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들의 공통점은 뭘까? 도무지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이것들은 모두 초임계유체를 활용한 기술이다. 초임계유체는 액체인 동시에 기체이기도 한 알쏭달쏭한 물질이다. 기체처럼 침투해 액체처럼 녹이는 성질로 원하는 물질을 추출하는 초임계유체의 활약상을 만나보자.
햇살이 따사로운 나른한 오후. 이럴 때 커피 한 잔 마시면 정신도 맑아지고 공부도 더 잘 될 텐데…. 하지만 커피 한 잔의 여유를 느끼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 커피 속 카페인과 궁합이 맞지 않는 경우다. 커피에 들어 있는 카페인은 우리 몸을 각성시키는 효과가 있어 사람에 따라 불면증이나 혈압상승 같은 부작용을 나타내기도 한다. 특히 카페인을 천천히 소화시키는 유전자를 가진 사람이 커피를 단숨에 들이키면 심장발작의 위험이 증가한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카페인을 쏙 뺀 디카페인 커피다.
1970년대 이전에는 드라이클리닝의 용매로 쓰이는 염화메틸렌(CH₂Cl₂)에 커피원두를 갈아 넣어 카페인을 뺐다. 이 방식은 커피를 일일이 가는 일도 번거로울뿐더러 그 과정에서 커피의 향이 날아가고 화학물질이 남아있을 수 있다는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이산화탄소 초임계유체를 이용하면서부터 커피의 형태와 향은 건드리지 않고 카페인만 녹여 빼낼 수 있게 됐다. 물론 먹어도 안전하다. 도대체 초임계유체가 어떤 물질이기에 이런 일이 가능한 걸까?

기체처럼 침투해 액체처럼 녹인다

그러나 특정 온도(임계온도)와 압력(임계압력)을 넘어서면 그때부터는 아무리 열과 압력을 가해도 그 상태가 변하지 않는 물질이 있다. 초임계유체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초임계 유체는 기체와 액체의 성질을 동시에 띠고 있어서 기체처럼 가볍고 확산이 잘되면서 액체처럼 다른 물질을 잘 녹여낸다. 또 액체와는 달리 점도와 표면장력이 낮아서 1nm(나노미터, 1nm=10-9m)보다 좁은 틈 사이로 들어갈 수도 있다.
초임계유체의 이런 특성은 커피에서 카페인을 추출하거나 천연화장품에 들어가는 식물추출액을 뽑을때 유용하게 이용된다. 임계온도가 31℃, 임계압력이 73.8기압(bar)인 초임계상태 이산화탄소를 만들어 이것을 커피나 녹차, 장미, 참깨 등 추출하려는 물질에 통과시키면 이산화탄소가 물질의 미세 구멍에 침투해 원하는 성분만 녹여서 나온다. 온도와 압력을 조절하면 녹여내는 정도(용해도)를 더 좋게 만들 수도 있다. 쓰고 난 초임계유체는 압력을 낮추면 녹아있던 성분이 분리되므로 회수해서 다시 사용한다.

그렇다면 왜 하필 이산화탄소를 초임계 상태로 만드는 걸까? 이산화탄소는 임계온도와 임계압력이 낮아 다른 물질보다 초임계상태로 만들기 쉽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카페인이나 참깨의 기름이 물보다는 이산화탄소에 잘 녹기 때문이다. 소금이 물에는 잘 녹지만 기름에는 안 녹는 것처럼 말이다. 이 같은 현상은 물질이 가지는 극성 때문이다. 물질은 분자 구조에 따라 (+)나 (-)같은 극성을 띠기도 하고, 띠지 않기도 한다. 용매와 용질의 특성은 용해도와 관련된다. 극성 물질은 극성 용매에 녹고, 무극성 물질은 무극성 용매에 녹는다. 극성을 가진 소금이 극성인 물에만 녹는 것처럼 무극성인 카페인이나 기름은 극성이 없는 이산화탄소로 녹여내야 한다.
극성이 있는 성분을 추출하고 싶으면 극성이 있는 물을 초임계상태로 만들어 쓰면 된다. 하지만 물은 임계온도가 374℃, 임계압력이 221기압이나 되기 때문에 초임계 이산화탄소에 알코올 같이 극성이 강한 물질을 섞어 극성 물질을 추출하는 용매로 사용한다.
반도체 세정에서 에어로젤까지

