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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전자 추적해 '부모중 누구 닮았나'규명

 

유전자 연구에 도움을 주는 실험동물 생쥐


유명한 극작가이자 예술평론가인 버나드 쇼와 현대 무용의 창시자라 일컬어지는 이사도라 덩컨 사이에 일어난 일화가 있다. 재치 넘치고 신랄한 평론으로 이름을 떨치던 쇼였지만 외모는 보잘 것이 없었다.

하루는 아름답고 콧대 높기로 유명한 덩컨이 쇼의 외모를 비꼬아 이렇게 말했다. “쇼여, 만약 당신이 나와 결혼하게 된다면 당신의 머리를 닮고 외모는 나를 닮은 둘도 없이 훌륭한 아이가 태어날 거라고 생각하지 않나요?”이에 대해 쇼는 “이사도라 덩컨, 당신의 말은 분명 일리가 있지만, 혹시 나의 외모를 닮고 머리는 당신을 닮은 아이가 태어나는 불행한 사태가 염려되니 나는 당신과 결혼할 수 없소이다”라며 덩컨을 조롱했다.

쇼와 덩컨의 얘기 중 누구 얘기가 옳을까. 우리의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이 얘기를 들으셨다면 아마도“쇼가 옳다”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머리는 어머니로부터, 근육은 아버지로부터’라는 속설이 오래 전부터 민간에서 전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똑똑한 자식을 보려면 공부 잘하는 며느리를 맞으라’는 말씀을 어른들로부터 종종 듣곤 한다.

흥미롭게도 이 속설이 과학적으로 증명될 지도 모른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KAIST 분자유전학 실험실이 중점을 두고 연구하는 내용이 바로 이것이다.

분자유전학 실험실에서는 ‘유전자각인’(genomic imprinting)이라는 독특한 유전 현상에 대해 집중적인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유전자각인이란 특정 유전자가 어머니 쪽에서 전해졌느냐 혹은 아버지 쪽에서 전해졌느냐에 따라 차등적으로 발현되는 현상을 말한다. 여기서 ‘각인’됐다는 말은 해당 유전자가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의미다. 예를 들어 만약 지능 유전자가 부계각인(아버지 쪽에서 물려받은 유전자가 발현되지 않는 현상)돼 있다면 2세의 지능은 덩컨을 닮을 것이다. 반대로 모계각인돼 있다면 2세의 지능은 쇼를 닮게 된다.

“왜 그런 방향으로 진화했을까”의문

현재까지 인체에서 알려진 각인된 유전자 수는 20여가지. 하지만 이들은 ‘머리는 엄마 닮고 외모는 아빠 닮은’ 정도로 눈에 띌 만큼 가시적으로 표현되지 않는 종류들이다. 예를 들어 췌장에서 분비되는 호르몬인 인슐린이 처음 만들어질 때 관여하는 성장호르몬을 들 수 있다. 이 성장호르몬은 모계쪽으로 각인돼 있기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받은 관련 유전자만 발현되고 어머니로부터 받은 관련 유전자는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이 외에도 좀더 섬세한 양상을 보이는 발현 조절(예를 들어 아버지쪽 70%, 어머니쪽 30%)을 받는 유전자까지 합하면 각인된 유전자의 수는 더욱 늘어난다. 만일 이 모든 유전자를 밝혀낼 수 있다면 결국 쇼와 덩컨 얘기 중 누구 말이 맞는지 판정내릴 수 있지 않을까.

현재 KAIST 분자유전학 실험실은 정재훈 교수(43)의 지도를 받으며 박사과정 8명, 석사과정 2명, 그리고 연구원학생 2명이 연구에 임하고 있다. 실험 대상은 생쥐. 유전자의 구조와 유전 현상에서의 조절 양상이 사람과 매우 비슷하기 때문에 사람을 포함한 고등 유전현상 연구의 주요한 모델로 애용되는 동물이다.

연구원들은 현재까지 밝혀지지 않은 새로운 각인 유전자를 찾는데 매진하고 있다. 사람의 경우 각인된 유전자의 수는 대략 수백개가 존재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전체 유전자의 1%도 안되는 적은 수다. 하지만 양보다는 질이 중요한 법. 만일 암이나 노화를 일으키는 유전자가 아버지나 어머니로부터 각인된 유전자라면 불치병 퇴치와 노화 방지를 위한 새로운 단서를 제공해줄지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정교수는 이따금씩 “왜 인류는 유전자각인의 경향을 가지고 진화해 왔을까”라는 화두를 떠올린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부모 모두로부터 온전한 기능을 전수받는 것이 유리한 것이 아닐까. 어느 한쪽의 유전자가 제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게 생존에 어떤 면에서 도움을 줬을까. 정교수는 좀더 많은 연구 결과가 나올 때까지 명쾌한 대답을 미뤄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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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11월 과학동아 정보

  • 김훈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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