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쪽은 요동반도에서 서쪽은 기련산맥 기슭에까지 장장 5천 km 평원과 산맥에 끝없이 이어진 성벽은 고대중국인이 낳은 위대한 기적이다.
중국 민족의 상징
중국의 만리장성…그것은 과연 실제로 그렇게 긴것일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사실 장성의 길이를 정확하게 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복잡하고 험한 지형에 구축되어 있으며 이중 삼중으로 되어있는 곳과 나무 가지처럼 갈라진곳등이 여러곳 있기 때문이다.
현재 볼수있는 장성은 명(明)나라시대 후기인 16세기경에 완성된 것이다. 동쪽은 하북성 동부의 발해만에 이르는 산해관(山海關) 노룡두(老龍頭)에서 북경(北京), 산서(山西), 내몽고(內蒙古), 섬서(陝西), 영하(寧夏)등의 성(省)과 자치구를 거쳐 감숙성(甘肅省)의 가욕관(嘉峪關) 에까지 이른다.
직선거리로 하여 약 2천 3백 km 남짓하나 실제 연장은 5천km 이상으로 옛날 중국의 이(里)로 환산하면 1만리를 넘는다. 거기다 중국의 학자중에는 중국영내의 옛장성까지 합치면 총연장이 5만km, 즉 10만리를 넘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보면 만리라는 표현이 결코 가공의 수자가 아닌것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엄청난 규모의 것을 만들려는 생각을 처음 떠올리고 또 그것을 실현한 민족이 인류 역사상 또 있었을까. 그래서 사람들은 장성을 볼때 누구나 언제? 무엇때문에? 어떻게? 라는 질문 하지 않을수 없을 것이다.
만리장성은 바로 중국 그것이다. 따라서 장성에 대한 질문은 중국에 대한 흥미 이기도 한 것이다.
2천년이 걸린 대공사
성이라고 하면 흔히 천수각(天守閣·성의 중심부 아성 중앙에 3~5층으로 높게 만든 망루)이 있는 성을 머리속에 떠올리겠지만 중국에서는 성벽을 일컫는다. 이 나라는 도시를 일찍부터 네모난 모양의 성벽으로 둘러 싸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장성은 중국 전체를 감싼 긴 성벽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 장성을 최초로 건설한것은 기원전 5세기경, 춘추(春秋) 시대말의 제(齊)나라 때다. 전국시대에는 여러나라가 자위책으로 요충지에 긴성벽을 쌓았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진(秦), 연(燕), 조(趙) 세 나라는 유목민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북변에 성벽을 쌓았다. 이런 유적은 지금도 요령성 (遼寧省)의 적봉(赤峰) 부근이나 산동(山東), 하북(河北), 하남(河南)의 각성에서 볼수 있다.
기원전 221년, 진의 시황제(始皇帝)가 전국을 통일하자 중국통일의 장해가 되는 국내에 흩어져 있는 성벽을 모두 무너뜨렸다. 그러나 앞의 세 나라가 북변에 쌓은 장성은 잇고 연장하여 대장성을 쌓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것이 '만리장성'이라 불린 최초의 것으로 현재의 장성보다 훨씬 북쪽에 있다. 그리고 기원전 110년 경 한(漢)의 무제(武帝)는 감숙의 회랑을 흉노로부터 지키기 위해 장성을 옥문관(玉門關)까지 연장했고 다시 그로부터 5백여년 뒤 5세기 전반경 북위(北魏)가 유연(柔然)의 남침을 막기 위해 장성을 대보수 했다.
이 진의 장성보다 훨씬 남쪽으로 내려간 현재의 위치에 최초의 장성을 쌓은 것은 북위의 축성때로부터 1백여년 뒤 기원 550년에 일어선 북제(北齊)로 대동의 북서에서 거용관(居庸關)을 거쳐 산해관에 이르는 부분이다.
수대(隨代·581~618년)에는 돌궐(突厥)이나 거란(契丹)에 대비해 보수를 했으나 당대(唐代)에는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취하여 장성이 무시되었다. 그러나 금대(金代·1115~1234년)에는 몽고족 방위를 위하여 장성에대한 인식이 새로와져 흥안령 서쪽에 대규모의 장성이 구축되었다.