아세아초임계연구학회장과 한국초임계연구학회장을 역임하고 있는 서강대 화공생명공학과 유기풍 교수는 “점도와 표면장력이 기체처럼 낮은 초임계유체를 사용하면 나노미터크기 미세 구멍에서 이물질을 효과적으로 씻어낼 수 있다”고 말했다. 초임계 상태 이산화탄소에 세정제를 섞어 쓰면 세밀한 부분까지 깨끗하게 씻길 뿐만 아니라 비용이 절약되고 폐수도 발생하지 않아 일석삼조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초임계유체는 나노기술에도 응용할 수 있다. 인간이 만든 가장 가벼운 고체로 2002년 기네스북에 오른 에어로젤은 초임계유체 없이는 절대 만들 수 없는 물질이다. 에어로젤을 확대해서 보면 10nm크기의 작은 구멍이 스펀지처럼 수없이 많이 있다. 이런 미세한 구멍은 열이나 전기를 차단하는 특성을 가진다. 덕분에 에어로젤은 단열성이 뛰어나서 건축자재나 방한복, 우주탐사선의 단열재 등으로 유용하게 쓰인다.

에어로젤은 표면적이 넓어 흡착제나 촉매로도 쓰인다. 특히 전기 전도도가 높은 탄소로 에어로젤을 만들면 바닷물을 식수로 정화할 수 있다. 두 개의 탄소에어로젤을 양극과 음극으로 만들어 그 사이에 바닷물을 흘려보내면 녹아있던 나트륨이온(Na+)과 염소이온(Cl-)이 분리된다.
초임계 기술은 폐수를 처리하는 데도 유용하다. 물은 수소와 산소가 수소결합을 하고 있어 극성이 큰 물질인데 초임계 상태로 만들면 수소결합이 약해지면서 극성을 잃는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평소에 물에 잘 녹지 않던 무극성 기체(산소나 질소)는 물에 녹고, 반대로 잘 녹던 소금은 더 이상 녹지 않는다.
이런 특성을 이용해 폐수 속의 물을 초임계 상태로 만들고 산소를 주입하면 산소가 녹아 그 속에 떠다니는 유기물과 결합해 높은 온도에서 타버린다. 결과적으로 폐수 속 유기물은 전부 분해되고 무기물과 이산화탄소, 물만 남게 돼 수질오염을 예방할 수 있다. 국내에서는 한화석유화학이 초임계 기술을 활용한 정화시설을 운용하고 있다.
카페인추출부터 폐수처리까지 못하는 게 없는 물질계 만능엔터테이너 초임계유체지만 아직 풀어야 할 숙제가 있다. ‘압력’이 그 첫 번째 문제다. 물질을 초임계상태로 만들기 위해 임계압력까지 압력을 올리는 과정은 장비가 복잡하고 비용도 만만치 않다. 물의 임계압력은 221기압, 암모니아는 111.3기압이나 된다. 버스 타이어의 내부 기압이 2기압인 것을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압력이다. 따라서 더 간편하고 저렴하게 압력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또 원하는 물질을 녹여내기에 어떤 용매가 가장 적합한지, 어떤 압력과 온도에서 가장 효율적일지 추론할 수 있는 이론을 정립하는 일도 중요하다. 지금은 카페인 같이 추출하려는 성분이 있으면 그것의 대략적인 분자 모양으로 극성을 추측해 가능성 있는 용매를 차례로 넣어보고 용매마다 온도와 압력을 계속 바꿔가면서 일일이 실험해보는 수준이다. 하지만 초임계유체의 물성을 완벽히 파악하면 추출에 가장 적합한 상태를 쉽게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초임계유체는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있지만 어디서부터 열어야할지 조금은 막연한 보물상자다. 보물상자를 열기 위해 다가가는 과학자들의 노력이 기대된다.
초임계유체는 액체와 기체의 성질을 동시에 띠고 있어서 기체처럼 좁은 틈 사이로 침투해 액체처럼 원하는 물질을 녹여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