도이다.
 

루비아도 과학에 대한 집념이 너무나 커서 손해를 본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는 내 직업에 너무 집착하고 있고 나의 호기심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어디로 가려는 욕망이 너무나 크고 너무나 강해서 내 마음속은 언제나 뛰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그를 너무나 잘알고 있는 레더맨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루비아의 추진력과 호기심과 야심은 너무나 커서 일을 너무 빨리 추진하고 이것은 그의 동료에게 생기를 불어 넣고 경쟁자들을 계속 뒤쫓게하고 있다. 루비아에게는 물리학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그의 취미도 물리학이고 그의 휴식도 물리학이며 그의 오락도 물리학이다. 그는 물리학을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다.”
 

루비아를 신랄하게 공격하는 사람들도 “루비아는 매우 머리가 좋고 수억달러의 돈을 내도록 정부를 설득할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라고 칭찬한다.
 

세미나에서 강의하는 루비나

 

1987년 05월 과학동아 정보

  • 현원복 과학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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