1368년에 시작되는 명(明)은 몽고족을 부수고 이를 북쪽으로 내 몰았으나 유목민족의 반격을 두려워하여 북제이래의 장성선을 따라 15세기초부터 대수축작업을 벌였다. 먼저 하북과 산서 방면이 수축되었고 이어 오이라트(Oirat. 명대의 몽고부족)가 강대해지자 이에 대비하여 안쪽 장성도 건축되었다. 그 뒤는 오르도스(Ordos. 현 중국내몽고 자치구의 일부, 황하의 만곡부에 둘러 싸인 부분으로 장성이북지역)쪽과 가욕관 부근도 수축되어 16세기 후반에 오늘날 볼수있는 장대하고 견고한 장성이 2천년이나 걸린 끝에 겨우 완성된것이다.
피와 땀과 눈물로 굳힌…….
진대의 장성은 이집트의 피라밋 30개소와 거의 비슷한 규모였다한다. 시황제는 이것을 30만명을 동원하여 10년에 넘게걸리는 동안에 쌓아 올렸다. 그것은 황제의 권력이 얼마나 강력했던가와 중국민중의 건축기술 수준이 어느정도 높았는지를 나타냄과 동시에 노예노동에 혹사당한 사람들이 피와 땀과 눈물의 결정이라는 것을 말해주는것이기도 하다.
이 난공사를 가능하게 한 기술적 요인은 뭐니뭐니해도 기원전 6세기 이래의 주철(鑄鐵) 기술개발일것이다. 이에 의해 철제토목 용구가 대량생산되고 작업능률을 비약적으로 증가시킴과 동시에 국가권력에 의한 노동력의 대량동원을 가능케 한 것이다.
진대의 장성축조에는 판축법(版築法)이라는 공법이 쓰였다. 그것은 양쪽에 널빤지와 막대기로된 울타리같은것을 세워 위에서 흙이나 자갈을 조금씩 넣고 물을 부어 다져가면서 토벽을 쌓아 올리는 공법이다. 그리고 한대의 돈황(敦煌) 부근 성벽에는 버드나무류의 가지나 갈대등을 섞어 보강했다. 그리고 돈대(墩臺·망대)나 봉화대(烽火臺·횃불대), 관문등은 외벽을 햇볕에 말린벽돌이나 햇볕에 말린 벽돌을 다시 불에 구은 전(塼) 또는 나무로 감쌌다.
최근 중국의 과학자가 이런 한대의 장성을 조사한결과 토벽내부에는 나무가지나 굵은나무둥치가 꽉차있고 수분과 염분이 침투되어 황토와 이런 식물질이 엉켜 콘크리트처럼 굳은 덩어리가 되어 있었다한다.
중국 북변의 건조지대에서는 이런 토벽이 2천년이 지나는 동안의 바람과 눈비에도 견디어 그 일부가 지금도 남아있다.
그러나 장성은 모두가 같은 구조로 만들어져 있는것은 아니다. 정치중심지나 비옥한 농경지대는 그밖의 지대에 비하여 훨씬 견고하게 만들어져있다. 산서이동의 장성은 수백년에 걸친 전화와 풍설에 견디며 지금도 옛날의 웅장한 모습을 간직하고있다. 이에비해 섬서이북에서는 햇볕에 말린 벽돌이 무너져내린 상태의 토벽이 되어 어떤것은 남진하는 유사(流沙)에 파묻혀 버리고 만곳도있다.
난공불락을 위한 궁리
산서성 이서의 견고한 장성은 판축공법이긴하지만 그 외벽은 전돌과 자연석을 쌓아 올리고 석회로 발라 굳힌것이다. 이런것을 산악지대의 산등성이나 계곡을 따라 쌓았으므로 축조과정에 여러가지 난점이 많았다.
첫째는 자재의 확보와 수송이다. 자재는 대개 현지조달을 원칙으로했다. 그럴때 전돌이나 기와, 석회등은 바로 가까운 현지에서 소성(燒成)되었으나 이에 필요한 대량의 땔감은 가까운 숲에서 벌채해야만 했다. 물론 이럴때 동원된 사람들을 위한 식료품이나 의류보급문제도 빼놓을수 없을것이다.
