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상의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나사렛 예수의 수의(壽衣)라고 믿어지고 있는 ‘토리노’의 수의(The Shroud of Turin, Turin은 지명 Torino의 영자표기)는 이탈리아의 대성당 ‘산 지오바니 바티스타’(San Giovanni Battista)에 보관돼 있다.
내년에는 진상 밝혀질지도
신비속에 감추어져 있는 이 수의는 14세기에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진 하잘 것 없는 웃음거리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과연 약 2천년 전 실제로 나사렛 예수가 매장될 때 사용되었던 수의인가?
수백년동안 수많은 연구가들에 의해 그 진위가 추구돼왔던 이 문제의 수의는 최근들어 첨단의 과학적 연구방법 덕분에 진상이 밝혀져가고 있다. 특히 자외선 촬영이라든가 컴퓨터의 이용 등으로 훌륭한 과학사진을 얻을 수 있게 됨으로써 이 수의는 그 신비한 모습을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전하는 소식에 따르면 예수의 수의가 언제 만들어진 것인지 그 제작연대를 밝히는데 결정적 계기가 될 탄소연대측정법(Carbon Dating)에 의한 연구가 시작될 것이라고 한다. 이는 교황 바오로2세가 수의의 일부분을 도려내는 것을 허락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연구가 예정대로 진행된다면 88년 부활절까지는 그 결과가 나오게 될 것 같다.
아뭏든 이 수의는 종교적인 의미에서뿐 아니라 과학적인 차원에서도 대단한 관심을 끌고 있다 하겠다. 이제 하나하나 그 신비가 벗겨지고 있는 시점에서 최근까지는 과학적 연구결과를 분석해보고 수의에 얽힌 뒷얘기를 알아본다.
사람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수의
나사렛 예수가 골고다의 언덕에서 죽음을 당하고 매장될 때 사용되어졌던 것이라고 알려져 있는 문제의 수의는 오래 되어서 누렇게 바랜 색을 띠고 있다. 수의는 4m42cm의 길이와 1m7cm의 폭으로 되어 있는 아마포(linen)의 천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던 수의와 거의 유사한 것이다. 길다란 수의는 반으로 접은 상태에서 한쪽은 사람의 정면을, 다른 한쪽은 사람의 등판 모습을 보여주는 2개의 이미지가 정착되어 있다. 정면의 모습은 양손을 중심으로 앞으로 가지런히 모으고 마치 누워있는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예수의 죽음과 좀더 접근할 수 있는 의학적 분석을 해보면 수의에는 상처에 의해서 생긴 혈흔과 십자가에 못박혔던 부분 등이 정확히 나타나고 있다. 처음 수의의 연구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의사와 인류학자들은 수의에 포함돼 있는 이미지가 그러한 의학적 증거를 보여주고 있음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수의의 연구에 관계한 전문가들은 물리학자 섬유전문가 과학·산업사진가 의사 역사가 범죄학자 성경학자 등이었는데 이들에 의해 많은 의문점들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그 수의의 이미지가 진실로 예수의 수의였다는 확실한 증명은 제시되지 않고 있다.
수의에 대한 과학적 연구업적들
예수의 수의를 연구하고 있는 학자들과 역사가들은 수의에 나타나 있는 이미지가 어떻게 형성된 것인지에 관한 여러 가설들과 의문들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기 위해서 많은 실험과 연구를 해왔다. 그중에서 가장 설득력 있게 논리적으로 증명된 몇가지 연구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증기학적으로 형성된 이미지
세계적인 동물학자인 ‘이브 델라지’(Yves Delage)와 그의 조수인 생물학자 ‘폴 조셉 비뇽’(Paul Joseph Vignon)에 의해서 연구되어진 이론은 수의에 나타난 예수의 이미지가 증기학적으로 발생한 이미지일 것이라는 의견이다. 그들은 최초의 수의 촬영자 ‘세콘도 피아’(Secondo Pia)의 사진을 조심스럽게 연구를 했는데, 그들의 의문은 사람의 힘으로 수의와 똑같은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하는 데 있었다. 그후 그들은 수차례에 걸쳐 오일 페인팅 혹은 수채화에 사용되는 재료로서 시도를 했었다. 그들의 결론은 역시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탈리아의 토리노에 보관돼 있는 수의는 처음으로 기록에 나타나는 14세기에 그려진 그림이 아니라는 것을 논증할 수 있었다. 과연 어떻게 이미지가 형성되었는가 하는 의문은 날로 증가할 뿐이었다.
폴 비뇽은 다른 원리로서 연구를 해보았다. 고대의 장례의식에 전통적으로 사용되어졌던 향료인 몰약과 노희가 땀과 함께 증발하여 장례식에 사용되었던 아마포위에 배어 이미지를 형성한다는 원리였다(성경 요한복음 19장 39─40절 : 일찍 예수께 밤에 나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을 백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Linen)에 싸더라).
성경을 근거로 한 그의 연구는 심한고문을 받은 육체로부터 생겨난 땀은 요소를 만들며 그것이 암모니아 증기를 만든다는 것을 알았다. 그가 이러한 이론을 밝힌 이유는 암모니아 증기가 옷이나 천속으로 스며들 때 색깔이 갈색으로 변한다는 사실에서였다. 여러 차례에 걸쳐서 두 과학자들은 실험을 통해서 좀더 구체적인 이론을 세웠고 그것을 증기 이미지(Vaporgraph)라 불렀다. 1902년 델라지는 프랑스의 과학학술원에서 자세히 그러한 원리를 설명했고 실험을 해서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신비의 수의에 형성된 이미지는 예수가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인체 해부학적인 증명
델라지가 증기학적인 이미지의 형성을 발표한 지 30년후에 '피에르 바르베’(Dr. Pierre barbet)박사는 인체해부학적인 면에서 사실의 증명을 시도했다. 그것도 역시 수의의 사진을 바탕으로 연구에 착수했는데, 이때 이용한 사진은 처음 촬영을 했었던 ‘세콘도 피아’의 사진보다도 훌륭한 디테일을 포함하는 ‘쥬세페 엔리’(Giuseppe Enrie)의 사진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그는 실제로 죽은 시체를 가지고 손바닥에 못을 박게 되면 과연 시체의 몸무게가 지탱되어 질 수 있겠는가를 실험했다. 실험의 결과는 지탱을 못하고 손바닥이 찢어지고 만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손목에 못이 박혀져 있다면 지탱할 수 있다는 사실도 실험에 의해서 밝혀졌다. 그렇다면 예수는 손바닥에 못이 박혔을까 아니면 손목에 박혔을까. 한가지 주의해서 보아야 할 점은 일반적으로 그 당시나 지금의 예수 그림이나 십자가에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서 죽었을 때 못이 박혔던 곳이 손바닥으로 나타나 있다. 그러나 쥬세페 엔리의 사진에 의하면 분명하게 정 가운데의 손바닥이 아니고 손목에 못이 박혀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러한 사실을 다시 정리하면 만일 예수의 수의가 나중에 그려진 것이라면(가짜라면) 그 당시 누구나 공통적으로 그림을 그렸듯이 손바닥에 못이 박힌 모습으로 그렸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볼 수 있다. 그렇다면 특별히 오직 이 수의만이 손목에 못이 박혔던 것으로 그림을 그린 이유는 어디 있겠는가 하는 역설적 증명을 통해서 수의가 틀림없이 예수의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그리스어의 성경에는 못이 박혔던 부분을 Cheir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손 뿐만이 아니라 손목, 팔목을 모두 포함한다).
또한 수의의 혈흔은 시각적으로도 매우 분명히 구별이 가능하다. 이미지의 머리 팔 발 허리 등의 부분은 물론 온 몸에 고문으로 생긴 상처에 의한 혈흔에서도 논리적인 증명이 가능하다. 수의의 팔을 따라 흐른 피의 흔적은 손목에 못이 박히고 거기서 나온 피가 팔을 따라 아래로 향해 흘렀다는 것을 증명해 줄 수가 있는데 이는 틀림없이 손목이 위로 향한 채 매달려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특히 온몸의 상처는 로마가 고문용으로 사용했었던 채찍(플레그런; Flagrun이라 불렀음)에 의해 나타날 수 있는 상처와 동일한 상처가 수의의 이미지에 나타나고 있다는 것도 간접적인 증빙자료가 되고 있다. 즉, 이 수의의 이미지는 예수의 수의가 틀림없다는 해부학적인 증명이다.
꽃가루의 조사
다른 증명중의 하나는 지리학적인 증명인데, 이것은 꽃가루의 성분조사에서 나타난 것이다. 스위스의 과학수사 연구학자인 ‘막스 프라이’(Max Frei)는 접착성이 강한 투명한 테이프로 수의에 묻어 있는 먼지를 채취, 이것을 현미경 분석기를 이용해 성분을 조사해본 결과 약 48종류의 꽃가루들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아냈다.