그러나 현장은 지세가 험하여 산짐승이 다니던 길을 이용할 수 밖에 없었으므로 사람들은 줄을 지어 릴레이식으로 물자를 나르거나 이런 길에 익숙한 산양이나 노새에 짐을 한덩어리씩 실어 올리는 수밖에 없었다. 이럴때의 산양은 운반에 이용될뿐만 아니라 고기는 식용으로도 쓰이고 모피는 방한복으로 쓰이는 귀중한 동물이었다. 그런데도 이런 험한 지형이 교묘하게 이용되어 장성자체의 일부가 되었고 자재를 절약하는 이점이 있기도 했다.
둘째로 곤란한 점은 이런 장소에 성벽을 축조하는 공법이었다.
급한 경사지에 건축물을 축조하는데는 항상 붕괴 위험이 따른다. 그래서 한 부분마다 지면을 수평으로 하여 토대가 되는 받침돌과 외벽이되는 전돌이 수직이되도록 규측바르게 늘어세워 계단상태로 쌓아올리는 방법으로 상등성이를 따라 축조해 간것이다.
이렇게 쌓아올린 장성은 산서 이동에서의 것이 높이 8m, 바닥에서의 폭 약 6m, 위쪽의폭 약 5m다. 섬서성 이서에서는 이보다 약간 작아 높이 약 5m, 바닥폭 약 4m이다.
산서 이동의 장성 위에는 전돌이 쫙 깔려 5마리의 말이 나란히 달릴수 있다. 약쪽에는 1m정도 높이의 외벽이 있고 거기에는 총안이 뚫려있다. 그리고 약 1백 20m 거리마다 망대가 있다. 이 성벽위의 길을 시간에 맞춰 병사가 순시했다.
교통로와 교차하는 지점에는 문이 달려 있는 막사건물이 있어 군인들이 주둔했다. 이런 문을 '관'(關) 또는 '구'(口)라 했다.
그리고 중요지점은 이중 삼중으로 겹쳐 쌓은 데다 곳곳에 보루(堡壘·작은성)나 후(堠·망대 혹은 봉화대)를 쌓았다.
이런 중요지점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곳이 팔달령(八達嶺)에서 동으로 1백 km 거리에 있는 고북구(古北口) 부근 금산령(金山嶺)이다. 북방의 요(遼), 금(金)의 군대가 이곳을 돌파하여 중국내륙으로 쳐 들어갔고 명나라때도 유목민이 때때로 습격한 지점이기도 하다. 팔달령과 함께 특별히 공들여 축조되어 한때는 난공불락을 과시한 곳이다.
기마 군단에의 대비
만리장성은 농경민의 나라인 중국이 북쪽 유목민의 침입에 대비한 것이라 전해지고 있다.
실제로 종아시아의 전 근대사는 농경민과 유목민의 대립 항쟁의 역사였다.
유목민은 곡물이나 일상생활필수품의 일부를 농경민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양쪽이 평화로운 교역관계를 유지한 동안은 괜찮았다. 그러나 엄격한 자연환경 아래서 한계생활을 영위했던 유목민이 자연환경이나 교역조건이 악화되었을때는 무력으로 필요한 물자를 뺏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므로 유목민에게 있어서 전쟁은 농경민으로 부터 전리품을 획득하는 일종의 생산적 행위이며 그와함께 세력확대와 부족통일의 한 몫을 하는것이기도 했다. 이에 비하여 중국의 농경사회는 원래 유목사회와 비교할때 생산력이 높고 물질문화도 풍요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침입해 오는 유목민과 싸워 이긴다 해도 농경에 알맞지않은 유목민의 영토는 아무 매력도 없었다. 쏟은 전력을 보상받을만한 전리품을 획득한다는 것도 거의 기대되지 않았으며 한번 농경지가 전장이 되거나 전쟁이 길어지거나 하면 농업이 황폐해지기 마련이었다.
그때문에 전근대 사회에서 농경민은 유목민에 대하여 본질적으로 수비태세를 취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평화적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조공무역이나 접경지역에 상호교역장을 설치한다는 명목으로 중국측이 대량의 물화를 내보내는 교역관계를 계속하고 있었다.
이 조공무역은 변방에서 중국에 보내는 '왕조에 대한 공물'이라는 의미에서 언뜻보아 바치는 변방나라쪽이 무리하고 있는것처럼 해석된다. 그러나 실제로는 바치는 물화이상의 답례품이 돌아감으로 수지상으로는 중국측의 대적자가 되고만다. 해마다 보내는 다액의 공납이나 조공무역은 항상 중국국가재정의 큰 부담이었다. 그렇다고 하여 많은 병력만으로 북변을 지키도록 하는것도 큰 손실이었다.
여기서 생각해낸것이 만리장성의 활용이었다.
육목민의 기마군단은 기동력이 뛰어났다. 그리고 양떼를 함께 몰고가면 병참보급이 거의 필요없었다. 병참기지에서 멀리 떨어진 변경에서 싸우면 농경민인 중국병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그래서 장성을 세워 유목민의 기동성을 줄이고 약간의 울타리도 넘지 못하는 양뗴를 장성으로 막아 기마군단과 분단시켰다. 이렇게 하여 중국의 역대왕조는 장성을 방어선으로 북방유목민의 침입에 대비한 것이다.
원래 장성은 난공(難攻)이긴 해도 불락(不落)인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역사가 말해주고 있다. 그렇다고 하여 무용지물이냐 하면 그런것도 아니다. 한 예를 들면 명나라시대 말엽 동북부에서 일어난 청(淸)의 공격에 대하여 명나라 군대는 왕조자체가 붕괴되기까지 끝내 장성을 지켰다.
기마병이나 궁(弓)보병에 의한 전쟁시대에 성벽이 갖는 방어적의미는 중세유럽에서 볼 수 있었던 성채와 같이 현대의 사람들의 상상 이상의 것이었음에 틀림없다.
새로운 장성 연구
지금까지의 장성연구는 문헌자료를 기초로 그 역사적 변천이나 축조방법등을 살펴보는것이 중심이었다.
그러나 1980년 6월 네 조사팀이 북경,요령,하북,내몽고 등지의 답사에서 여러가지 많은 자료를 찾아낸 뒤로는 달라졌다. 실지조사를 바탕으로 한 연구에 열을 올리게 되고 역사 이외의 분야에 대해서도 여러 각도로부터의 응용연구가 진전되기 시작한 것이다.
한 예를들면 '역사지리학'이라는 분야가 있다. 이것은 황하 중류유역의 황토 침식상황이나 서북사막지대의 확대와 처원, 농지 침식상황에서의 역사적 추이를 장성의 위치와의 관계에서 밝혀 보려는 것이다.
앞에서 설명한대로 장성은 농경지대와 유목민이 사는 초원지대의 경계 위에 세워졌다. 그렇다면 현재의 장성이 사막 가운데 있거나 하는 경우는 장성 축조연대를 계산하여 사막의 이동이나 확대의 속도가 추정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것은 앞으로 사막화 방지대책에도 응용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당초에 황하 연안에 축조된 장성도 있다. 그런 장성이 현재의 황하 줄기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고 하면 그것은 강줄기의 변화를 의미한다. 이런 데이타를 종합적으로 갖추어 앞으로의 황하치수대책에 활용하려는 것이다.
어떤 지진학자는 장성이 축조된 곳은 지층의 단열대(斷裂帶·지각이 균열된 지대)의 가장자리에 해당되며 과거의 지진에 의한 단열흔(斷裂痕)이나 위치가 어긋난 곳을 볼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이런것을 분석하면 지진학이나 건축학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게 될수 있을 것이라고 보고있다.
만리장성은 고대 중국인이 2천년이나 걸려 피와 땀과 눈물로 굳혀가며 쌓아올린 위대한 인류공통의 재산이다. 역사와 자연의 시련에 견뎌내며 고대중국을 지켜왔던 이 장성이 여러 학문 분야에 응용될수있는 귀중한 데이타까지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