이 꽃가루의 성분을 사전에 조사되어진 참고용 꽃가루와 대조해본 결과 수의에서 나온 대부분의 꽃가루들의 성분들이 정확히 판명되었다. 처음 막스 프라이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 자라는 종류의 식물 꽃가루를 예상했었지만 결과는 놀랍게도 해변 가까이에서 자라는 식물은 물론 팔레스타인과 아나톨리아(Anatolia)에서 서식하는 식물들의 꽃가루들도 확인된 것이다. 이것은 수의가 전에 팔레스타인이나 아나톨리아에 있었다는 증명일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의 기록에서 전해지지 않았던 13세기 이전의 이 수의가 성지(홀리랜드;Holy Land)에서부터 유래된 것임을 증명해낼 수가 있었던 것이다.
직물학적인 증명
직물학의 전문가인 벨기에의 직물학 교수 ‘질베르 라에스’(Gilbert Raes)는 1973년에 직물의 직조 방법과 수의의 재료를 역사적으로 조사해보았다. 연구에 의하면 수의의 재료는 아마포(linen)로 만들어진 것이며 그러한 재료는 공통적으로 고대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의해서 사용되어졌던 수의의 재료와 동일하다는 것이었다.
또 직조의 방법인 오늬모양(47페이지 사진참조)의 능직물(Herringbone twill)방법 또한 중동지역에서의 직조방법과 동일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 지역의 실은 당시 손으로 비벼서 만들었던 것에 비해 유럽의 경우는 ‘바퀴를 돌려서 실을 만드는 도구’를 이용해 실을 만들었다고 한다. 수의에 사용된 낟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즉 중동지역 부근에서 성행했었던 손으로 비벼서 만든 실로써 수의의 재료로 사용했는데 이 사실도 수의의 시작이 성지에서부터라는 증명을 해주고 있다.
수의에 묻은 피는 진짜인가
수의에 묻어 있는 피의 흔적은 정말 피인가?
이같은 의문은 명확히 밝혀졌다. 이 부분의 연구는 최초로 수의를 촬영한 세콘도 피아의 의문에서부터 시작됐다. 일반적으로 피는 붉은 빛을 띠고 있으므로 흑백사진(양화)에서는 그것이 검은색으로 나타난다. 그같은 원리로서 필름에 담겨진 이미지가 양화인지를 알게 된 것도 이 부분을 요주의해서였다. 즉, 필름은 음화를 형성하므로 실제의 피의 색깔은 필름(음화)에 투명하거나 맑게 나타나야 하지만 이 부분이 검게 나타난 것은 필름에 담긴 이미지가 양화임을 말해주었던 것이다. 한편 영국의 ‘존 헬러’(Dr .John Heller)박사는 그 부분에서 약간의 결정체를 조사한 결과 헤모글로빈을 발견했고 이것이 피(blood)라고 확인했다.
또한 오늘날에도 가장 관심이 큰 의문은 그 수의가 얼마나 오래된 것이냐는 점이다. 이 의문점은 탄소연대측정법(Carbon Dating)에 의해서 거의 근사치의 연도를 밝혀낼 수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로체스터대학교수 ‘해리 고브’(Dr. Harry Gove)는 약 1cm크기의 재료면 약 1백50년의 오차를 가지고 측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다행히도 최근의 C-14를 이용한 탄소연대 측정법은 약 2평방인치의 재료로서 측정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제사장(President of the Pontifical Academy of Sciences)은 교황 바오로2세에게 측정토록 간청을 올렸다 한다. 만일 이러한 간청을 받아들인다면 앞에서 언급했듯이 1987년 중순부터 연구가 시작될 것이고 결과는 1988년 부활절에 알려질 것이라고 한다.
14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수의의 역사
의문 속의 수의가 정말로 예수의 수의라면 그 역사는 의심할 여지도 없이 나사렛 예수로 거슬러 올라가야만 한다. 그러나, 실제로 수의가 역사속에 분명한 기록적 자료로서 처음 일반화될 수 있었던 것은 14세기 중반의 프랑스 리르(Lirey)에서였다. 다시 말해 이 수의에 대한 14세기 이전의 역사는 알려지지가 않고 있다.
수의의 주인은 당시 ‘리르’의 아주 유명한 봉건영주였던 ‘조프리 드 샤르니’(Geoffrey de charny)였는데 그가 어떻게 어디에서 그것을 소유하게 되었는지는 확실치가 않다. 당시 성전(Holy Wars)이라고 불리우는 십자군전쟁 때 얻었다는 설도 있으나 밝혀진 바는 없다.
네번째 십자군의 연대기록자 ‘로베르드 클라리’(Robert de Clari)는 1203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신의 모습을 한 ‘시도인’(Sydoine ; 그리스어의 sindon에서 유래된 것이며 훌륭한 천이라는 뜻. 지금에는 그것을 Shroud of Turin이라고 부른다)을 보았다는 진술을 남기고 있다. 1년후에 십자군이 비잔틴을 거쳤을 때 그 시도인이 없어졌다는 서술은 14세기 중반부터 시작되는 수의의 역사를 1203년 까지로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시도인(Sydoine)이 토리노의 수의와 동일 하다는 가정하에서만 인정될 수 있다. 따라서 누구도 그것을 증명할 수가 없으므로 실제적으로 역사의 기록에 의한 수의의 시작은 14세기 중반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영국의 작가 ‘아이반 윌슨’은 수의가 예루살렘으로부터 에데사(Edessa : 현재의 Urfa의 마을, 터키)로, 콘스탄티노플로, 그리고 리르에까지 이동되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연결의 가능성은 윌슨 자신만이 인정하는 사실이다.
14세기에서 수년이 지난 후에 10개 이상의 수의가(이미지를 포함하거나 하지않은 상태)만들어졌고 그것들이 서로 진짜 예수의 수의라고 주장되기도 했다. 특히, 기만과 협잡이 득실거렸던 14세기에 유물 거래자들에 의해서 매우 나쁘게 많이 알려져 있었다. 그러므로 그 지역의 대주교 ‘트로이스’(Troyes) 조차도 1389년에 예수의 수의를 대중들이 모두 볼 수 있게 전시되었을 때 그것이 진짜라고 말하질 않고 단지 똑같이 그린 그림에 불과하다고 말했던 것도 당시 상황으로 보아서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그후 그 수의의 소유는 처음 기록에 의한 소유자‘샤르니’의 손녀딸에게로 넘어갔고, 1453년 그녀는 사보이의 공작(Duke of Savoy)‘루이’(Louis)에게 그 수의를 주었다. 이에 대한 기록은‘수의의 기록’(File on the Shroud)에 정리되어 있지만, 왜 그것을 그에게 주었는지는 역시 아무도 모른다. 그러므로 ‘루이’는 그 수의의 실제적인 두번째 소유자가 되었다. 루이는 ‘샹베리’(Chambery : 도시이름)에 ‘생 샤펠’이라는 이름의 대성전을 설립해서 여기에 그 수의를 보관했었다.
그러나 1532년 샹베리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화재는 대성당에 영향을 주었고 그로 인해 은으로 만든 상자에 보관되어 있었던 수의도 화재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은상자가 열에 의해 녹자 그녹은 은의 불똥이 수의에 떨어지게 되었다. 이로 인해 수의의 일부분이 타고 구멍이 뚫리게 되었으며 더 이상의 화재를 막기 위해서 물을 부어서 타고 있는 수의를 구해냈다. 이러한 화재에 의한 두가지의 데미지는 현재 수의에 관한 연구에 확실한 증거를 제공해주는 실마리가 될 수가 있었다. 즉, 화재사건 이후 약 4백년이 지난 지금 수의에서 물의 흔적이나 탄 부분의 흔적이 과학적으로 입증된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많은 의문을 풀어줄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후 1578년 그 수의는 사보이에서 알프스산을 가로질러 이탈리아의 토리노로 옮겨졌으며 지금까지 계속 그곳에 보관중에 있다. 토리노로 옮긴지 4세기가 지난 1978년에는 4백년 동안의 보관을 기념하기 위해서 일반에 공개전시를 했는데 이는 20세기들어 1931년과 1933년에 이어 세번째의 일반공개였다.
그 당시 예수의 수의를 보기 위해서 몰려든 순례자들이 6주일동안 3백만이었다는 기록이다. 당시 처음 수의에 관한 연구는 천을 연구하는 학자(Sindenologist)들 사이에서 시작이 되었으며 그들의 모임에서 토론을 했던 테마는 ‘수의와 과학’(The Shroud and Science)이었다. 그들의 결론에 따라 수의의 과학적인 분석을 위해 미국의 모든 과학자들과 전문가들은 그것이 보관되어져 있는 이탈리아 토리노의 지오바니 바티스타 대성당(Cathedral of San Giovanni Battista)에서 모여 1978년 10월부터 연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